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신앙에 의한 믿음의 길
본문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혹독하게 책망을 받은 교회는 사데 교회였습니다. 책망 받은 이유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평가하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행위 중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데 교회는 교통 요충지에 있는 교회로서 그들의 부와 명성이 널리 소문나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눈에는 그들의 행위 중 온전한 것이 없었기에 가장 혹독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결책을 제시해 주십니다. 계 3:3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첫째는 “생각하라”는 것이며, 둘째는 “지키라”는 것이고, 셋째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들이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할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라고 그 대상을 말씀해 주십니다. 성령을 어떻게 받았고, 성령을 통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도록 회개하라는 요구이십니다. 결국 성령 안에서 들은 말씀에 어떻게 순종했는지를 추궁하시는 말씀이며, 이런 점에서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없다는 평가이십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처럼 부와 명성을 통해 거창하게 교회적인 모습으로, 성도의 모습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와 명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대로 순종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기보다는 그들의 명성 유지를 위해 전통을 고려하여 변질된 순종을 하였습니다. 명성 유지를 위해 영적 생명을 위한 순종보다 형식을 위한 순종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모습의 변질된 순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가, 오늘날의 성도들이 이런 책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지 냉정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성령 안에서 즉시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의 명성, 자신의 전통, 자신의 형식, 자신의 조직, 자신의 현실, 자신의 가정, 자신의 재산 등을 고려하여 변질된 순종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부활신앙 안에서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지 않기에 나타나는 증세들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어떻게”를 두 번씩이나 강조하며 순종의 방법이 어떠했는지 생각해 보고, 온전한 순종을 이루도록 회개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사데 교회를 책망하시며 주님께서 요구하신 온전한 순종은 오직 부활신앙을 지닌 자에게만이 나타날 수 있는 순종입니다. 부활신앙은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들은 그대로 받아들이며, 명령 그대로 순종합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상황, 환경, 조건들을 통해 변질시켜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는 사건 속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 받고, 조금의 변질도 없이 그대로, 즉시 순종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는 부활신앙의 모습은 우리가 지녀야 할 모습이며, 그런 모습만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옷을 더럽히지 않은 흰옷 입은 합당한 자의 모습입니다.
2. 부활신앙은 소망 가운데 망설임이 없는 즉각적인 순종을 하게 한다.
창 22:3-8은 세 가지의 준비 장면을 보여줍니다. 창 22:3은 아브라함이 출발을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창 22:4-6에서는 목적지에 도착을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 22:7-8은 아들을 번제로 드릴 마음의 준비를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이 출발해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어렵고도, 짧지만 긴 준비의 연속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비록 이미 준비된 아브라함이었지만 번제로 드릴 그 순간까지 아브라함에게 지속적으로 필요한 준비들이 앞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준비의 과정을 통하여 알고자 하신 것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창 22:3에서 아브라함이 출발을 준비하는 모습을 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지난 밤에 이런 명령을 받은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명령으로 인해 밤잠을 설쳤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명령을 받고 주저하며 망설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고 말씀하십니다.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의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명령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아브라함의 출발 준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상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는 시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언제”라는 명령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다음날 일찍 명령을 따라도 되고, 한 달 후나, 아니면 십년이나, 오십년 후에 지켜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적 재해석이나 변명의 구실들이 많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최소한 이삭이 결혼하여 손자를 낳은 후에 드려도 되는 상황으로 여길 수도 있었습니다.
아직 이삭은 아내가 될 리브가(창 24:1-67)를 만나기도 전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의 아브라함의 반응은 무엇인가 달랐습니다. 모든 인간적 변명과, 연기의 구실들을 다 포기하고 바로 다음 날 아침에, 그것도 이른 아침에 일찍 그 명령에 순종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하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아침” 앞에 정관사가 붙어 “그 아침”으로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이 명령을 받은 “그 아침”입니다.
저녁에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하루 주기를 볼 때 명령을 받은 같은 하루에 포함되는 “그 아침”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의 표현으로 하면, 이것은 “그 다음날 아침”이란 뜻을 나타냅니다. 이를 볼 때 아브라함의 신속하고 절대적인 순종이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일찍 일어났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찍 일어나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명령에 따르고자 하는 열망과 열심을 품고 일찍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밤새도록 통곡하며 괴로워한 모습을 읽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당시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교제를 나눈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에 반응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앞서서 몇 차례 이러한 일을 경험하였고(창 19:27; 21:14), 꿈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경고를 받은 아비멜렉도 그러했습니다(창 20:8).
이를 볼 때 지난밤의 여호와 하나님과의 만남은 매우 어려운 명령을 받은 만남이었으나 아브라함의 평상시 습관에 영향을 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하고자 하여 그날도 아침에 일찍 일어난 것입니다. 명령의 종류에 따라 태도가 변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의 푯대를 움켜 쥔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반응을 보입니다. 평상시의 준비된 모습이 이러한 반응을 가능케 합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흔들림 없는 반응을 가능케 하는 믿음의 근본 요소가 확증되어 가는 두 번째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의 반응은 아침에 일찍 일어난 후에,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질서 있는 출발 준비의 과정에서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지웠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갈 그의 사환 중 두 명을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을 불러 출발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번제로 쓰기 위한 나무를 쪼개었습니다. 다른 그 어떤 인간적인 계획과 목적이 들어 있지 않은 온전한 순종의 준비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귀에 안장을 지우는 것은 그날 아침에 출발할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행동이며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여행을 떠날 것임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행동입니다. 주저하며, 안타까워하며, 어쩔 수 없이 출발을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준비만 끝나면 곧 떠나게 됩니다. 나귀는 안장을 지고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 예외 없는 순종의 행동을 보여줍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이 이 준비에 모아졌습니다. 오직 자신의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열심히 준비에 임하고 있습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자에게는 망설임이 없습니다. 늘 여호와 하나님과 교통하며, 받은 말씀에 인간적 계산 없이 즉각 순종합니다. 부활에의 소망이 죽음을 이겼고, 실패에의 두려움을 물리쳤으며, 불확실성을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의 즉각성은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순종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은 이러한 즉각성을 보여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부활신앙을 지닌 자는 즉각적인 반응과 순종을 통해 평강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없는 성도는 괴롭습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성도는 많은 계산속에 고통을 당합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성도는 각종 변명과 합리화 작업 속에서 그 마음이 탐욕과 방탕, 외식과 불법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성도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은 언제나 짐이 되며, 밤잠을 설치게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즉각적인 순종을 통해 평강을 유지시키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3. 부활신앙은 성도의 시야를 인격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머물게 한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때 우리의 시야가 명령에 모아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시야가 모아지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어 온 것은 명령이나 지시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명령 이면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초점이 모아지도록 준비되어져 온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훈련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런 반응을 하게 했습니다.
명령 자체에 시야가 모아지는 사람은 분명히 인간적 반응이 나타납니다. 율법적인 의식이 뒤따릅니다. 변명의 구실도 찾습니다. 피할 길을 알아보는 노력도 동원됩니다. 그러나 명령 이면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의 이해 여부를 떠나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냅니다. 지시의 말씀을 인간적 계산 없이 즉시 순종으로 착수합니다.
명령 자체에 시야가 모아지면 이성이나 감정을 따르는 판단과 반응을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 시야가 모아지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의 유일한 행동 지침이 됩니다. 신앙의 난제들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 때 비로소 해결됩니다. 또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 때 우리 자신을 바로 알며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의 해결 방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께 시야가 고정될 때 바른 분별을 하며 바른 반응을 합니다. 이럴 때만 말씀에 즉각적인 순종을 합니다.
아브라함도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통해서만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다릅니다. 그것은 바로 그 이전에 준비되어야 할 것이 준비되어 있느냐에 관계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믿고, 따르도록, 다른 것을 버리는 훈련을 순종으로 받아 온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에 다릅니다.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고백적인 신앙을 지켜 온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일까지도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으로 반응하도록 훈련되어진 아브라함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즉각적인 순종은 나귀만을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함께 동행할 사환 두 명도 취했습니다. 자신의 여행길에 유익을 줄 수 있는 사환을 직접 택하였습니다. 어려움과 괴로움을 끼치지 않으며 영적인 방해를 일으키지 않을 사환 둘을 취했습니다. “사환”은 성경에서 종종 유아부터 결혼 전까지의 연령층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사환”은 “소년 종”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 이들이 비록 사환들의 우두머리는 아닐지라도 아브라함이 가장 신임하는 사환이었을 것입니다. 또는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사환의 책임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이삭이 떠난 후 집을 돌보라고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행하는 길에 동행하도록 그들을 부른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을 내어 쫓았던 일이 있었기에 집안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스마엘을 따르던 하속도 있었을 것이며, 아브라함과 이삭이 떠난 후 이스마엘과 다시 내통하여 집안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집안에서 신임하는 중요한 두 사환을 함께 데리고 가기로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시야가 머문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잔류하는 집안일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출발하면서도 뒷일을 계산하며, 부탁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입니다. 부활신앙에 의한 반응과 단순한 두려움에 의한 명령에의 순종은 다릅니다.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과 함께 하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모든 것 위에 있음을 알고 확신하는 믿음이 있을 때 그 여호와 하나님 외의 다른 문제가 끼어들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동안 축적한 부와 명성과 가정의 규모가 아브라함을 제어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밤에 명령을 주신 그 여호와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다는 믿음이 이미 아브라함에게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은 성도의 시야를 일이나, 물질로부터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옮겨 놓습니다. 살아 계신 인격과 인격적으로 우선적인 관계를 맺게 하며, 그 후에 그 인격으로부터 주어지는 말씀에 반응하게 합니다. 이런 반응만이 즉각적인 반응을 가능케 하며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을 가능케 합니다.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은 바로 이러한 인격성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다양한 명령을 접합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우리의 모든 시야가 머뭅니다. 그러기에 그 명령과 우리의 소유를 비교합니다. 그 명령과 우리가 쌓아온 것들을 비교합니다. 그 명령과 우리의 삶의 영역들을 비교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명령을 순종할 수 없는 자로 머물게 합니다. 오직 명령하신 여호와 하나님께만 우리의 시야가 머물 때, 우리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명령에 즉각 순종할 수 있습니다. 더 큰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순종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은 언제나 우리의 시야를 여호와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없는 성도는 언제나 자신의 삶의 영역과 동등한 위치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둡니다. 자신의 소유물과 동등한 위치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둡니다. 자신에게 선택권이 주어진 위치에 말씀을 내려 둡니다. 그러기에 부활신앙이 없는 성도의 삶은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결코 여호와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예할 수 없습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성도의 모습은 세상적으로 볼 때, 매정하게 보입니다. 무정하게도 보입니다. 정이 없는 사람처럼도 보입니다. 인간이 아닌 기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들이 죽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울부짖지도 않고, 매달리고 간청하지도 않고, 남들에게 하소연하지도 않고, 얼마나 무정하게 보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부활신앙이 있는 자들의 평강의 모습입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자들의 영원한 안식의 모습입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성도들의 변치 않는 삶의 모습입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성도는 여호와 하나님께만 시야가 머무는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4. 부활신앙은 명령의 순종에 있어서의 진실성을 확인해 준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평안 가운데 나귀와 두 사환을 준비한 후에 아들 이삭을 취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준비해 놓은 상황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궁금증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여행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취해졌기에 여행의 주요 대상이 자신임을 직감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이런 마음에 더 깊은 궁금증을 일으키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들 앞에서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동안에도 몇 번의 단을 쌓았기 때문에 이삭도 목격한 적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날처럼 여행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날은 긴 여행 준비를 하며, 번제에 쓸 나무까지 쪼개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지금 있는 브엘세바에서는 나무를 쪼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구릉 지대엔 대부분 나무들이 없었기에 번제용 나무를 미리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삭이 이것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삭에게 있어서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서 단을 쌓을 것인지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들 앞에서 나무를 쪼개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때 아브라함이 나무를 쪼개는 모습이 보통 때와는 달랐습니다. “쪼개었다”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형태는 아주 열심히 쪼개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각으로 나뉘어 지도록 쪼개는 것을 나타낼 때 쓰입니다. 의미심장하게, 정성을 다해서 쪼개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입니다. 이 엄숙한 쪼갬은 이삭과 두 사환의 입을 막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준비는 출발 준비의 마지막 과정입니다. 함께 떠날 모든 사람과 모든 동물이 함께 지켜보며 행해지는 과정이었습니다. 나무가 하나씩 쪼개어질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은 시험되어집니다. 번제를 실제 집행할 자와 형식을 갖추기 위한 자의 쪼개는 모습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정리하며 진정으로 번제를 드릴 자세로 쪼개었습니다. 그 동안 준비시켜 오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로 나무를 쪼개었습니다. 약속을 한번도 어기신 적이 없는 언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며 나무를 쪼개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적 반응을 이끈 근원도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부활신앙이었습니다. 영원한 약속에의 믿음이었습니다. 이삭을 통해 이루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부활신앙이 그의 순종의 자세를 결정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이 순종의 자세를 유지하게 한 것입니다.
다 쪼갠 후, 이들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여기서 “일어났다”라는 동사는 흔히 예비적 행위를 나타내며, 특히 여행에 따른 준비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입니다. 준비가 다 된 아브라함 일행이 다른 행동을 취한 것이 아니라 곧바로 일어나 출발했음을 알려주는 동사입니다. 여기에도 조금의 머뭇거림이나 지체함이 없습니다. 남들에게 무엇을 부탁하거나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명령대로 계속 순종의 길로만 들어섰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향한 마음의 준비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준비였음을 알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받기 원하시는 첫 번째 시험 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믿음의 자세부터 측정하시고 시험하십니다. 바른 믿음은 준비의 자세부터 측정되어집니다. 믿음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삶 전체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의 길을 수행하기 위한 모든 준비의 과정에서부터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는 부분도 바로 그러한 부분부터입니다.
말씀이 임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모든 반응은 곧 믿음의 반응인가 아니면 인간적, 율법적 반응인가를 결정짓습니다. 명령 이면에 있는 부활신앙에 의한 소망과, 명령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분명히 온전한 준비를 하게 합니다.
말씀을 대하는 반응은 바로 믿음을 측정하는 척도입니다. 믿음의 크기와 질을 측정합니다. 믿음의 종류를 측정합니다. 아직 번제를 드리기도 전인 “준비의 과정”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과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준비 과정에서 드러나는 믿음을 측정하십니다. 소망 가운데 믿음으로 반응하는 준비인지, 율법적으로 마지못해 행하는 과제로서의 일인지를 바라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명령하신 그 순간부터 우리의 믿음의 반응을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출발 준비,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여호와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의 말씀을 인간적 계산 없이 즉시 순종으로 착수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의 반응을 위한 준비 과정부터가 순종의 과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의 직접적인 응답 이전에 응답할 자의 자세를 먼저 준비시키십니다. 이 준비 자세의 실패는 결국 목적의 실패를 가져옵니다. 비록 목적이 뜻대로 성취되어도 준비의 실패는 여호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됨과 동시에 이루어져야만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가더니”라는 말은 “그가 출발했다”라는 뜻의 히브리적 관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출발 준비는 철저한 순종으로 완결되어, 지시한 곳을 향해 출발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상의 순종은 결과에 대한 소망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롬 4:17)”라로 믿고 소망 가운데 신속하고 단호하게 이삭과 함께 모리아 땅의 지시하신 산을 향해 출발한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명령에 순종하는 자의 순종의 진실성을 유지시킵니다. 나귀, 두 사환, 이삭, 나무 등의 어느 하나의 준비에 있어서도 진실성이 결여된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대면하며 영생을 누리는 자, 부활신앙을 지닌 자가 인식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시야가 언제나 그로 하여금 진실한 반응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출발 준비는 그의 부활신앙에 의한 이러한 순종의 진실성을 보여줍니다. 부활신앙의 결과에 대한 소망은 언제나 과정상의 진실한 순종을 이끌어 갑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자들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께서 일곱 번이나 재앙을 선언했던 외식하는 자들처럼 삶의 과정상의 불순종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파괴하며, 공동체를 파괴할 뿐 아니라,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있는 자들은 삶의 모든 과정을 미래적인 소망 가운데 순종으로 채워 나가기에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영역으로 만들어 가게 됩니다. 곧 부활신앙이 있는 자의 영역마다 형통함과 평강이 임하는 은혜를 입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보며 즉각적인 순종, 과정상의 순종을 해야 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즉각적인 순종, 변질되지 않은 순종, 세상 것들의 혼잡을 거부한 온전한 순종을 기다리십니다. 우리들이 부활신앙 가운데 이러한 순종의 모습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설 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을 계 3:4-5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아멘.
그래서 주님은 그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결책을 제시해 주십니다. 계 3:3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첫째는 “생각하라”는 것이며, 둘째는 “지키라”는 것이고, 셋째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들이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할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라고 그 대상을 말씀해 주십니다. 성령을 어떻게 받았고, 성령을 통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도록 회개하라는 요구이십니다. 결국 성령 안에서 들은 말씀에 어떻게 순종했는지를 추궁하시는 말씀이며, 이런 점에서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없다는 평가이십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처럼 부와 명성을 통해 거창하게 교회적인 모습으로, 성도의 모습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와 명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대로 순종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기보다는 그들의 명성 유지를 위해 전통을 고려하여 변질된 순종을 하였습니다. 명성 유지를 위해 영적 생명을 위한 순종보다 형식을 위한 순종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모습의 변질된 순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가, 오늘날의 성도들이 이런 책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지 냉정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성령 안에서 즉시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의 명성, 자신의 전통, 자신의 형식, 자신의 조직, 자신의 현실, 자신의 가정, 자신의 재산 등을 고려하여 변질된 순종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부활신앙 안에서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지 않기에 나타나는 증세들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어떻게”를 두 번씩이나 강조하며 순종의 방법이 어떠했는지 생각해 보고, 온전한 순종을 이루도록 회개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사데 교회를 책망하시며 주님께서 요구하신 온전한 순종은 오직 부활신앙을 지닌 자에게만이 나타날 수 있는 순종입니다. 부활신앙은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들은 그대로 받아들이며, 명령 그대로 순종합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상황, 환경, 조건들을 통해 변질시켜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는 사건 속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 받고, 조금의 변질도 없이 그대로, 즉시 순종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는 부활신앙의 모습은 우리가 지녀야 할 모습이며, 그런 모습만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옷을 더럽히지 않은 흰옷 입은 합당한 자의 모습입니다.
2. 부활신앙은 소망 가운데 망설임이 없는 즉각적인 순종을 하게 한다.
창 22:3-8은 세 가지의 준비 장면을 보여줍니다. 창 22:3은 아브라함이 출발을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창 22:4-6에서는 목적지에 도착을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 22:7-8은 아들을 번제로 드릴 마음의 준비를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이 출발해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어렵고도, 짧지만 긴 준비의 연속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비록 이미 준비된 아브라함이었지만 번제로 드릴 그 순간까지 아브라함에게 지속적으로 필요한 준비들이 앞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준비의 과정을 통하여 알고자 하신 것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창 22:3에서 아브라함이 출발을 준비하는 모습을 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지난 밤에 이런 명령을 받은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명령으로 인해 밤잠을 설쳤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명령을 받고 주저하며 망설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고 말씀하십니다.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의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명령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아브라함의 출발 준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상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는 시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언제”라는 명령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다음날 일찍 명령을 따라도 되고, 한 달 후나, 아니면 십년이나, 오십년 후에 지켜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적 재해석이나 변명의 구실들이 많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최소한 이삭이 결혼하여 손자를 낳은 후에 드려도 되는 상황으로 여길 수도 있었습니다.
아직 이삭은 아내가 될 리브가(창 24:1-67)를 만나기도 전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의 아브라함의 반응은 무엇인가 달랐습니다. 모든 인간적 변명과, 연기의 구실들을 다 포기하고 바로 다음 날 아침에, 그것도 이른 아침에 일찍 그 명령에 순종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하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아침” 앞에 정관사가 붙어 “그 아침”으로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이 명령을 받은 “그 아침”입니다.
저녁에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하루 주기를 볼 때 명령을 받은 같은 하루에 포함되는 “그 아침”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의 표현으로 하면, 이것은 “그 다음날 아침”이란 뜻을 나타냅니다. 이를 볼 때 아브라함의 신속하고 절대적인 순종이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일찍 일어났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찍 일어나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명령에 따르고자 하는 열망과 열심을 품고 일찍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밤새도록 통곡하며 괴로워한 모습을 읽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당시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교제를 나눈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에 반응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앞서서 몇 차례 이러한 일을 경험하였고(창 19:27; 21:14), 꿈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경고를 받은 아비멜렉도 그러했습니다(창 20:8).
이를 볼 때 지난밤의 여호와 하나님과의 만남은 매우 어려운 명령을 받은 만남이었으나 아브라함의 평상시 습관에 영향을 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하고자 하여 그날도 아침에 일찍 일어난 것입니다. 명령의 종류에 따라 태도가 변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의 푯대를 움켜 쥔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반응을 보입니다. 평상시의 준비된 모습이 이러한 반응을 가능케 합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흔들림 없는 반응을 가능케 하는 믿음의 근본 요소가 확증되어 가는 두 번째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의 반응은 아침에 일찍 일어난 후에,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질서 있는 출발 준비의 과정에서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지웠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갈 그의 사환 중 두 명을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을 불러 출발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번제로 쓰기 위한 나무를 쪼개었습니다. 다른 그 어떤 인간적인 계획과 목적이 들어 있지 않은 온전한 순종의 준비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귀에 안장을 지우는 것은 그날 아침에 출발할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행동이며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여행을 떠날 것임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행동입니다. 주저하며, 안타까워하며, 어쩔 수 없이 출발을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준비만 끝나면 곧 떠나게 됩니다. 나귀는 안장을 지고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 예외 없는 순종의 행동을 보여줍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이 이 준비에 모아졌습니다. 오직 자신의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열심히 준비에 임하고 있습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자에게는 망설임이 없습니다. 늘 여호와 하나님과 교통하며, 받은 말씀에 인간적 계산 없이 즉각 순종합니다. 부활에의 소망이 죽음을 이겼고, 실패에의 두려움을 물리쳤으며, 불확실성을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의 즉각성은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순종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은 이러한 즉각성을 보여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부활신앙을 지닌 자는 즉각적인 반응과 순종을 통해 평강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없는 성도는 괴롭습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성도는 많은 계산속에 고통을 당합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성도는 각종 변명과 합리화 작업 속에서 그 마음이 탐욕과 방탕, 외식과 불법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성도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은 언제나 짐이 되며, 밤잠을 설치게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즉각적인 순종을 통해 평강을 유지시키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3. 부활신앙은 성도의 시야를 인격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머물게 한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때 우리의 시야가 명령에 모아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시야가 모아지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어 온 것은 명령이나 지시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명령 이면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초점이 모아지도록 준비되어져 온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훈련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런 반응을 하게 했습니다.
명령 자체에 시야가 모아지는 사람은 분명히 인간적 반응이 나타납니다. 율법적인 의식이 뒤따릅니다. 변명의 구실도 찾습니다. 피할 길을 알아보는 노력도 동원됩니다. 그러나 명령 이면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의 이해 여부를 떠나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냅니다. 지시의 말씀을 인간적 계산 없이 즉시 순종으로 착수합니다.
명령 자체에 시야가 모아지면 이성이나 감정을 따르는 판단과 반응을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 시야가 모아지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의 유일한 행동 지침이 됩니다. 신앙의 난제들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 때 비로소 해결됩니다. 또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 때 우리 자신을 바로 알며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의 해결 방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께 시야가 고정될 때 바른 분별을 하며 바른 반응을 합니다. 이럴 때만 말씀에 즉각적인 순종을 합니다.
아브라함도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통해서만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다릅니다. 그것은 바로 그 이전에 준비되어야 할 것이 준비되어 있느냐에 관계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믿고, 따르도록, 다른 것을 버리는 훈련을 순종으로 받아 온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에 다릅니다.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고백적인 신앙을 지켜 온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일까지도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으로 반응하도록 훈련되어진 아브라함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즉각적인 순종은 나귀만을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함께 동행할 사환 두 명도 취했습니다. 자신의 여행길에 유익을 줄 수 있는 사환을 직접 택하였습니다. 어려움과 괴로움을 끼치지 않으며 영적인 방해를 일으키지 않을 사환 둘을 취했습니다. “사환”은 성경에서 종종 유아부터 결혼 전까지의 연령층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사환”은 “소년 종”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 이들이 비록 사환들의 우두머리는 아닐지라도 아브라함이 가장 신임하는 사환이었을 것입니다. 또는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사환의 책임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이삭이 떠난 후 집을 돌보라고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행하는 길에 동행하도록 그들을 부른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을 내어 쫓았던 일이 있었기에 집안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스마엘을 따르던 하속도 있었을 것이며, 아브라함과 이삭이 떠난 후 이스마엘과 다시 내통하여 집안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집안에서 신임하는 중요한 두 사환을 함께 데리고 가기로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시야가 머문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잔류하는 집안일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출발하면서도 뒷일을 계산하며, 부탁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입니다. 부활신앙에 의한 반응과 단순한 두려움에 의한 명령에의 순종은 다릅니다.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과 함께 하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모든 것 위에 있음을 알고 확신하는 믿음이 있을 때 그 여호와 하나님 외의 다른 문제가 끼어들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동안 축적한 부와 명성과 가정의 규모가 아브라함을 제어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밤에 명령을 주신 그 여호와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다는 믿음이 이미 아브라함에게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은 성도의 시야를 일이나, 물질로부터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옮겨 놓습니다. 살아 계신 인격과 인격적으로 우선적인 관계를 맺게 하며, 그 후에 그 인격으로부터 주어지는 말씀에 반응하게 합니다. 이런 반응만이 즉각적인 반응을 가능케 하며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을 가능케 합니다.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은 바로 이러한 인격성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다양한 명령을 접합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우리의 모든 시야가 머뭅니다. 그러기에 그 명령과 우리의 소유를 비교합니다. 그 명령과 우리가 쌓아온 것들을 비교합니다. 그 명령과 우리의 삶의 영역들을 비교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명령을 순종할 수 없는 자로 머물게 합니다. 오직 명령하신 여호와 하나님께만 우리의 시야가 머물 때, 우리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명령에 즉각 순종할 수 있습니다. 더 큰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순종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은 언제나 우리의 시야를 여호와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없는 성도는 언제나 자신의 삶의 영역과 동등한 위치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둡니다. 자신의 소유물과 동등한 위치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둡니다. 자신에게 선택권이 주어진 위치에 말씀을 내려 둡니다. 그러기에 부활신앙이 없는 성도의 삶은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결코 여호와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예할 수 없습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성도의 모습은 세상적으로 볼 때, 매정하게 보입니다. 무정하게도 보입니다. 정이 없는 사람처럼도 보입니다. 인간이 아닌 기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들이 죽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울부짖지도 않고, 매달리고 간청하지도 않고, 남들에게 하소연하지도 않고, 얼마나 무정하게 보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부활신앙이 있는 자들의 평강의 모습입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자들의 영원한 안식의 모습입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성도들의 변치 않는 삶의 모습입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성도는 여호와 하나님께만 시야가 머무는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4. 부활신앙은 명령의 순종에 있어서의 진실성을 확인해 준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평안 가운데 나귀와 두 사환을 준비한 후에 아들 이삭을 취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준비해 놓은 상황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궁금증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여행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취해졌기에 여행의 주요 대상이 자신임을 직감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이런 마음에 더 깊은 궁금증을 일으키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들 앞에서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동안에도 몇 번의 단을 쌓았기 때문에 이삭도 목격한 적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날처럼 여행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날은 긴 여행 준비를 하며, 번제에 쓸 나무까지 쪼개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지금 있는 브엘세바에서는 나무를 쪼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구릉 지대엔 대부분 나무들이 없었기에 번제용 나무를 미리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삭이 이것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삭에게 있어서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서 단을 쌓을 것인지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들 앞에서 나무를 쪼개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때 아브라함이 나무를 쪼개는 모습이 보통 때와는 달랐습니다. “쪼개었다”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형태는 아주 열심히 쪼개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각으로 나뉘어 지도록 쪼개는 것을 나타낼 때 쓰입니다. 의미심장하게, 정성을 다해서 쪼개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입니다. 이 엄숙한 쪼갬은 이삭과 두 사환의 입을 막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준비는 출발 준비의 마지막 과정입니다. 함께 떠날 모든 사람과 모든 동물이 함께 지켜보며 행해지는 과정이었습니다. 나무가 하나씩 쪼개어질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은 시험되어집니다. 번제를 실제 집행할 자와 형식을 갖추기 위한 자의 쪼개는 모습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정리하며 진정으로 번제를 드릴 자세로 쪼개었습니다. 그 동안 준비시켜 오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로 나무를 쪼개었습니다. 약속을 한번도 어기신 적이 없는 언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며 나무를 쪼개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적 반응을 이끈 근원도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부활신앙이었습니다. 영원한 약속에의 믿음이었습니다. 이삭을 통해 이루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부활신앙이 그의 순종의 자세를 결정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이 순종의 자세를 유지하게 한 것입니다.
다 쪼갠 후, 이들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여기서 “일어났다”라는 동사는 흔히 예비적 행위를 나타내며, 특히 여행에 따른 준비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입니다. 준비가 다 된 아브라함 일행이 다른 행동을 취한 것이 아니라 곧바로 일어나 출발했음을 알려주는 동사입니다. 여기에도 조금의 머뭇거림이나 지체함이 없습니다. 남들에게 무엇을 부탁하거나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명령대로 계속 순종의 길로만 들어섰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향한 마음의 준비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준비였음을 알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받기 원하시는 첫 번째 시험 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믿음의 자세부터 측정하시고 시험하십니다. 바른 믿음은 준비의 자세부터 측정되어집니다. 믿음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삶 전체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의 길을 수행하기 위한 모든 준비의 과정에서부터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는 부분도 바로 그러한 부분부터입니다.
말씀이 임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모든 반응은 곧 믿음의 반응인가 아니면 인간적, 율법적 반응인가를 결정짓습니다. 명령 이면에 있는 부활신앙에 의한 소망과, 명령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분명히 온전한 준비를 하게 합니다.
말씀을 대하는 반응은 바로 믿음을 측정하는 척도입니다. 믿음의 크기와 질을 측정합니다. 믿음의 종류를 측정합니다. 아직 번제를 드리기도 전인 “준비의 과정”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과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준비 과정에서 드러나는 믿음을 측정하십니다. 소망 가운데 믿음으로 반응하는 준비인지, 율법적으로 마지못해 행하는 과제로서의 일인지를 바라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명령하신 그 순간부터 우리의 믿음의 반응을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출발 준비,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여호와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의 말씀을 인간적 계산 없이 즉시 순종으로 착수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의 반응을 위한 준비 과정부터가 순종의 과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의 직접적인 응답 이전에 응답할 자의 자세를 먼저 준비시키십니다. 이 준비 자세의 실패는 결국 목적의 실패를 가져옵니다. 비록 목적이 뜻대로 성취되어도 준비의 실패는 여호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됨과 동시에 이루어져야만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가더니”라는 말은 “그가 출발했다”라는 뜻의 히브리적 관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출발 준비는 철저한 순종으로 완결되어, 지시한 곳을 향해 출발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상의 순종은 결과에 대한 소망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롬 4:17)”라로 믿고 소망 가운데 신속하고 단호하게 이삭과 함께 모리아 땅의 지시하신 산을 향해 출발한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명령에 순종하는 자의 순종의 진실성을 유지시킵니다. 나귀, 두 사환, 이삭, 나무 등의 어느 하나의 준비에 있어서도 진실성이 결여된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대면하며 영생을 누리는 자, 부활신앙을 지닌 자가 인식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시야가 언제나 그로 하여금 진실한 반응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출발 준비는 그의 부활신앙에 의한 이러한 순종의 진실성을 보여줍니다. 부활신앙의 결과에 대한 소망은 언제나 과정상의 진실한 순종을 이끌어 갑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자들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께서 일곱 번이나 재앙을 선언했던 외식하는 자들처럼 삶의 과정상의 불순종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파괴하며, 공동체를 파괴할 뿐 아니라,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있는 자들은 삶의 모든 과정을 미래적인 소망 가운데 순종으로 채워 나가기에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영역으로 만들어 가게 됩니다. 곧 부활신앙이 있는 자의 영역마다 형통함과 평강이 임하는 은혜를 입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보며 즉각적인 순종, 과정상의 순종을 해야 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즉각적인 순종, 변질되지 않은 순종, 세상 것들의 혼잡을 거부한 온전한 순종을 기다리십니다. 우리들이 부활신앙 가운데 이러한 순종의 모습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설 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을 계 3:4-5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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