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의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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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신문에 보도된 어떤 사건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십년 쯤 전에 일어났던 살인사건에 관한 일인데요,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인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벌써 이십년 가까이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을 유죄판결받게 한 증인들이 다 그 때 자기가 한 증언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힌 것입니다. 당시 경찰이 용의자를 검거해놓고, 그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아무나 데려다가 증인으로 만들고, 경찰이 요구하는대로 증언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증인들은 자기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에 대해서는 증언할 수 없다고 했지만, 경찰은 증인들을 고문하고 협박해서 거짓 증거하도록 만들고 끝까지 거절하면 이번에는 증인들에게 어떤 죄든 뒤집어 씌워서 구속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살인용의자는 다른 아무 증거 없이 그렇게 경찰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증인들의 거짓 증언만으로 유죄판결을 받아서 오늘까지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실을 확인하는데 있어서 증인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에서 이기려고 거짓 증인을 동원하기도 하고, 상대방쪽에 유리한 증인이 등장하면 어떻게든지 그 증언의 신빙성을 훼손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어떤 경우에는 사건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증인의 사생활까지 들추어내서 그 사람이 마약을 했고 바람둥이고 대학을 일곱 번 떨어졌고 등등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들게 해서 그 사람의 증언 역시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증인의 증언이 사실을 확인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거짓 증거는 언젠가는 밝혀지게 됩니다. 거짓 증인들은 결국 자기의 거짓말이 자기의 발목을 묶어서, 스스로 자기가 거짓말한 것을 드러내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사건에서처럼,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도 거짓은 거짓으로 밝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고, 여러 사람을 잠깐 동안 속일 수는 있어도, 여러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지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고, 또 그렇게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자청해서 부활의 증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부정해보려고 애를 써왔고, 또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고 애를 써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고, 부활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부활의 증인들이 계속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부활의 확실성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늘까지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이 전해지고 선포되게 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증언으로 인해 예수님의 부활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했고, 그 증언이 너무나 확실하고 분명했기 때문에 제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서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 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부활의 증인보다도 오히려 부활을 부정하는 거짓 증인들의 이야기가 먼저 나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거짓 증인들 가운데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예수를 잡아 죽게 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알고는, 예수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덤을 지키고 있던 로마 군인들을 돈으로 매수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꾸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섭고 실망해서 모두 도망가 숨어있었습니다. 문을 꽁꽁 잠그고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나선 것도 힘없는 여인들 몇 명이었습니다. 여인들의 힘으로는 무덤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을 제압할 수도 없었고, 무덤 문을 막아놓은 돌을 치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 제자들이 훔쳐갔다는 소문은, 제자들이 그런게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일어나 무덤을 걸어서 나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사진으로 찍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은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제자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그분의 생애와 그분이 하셨던 말씀들을 되새기면서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보니까, 거기서 부활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믿음의 눈으로 보았을 때 보인 신앙의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눈으로 보면 보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 보면 보이지 않는 일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이런 얘기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있던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도 믿지 못했고, 도마 같은 제자는 다른 제자들이 직접 보았다고 아무리 얘기해줘도 실제로 자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해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도마만의 믿음이었겠습니까 다른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모두 마찬가지 상태였습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대해 각별한 애정과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는데도 그랬다니 말입니다.
도마에 관해서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형제 나사로가 죽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다니에 살고 있었는데, 베다니는 유대지방에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마침 이 때 예수님은 얼마 전에 유대지방에서 유대사람들이 돌로 쳐죽이려고 하는 것을 피해 나온 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대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죽으려고 가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선생님, 지금 막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는데, 거기로 또 간단 말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야겠다"고 대답하십니다. 그 때 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 다른 제자들은 두려워서 피하려고 하는 상황이었지만, 도마는 주와 함께 죽겠다는 결의를 보입니다. 베드로가 마지막 만찬에서 죽더라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것과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베드로는 실제적인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호언장담한 것이었고, 도마는 실제로 죽을 상황 속으로 함께 가자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랬던 도마조차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낙심하고 마음이 떠나 있었는데, 그런 제자들의 눈에 부활하신 주님이 보이게 할 만한 믿음이 도대체 어디서 생겨났단 말입니까
이것은 거꾸로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 줍니다. 즉 믿음이 부활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부활이 믿음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비로소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래서 부활을 믿게 된 이 믿음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하나같이 비겁하고 별 볼일 없던 제자들이 이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투사가 되어 모든 사람에게 부활을 증거 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은 그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되어 부활의 증인이 된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고 다니자, 예수님을 잡아 죽게 했던 대제사장과 그 일당들은 마음에 시기가 가득 일어났다고 합니다. 미워 죽겠지요. 눈에 가시 같던 예수를 기껏 잡아 죽였더니 이제는 그 제자들까지 나서서 예수 행세를 하고 다니니 말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일파는 사도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가 감옥 문을 열고 제자들을 풀어줍니다. 제자들은 풀려나자마자 또 다시 성전에 가서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했습니다. 대제사장 일파는 그것도 모르고 감옥에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관원들이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오려고 보니까, 감옥이 비어있는 겁니다. 감옥 문은 잠겨 있고 간수는 문에 서서 감옥을 지키고 있는데, 감옥 안은 텅 비어있는 겁니다. 사도들은 감옥에서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옵니다. 관원들이 다시 사도들을 잡아왔지만, 이번에는 사도들을 함부로 대하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사도들의 말을 경청하고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도들을 잡아가는 관원들을 돌로 쳐죽일 기세였습니다. 백성들은 사도들의 말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사도들을 공회 앞에 세우고 재판을 합니다. 사도들에게 말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했는데, 왜 또 다시 예수를 전하느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람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
이전의 베드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재판 받으시던 밤, 난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비겁하게 거짓말을 했던 베드로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부활을 증언하지 못하게 입을 막고 거짓증언을 하게 만들려는 위협과 협박과 고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직접 보고 겪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는 당당한 모습만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그리고 사도들을 이렇게 변화시킨 힘은 바로 예수의 부활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었습니다. 그 만남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했고, 그 믿음이 사람을 이렇게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비겁하게 도망 다니고 숨어 다니던 제자들은 이제 죽음도 그 입을 막지 못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자기들이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했고, 그 경험이 자기도 부활하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다. 그래, 예수님이 늘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 그렇다면, 역시 예수님이 늘 말씀하신 대로 우리도 다시 살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죽음 따위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다시 살 터인데,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터인데, 도대체 죽음 따위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두려워 입을 다물 것인가 그들이 우리를 죽여도 우리를 부활하게 하실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런 믿음이 죽음의 위협으로도 사도들의 입을 막을 수 없게 했던 것입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도들은, 그 경험을 자기들의 마음 속에만 담아둘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일찍이 예레미야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타락할 대로 타락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자, 이스라엘의 왕과 종교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은 예레미야를 미워하고 그 입을 막으려고 하고 백성들은 심판과 멸망의 예언을 듣기 싫어하며 예레미야를 거부하고 따돌렸습니다.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도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입을 막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자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탄원합니다.
주님, 주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께 속았습니다. 주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마음 속에 불이 붙는 것 같아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는 상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담아두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마음, 바로 그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에 나오는 이발사의 마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 흉볼 일 생기면 입이 근질거려서 견딜 수가 없는 우리의 마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리에게 들려 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대한 증언이야말로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증거가 됩니다. 재판에서 판결을 내리는데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증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여러 증거 가운데서도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증언인 것입니다. 남에게 들은 얘기이거나 자기가 추측해서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직접 보고 만져보고 겪어 본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판사가 사건 현장에 가보지 않고도 여러 가지 증거들과 함께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사건 전모를 파악하고 판결을 내리듯이, 우리도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전모를 파악하고 그 사건이 사실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직접 보지 못했고, 사건 현장에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고 믿는 것은 그 모든 일을 직접 경험한 사도들의 증언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우리 마음 속에 불을 질러 놓고야 맙니다. 이 사실을 그냥 나 혼자 알고 있게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입이 근질거리고 속이 답답해서 견뎌 내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듯이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고 외쳐댈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감기와 사랑은 감출 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새 우리 교우들 가운데도 감기 걸리신 분들이 많으신 것 같은데, 감기에 걸리면 기침 나고 콧물 나고 재채기 나오고 목이 잠기고 해서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다는 겁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여서 사랑에 빠지면 얼굴에 열이 나서 화끈거리고 눈에 초점이 풀리고 콧구멍이 벌름거려서 감출 수가 없게 되지요.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되면, 그 사실이 내 속에 살아서 끓는 냄비뚜껑처럼 들썩거려 감추려고 해봐도 감출 수가 없고 가만히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온갖 죽음의 세력에 대해서 부활을 선포하고, 세상에 죽음을 가져오는 것들과 맞서 싸우게 되고, 죽음에 눌려 살면서 부활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고, 그리고 그 분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부활한다는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인 사도들로부터 받은 증거로 인해서 우리 자신도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리고 그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를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증인 노릇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증인의 삶이 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의 증언을 신빙성 있고 믿을 만한 것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부활의 증인노릇하기에 부끄러운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치 한 평생 살다 가면 모든 게 끝나는 것처럼, 부활은 우리 입에만 있고, 교회 안에만 있는 것처럼, 세상의 물질과 영광에 집착해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삶이어서는, 부활의 증인은커녕 부활이 없다는 좋은 증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가 증언하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우리가 주님이 부활하지 않았다고 거짓 증언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도 부활의 증인답게 정직하고 올바르고 신실하며 또 용기 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너그럽고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워하며 비겁한 모습이 아니라, 담대하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출세, 물질과 명예에 집착해서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거나, 모든 사람은 내 경쟁자이고 적이라는 각오로 살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과 어울리며 모두 함께 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여기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부활의 새 생명을 이 세상에 끌고 들어와서 이 땅에서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우리 가운데 아직 부활을 믿지 못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부활은 누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활은 직접 경험한 증인들이 증언한 가장 확실한 사실입니다. 부활은 비겁하고 나약했던 사람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증인으로 바꾸어놓은 현실인 것입니다. 부활만큼 확실한 증거를 가진 역사적 사실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부활의 증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이제부터는 부활의 증인으로, 증인 노릇 제대로 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믿지도 못하고 비겁하기만 했던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증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믿고, 부활의 증인이 되어서, 이 땅에서도 부활을 맛보는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실을 확인하는데 있어서 증인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에서 이기려고 거짓 증인을 동원하기도 하고, 상대방쪽에 유리한 증인이 등장하면 어떻게든지 그 증언의 신빙성을 훼손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어떤 경우에는 사건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증인의 사생활까지 들추어내서 그 사람이 마약을 했고 바람둥이고 대학을 일곱 번 떨어졌고 등등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들게 해서 그 사람의 증언 역시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증인의 증언이 사실을 확인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거짓 증거는 언젠가는 밝혀지게 됩니다. 거짓 증인들은 결국 자기의 거짓말이 자기의 발목을 묶어서, 스스로 자기가 거짓말한 것을 드러내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사건에서처럼,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도 거짓은 거짓으로 밝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고, 여러 사람을 잠깐 동안 속일 수는 있어도, 여러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지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고, 또 그렇게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자청해서 부활의 증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부정해보려고 애를 써왔고, 또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고 애를 써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고, 부활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부활의 증인들이 계속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부활의 확실성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늘까지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이 전해지고 선포되게 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증언으로 인해 예수님의 부활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했고, 그 증언이 너무나 확실하고 분명했기 때문에 제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서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 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부활의 증인보다도 오히려 부활을 부정하는 거짓 증인들의 이야기가 먼저 나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거짓 증인들 가운데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예수를 잡아 죽게 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알고는, 예수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덤을 지키고 있던 로마 군인들을 돈으로 매수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꾸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섭고 실망해서 모두 도망가 숨어있었습니다. 문을 꽁꽁 잠그고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나선 것도 힘없는 여인들 몇 명이었습니다. 여인들의 힘으로는 무덤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을 제압할 수도 없었고, 무덤 문을 막아놓은 돌을 치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 제자들이 훔쳐갔다는 소문은, 제자들이 그런게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일어나 무덤을 걸어서 나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사진으로 찍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은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제자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그분의 생애와 그분이 하셨던 말씀들을 되새기면서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보니까, 거기서 부활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믿음의 눈으로 보았을 때 보인 신앙의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눈으로 보면 보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 보면 보이지 않는 일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이런 얘기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있던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도 믿지 못했고, 도마 같은 제자는 다른 제자들이 직접 보았다고 아무리 얘기해줘도 실제로 자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해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도마만의 믿음이었겠습니까 다른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모두 마찬가지 상태였습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대해 각별한 애정과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는데도 그랬다니 말입니다.
도마에 관해서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형제 나사로가 죽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다니에 살고 있었는데, 베다니는 유대지방에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마침 이 때 예수님은 얼마 전에 유대지방에서 유대사람들이 돌로 쳐죽이려고 하는 것을 피해 나온 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대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죽으려고 가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선생님, 지금 막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는데, 거기로 또 간단 말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야겠다"고 대답하십니다. 그 때 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 다른 제자들은 두려워서 피하려고 하는 상황이었지만, 도마는 주와 함께 죽겠다는 결의를 보입니다. 베드로가 마지막 만찬에서 죽더라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것과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베드로는 실제적인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호언장담한 것이었고, 도마는 실제로 죽을 상황 속으로 함께 가자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랬던 도마조차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낙심하고 마음이 떠나 있었는데, 그런 제자들의 눈에 부활하신 주님이 보이게 할 만한 믿음이 도대체 어디서 생겨났단 말입니까
이것은 거꾸로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 줍니다. 즉 믿음이 부활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부활이 믿음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비로소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래서 부활을 믿게 된 이 믿음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하나같이 비겁하고 별 볼일 없던 제자들이 이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투사가 되어 모든 사람에게 부활을 증거 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은 그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되어 부활의 증인이 된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고 다니자, 예수님을 잡아 죽게 했던 대제사장과 그 일당들은 마음에 시기가 가득 일어났다고 합니다. 미워 죽겠지요. 눈에 가시 같던 예수를 기껏 잡아 죽였더니 이제는 그 제자들까지 나서서 예수 행세를 하고 다니니 말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일파는 사도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가 감옥 문을 열고 제자들을 풀어줍니다. 제자들은 풀려나자마자 또 다시 성전에 가서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했습니다. 대제사장 일파는 그것도 모르고 감옥에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관원들이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오려고 보니까, 감옥이 비어있는 겁니다. 감옥 문은 잠겨 있고 간수는 문에 서서 감옥을 지키고 있는데, 감옥 안은 텅 비어있는 겁니다. 사도들은 감옥에서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옵니다. 관원들이 다시 사도들을 잡아왔지만, 이번에는 사도들을 함부로 대하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사도들의 말을 경청하고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도들을 잡아가는 관원들을 돌로 쳐죽일 기세였습니다. 백성들은 사도들의 말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사도들을 공회 앞에 세우고 재판을 합니다. 사도들에게 말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했는데, 왜 또 다시 예수를 전하느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람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
이전의 베드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재판 받으시던 밤, 난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비겁하게 거짓말을 했던 베드로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부활을 증언하지 못하게 입을 막고 거짓증언을 하게 만들려는 위협과 협박과 고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직접 보고 겪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는 당당한 모습만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그리고 사도들을 이렇게 변화시킨 힘은 바로 예수의 부활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었습니다. 그 만남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했고, 그 믿음이 사람을 이렇게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비겁하게 도망 다니고 숨어 다니던 제자들은 이제 죽음도 그 입을 막지 못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자기들이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했고, 그 경험이 자기도 부활하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다. 그래, 예수님이 늘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 그렇다면, 역시 예수님이 늘 말씀하신 대로 우리도 다시 살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죽음 따위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다시 살 터인데,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터인데, 도대체 죽음 따위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두려워 입을 다물 것인가 그들이 우리를 죽여도 우리를 부활하게 하실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런 믿음이 죽음의 위협으로도 사도들의 입을 막을 수 없게 했던 것입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도들은, 그 경험을 자기들의 마음 속에만 담아둘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일찍이 예레미야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타락할 대로 타락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자, 이스라엘의 왕과 종교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은 예레미야를 미워하고 그 입을 막으려고 하고 백성들은 심판과 멸망의 예언을 듣기 싫어하며 예레미야를 거부하고 따돌렸습니다.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도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입을 막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자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탄원합니다.
주님, 주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께 속았습니다. 주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마음 속에 불이 붙는 것 같아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는 상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담아두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마음, 바로 그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에 나오는 이발사의 마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 흉볼 일 생기면 입이 근질거려서 견딜 수가 없는 우리의 마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리에게 들려 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대한 증언이야말로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증거가 됩니다. 재판에서 판결을 내리는데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증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여러 증거 가운데서도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증언인 것입니다. 남에게 들은 얘기이거나 자기가 추측해서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직접 보고 만져보고 겪어 본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판사가 사건 현장에 가보지 않고도 여러 가지 증거들과 함께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사건 전모를 파악하고 판결을 내리듯이, 우리도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전모를 파악하고 그 사건이 사실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직접 보지 못했고, 사건 현장에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고 믿는 것은 그 모든 일을 직접 경험한 사도들의 증언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우리 마음 속에 불을 질러 놓고야 맙니다. 이 사실을 그냥 나 혼자 알고 있게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입이 근질거리고 속이 답답해서 견뎌 내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듯이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고 외쳐댈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감기와 사랑은 감출 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새 우리 교우들 가운데도 감기 걸리신 분들이 많으신 것 같은데, 감기에 걸리면 기침 나고 콧물 나고 재채기 나오고 목이 잠기고 해서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다는 겁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여서 사랑에 빠지면 얼굴에 열이 나서 화끈거리고 눈에 초점이 풀리고 콧구멍이 벌름거려서 감출 수가 없게 되지요.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되면, 그 사실이 내 속에 살아서 끓는 냄비뚜껑처럼 들썩거려 감추려고 해봐도 감출 수가 없고 가만히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온갖 죽음의 세력에 대해서 부활을 선포하고, 세상에 죽음을 가져오는 것들과 맞서 싸우게 되고, 죽음에 눌려 살면서 부활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고, 그리고 그 분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부활한다는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인 사도들로부터 받은 증거로 인해서 우리 자신도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리고 그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를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증인 노릇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증인의 삶이 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의 증언을 신빙성 있고 믿을 만한 것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부활의 증인노릇하기에 부끄러운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치 한 평생 살다 가면 모든 게 끝나는 것처럼, 부활은 우리 입에만 있고, 교회 안에만 있는 것처럼, 세상의 물질과 영광에 집착해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삶이어서는, 부활의 증인은커녕 부활이 없다는 좋은 증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가 증언하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우리가 주님이 부활하지 않았다고 거짓 증언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도 부활의 증인답게 정직하고 올바르고 신실하며 또 용기 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너그럽고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워하며 비겁한 모습이 아니라, 담대하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출세, 물질과 명예에 집착해서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거나, 모든 사람은 내 경쟁자이고 적이라는 각오로 살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과 어울리며 모두 함께 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여기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부활의 새 생명을 이 세상에 끌고 들어와서 이 땅에서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우리 가운데 아직 부활을 믿지 못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부활은 누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활은 직접 경험한 증인들이 증언한 가장 확실한 사실입니다. 부활은 비겁하고 나약했던 사람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증인으로 바꾸어놓은 현실인 것입니다. 부활만큼 확실한 증거를 가진 역사적 사실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부활의 증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이제부터는 부활의 증인으로, 증인 노릇 제대로 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믿지도 못하고 비겁하기만 했던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증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믿고, 부활의 증인이 되어서, 이 땅에서도 부활을 맛보는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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