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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한 것들

본문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것을 약속했다면 신약은 그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책이라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 입니다. 약속을 믿는 것은 인격을 믿는 것이고 그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믿는 것입니다. 인격자라고 말할 때, 돈 많은 사람을 인격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인격자가 아닙니다. 사회적인 신분이 높은 사람이 인격자가 아닙니다. 자기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인격자입니다. 우리 민족 근대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한 인격자를 꼽으라면 사람들은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거론합니다. 이 분은 자기 목숨이 위태한줄 알면서도 한 어린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러 가다가 일제에 붙잡혀서 그 생애가 끝났습니다. 이 분이 다른 위인들 보다 더 큰 일을 많이 행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그처럼 존경하는 이유는 그 분은 자기가 한 약속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향하여 약속하신 그 약속을 믿는 신앙인들의 기록을 보여줍니다. 그 중 가장 먼저 확실하게 생애를 통해서 보여준 분이 아 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라. 너로 복을 주되 복의 근원을 삼 겠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 너는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자기 땅을 떠나서 가나안 복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렇지만 가나안 복지는 그에게 결코 처음부터 좋은 땅이 아니었습 니다. 기근이 닥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그 곳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집트로 떠납니다. 이집트에 갔을 때 그 곳에서 그는 뜻하지 않는 사건을 만납니다. 기근을 피했다가 더 무서운, 목숨을 걸어야 되는 시련 앞에 섭니다. 사랑하는 아 내가 너무 예뻤기 때문에 그것을 탐낸 이집트인들이 바로에게 그 아내를 증거합니다. 그 때 그는 그 위기 앞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사실상 자기 아내를 팔아넘깁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처럼 비겁하고 나약하다는 사실 앞에 큰 위로를 받습 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만 전심으로 믿는 완성품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섰더라면 우리는 절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나하고 별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지난주간 고난절 집회 기간 중 강사로 오셨던 주광조 장로님은 자기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의 이야기를 진솔 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주기철 목사님을 믿음의 용사,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이 아들은 일본 고등계 형사가 자기 집을 덮쳤을 때 도망나가는 아버지,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비겁한 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대로 증언했습니다. 저는 주기철 목사님 의 생애를 다른 사람이 그렇게 증언했다면 모르되 친히 옆에서 아버지가 잡혀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던 아들이 이야기할 때 '바로 이것이 진실된 간증이다. 그 분에게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믿었던 주님이 능력이다'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 망입니다. 나는 약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누추한지, 내가 나에 대해서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대상이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설 때 놀랍게도 그 믿음이 능력이 되고 삶의 권세가 되는 모습을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비겁한 아브라함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아브라함을 괴롭히는 바로를 무섭게 징벌하십니다. 깜짝 놀란 이 바로가 "아니, 네가 나와 무슨 원수져서 나를 망하게 하려고 이런 짓을 했느냐" 고 아브라함에게 항의합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앞에 서서 부들부들 떨면서 아브라함에게 자기를 떠나라고 말하면서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많은 물건까지 그 품에 안겨주어서 떠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시 가나안 복지로 돌아왔습니다. 그랬던 그가 가나안 복지에서 많은 물질 때문에 새로운 시험을 당합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조카 롯 과 계속 틈바구니가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끌고 올라온 소떼와 양떼의 숫자가 너무 많아 도저히 이 헤브론 들녘의 목초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소떼와 양떼가 서로 부딪칩니다. 그러니까 목자들끼리도 부딪쳐서 서로 싸웁니다. 이 사실을 보았던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아브 라함은 자기 조카 롯을 부릅니다. "롯아 너와 나는 친척 골육이다" 원리를 제시합니다. 우리 인생을 크게 속이는 것 중의 하나는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믿음입니다.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 돈은 또 다른 저주를 낳습니다. 돈 있는 곳에 미움이 있습니다. 돈 있는 곳에 싸움이 있습니다. 돈 있는 곳에 시기가 있습니다. 돈 있는 곳에 살육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재물이 두 사람 마음을 갈라놓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삶의 원리로 "너와 나는 친척 골육이다. 너의 아픔은 내 아픔이고 내 손해는 너의 손해다. 우리가 싸울 관계가 아니다. " 그리고는 그 원리 위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보니 정말로 너의 소떼와 양떼가 나의 것과 합해보면 이 들녘에서는 수용하거나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 헤어지자. " 현실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 들은 신앙을 가지면 상식을 무시하려고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상식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괴상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는 제안을 합니다.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 " 먼저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그 때 롯은 눈 앞에 보이는 소먹이기 좋은 기름진 들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덥썩 결정합니다. 이런 결정을 보면서 참 나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평생 귀한 삶을 살면서 기껏해야 최대의 관심이 소먹이였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그렇게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껏해야 돈 몇 푼, 그것이 인생 의 초미의 관심사라면 비극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기름진 들녘을 택했을 때 쓸쓸한 헤브론 광야에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또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네가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그 모든 땅을 내가 다 너에게 주리라. 그리고 땅 의 티끌을 보아라. 네 후손이 이와 같이 많으리라. " 그런 어느날 떠나보낸 롯이 살고 있는 곳에 북쪽의 거대한 나라의 연합군이 쳐들어와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그 땅의 많은 물건들을 빼앗아갔습니다. 318명 밖에 안되는 적은 군대지만 아브라함은 적은 군대를 끌고가서 네 연 합군을 급습해 크게 승리하고 그 모든 물건과 사람들을 찾아왔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듣고 소돔 왕이 그를 영접하고 말합니다. "백성들이야 원래 내 백성이니까 다시 돌려주고 이 물건은 당신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저들의 물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 물건은 당신이 가지십 시오. " 이 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이 이렇게 외칩니다.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맹세한다. 소돔왕 네가 이 물건을 줘놓고 네가 아브라함을 축복해서 아브라함이 부요케 되었다는 말은 듣기 싫다. 나의 부요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로서 온다. "며 그 물건을 거절했습니 다. 그 밤입니다. 다시 네 연합군이 군대를 몰고 돌아올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마음의 근심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아브라함아, 나는 너의 군대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천사를 보내서 지켜준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친히 너의 방 패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뚫기 전에는 아브라함은 머리털 하나 상할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를 끌고 나가서 밤 하늘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아, 밤 하늘을 보아라. 네가 별을 셀 수 있나 보아라. 네 후손이 이와같이 많으리라. " 그 때 그는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는 자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의 엘리에셀을 내 후손으로 삼겠습니다. "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다. " 이 말을 듣고 그는 자기 아내의 권고를 따라, 당시 풍습을 따라 자기 아내의 여종인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는 행복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아기의 웃음에 그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아이의 찡그림까지 기뻤습니다.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 처음 아이를 가진 이 노부부는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했는지 모릅니다.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도 남자로서 생식의 기능이 모두 끝나버리고 그 아내 사라도 이제 여성으로서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시간이 된 어느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여호와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준 이스마엘 하나로 즐거워하 고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줄 아느냐 아니라 나는 전능한 여호와 하나님이라. 너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내가 약속한 그 약속을 붙잡고 온전히 살아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열국의 아비라. 모든 족속이 네게서 나오겠다. 그리고 너는 이름을 바꾸어라. 이제부터 아브라함이라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들 하나밖에 없는 그에게 열국의 아비라는 이름,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이름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약속을 하겠다. 네 후손은 정녕 이 땅에서 복을 누릴 것이다. 번성할 것이 다. 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내 언약을 네가 꼭 붙잡아라. 그것을 위해서 할례를 행하라"고 요구하십니다.

 할례! 기독교계의 유명한 의사 중의 한 분인 맥밀란 박사는 그의 저서를 (이런 질병이 없다)라고 출애굽기의 어느 한 구절을 발췌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 하는 자에게는 질병이 없겠다'는 내용의 제목을 정했습니다. 거기 한 chapter에 이런 재미난 소제목이 있습니다. "현대 의학보다 사천년 앞선 성경"입니다. 그는 여기서 할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미국의 의사들이 '어린 아이에게 언제 포경 수술을 하면 가장 좋겠는가'를 연구했는데 난지 8일만이라는 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피가 너무 깨끗하고 맑기 때문에 지혈이 잘 안됩니다. 그런데 지혈시키는데는 비타민 K라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나자마자는 비타민 K가 없다가 난지 5일이 지난 다음에 사람 몸에 비타 민 K가 형성되고, 더 재밌는 것은 난지 8일이 되면 우리 몸에서 비타민 K가 110%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비타민 K라는 물질은 불과 몇 십년 전에 발견했습니다. 과거에는 비타민 K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경은 사천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난지 8일만 에 비타민 K가 있는줄 알아서 8일만에 할례를 하라고 했을까' 놀라와하면서 그 분은 이런 재미난 견해를 말합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실제로 없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시면서 그 주님의 전능하신 말씀 따라 비타민 K가 난지 8일만에 110%로 혈중 에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생후 8일이 비타민 K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한 날이라고 Dr. 맥밀란은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포경수술이라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 약속이 네 살 안에 있겠다. 네가 부인할 수 없는 흔적을, 내 약속을 지킨 날의 흔적을 가 지고 살아라. 내 백성들은 누구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다음에 모두들 할례를 받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후손을 많이 주겠다고 말하니까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 이스마엘이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잘 살게 해주세요. 나는 이 미 아이 낳을 수 없는 몸이고 내 아내 사라도 이미 끝난 몸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나 잘 살기 원합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몸에서 뿐만 아니라 이삭의 몸을 통해서 낳겠다. "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손을 많이 주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더 분명해집니다. 그 때 이미 사라의 몸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조건으로 바뀐 다음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을 보이시기 위해서 그 많은 세월을 뒤로 돌리신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았던 아브라함은 온 자기 자손들에게 할례 를 행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꼬박꼬박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서 삽니다.

 게오르그라는 소설가가 쓴 25시에 보면 독일 사람들이 유대인을 죽이기 위해서 "너, 이스라엘 사람이냐"고 물으면 모두 아니라고 거짓말하니까 남자들을 모두 옷을 벗기고 조사하 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도 거기서 못 도망갑니다. 움직일 수 없는 확실한 증거,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서 삽니다'하는 할례가 있습니다. 이 할례는 장차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나안 땅에 편만케 해주겠 다는 약속의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실 그 보다 더 큰 약속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범죄한 다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생을 향해서 메시야 보내실 것을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성취할 한 족속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후손들을 계속 축복하셨습니다. 그 다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보내겠다고 반복합니다. 이것이 구약입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다. 그가 죽을 때는 양 팔에 상처를 입을 것이다. 계속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 님은 어느날 그 약속을 수행하십니다.

 메시야 예수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그냥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대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으셨습니다.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죽었습니다. 이 말은 '약속대로'라는 말로 바꾸어도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며 "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죄없는 예수가 그렇게 고통스런 죽음을 죽었던 것이 효험이 있지 않겠느냐" 그 런데 제가 이번 저 희 교회 고난주간 집회 때 오신 순교자들의 자녀들을 통해 순교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듣고 생각해보니까 주기철 목사님만해도 예수님 보다 실제로 더 고통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하루 고통 당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주기철 목사님은 7년 8개월 동안 매 일 끌려나가서 매를 맞고 손톱을 뽑히고 발로 채임을 당하고 기절했다가 일어나고 기절했다가 일어나는 것이 몇 백번이었는지 모릅니다. 고통으로 말하면 순교자들의 고통이 더 클 수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만 해도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죽음하고 우리 주님의 죽음이 어떻게 다른가 그 분들은 그냥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성경대로 이 땅에 오셔서 성경대로 죽었습니다. 성경대로 죽은 죽음은 우리 죄를 위한 죽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성경대로 죽을 뿐 아니라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런고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죄를 위한 그 죽음,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대로 믿으면 성경대로 우리 죄는 그에게 전가 되어서 내 죄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옮겨집니다.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으면 성경대로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너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녀라. "(요1:12) 성경대로 믿은 나에게 성경은 말합니다. "너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심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 성경대로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었고 입니다. 얻을 것이고가 아닙니다. 사망에 이르지 않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성경대로 천국은 내 것입니다. 성경대로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을 온전하게 고백하는 한 상징이 있다면 그것은 세례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내가 믿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십자가에 내가 박혀있습니다. 사실은 침례가 세례의 완전한 모습입니다. 내가 땅 속에 묻힌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물 속에 들어갑니 다. 그리고 일으켜 세웁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내가 다시 일어납니다.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이 행동이 주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는, 약속하신 대로 내게 효험된 것을 믿는다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살아날 때 내가 다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살았습니다.

 구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완성한

첫번째 상징인 세례를 바라보며 할례를 받았는데 이 할례가 몸 속에 흔적을 주었다면 세례는 영혼 깊숙한 곳에 성령의 인침을 받는 것입니다. 완성했습니다.

 두번째로 바꿔진 것 있습니다. 유월절이 변해서 성만찬으로 바뀌었습니다. 주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떡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이것을 행하여 나의 죽음을 기억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 죄를 위하여 찢긴 나의 몸이고, 내가 흘린 보배로운 피다. "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 은 유월절 절기에 떡을 먹으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 결정적인 밤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기로 작정하신 그 밤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약속의 아들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십니다. "너희들은 양을 잡아서 문인방과 설주에 바르라.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지나갈 것이다. " 저는 어렸을 때 교회 다니면서 유월절이라고 해서 6월의 몇일이 유월절인가하고 고민했습니다. 5월 6월이 아니라 "Pass over" 지나갔다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께 서 내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내게 새 생명 주신 완성의 축복을 누리면서 성만찬을 맞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바뀌어진 것 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이 변해서 주님의 날이 되었습니다.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우리는 토요일을 안지킵니다. 왜 안지키는 줄 아십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의 마지막 날 쉬셨습니다. 안식을 누렸습니다. 창세기에서 우리 족장들이 안식일을 지킨 흔적이나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민족을 이루고 한 질서가 필요할 때 족장들은 어느 때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살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쉬신 그 날을 기념해서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제와 제사와 예배의 날로 정하시고 안식일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복주시기로 약속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쉼을 따라서 우리의 세상 살이의 모든 것이 쉬어지고 여호와 하나님께 집중하는 날입니다. 그 정신은 그대로 받았지만 '주께서 나의 모든 죄를 도말하시고 승 리하셔서 부활하신 그 날, 부활의 주님을 믿습니다'하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부활절에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날에 예배하면서 주께서 부활하셨다고 선포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권능을 참으로 아름답게 누릴 수 있는 비결이 없을까요 에베소서를 한번 보겠습니다. 1장 18절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간절히 기도합니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1:18) 너희 마음 눈을 밝아져서 하 나님께서 주시는 그 소망,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가를 알게 되기 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9)고 합니다. 그 능력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능력이 예수 믿는 성도들의 삶에 오늘도 역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이 부활의 능력을 누리고 살고 있습니까 느끼며 살고 있습니까 대부분 잘 모릅니다. 제가 이번 고난절 집 회 순교자의 길을 보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이 부활의 권능을 삶 속에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는 사람에게는 부활이 없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사실이지 않습니까 안죽었는데 무슨 부활 능력이 있습니까 안죽은 생애, 무슨 부활의 능력이 필요합니까 순교자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가셨던 죽음의 길을 믿음으로 걸었습니다. 그들은 믿었습니다. '내가 죽어도 부활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 분은 나를 일으키신다. 그 권세가 나와 함께 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거대한 죽음의 세력아 날 한번 죽여봐라. 부활의 주님이 나의 주인이시다. 그 분이 나를 피 값으로 사셨다. 그 분 앞에 나는 안전하다. 네가 헤칠 수 있는 것은 죄 밖에 없다. ' 우리 순교자들은 부활의 주님의 권능을 믿었기 때문에 그 죽음의 길을 믿음 으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부활의 능력으로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를 비껴갑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또 말합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 가에 못박았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박은 경험을 가진 사람만이 부활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제가 D. L. 무디와 믿음의 사람들의 글 가운데 나타나는 한가지 공통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어떻게 그렇게 큰 능력이 임할 수 있습니까"하고 죠지 뮬러에게 물을 때 그는 "그 것은 내가 나에 대해서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죽은 날이 언제입니까 언제 죽으셨습니까 안죽었다면 부활의 능력이 내 삶 속에 나타날 근거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잘 죽읍시다. 땅의 지체를 죽입시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읍시다. 그 때 우리들은 내 삶 속에 역사하시는 부활의 주님, 그 권능을 누릴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남서울은혜교회가 필요한 것이 죽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 있습니다. 죽는 것입니다. 내가 살았기 때문에 죄만 짓고, 내가 살았기 때문에 짜증만 나고, 내 가 살았기 때문에 질투만합니다. 내가 살아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이맛살을 찌뿌리게 한 것 외에는 없지 않습니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부활의 주님이 내 인생 속에서 거대한 능력으로, 부활의 권세로 승리하시는 은혜가 여러분의 생애에 풍성하게 펼쳐 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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