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은 생명의 진통
본문
요즘 영화관에 등장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상영되어 많은 관객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지상에 머문 마지막 12시간의 이야기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성서 내용을 바탕으로 감독 겸 제작자인 멜 깁슨과 베네딕트 피츠제럴드가 각색하고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도시 마태라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이 연출되고, 그리스도의 종교적 종교 재판이 행해 졌던 사원과 필레트의 성 앞, 몇몇 법률심의가 이루어 졌던 정원과 그리스도가 매 맞고 채찍질을 당했던 성안 토지의 모습이 배경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살았던 1세기의 예루살렘을 그대로 방불게 했습니다.
예수의 12시간의 진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잔인한 채찍질과 십자가 처형 장면은 고통의 심한 진통임을 알게 합니다.
실제로 excruciating(견딜수 없이 괴로운) 이란 단어가 crucifixions(그리스도의 처형)의 끔찍한 고통에서 유래된 말이었을 정도로 특수 효과팀과 메이그업팀은 실감 나는 흉터를 만들기 위한 온몸이 상처와 흉터로 뒤덮일 때까지 문신을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예수의 손톱을 뽑는 장면과 채찍질 당한 때의 등에서 살점이 찢어지는 장면들이 사실적으로 보여 1세기 예루살렘의 예수를 실제로 보는 리얼리즘의 결정체이었습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을 가장 영광스러운 축복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이러한 기독교 특색은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에 역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기독교는 개인의 혈육의 축복에만 사로잡히는 이기적 종교가 아닙니다.
인격적 완성을 위해 수도하려는 그러한 고난이 아닙니다.
그는 민중을 깔보고 억누르고 수탈하는 잘못된 지배집단과 인간을 부당하게 비뚤어지게 만드는 악마적 기득권 세력에 의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기에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역사를 어둡게 하고 사회를 부패시키고 인간의 전체성을 파괴하는 위선자들과 용기 있게 대결하였기에 그들에 의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역사 속에서든 그곳에 예루살렘이 있고, 그 예루살렘에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있는 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발전을 위하여 변화를 싫어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의 고난은 어디까지나 의로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고난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유롭고 정의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타적인 고난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항상 의로운 역사를 엮어 가는 전위의 구실을 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의 고통을 겪어 내고야 많은 열매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생명의 진통을 겪은 후에야 승리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변화와 발전은 진통의 개혁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통은 구체적인 역사의 삶의 현장에서 생겨나는 진통이고 그들의 희생이 역사와 사회 속에서 당하는 구체적인 죽음인 만큼 부활도 허망한 꿈이나 환상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기독교는 철저하게 역사적인 종교요 사회적인 종교입니다.
보람 있는 고난과 가치 있는 죽음을 뜨겁게 존중하는 역사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간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가 당한 수모와 고난과 핍박과 죽음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예수의 그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예수의 고난을 함께 짊어져야하고 예수의 죽음을 즐겁게 죽어야하며 그리고 예수의 그 부활을 온 존재로 맞이해야 합니다.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 부당하게 차별 받고 눌렸던 민중을 봅니다.
그들은 “땅의 사람”에 속하였습니다.
무식하고 가난하여 율법을 몰라 죄인으로 낙인찍힌 민중 이었으며 돈이 없어 병들어도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한 병자들 그리고 갈릴리 지역에 많이 살았던 반로마적 민중들, 이방인으로 멸시 받던 사마리아 사람들, 지독한 가부장적 가족제도 아래 차별 받던 여성들과 아이들 등이 예수의 공감과 위로와 축복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는 기득권층에 속하는 집단과 인간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책망하였고 분노를 쏟았던 것입니다. 예수는 “화 있을진저”로 시작해서 “독사의 새끼들”이나 “여우의 자식”에 이르기까지 날카로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또한 민족 반역자로 욕먹던 세리들에 대한 예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세금을 포탈하고 국익을 해치는 그들을 향해 질타하였습니다.
정경 유착으로 부정부패가 날로 치달아 사회적 병폐를 이루어 갈 때 예수는 그들을 향해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 영화를 통하여 한국 교회는 십자가의 예수를 다시 정리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근본주의를 내세워 예수를 독선주의자로 믿어 형제자매를 차별하여 왔습니다. 율법주의자로 사실의 예수를 가두어 놓았습니다.
한국 교회는 예수를 신비주의자로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 개인의 영달을 위해 기적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골고다 길로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십자가 지심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예수의 성육신 사건을 탈육신 사건으로 변질시켜 왔습니다.
한국 교회는 신앙적 이기주의에 빠져 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 하나 예수 잘 믿고 천당 가려는 그 영악한 신앙적 이기주의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한국 교회는 불한당을 만난 이웃이 아니고 기득권층의 대변인의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가진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방패막이가 되어 개혁을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역사적 예수는 우리 중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와 낮은 자들을 위해서 희생하셨던 주님이십니다.
권세 있는 자와 부자들 그리고 기득권자의 악과 부패와 부조리의 구조를 비판하였습니다.
이러한 비판 의식을 가지면서 한국 교회는 이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개혁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의식으로 받아들여 변화 발전에 힘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팔레스틴에서 숨쉬고 행동하시고 죽임을 당하셨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신 원산지 예수를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시며 골고다의 형극의 십자가 진통을 수용해야 합니다.
오늘도 불의한 구조와 역사에 의해 타박상을 입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장에서 스스로 챙겨 보는 하늘에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죄악 된 세상 속에서 겸손과 자기 비하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멸시 당하시는 메시아를 예언합니다.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의 죄악을 대속하기 위해 그리고 사회의 상황을 살펴 하늘의 소리를 내며 피눈물 나는 고난과 진통의 과정을 예수를 통해 생생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합니다.
이것은 메시아의 수난은 죽음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구원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의 궁극적 승리라는 거룩한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신약 성서 본문은 이 뜻을 받들어 다윗이 말한 대로 메시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선언하는 말씀임을 깨닫게 하며, 부활은 생명의 진통을 통하여 승리함을 메시지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 주일은 부활절 주일입니다.
2천여 년 전 팔레스타인을 소란하게 한 유대인 청년이 내란 음모죄와 신성모독죄라고 하는 정치적 종교적 죄목으로 로마제국의 가장 가혹한 사형 틀인 십자가에 처형되어 장사를 지낸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어둠이 있으면 밝은 빛이 있어야하고 캄캄한 새벽이 있으면 밝아 오는 아침이 있어야 합니다. 겨울이 있으면 봄이 있는 것이고 죽음이 있으면 생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밝은 빛을 믿기 때문에 어둠을 향하여 저항 합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믿기 때문에 어두움과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일제 36년 동안 역사의 겨울 속에서 해방의 봄을 기다리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민족 분단의 겨울 속에서 통일의 봄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 신앙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다름 아닌 부활에 대한 믿음,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모진 겨울을 이겨 내고 어둠의 세력과 맞서서 싸운 사람들 죽은 것 같았던 민중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 땅에 민주화가 이룩되는 것은 민주주의를 비웃거나 반대하는 반민주적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리고 정치적으로 죽음의 세력 인간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는 정치 체제와 그것을 옹호하고 보수하는 기득권 세력과의 대결이며 신념이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부활의 신앙을 값 싼 믿음으로 가르쳐 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은 아프고 가난하고 좌절하고 죽음을 앞에 둔 십자가에 고통을 겪고 있는 어두운 겨울의 사람들에게 일어서서 싸울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은 진통을 통해 한 생명을 토해 냅니다. 이 진통의 과정은 생명을 향하여 깊은 숨을 쉽니다. 부활은 생명의 진통입니다.
그리스도가 지상에 머문 마지막 12시간의 이야기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성서 내용을 바탕으로 감독 겸 제작자인 멜 깁슨과 베네딕트 피츠제럴드가 각색하고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도시 마태라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이 연출되고, 그리스도의 종교적 종교 재판이 행해 졌던 사원과 필레트의 성 앞, 몇몇 법률심의가 이루어 졌던 정원과 그리스도가 매 맞고 채찍질을 당했던 성안 토지의 모습이 배경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살았던 1세기의 예루살렘을 그대로 방불게 했습니다.
예수의 12시간의 진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잔인한 채찍질과 십자가 처형 장면은 고통의 심한 진통임을 알게 합니다.
실제로 excruciating(견딜수 없이 괴로운) 이란 단어가 crucifixions(그리스도의 처형)의 끔찍한 고통에서 유래된 말이었을 정도로 특수 효과팀과 메이그업팀은 실감 나는 흉터를 만들기 위한 온몸이 상처와 흉터로 뒤덮일 때까지 문신을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예수의 손톱을 뽑는 장면과 채찍질 당한 때의 등에서 살점이 찢어지는 장면들이 사실적으로 보여 1세기 예루살렘의 예수를 실제로 보는 리얼리즘의 결정체이었습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을 가장 영광스러운 축복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이러한 기독교 특색은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에 역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기독교는 개인의 혈육의 축복에만 사로잡히는 이기적 종교가 아닙니다.
인격적 완성을 위해 수도하려는 그러한 고난이 아닙니다.
그는 민중을 깔보고 억누르고 수탈하는 잘못된 지배집단과 인간을 부당하게 비뚤어지게 만드는 악마적 기득권 세력에 의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기에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역사를 어둡게 하고 사회를 부패시키고 인간의 전체성을 파괴하는 위선자들과 용기 있게 대결하였기에 그들에 의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역사 속에서든 그곳에 예루살렘이 있고, 그 예루살렘에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있는 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발전을 위하여 변화를 싫어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의 고난은 어디까지나 의로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고난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유롭고 정의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타적인 고난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항상 의로운 역사를 엮어 가는 전위의 구실을 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의 고통을 겪어 내고야 많은 열매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생명의 진통을 겪은 후에야 승리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변화와 발전은 진통의 개혁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통은 구체적인 역사의 삶의 현장에서 생겨나는 진통이고 그들의 희생이 역사와 사회 속에서 당하는 구체적인 죽음인 만큼 부활도 허망한 꿈이나 환상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기독교는 철저하게 역사적인 종교요 사회적인 종교입니다.
보람 있는 고난과 가치 있는 죽음을 뜨겁게 존중하는 역사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간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가 당한 수모와 고난과 핍박과 죽음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예수의 그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예수의 고난을 함께 짊어져야하고 예수의 죽음을 즐겁게 죽어야하며 그리고 예수의 그 부활을 온 존재로 맞이해야 합니다.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 부당하게 차별 받고 눌렸던 민중을 봅니다.
그들은 “땅의 사람”에 속하였습니다.
무식하고 가난하여 율법을 몰라 죄인으로 낙인찍힌 민중 이었으며 돈이 없어 병들어도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한 병자들 그리고 갈릴리 지역에 많이 살았던 반로마적 민중들, 이방인으로 멸시 받던 사마리아 사람들, 지독한 가부장적 가족제도 아래 차별 받던 여성들과 아이들 등이 예수의 공감과 위로와 축복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는 기득권층에 속하는 집단과 인간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책망하였고 분노를 쏟았던 것입니다. 예수는 “화 있을진저”로 시작해서 “독사의 새끼들”이나 “여우의 자식”에 이르기까지 날카로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또한 민족 반역자로 욕먹던 세리들에 대한 예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세금을 포탈하고 국익을 해치는 그들을 향해 질타하였습니다.
정경 유착으로 부정부패가 날로 치달아 사회적 병폐를 이루어 갈 때 예수는 그들을 향해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 영화를 통하여 한국 교회는 십자가의 예수를 다시 정리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근본주의를 내세워 예수를 독선주의자로 믿어 형제자매를 차별하여 왔습니다. 율법주의자로 사실의 예수를 가두어 놓았습니다.
한국 교회는 예수를 신비주의자로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 개인의 영달을 위해 기적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골고다 길로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십자가 지심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예수의 성육신 사건을 탈육신 사건으로 변질시켜 왔습니다.
한국 교회는 신앙적 이기주의에 빠져 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 하나 예수 잘 믿고 천당 가려는 그 영악한 신앙적 이기주의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한국 교회는 불한당을 만난 이웃이 아니고 기득권층의 대변인의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가진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방패막이가 되어 개혁을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역사적 예수는 우리 중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와 낮은 자들을 위해서 희생하셨던 주님이십니다.
권세 있는 자와 부자들 그리고 기득권자의 악과 부패와 부조리의 구조를 비판하였습니다.
이러한 비판 의식을 가지면서 한국 교회는 이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개혁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의식으로 받아들여 변화 발전에 힘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팔레스틴에서 숨쉬고 행동하시고 죽임을 당하셨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신 원산지 예수를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시며 골고다의 형극의 십자가 진통을 수용해야 합니다.
오늘도 불의한 구조와 역사에 의해 타박상을 입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장에서 스스로 챙겨 보는 하늘에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죄악 된 세상 속에서 겸손과 자기 비하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멸시 당하시는 메시아를 예언합니다.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의 죄악을 대속하기 위해 그리고 사회의 상황을 살펴 하늘의 소리를 내며 피눈물 나는 고난과 진통의 과정을 예수를 통해 생생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합니다.
이것은 메시아의 수난은 죽음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구원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의 궁극적 승리라는 거룩한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신약 성서 본문은 이 뜻을 받들어 다윗이 말한 대로 메시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선언하는 말씀임을 깨닫게 하며, 부활은 생명의 진통을 통하여 승리함을 메시지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 주일은 부활절 주일입니다.
2천여 년 전 팔레스타인을 소란하게 한 유대인 청년이 내란 음모죄와 신성모독죄라고 하는 정치적 종교적 죄목으로 로마제국의 가장 가혹한 사형 틀인 십자가에 처형되어 장사를 지낸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어둠이 있으면 밝은 빛이 있어야하고 캄캄한 새벽이 있으면 밝아 오는 아침이 있어야 합니다. 겨울이 있으면 봄이 있는 것이고 죽음이 있으면 생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밝은 빛을 믿기 때문에 어둠을 향하여 저항 합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믿기 때문에 어두움과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일제 36년 동안 역사의 겨울 속에서 해방의 봄을 기다리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민족 분단의 겨울 속에서 통일의 봄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 신앙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다름 아닌 부활에 대한 믿음,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모진 겨울을 이겨 내고 어둠의 세력과 맞서서 싸운 사람들 죽은 것 같았던 민중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 땅에 민주화가 이룩되는 것은 민주주의를 비웃거나 반대하는 반민주적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리고 정치적으로 죽음의 세력 인간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는 정치 체제와 그것을 옹호하고 보수하는 기득권 세력과의 대결이며 신념이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부활의 신앙을 값 싼 믿음으로 가르쳐 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은 아프고 가난하고 좌절하고 죽음을 앞에 둔 십자가에 고통을 겪고 있는 어두운 겨울의 사람들에게 일어서서 싸울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은 진통을 통해 한 생명을 토해 냅니다. 이 진통의 과정은 생명을 향하여 깊은 숨을 쉽니다. 부활은 생명의 진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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