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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높은 곳에 오르는 부활 신앙

본문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허락 받았지만, 동시에 그 부활은 이루어 가야 할 우리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하루아침에 완성 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겨자씨처럼 시작되어 점점 자라 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 신앙도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 속에 들어오 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자라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 살 때에는 노예로서 아주 형편없는 천한 삶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서 나 와 시내산에 이르러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을 맺어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났던 것입니다. 노예의 삶을 깊은 골짜기의 삶이라면, 거룩한 백성의 삶은 높은 산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 높은 산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허락되었 지만, 문제는 '어떻게 거기에까지 오르느냐'입니다. 깊은 골짜기에 있다가 높은 산 에 오르려면 한참 고생하며 올라가야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은 거룩한 백성 이 되기 위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부활 신앙도 마찬가지로 죽음의 깊은 골짜기에 있다가 이제부터 부활의 저 높은 산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 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 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골짜기에서 부활의 높은 곳에 이르신 것처럼 바울도 부활에 이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높은 곳에 올라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거기에 산이 있기 때문에 오른다고 합니다. 에베레스트를 등산하는 사람들을 보면 목숨을 걸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그 정상에 올라서 하는 일이란 태극기 하나 꽂아놓고 감격 소리 한 번 외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훈련을 하고 막대한 돈을 드리고 마침내는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것입니다.
97년에 시내산에 갔을 때 새벽 2시에 일어나 산에 올랐습니다. 우리 일행은 낙타를 타고 중턱까지 올라가서 정상까지 걸어올라 갔습니다. 정상에는 바람이 몹시 불고 추웠는데,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거기에 오르는 이유는 그 산이 모세가 올라와 여호와 하나님과 만나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았던 곳이라는 것과 그 리고 거기서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 산이 모세가 올랐던 산 인지는 아직까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어쨌든 이 단순한 이유 때문에 이른 새벽에 시내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율법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엘리야가 호렙산에 오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 이 변화산에 오르신 이유는 자기의 사명을 다시 한번 확인하시기 위하여서였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부활의 높은 곳에 올라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시내산에 오른 것처럼 우리가 이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부활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 스라엘 자손들이 시내산에 임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뵙기 위하여 이틀동안 옷을 빨고 몸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뵙기 위하여서는 죄로 더러워진 우리의 옛 생활을 십자가에 못박고, 새로운 마음, 새로운 생각, 깨끗한 몸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의 죄를 씻어내 고 우리 속에 새로운 삶을 받아드릴 때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팔복 말 씀에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부활하여 모든 욕심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을 가질 때 여호와 하나님을 뵈옵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90년 2월에 보세이 참여자들과 함께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고 교황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직접 악수를 하고 함께 사진도 찍었습니다. 별 것 아니지만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일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기독교 지도자들 초청한 청와대 오찬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가서 대통령과 악수하 고 중국 음식으로 준비된 오찬을 먹고 돌아온 것이지만 이 역시 누구에게나 주어진 기회가 아니기에 기억에 남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뵙는 일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죄씻음을 받고 부활의 생명에 이른 사람이면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을 뵈옵는 것 입니다. 교황이나 대통령을 만나는 것처럼 악수하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믿음 가운데서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교황이나 대통령 은 어쩌다 한 번 만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항상 만날 수 있고 그의 은 총이 우리에게 내리기에 이것은 기쁨이며 보람이며 큰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이 기쁨과 보람을 위해 부활의 높은 산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 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부활의 산을 오르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은 것처럼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을 듣고 받기 위하여 부활에 이르러야 합니다. 육신의 양식은 농사를 통해 얻지만, 하늘의 양식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세처럼 시내 산에 올라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 말씀이 성경으로 우리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성경을 누구나 읽는다고 해서 다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성 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기에 성령의 도우심과 감동이 없이는 아무리 읽어도 거기서 말씀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속에 세상을 향한 욕심이 가득한 채 아무 리 성경을 읽어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이란 결국 내가 마음을 비울 때 오는 것입니다. 내 욕심을 버리고 세상의 잡다한 생각을 비우고 가 난한 마음 겸손한 자세로 그 성경을 읽을 때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비울 때 우리의 귀가 열리고 우리의 눈이 밝아지기 때문 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에서만 듣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귀가 열리고 눈이 떠지면,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속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나의 편견과 고집과 이념을 버리면 어디서나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지만, 나의 편견을 버리지 아니하면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편견의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성장이란 이념에 사로잡히거나 틀에 박힌 신학에 붙잡히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마음을 비우면서 조용히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비 로소 그 말씀을 제대로 설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도 마 찬가지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오면서 복잡하고 힘들었던 세상살림에 대한 걱정과 생각들을 다 비우고 겸손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기도하고 준비한 사람에 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설교가 허공을 치는 무의미하고 지루한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호렙산 굴속에서 겸손히 엎드렸을 때 작고 가늘게 들려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이제 우리 도 부활 신앙의 높은 곳으로 나아가 우리의 잡다한 생각과 이념과 걱정근심들을 털 어 버리고 가난한 마음으로 엎드릴 때 거기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 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자에게는 기쁨이 있으며, 자기의 길이 분명해지고 그 말씀 에 순종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부활의 높은 곳으로 오르려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멀리 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깊은 골짜기나 낮은 곳에 있으면 멀리 볼 수 없습니다. 높은 곳에 오를 때 비로소 멀리 보이고 자기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그래서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가끔 길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막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데 하늘에 뜬 헬리콥터가 이런 상황을 살펴서 지상에 알려주면 그런 궁금증을 금방 풀 수가 있고 상황을 보아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은 인공위성을 띄워놓고 거기서 보내어 오는 정보를 가지고 가장 빠른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단 자동차들이 나옵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 다보면 한 눈에 모든 길이 다 보이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얻어 높은 곳에 오르게 되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고 여호와 하나님이 이루시는 그 역사의 방향과 의미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 니다. 그러면 우리는 길을 헤매지 않고 바르게 그 역사의 방향을 좇아 나가며 지혜 롭게 문제에 대처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이란 바로 높은 곳에서 여호와 하나님 의 역사를 통찰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오늘의 인공위 성이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과거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비록 이 땅 낮은 곳에 살지만 부활을 통하여 신앙의 인공위성을 우리의 영의 하늘에 띄워야 하겠습니다. 거기로부터 오는 정보를 분석하여 우리의 잘못된 삶의 방향을 수정하 고 올바른 방향을 찾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 편한 길로 몰려가는 것은 그 앞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는 그 앞길의 정보를 알 수 있는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대로 당장 넓고 편한 길을 택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 넓은 길 끝에 절벽 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안다면 사람들이 그 길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애써 부활의 높은 곳으로 오르려 하는 까닭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이루시는 그 역사의 길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야 미리 우리의 길을 내다보면서 갈 길을 택하고 지혜로 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가 부활의 높은 곳에 오르려 하는 것은, 하늘의 능력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 눅 24:49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 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 행 1:8
'능력'이나 '권능'이 다같이 '듀나미스'에서 번역된 말입니다. '힘', '이적적인 능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영어의 dynamics가 여기에서 나온 말로서 원동력, 활력, 역동성을 뜻합니다.
가끔 TV를 통해 춤추며 노래하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신기하게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격렬하게 율동을 하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 그 젊은이들의 힘과 그 능력이 부럽습니다. 농구나 축구 선수들이 쉴 사이 없이 뛰면서 공을 놓은 것을 보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뛰는 젊은 선수들의 그 넘치는 힘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젊음의 힘은 30대가 넘어서면서 많이 줄어들게 되어 대체로 운동선수들은 은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그 힘과 역동성은 점차 사그라지는 것입니다.
여성의 경우 여성 호르몬이 마르기 시작하는 50대가 되면 진이 빠지고 활기를 잃게 되며, 아기를 낳을 수 없게 됩니다. 생명의 힘이 말라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아름답던 피부에 주름살이 생기고 여러 가지 병에 걸리게 되어 결국은 시든 꽃과 같이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여성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아름다운 것처럼, 젊은 운동 선수들이 그 넘치는 힘으로 뛸 때 놀라운 기술과 아름다움을 들어내는 것처럼,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면 그 속에 간직된 새로운 생명의 힘이 우리를 아름답게 만 들며,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수 있게 만듭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기에 무서 운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결코 그 신앙을 굽히지 않으며, 불의와 부정, 거짓과 탐 욕에 대항하여 정의와 사랑으로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 생명의 능력 은 사도들로 하여금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였으며, 특별히 사도 바울은 "나에 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9)고 하면서 그는 온갖 고난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3차에 걸친 선교 여행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복음 전파의 능력이야말로 부활의 생명이 간직한 놀라운 힘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얻기 위하여 부활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아직 우리가 담대하게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까닭은 이 능력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제 시대나 군사정권 시절에 저들의 불의와 억압에 맞서서 여호와 하나님의 의를 전하지 못한 것도 이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그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는 우리에게 이 부활 생명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에게 이 능력 주시기를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 생명을 얻게 된 여러분은 이제부터 그 부활 생명의 높은 정상에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을 뵈오며, 그가 들려주는 말씀을 들으며, 그가 보여주시는 구원의 역사를 보며, 거기 로부터 오는 하늘의 능력을 받아 이 땅에 널리 복음을 전하며 모든 어둠의 세력과 불의와 맞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였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낮은 곳에서 평범한 삶에 묻혀 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능력을 받으므로 아름다우면서도 활기에 넘친 삶,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삶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 이 나라에는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일꾼을 삼으시려 하는데, 우리가 그 부름을 외면하고 나의 평안만은 구하는 안이한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제 부르심을 따라 나가서 그가 주시는 말씀과 능력을 받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가야 하겠습니다.
저는 안동교회 역사를 쓰면서, 교회가 마땅히 하여야 할 선교와 봉사의 기록들이 많이 있어서 그것을 위주로 역사를 써야 할텐데, 오히려 문제가 생겨서 그 문제 때문에 갈등하고 싸운 기록들로 역사를 채워가야 하는 것이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 닙니다. 이제 90주년을 맞은 안동교회가 앞으로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힘있게 건 설하는 일들로 채워질 수 있기를 위해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제 부활 신앙을 따라 높은 영의 세계에 올라가 새로운 부활 생명을 받아서 새 역사를 창조해 가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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