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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본문

믿음의 장 히 11:35에 “믿음으로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여자들 중 한 사람은 왕하 4:8-37에 등장하는 수넴 여인일 것입니다. 이 여인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이 귀한 믿음의 여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만났을 때 과연 이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라고 알아보았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본다는 말대로 이 여인이 엘리사의 선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모습을 알아 보았다는 것은 이미 그 여인이 엘리사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 여자는 엘리사와 교제하는 동안 엘리사의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전도도 이와 같이 자연스러워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착하고 선해야 합니다. 선하다, 좋다는 말은 착한 행실, 선한 행위가 있다는 뜻입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눅 6:43)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사의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여호와 하나님으로 모신 이 여자는 즉시로 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의 이름으로 그 여자는 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을 선대하였습니다. 소위 선지자의 방이라 불리우는 여분의 사랑방, 다락방을 짓고는 침상과 책상, 의자와 촛대를 진설해 놓고 엘리사로 하여금 쉬게 해드렸습니다.
엘리사가 수넴을 지날 때마다 그 여자가 강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였으므로 엘리사는 그 집의 단골손님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제하는 동안 하루는 엘리사가 하도 고마와서 그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생각이 주밀하니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행할 것이 없습니까 왕께나 군대장관에게 구할 것이 없습니까”
생각이 주밀하다는 말은 세심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는 배려가 깊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할 때 보다 생각이 깊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섬길 때 언제나 주님을 최우선으로, 가장 귀한 것으로, 구체적 행동으로 끝날까지 변함없이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 감정이 상하면 다 틀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에서는 종종 낮추는 일이 발생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후 12:21에 말씀합니다. “내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그러나 우리 원숙한 청지기들은 더러 교회가 날 부끄럽게 해도 우리 자신은 교회를 부끄럽게 해선 안 된다는 점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그 믿음의 여인이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내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을 접대하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나는 내 백성 가운데 사는데 아무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때 눈치 빠른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제의합니다. “선생님, 이 여인에게는 아들이 없고, 남편은 늙었습니다” 엘리사가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대언합니다. “여인이여 지금부터 10개월이 지나면 아들을 안을 것입니다”
여인이 그 말씀을 신앙으로 받으며 고사합니다. “내 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과연 수넴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여 출산했고, 잘 자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보십시오. 이 여인은 황금률을 실천함으로 구하지 아니한 축복까지 받게 되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교회를 주밀히 섬기면 주님께로부터 주밀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 여자는 주를 믿어 구원을 받고, 죄 사함과 영생을 얻고 보니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감사해서 그저 주의 사업에 힘쓰고 여호와 하나님의 종을 접대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그 순수한 마음과 선행에 대하여 “내가 저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꼬”라고 생각하셨고,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종들이 그러한 기도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이를 낳은 여자에게는 이제 그 아이가 최고의 보배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남편이 최고였지만 이제는 남편 없이는 살아도, 아이 없인 못 사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보배 같은 아이가 재롱을 떨며 따라다니다가 하루는 곡식 베는 밭에서 “아이고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더니만 그만 실신하지 않겠습니까 이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기자 조금 나은 듯이 보이다가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청천에 벼락이요 하늘이 노랗게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야고보 사도가 약 4:14에 말씀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생이란 거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살다가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훌쩍 떠나가는 기식, 숨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아이의 죽음을 보았을 때 그 죽음만 보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징후를 묻는 남편에게 평안이라고 말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멀리서 그 여인이 오는 것을 보고 사환 게하시를 통하여 물었습니다. “당신은 평안합니까 남편도 평안합니까” 여인이 그 황급한 중에서도 대답합니다. “평안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아이가 죽어도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소망 안에서 믿음으로 평안한 이것이 신앙인 것입니다(삼하 12:15-23).
그런데 여인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만히 나아와 그 발을 안았을 때 엘리사는 평안 가운데 있는 그 여인의 인간적 괴로움과 간절한 기대를 알아채고 그 종 게하시에게 말합니다. “너는 일직선으로 이 여인의 집으로 달려가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일상적이 아닌 이상한 일이 발생한 것을 보고 아마도 마귀의 공격이라고 직감한 엘리야는 자기의 기도와 함께 마귀를 대적하는 지팡이를 들려 보냈습니다.
 “평강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롬 16:20). 게하시가 먼저 달려가서 그 지팡이로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아무 기척이 없었습니다. 곧 뒤따라온 엘리사가 그 아이 곁에 와서 보니 이미 그 아이는 죽어서 침상에 눕혀 놓은 채였습니다. 엘리사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한 다음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렸습니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츰 따뜻해졌습니다.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번 재채기하고 눈을 떴습니다. 수넴 여인이 들어가 그 아들을 취하고는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사태가 악화될 때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위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나 죽음에는 우리의 소원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불러가신 것을 우리가 오라고 명할 수 없습니다. 엘리사가 혼자 그 아이가 있는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으니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죄와 죽음 가운데 있는 인간을 사랑하는 이는 예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연합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입과 우리의 입, 예수의 손과 우리의 손, 예수의 눈과 우리의 눈, 예수의 몸과 우리의 몸이 하나가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신앙만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을 가져온다는 것을 엘리사는 그 몸짓으로 표현했습니다. 엘리사는 상징적인 행위를 통하여 믿는 자의 생명의 본성을 만세의 교인들에게 알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생명은 부활의 생명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이요, 영적으로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입니다. 불멸의 생명이요 어떤 병도 이기는 생명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오만 가지 질고를 짊어지시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자비의 샘, 치유의 샘에서 구원의 우물을 얼마든지 퍼 마실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는 죽음에서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 이 아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믿는 여자들은 실제로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이와 방불한 사건들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사망의 길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죽은 자와 같이 된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생명을 얻고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기독교회의 생생한 간증들의 핵심이 아닙니까
이렇게 부활의 생명을 체험한 수넴 여인 역시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환란과 우수사려 속에 살았는데 오늘 본문은 그 후일담입니다. 세월이 흐른 다음 하루는 엘리사가 그 수넴 여인을 찾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합니다. “여인이여 이땅에 7년 동안 대 기근이 있을 것입니다. 이 7년을 피해서 권속과 함께 블레셋 땅으로 피신하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에게 친절하십니까
우리의 생활범사에 관심을 가지고 기근에서, 경제적 부족에서, 극심한 가난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십니다. 이 여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불경기 가운데서 주님의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가난, 부족, 기근 가운데서도 역사하시고 인도하시고 함께하십니다. 피할 길을 내시고 구원의 손길을 펴십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졌다고 이 세상의 기근이 그녀를 피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 주의 종을 위해, 물질로 선대한 것을 여호와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온 땅의 기근 가운데서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을 구원하시고 7년 동안 먹을 양식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심은 것,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저축한 것, 찬물 한 그릇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접대한 것은 그 상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씨앗이 되어 30배, 60배, 100배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에게 축복의 열매로 임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무슨 구호기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므로 흉년이 오면 실제로 굶어죽었고 그 가문이 멸망되기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 수넴 여인의 가문을 그 땅 위에 영속시키셨습니다. 진실로 인생의 생사화복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도 내일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며, 온유한 자가 마침내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오늘 본문은 한겹 더 자상한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우리의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해결책을 내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여인이 7년간 수넴에서 블레셋으로 피난가서 산 것은 좋았는데 그 동안에 버려두고 간 자기의 집과 전토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고향에는 돌아왔는데 집도 밭도 없게 되었으니 낭패가 났습니다.
이제 이 문제는 우리 임금께 가서 통사정을 하고 실정해 주실 것을 구하는 도리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행정관서로 달려갔지만 사실 그 문제가 해결될런지는 난망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그 시간에 임금 곁에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있었는데 왕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게하시가 엘리사에 대해서 이것 저것 말하다가 마침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다시 살린 일을 이야기 하는 바로 그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그 여인이 와서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해서 왕께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게하시가 왕께 말합니다. “내 주 왕이여, 이 여인이 바로 그 여인이요 저 아이가 바로 그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니이다”
왕이 그 여인에게 물으매 여인이 고한지라 왕이 저를 위하여 한 관리를 임명하여 가로되 무릇 이 여인에게 속한 것과 이 땅에서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 밭의 소출을 다 돌려주라고 지시했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계된 모든 것을 완전케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시 138:8).
우리의 영적인 복리와 함께 육적인 매일의 양식도 함께 책임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뿌리고 허비한 모든 일과 물질을 분명히 보상하십니다. 끝날까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손의 삶에 은혜 베푸시기를 잊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으로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기도 하며” 달리 말하면, 믿는 성도들은 이땅 위에 사는 날 동안 범사에 완전한 인도하심과 풍성한 구원을 받는다는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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