[부활절] 부활신앙과 부흥
본문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9:27을 보면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사실임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문제를 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생각도 말하기도 싫어합니다. 그러나 세월은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고 죽음이 우리에게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간다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의 문제는 인간이 해결하여야 할 가장 첫 번째 문제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죽음의 문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한 지혜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죽는 일 외에는 무엇이나 준비해 두었다. 이제 바야흐로 죽음이 나에게 왔으니 나는 그에 대한 준비가 없는 채 여기 서 있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리고 이 죽음이 우리 앞에 다가오면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과 아픔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참 모습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위대한 소식을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은 믿음의 시작이요 교회의 시작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가장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 신앙을 가지면 이 땅에서는 아무리 불행과 시련을 당하고 병들고 심지어 죽는다 할지라도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얼마나 강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새 생명과 새 미래를 누리는 축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부활의 신앙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임에도 무력하게 산다면 그것은 부활신앙이 없고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자격이 없습니다. 여자 청년들 사이에 유행되는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자가 과거가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남자가 미래가 없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 생각해 볼만한 말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한다면 "신앙인이 과거가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신앙인이 부활신앙도 없어 미래가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 왜 그렇습니까 우리들의 인생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동행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과 새롭게 만나고 동행을 시작하는 부활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 론
1.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의 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25리쯤 되는 엠마오란 마을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 길에 황혼 빛이 뉘역 뉘역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에수님의 제자 두 명이 슬픔과 절망에 빠져 이 길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 가운데 슬며시 나타나 한 사람이 동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제자들은 이 분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이 분은 두 제자에게 길에서 주고받은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듣지 못하였냐 예수라는 선지자가 십자가에 죽은 것과 부활하였다는 소문은 있고 실제로 그 무덤에 가 본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는 볼 수 없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동행자는 "이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을 왜 알지 못하느냐"하면서 성경을 자세히 알지 못하느냐"하면서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두 제자들은 이 동행자를 강권하여 집으로 모시고 음식을 나눴습니다. 그 때 동행자가 떡을 가져 축사하시고 떼어 자기들에게 주실 때, 저희 눈이 밝아져서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희는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하면서 그 즉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열 한 사도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과연 살아나셨다고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경험들을 우리들도 함께 경험하기를 원하면서 제자들의 경험한 것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2. 이들이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만났을때는 언제나 감격하고 흥분되고 기뻐했었습니다. 주님을 보는 것만 해도 감격스럽고 말씀을 들으면 용기가 나고 기적을 보면 흥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으로 제자들의 마음은 가라앉고 차갑게 식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군대갔다 첫 휴가온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사랑하는 연인과 이야기를 나누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이와같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도 얼어붙은 심령을 녹이고 불을 붙여 뜨겁게 해줍니다. 예레미야 23:29에서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던져 줍니다. 소극적인 신앙이 적극적인 신앙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지면 그의 마음은 뜨거워지고 그의 가정과 교회와 역사와 세상을 뜨겁게 만드는 열정의 사람으로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부활의 아침에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니까 한 교육목사님이 이런 관찰을 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을 듣지 않는 것같이 하면서 듣는데 어른들은 듣는 것 같으면서 듣지 않는다" 부활의 소식은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슬픔과 연약함은 말씀을 듣지 못하고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을 모르면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세속적 욕심과 관심에 따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성경의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성경의 진리를 바로 알게 됩니다. 토저라는 목사님은 성경의 교훈과 성령의 교훈은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교리에는 익숙하지만 성령의 조명이 없이 마음을 가리우고 있다면 영적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우신 예수님을 통하여 살아있는 진리를 만나지 않으면 위선적인 성도로 타락합니다. 신앙의 껍데기에 만족하고 맙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겸손히 마음을 주님께 기울이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잃었던 마음의 열정을 회복하게 됩니다.
3. 이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영적 눈이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슬픔하고 탄식하였습니다. 왜 그런가요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자들이 세상을 볼 때 슬픔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죽음을 향하여 가는 인생이라는 것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만나고 나자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인간적인 눈으로 십자가를 보았을 때 그들은 실망했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정치적 야망을 예수님을 통해 이루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니 낙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니 십자가의 죽음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눈을 뜬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안이고, 하나는 영안입니다. 육적인 눈은 세상과 사물을 봅니다. 그러나 이 눈은 너무 커도 볼 수 없고, 너무 작아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력은 또 시간이 지나면서 쇠퇴합니다. 친구 목사가 한국을 방문하였다가 원시 안경을 맞추어 카나다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아주 눈이 좋았었는데 눈이 나빠집니다. 여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봅니다. 젊어서는 가까운 것, 세상의 것을 많이 보았는데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멀리 있는 것을 많이 보라고 신령한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다음 우리의 눈은 영적인 눈입니다. 이 눈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입니다.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삼차원의 세상이 아닌 무한한 차원의 여호와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는 여호와 하나님 대신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 밖에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로는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살아 계신 주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절을 맞아서 살아계신 주님을 통해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눈을 뜨기 위해서 단지 마음을 열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단순하며 얼마나 놀랍습니까" 부활절을 맞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열어 주님께 드리고 이제는 예수님 안에 내가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하바드 대학에 들어간 한 수재의 간증입니다. 대학에 다닐 때 학생회장이었고, 오년 동안 최고 우등생이었습니다. 그의 생활 철학은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밝은 미래를 확신하였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했을 때는 모든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나의 성공적인 인생은 자타가 인정하였습니다. " 그러나 그의 결혼은 얼마 안가서 무너졌고, 미래에 대한 모든 기대는 사라졌습니다. 그는 늘 예수를 개인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고를 했습니다. "내가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나의 생애 가운데로 영접하여 나를 그에게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 후 계속 새로운 종류의 기쁨과 평안이 있더군요. 참 성공과 행복은 오로지 매일 매일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결과로 얻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맡기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입니다.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모시고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가 영적 눈을 뜨지 못하면 세상의 부조리하고 모순되고 악한 모습만을 보게 됩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활개치는 슬픈 현실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악은 그리스도의 심판으로 멸망하고, 죽음은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게 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는 악이 승리하고 힘이 있는 자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세상의 불의와 죽음을 몰아내고 사랑과 진리가 미움과 거짓을 몰아내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승리의 삶을 살 것입니다.
4.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 그들은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그들은 신앙을 등지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등지고 가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에서 어두움이 가득한 세상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만나는 사람마다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절망의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명의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까 슬픔과 어둠이 있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면 새로운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미래를 사명을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로막을 사람이 세상에 없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초대 교부 중에 크리소스톰이란 분이 로마 황제에게 붙잡혀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황제는 명령을 하였습니다. "저 녀석을 독방에 쳐 넣어라.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라. " 그러자 옆의 신하가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인입니다. " 황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별거냐 속히 독방에 넣어라!" 신하가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런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독방을 좋아합니다. 독방에 넣으면 하루 종일 찬송하고 기도하고 중얼거립니다. 그리고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의 영이라는 것이 있어서 함께 있답니다. 독방에 넣으면 저들 좋은 일만 시키는 거랍니다. " "그러면 이 자를 극악무도한 죄인들 틈에 넣어라" 황제가 말했습니다. "그것도 안됩니다. 이들은 전도할 기회를 얻었다고 좋아합니다. 이들은 전도를 잘 하는데
며칠만 지나면 모두 예수쟁이를 만들어 버릴겁니다. " 황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얼른 이 자를 데려다가 목을 베어라. " "아니되옵니다. 저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순교입니다. 순교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가장 큰 상급이랍니다. "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이런 신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여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들을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며 모든 성도들과 함께 부활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는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안에 주님께서 다시 사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슬픔과 절망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계신 주님을 마음 속에 모셔들이면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의 부흥입니다. 여러분의 인생과 가정과 이 세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런 부활의 사건과 부흥이 오늘 우리 영혼과 가정 속에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죽음의 문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한 지혜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죽는 일 외에는 무엇이나 준비해 두었다. 이제 바야흐로 죽음이 나에게 왔으니 나는 그에 대한 준비가 없는 채 여기 서 있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리고 이 죽음이 우리 앞에 다가오면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과 아픔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참 모습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위대한 소식을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은 믿음의 시작이요 교회의 시작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가장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 신앙을 가지면 이 땅에서는 아무리 불행과 시련을 당하고 병들고 심지어 죽는다 할지라도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얼마나 강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새 생명과 새 미래를 누리는 축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부활의 신앙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임에도 무력하게 산다면 그것은 부활신앙이 없고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자격이 없습니다. 여자 청년들 사이에 유행되는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자가 과거가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남자가 미래가 없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 생각해 볼만한 말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한다면 "신앙인이 과거가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신앙인이 부활신앙도 없어 미래가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 왜 그렇습니까 우리들의 인생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동행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과 새롭게 만나고 동행을 시작하는 부활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 론
1.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의 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25리쯤 되는 엠마오란 마을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 길에 황혼 빛이 뉘역 뉘역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에수님의 제자 두 명이 슬픔과 절망에 빠져 이 길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 가운데 슬며시 나타나 한 사람이 동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제자들은 이 분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이 분은 두 제자에게 길에서 주고받은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듣지 못하였냐 예수라는 선지자가 십자가에 죽은 것과 부활하였다는 소문은 있고 실제로 그 무덤에 가 본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는 볼 수 없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동행자는 "이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을 왜 알지 못하느냐"하면서 성경을 자세히 알지 못하느냐"하면서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두 제자들은 이 동행자를 강권하여 집으로 모시고 음식을 나눴습니다. 그 때 동행자가 떡을 가져 축사하시고 떼어 자기들에게 주실 때, 저희 눈이 밝아져서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희는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하면서 그 즉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열 한 사도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과연 살아나셨다고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경험들을 우리들도 함께 경험하기를 원하면서 제자들의 경험한 것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2. 이들이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만났을때는 언제나 감격하고 흥분되고 기뻐했었습니다. 주님을 보는 것만 해도 감격스럽고 말씀을 들으면 용기가 나고 기적을 보면 흥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으로 제자들의 마음은 가라앉고 차갑게 식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군대갔다 첫 휴가온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사랑하는 연인과 이야기를 나누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이와같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도 얼어붙은 심령을 녹이고 불을 붙여 뜨겁게 해줍니다. 예레미야 23:29에서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던져 줍니다. 소극적인 신앙이 적극적인 신앙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지면 그의 마음은 뜨거워지고 그의 가정과 교회와 역사와 세상을 뜨겁게 만드는 열정의 사람으로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부활의 아침에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니까 한 교육목사님이 이런 관찰을 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을 듣지 않는 것같이 하면서 듣는데 어른들은 듣는 것 같으면서 듣지 않는다" 부활의 소식은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슬픔과 연약함은 말씀을 듣지 못하고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을 모르면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세속적 욕심과 관심에 따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성경의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성경의 진리를 바로 알게 됩니다. 토저라는 목사님은 성경의 교훈과 성령의 교훈은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교리에는 익숙하지만 성령의 조명이 없이 마음을 가리우고 있다면 영적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우신 예수님을 통하여 살아있는 진리를 만나지 않으면 위선적인 성도로 타락합니다. 신앙의 껍데기에 만족하고 맙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겸손히 마음을 주님께 기울이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잃었던 마음의 열정을 회복하게 됩니다.
3. 이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영적 눈이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슬픔하고 탄식하였습니다. 왜 그런가요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자들이 세상을 볼 때 슬픔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죽음을 향하여 가는 인생이라는 것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만나고 나자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인간적인 눈으로 십자가를 보았을 때 그들은 실망했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정치적 야망을 예수님을 통해 이루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니 낙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니 십자가의 죽음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눈을 뜬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안이고, 하나는 영안입니다. 육적인 눈은 세상과 사물을 봅니다. 그러나 이 눈은 너무 커도 볼 수 없고, 너무 작아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력은 또 시간이 지나면서 쇠퇴합니다. 친구 목사가 한국을 방문하였다가 원시 안경을 맞추어 카나다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아주 눈이 좋았었는데 눈이 나빠집니다. 여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봅니다. 젊어서는 가까운 것, 세상의 것을 많이 보았는데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멀리 있는 것을 많이 보라고 신령한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다음 우리의 눈은 영적인 눈입니다. 이 눈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입니다.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삼차원의 세상이 아닌 무한한 차원의 여호와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는 여호와 하나님 대신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 밖에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로는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살아 계신 주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절을 맞아서 살아계신 주님을 통해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눈을 뜨기 위해서 단지 마음을 열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단순하며 얼마나 놀랍습니까" 부활절을 맞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열어 주님께 드리고 이제는 예수님 안에 내가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하바드 대학에 들어간 한 수재의 간증입니다. 대학에 다닐 때 학생회장이었고, 오년 동안 최고 우등생이었습니다. 그의 생활 철학은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밝은 미래를 확신하였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했을 때는 모든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나의 성공적인 인생은 자타가 인정하였습니다. " 그러나 그의 결혼은 얼마 안가서 무너졌고, 미래에 대한 모든 기대는 사라졌습니다. 그는 늘 예수를 개인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고를 했습니다. "내가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나의 생애 가운데로 영접하여 나를 그에게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 후 계속 새로운 종류의 기쁨과 평안이 있더군요. 참 성공과 행복은 오로지 매일 매일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결과로 얻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맡기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입니다.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모시고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가 영적 눈을 뜨지 못하면 세상의 부조리하고 모순되고 악한 모습만을 보게 됩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활개치는 슬픈 현실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악은 그리스도의 심판으로 멸망하고, 죽음은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게 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는 악이 승리하고 힘이 있는 자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세상의 불의와 죽음을 몰아내고 사랑과 진리가 미움과 거짓을 몰아내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승리의 삶을 살 것입니다.
4.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 그들은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그들은 신앙을 등지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등지고 가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에서 어두움이 가득한 세상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만나는 사람마다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절망의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명의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까 슬픔과 어둠이 있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면 새로운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미래를 사명을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로막을 사람이 세상에 없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초대 교부 중에 크리소스톰이란 분이 로마 황제에게 붙잡혀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황제는 명령을 하였습니다. "저 녀석을 독방에 쳐 넣어라.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라. " 그러자 옆의 신하가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인입니다. " 황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별거냐 속히 독방에 넣어라!" 신하가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런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독방을 좋아합니다. 독방에 넣으면 하루 종일 찬송하고 기도하고 중얼거립니다. 그리고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의 영이라는 것이 있어서 함께 있답니다. 독방에 넣으면 저들 좋은 일만 시키는 거랍니다. " "그러면 이 자를 극악무도한 죄인들 틈에 넣어라" 황제가 말했습니다. "그것도 안됩니다. 이들은 전도할 기회를 얻었다고 좋아합니다. 이들은 전도를 잘 하는데
며칠만 지나면 모두 예수쟁이를 만들어 버릴겁니다. " 황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얼른 이 자를 데려다가 목을 베어라. " "아니되옵니다. 저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순교입니다. 순교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가장 큰 상급이랍니다. "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이런 신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여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들을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며 모든 성도들과 함께 부활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는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안에 주님께서 다시 사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슬픔과 절망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계신 주님을 마음 속에 모셔들이면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의 부흥입니다. 여러분의 인생과 가정과 이 세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런 부활의 사건과 부흥이 오늘 우리 영혼과 가정 속에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일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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