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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영혼의 불멸과 몸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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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매우 중요한 내용이지만 모두들 쉽게 질문도 하지 않고 또 대답하기도 힘든 질문입니다. 부활절을 지나고 처음 만난 주일인 오늘 부활 이후에 관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관념은 어떤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육체는 없어지고 혼만이 살아서 영원히 산다는 유교의 전통적인 사상에 익숙해 있는 분들은 “혼백”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혼이란 사람의 영적, 정신적 요소이고, 백은 인체의 뼈를 줌심한 체백인데 이것은 지기(땅의 기)에서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혼은 천상으로 돌아가서 신령이 되고 체백은 명당을 찾아서 무덤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 때문에 명당에다가 조상들이 무덤을 만들어야 했고 시신을 화장을 해서는 아니 된다고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이 된 조상의 묘에 참배해야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백” 즉 부모의 뼈에서 나오는 기가 그 자식들에게 이어져야 하는데 화장하면 그것들이 다 없어진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혼백의 기간이 있는데 4대 즉 80년으로 봅니다. 촛불이 녹아 없어지듯이 혼백이 다 없어져서 더 이상 제사를 지낼 필요가 소멸되는 시기가 4대에 온다고 믿는 것입니다.
증조 할아버지 할머니 까지만 제사하면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믿던 이런 유교사상은 기독교의 사상과는 배치됩니다. 기독교는 땅에서 나와서 사람의 뼈 속에 옮겨지는 체백이란 것을 믿지 않습니다. 몸은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금의 몸은 썩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화장도 마다하지 않고 합니다. 화장하여 남은 재가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나 시신이 땅에 묻혀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요즈음 매장할 땅이 없는 작은 땅에 사는 우리 나라에서는 화장이 후손들을 위해서 매우 바람직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 영생의 삶에 관한 서양의 사상을 보면 희랍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는데 한 마디로 영혼의 불멸사상이 그것입니다. 기독교 사상가들이 이 희랍의 사상에 물들어서 인간이 죽은 후에는 영원히 산다는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하면서 “육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만은 영생한다” 는 식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부활 사상을 영혼의 불멸사상 정도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몸은 없어지고 혼이나 영혼은 살아 남아서 공중을 배회하면서 지낸다는 생각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고 그리고 대다수의 종교가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부활사상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성경 사상은 몸의 부활을 주장합니다. 유교의 혼백사상도 아니고 희랍의 영혼의 불멸사상도 아닙니다. 사도들이 가르쳤던 부활의 복음은 영혼의 불멸이 아니었습니다. 몸의 부활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직전에서 사도 바울의 설명은 이러합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옵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린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 그 자체를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밀이든지 그 밖에 어떤 곡식이든지, 다만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뜻하신 대로 그 씨앗에 몸을 주시고 그 하나 하나의 씨앗에 각기 고유한 몸을 주십니다. ”(고전15: 35절 이하) 이어서 바울은 부활 후의 각 인격의 모습이 각기 다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39절-44절).
사람의 몸과 동물의 몸이 다르듯이 부활 후에도 각각 다른 모습의 몸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고 또 같은 하늘에 속한 형체들일지라도 각기 다른 모습을 띄고 있다는 것입니다. 해의 영광과 달의 영광이 다르듯이, 심지어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듯이 죽은 자의 부활 시에도 모두가 각기 다른 모습의 몸의 부활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만약 영혼의 부활이라고 하면 모두가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 자체가 어폐가 있는 것이 영혼은 죽지 않고 불멸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것도 이해가 아니 되지만 영혼의 부활은 인격의 다름을 표시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의 본질이 영혼이라고 설명된다면 영혼은 모두 같을 것이고 따라서 인격간의 구별은 불가능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영혼이 불사한다면 모든 영혼이 다 살아 있을 것이니 영혼불멸의 사상만으로 서는 다시 사는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에서의 영광이나 고통도 영혼만의 것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초대교회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몸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부활후의 몸과 지금의 몸과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 하는 것인데 오늘 본문 직전 44절에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하심에서 지금의 몸이 아닌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그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절 이하에서 보면 예수님의 몸이 변화하였습니다. 옷이 광채가 나서 이 세상에서는 그토록 희게 빨래할 수 없을 정도로 희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입은 옷이 달라졌고 그의 몸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의 형체가 나타났습니다. 이미 이 땅을 떠나 간 두 분이 지상에서의 인격으로 그대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모세로,
엘리야는 엘리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구별이 가능한 몸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그 몸 그대로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변화하였듯이 모세와 엘리야의 몸도 신령한 몸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 변화된 두 분을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들이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을 안 믿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물었습니다. “어떤 집에 아들 7형제가 있는데 장남이 장가를 갔으나 일찍 죽는 바람에 대를 이을 씨를 못 남겨서 그 다음 차남이 그 동일한 여자와 결혼하였고 그도 또한 일찍 죽어서 그 다음 아들이 그녀와 결혼하였지만 또 씨가 없이 죽었고 .. 이렇게 7 형제가 한 여인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부활 시에는 이 여인의 남편이 누가 되겠습니까” 실제로 7 아들 모두가 한 여인에게 장가를 드는 이런 사건이야 있었겠습니까 사두개파들이 예수를 골탕을 먹이려고 엉터리 질문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에 “부활후의 몸은 지상에서의 몸과 다르다. 거기서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는 새로운 몸으로 태어난다. ” 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대답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후의 신령한 몸을 예수님은 인정하였습니다. 몸은 없어지고 영혼만이 영생한다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몸이 중요합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에서 보시는 대로 여호와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의 한 구역을 주시면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육신의 삶, 몸의 삶의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 영원한 기업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불멸이 아니고 몸의 부활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앞서 소천 하신 의인들이 지금 영혼으로만 떠돌아다니는 존재가 아닙니다. 찬란한 몸을 갖고 영광스러운 옷을 입은 예수님의 변화산의 모습과 비슷한 모양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죽은 후에 영혼만이 떠돌아다닌다면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만날 수 없을 것이며 예수님도 바울도 베드로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죽은 후에 영혼만이 영생을 한다면 먼저 떠난 우리들의 가족들과의 만남은 불가능합니다. 기독교의 부활이 몸의 부활을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몸의 부활이 없다면 인격체와의 만남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몸의 부활은 언제 일어나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것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로 하늘로부터 쫓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살전 4:16-17). 오늘의 신약의 본문 51, 52절에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 선언합니다.
인간의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과 연결되어 일어나는 것을 위의 말씀들이 확인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바로 지금의 사건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누이 마르다가 너무나 슬퍼할 때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부활한다. 걱정 말아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가 “마지막 날, 종말의 부활 시에는 나의 오라버니도 부활할 줄로 압니다” 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바로 수정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날에만 부활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부활이신 예수님을 믿음에서 바로 오늘에서 다시 사는 삶을 얻는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믿는 자는 그가 죽은 후에 바로 신령한 몸으로 변화한다는 믿음을 예수님의 말씀은 보여주었습니다. 바울 사도 자신도 자기의 죽음과 동시에 부활한다고 믿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5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종말이 다가 오는 것을 느끼면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은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나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오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덧입는다는 표현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묵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과 동시에 부활의 몸이 되는 것을 매우 실감 있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재림시 까지 영혼만이 떠돌아다닌다는 말이 되는데 바울이나 기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습니다. 죽음과 더불어 헌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다고 믿었습니다. 지금의 썩은 몸이 다시는 썩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바뀌어진다고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몸의 부활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 몸의 부활 사상은 이 땅에서의 삶의 내용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준비된 죽음을 살라는 뜻입니다. 천주교의 연옥설은 죽은 후에도 죽은 자에게 참회의 기회를 주는 뜻에서는 이해되지만 살아있는 동안의 삶의 중요성을 삭감시키는 결과를 만들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육으로 죽는 순간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는 확신을 바울 처럼 가지고 있다면 살아있는 동안 참되게 살고 의롭게 살아야 하겠다고 다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몸이 죽은 후에 영혼만이 살아서 떠돌아다니면서 참회하여 천국으로 영접이 된다면 이 땅에서 못된 짓 다 하면서 인간의 쾌락만을 추구하다가 죽은 후에 영으로 회개하면 되겠지요.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고로 몸의 부활사상이 중요한 것이고 죽은 이후 곧 바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사상이 중요한 것입니다.
몸의 부활을 믿기에 이 땅에서의 몸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너희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몸은 구체적인 실천을 의미합니다. 마음이나 생각에서가 아니고 날마다의 삶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뜻을 행동으로 옮기는 삶을 몸의 산 제사로 묘사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몸의 활동에 따라서 저 나라에서의 신령한 몸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체로 심느냐에 따라서 그 열매가 달라집니다. 밀을 심으면 밀이 나오고 보리를 심으면 보리가 나옵니다. 참외 씨를 심으면 참외가 나오고 오이씨를 심으면 오이가 나옵니다. 영혼의 불멸사상과 몸의 부활 사상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을 여기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심은 대로되는 몸의 부활을 믿는 자는 가장 값진 몸을 이 땅에서 장만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51절에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라고 확언했습니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실현된 종말론입니다. 이미 이 땅에서 몸으로 있는 동안 종말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즉 몸의 부활을 삽니다. 사도바울이 그래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절). 죽음이 바울에게서 이미 극복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들은 죽음을 극복한 삶을 살고 있는 분들입니다. 고로 견고하여 흔들리질 말고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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