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을 믿는다면
본문
오늘은 특별히 부활주일날 보통 날과 다른 주일입니다.
오늘 여러분 잘 알듯이 세계가 기독교가 동쪽으로 서쪽으로 갈라졌습니다마는 우리는 서쪽으로 갈라진 교회 계통입니다.
근데 동쪽은 동방 정교회인데 이 교회는 크리스마스를 크게 지내지 않습니다.
그대신 일년의 가장 큰 명절이 부활주일입니다. 예수가 세상에 나셨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죽음이 이기고 부활했다는 것이 가장 클라이막스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72년도에 크레타에 가서 동방 정교회의 고난절과 예배에 참가했는데 부활절이 밤 12시에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해가 뜰때까지 계속됩니다.
근데 그러한 것을 우리 서방 교회에서는 본받지 않고 있지만 정말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라는 말은 저는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느냐 안 믿느냐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가장 근본되는 문제인데 사실에 부활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거든요.
죽음이라는 것은 있지만, 혹은 죽은 이후에 영혼 불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윤회 전생 ,내생이라는 것도 있지만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난다라는 것은 오직 기독교에서 믿는 예수에게서만 있는 사건인데, 그것을 어떻게 믿는냐
전 사실에 놀라게 생각하는 것은 교회 일년 동안에 다른 주일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목사의 설교도 듣고 성가대 따라 듣는 것이 다 이해가 되는데 ,왜 하필 이런 부활 주일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나와, 1부 예배도 꽉 찼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이런 예수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믿고 나오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저는 해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한 문제는 그런 2000년 전에 예수가 유대 나라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2000년 후에 살고 있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우리가 그런 야단 법석을 해야됩니까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면 "당신 도대체 어떻게 예수의 부활,그리고 그 부활의 나와 관계됨을 어떻게 믿습니까'라고 물어보면 물어보는 사람마다 그 대답이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제가 가평의 발암 연구소에서 40-50대 목사님들 모임을 여러번 했는데 제가 이야기하다가 불쑥 물어봅니다.
당신 죽음에 대한 설교를 많이 했을텐데 당신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되는지 말해보세요. "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또한 말하는 사람마다 또 달라요. 그 죽고난 뒤에 어떻게 되느냐라는 문제에 대해서 그것을 당신이 어떻게 되느냐 물어보면 다 설교를 하라면 다 잘하는데 '당신이 어떻게 되느냐 '물어보면 별로 신통한 대답을 잘하는 사람을 그렇게 못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는 가장 근본 문제다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정말 예수님의 부활 했다는 사실을 또한 이 부활의 구체적으로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믿는가를 물어보면 여러가지 대답이 나오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면 가장 당황을 하는 것이 나같은 목사일텐데 이제는 나이도 많고 조금 엉터리같은 이야기를 해도 다 이해해서 들을거라고 생각이되어서 정직하게 내 생각을 얘기하는 것으로 내 메세지를 삼으려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태초에 생명이라는 것, 또 천지만물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저는 여호와 하나님은 곧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에너지에 의해서 만물과 생명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된 만물가운데 사람 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여호와 하나님도 사람처럼 코가 있고 귀고 있고 입이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사람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자유가 없이는 하나의 법이 되어버리는데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을 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의 깊은 곳에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과 함께 탐욕이라는 내 중심으로 내 욕심을 채우고 살고 싶어하는 것 이 두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은 이 탐욕의 지배를 받던지 사랑의 지배를 받는데, 이 사랑의 지배를 받지 않고 탐욕의 나를 지배하게 될 때 그 때는 벌써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은 아니다.
그것은 결국에 생명에서 탈락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죄와 죽음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결국에 인간은 아담 이브의 선악과 이야기는 별 것이 아닙니다.
결국에 선택을 자기 욕심을 충족시키는 쪽으로 했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사랑에서 단절되어버렸다.
사랑과 끊어진 세계, 그것은 죽음으로 운명지어진 세계입니다.
이렇게 되어진 세상 안에는 이미 모든 것은 죽음으로 운명지어지고 궁극적으로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고 어떤 힘도 죽음보다 강한 힘이 존재하지 않는 죽음의 세력 가운데 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성서는 오늘 이사야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언젠가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들어와서 이런 탐욕이 지배하고 마지막에 죽음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이것을 끝내 버린다.
그것이 바로 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란 청년이 31살 정도 되는 청년, 즉 시골 청년이 신발도 안 신고 맨 발로 더벅더벅 걸어다니면서 무슨 말을 하는가 하면 "내가 곧 생명이다. " 내가 곧 생명이다.
그러니까. 나를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내가 내 몸을 몽땅 너에게 주겠다.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먹어라 그러면 네가 산다. 이런 말을 합니다.
만일에 예수가 그 말을 했을 때 내가 유대 나라에 있었다면 '저런, 세상에 미친 놈! 저것 정신 병원에 보내야지 저런 미친 놈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 분이 생명이고 저 분안에 생명이 있고 , 그 생명을 내게 거저 준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 내 살을 뜯어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이 도대체 따라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예수가 이 세상에서 모든데서 사람들에게 있는 탐욕이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것, 손과 발이 움직이는 전체가 하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독일의 본 회퍼는 예수란 이름을 'man for others'라고 불렀습니다. 남을 위해서 산 존재 그렇게 부르면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자기를 버리고 산다.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그래도 보고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자기의 몸을, 33살의 젊은 몸을 완전히 던져 버린 것이다.
바로 그 때 죽으러 가던 그 앞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떡을 떼어주면서 '먹어라 이것은 내 살이다. ', 포도주를 따라주면서 '이것은 내 피다. 마셔라. ' 내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면 내 안에 내 생명이 살고 내가 네 안에 살게 된다.
' 이것은 마치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내가 공기 안에 있고, 동시에 공기가 내 안에 들어와 있어서 내가 사는 것처럼 바로 그런 이야기라도. 그러고 나아가서 십자가에서 죽는다.
그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알아서 그것을 죽이던 총책임자인 로마의 백부장이라는 사람이 그 죽는 것을 가만히 보더니 이것은 사형 집행 때인데 '저는 과연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바로 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 성서는 우리가 사랑 사랑하지만 사랑인 것을 몰랐다. 우리가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지지 않은 사랑이라는 것만 알아왔다.
참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만 있다. 여호와 하나님만 아시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 않느냐
그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그 사랑이 단절되어버렸으니까 우리가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는 예수의 죽음 속에서 저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라고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그는 마지막 피의 한 방울까지 버리고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부활했다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더 강한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을 이겨낼 수 있는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이 이 세상인데 여기에 생명을 창조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들어와서 참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몸을 가지고 피의 마지막까지 쏟아가면서 참 사랑을 이 세상에서 보여주었다.
이 사랑은 죽음보다 훨씬 더 강한 것이다. 사람을 지배하는 탐욕의 뿌리라는 것은 굉장히 깊고 강한 것이다. 그러나 이 탐욕의 뿌리를 뽑아가지고 거기에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만드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 밖에 하실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러니까 부활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달리 생각해서는 그것은 알 수 없는 이야기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이니까, 다만 내 자신은 정말 사랑을 죽음으로 끝낼 수 없다. 근데 우리는 정말 참된 사랑을 해낼 수 없는 존재이니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강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면서 '내 살을 뜯어 먹어라 새 피를 마셔라'하는 바로 그 분 안에 있는 사랑에서 죽음은 이겨내지 못합니다.
죽음을 정복해버렸다. 죽음을 이겼다. 그것이 예수의 부활이다.
저는 바로 그렇게 예수의 부활은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어느 고린도전서에다가 '그는 결국에 주검아 네가 오늘까지는 모든 것을 승리하고 이겼지만은 네 승리는 끝났다.
네 승리는 어디에 있느냐 오늘까지 그 주검이 찌르는 가시와 독은 누구도 뽑아낼 수 없었는데 주검은 있지만 그 가시는 이미 빠졌다.
왜냐면 주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 안에 삼켜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얘깁니다.
저는 여기서 확실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천년 전에 저 갈보리 언덕 위에서 예수가 살아난 것이 사실이다.
또 세상의 끝날에 예수가 재림하던 때에 부활이 일어난다. ' 이런 것을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믿어서야, 그것을 믿는다고 해서 오늘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진정한 부활을 믿는다면 그 부활은 현재 살아 있는 나의 삶 속에 일어나야 됩니다.
그것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것이 증명을 보여줄 도리는 없습니다.
증명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정말로 믿을 때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만은 그것을 나 자신의 삶 속에서 매일 매일 경험해야됩니다.
그것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경험한다. 이런 점에서 저는 대단히 이 어렵고 중대한 문제에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굉장한 모험입니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바르트가 어떻게 생각했고, 불트만이 어떻게 생각했고 하는 것은 이해가 갈 수 있지만, 나는 나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이 부활의 사건 이것을 되풀이 되풀이 살아오면서 경험을 하고 살아오는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까지 사는 동안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것이 나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이 닥쳐오는구나.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구나. '하는 경험을 곰곰히 계산해 보니까 9번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삶 속에서 나 자신이 이제 죽는다 할 때 나 아무렇지도 않다'라는 그런 영웅이 절대로 나는 아닙니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죽음에 대해서 말로 하고 글로 쓰지만 정말 죽음이 찌르는 가시라는 것을 경험한 것은 제 6살 먹은 아들의 죽음을 보고나서입니다.
그 때는 저는 죽음에 대한 설교를 할 수 없고 글을 쓸 수가 없어요. 남의 이야기만 할 수 있는데 할 수 없어요. 그러한 때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부활 믿으니까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 어떤 장례식 설교를 하면서 죽으면 죽자 마자 여호와 하나님 나라 천국에 가서 즐겁게 지내는 것이라면 장례식에 와서 "아이구, 당신 아버지 세상 떠난 것을 축하드립니다. '라고 하지 왜 조문을 하냐 그것은 거짓입니다.
죽음은 두려운 것입니다. 죽음은 정말로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사랑하는 것 만큼 슬픈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의 죽음은 슬프지 않습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슬픕니다. 그러기때문에 여기에서 결국에 이 사랑 때문에 슬프고 아픈 이것은 참 여호와 하나님 만이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진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란 부활이란 그것이 정말 이것을 이기고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을 나는 내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경험한 사람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그 믿는 사람은 어떤 고통이 오게 되면 다 신앙으로서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 있는 신앙 체계는 없어요.
비겁하기도 하고 정말 고통은 괴롭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많은 고통 속에서도 예를 들면 1979년 바로 이 고난절 주간 동안에 저는 중앙 정보부 지하실에서 1주일 동안 곁에서 내 직원들이 고문을 받으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으면서 그 안에서 지낼 때 참으로 지옥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가운데서 내 믿음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물을 때 내 살아오는 중에 맨날 '십자가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내 몸이 십자가를 예수처럼 지는 것은 아니라도 예수의 십자가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 내가 왔다는 것은 그 때 느끼고 석방되어 나와서 여러분과 부활절을 지키던 때 내 생애 가장 기가막힌 부활절이이었습니다. 뭐 이런 시간도 없는데 일일이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적어도 목사를 50-60년 했으니까 어떤 욕심도 없고 그러고 무슨 다 사랑만 있고 탐욕도 없고, 자꾸 신문에는 목사를 성자로 나옵디다마는 그러나 내가 죽으면 여러분은 절대로 저를 성자라 부르지 마십시요.
왜냐면 나는 좋은 것은 보면 가지고 싶고 또 가지면 놓치고 싶지 않고, 저는 욕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있는 것을 내가 아는데 이것은 정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면 잘못된 것인데라고 깨닫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죄란 관념이 아닙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진짜 남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나 자신만의 욕심만으로 사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때 그 때가 내가 죄인인 것을 나는 압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닫는 때 그보다 더 훨씬 더 큰 그리스도 안에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하는 사랑이 바로 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나는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죄 짓는 사람이지만 내가 짓는 죄보다 훨씬 더 강한 훨씬 쌘, 그리스도한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와서 나를 이기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 많았습니다만은 1985년 내가 이 아무 것도 없는 땅위에다가 고학생 몇 사람을 데리고 시작한 이 교회에서 제가 물러가야할 나이가 되서 은퇴하던 때 실직을 하니까 그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시작되어서 그 이후에 국제적으로 그 돌아다니면서 내다녔던 국제 기관에서 모든 하나씩 하나씩 은퇴를 하게 되고 그러고 맨날 전에는 마지막으로 제 아카데미에서도 은퇴를 하고 보니까 그런 무슨 말인가 하면 그 자체가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오래 수고를 했으니까. 편히 쉬십시요 '라는데 그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 왜 이것이 고통스러운 것인가 하면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할 일은 끝났다. 이제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또 내게서 사람들도 자꾸 떠난다. 그것은 숨을 쉴지 알뿐이지만 관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점에서 나이 많은 노인들을 꼭 생리적인 것만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세상에서 버림받는 사람으로서의 인간이 여기서 맞이하게 되는 나 자신의 필요없는 존재라고 느껴지는 때라고 사람이 가지는 모든 힘들이 빠져 버리는 것이고 그것은 죽음 바로 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일하던 기관에서라면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때 이 세상에 내가 해야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왜 지금까지 나는 해 오던 일을 하려고 하느냐
새로운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립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되지 않느냐 그래서 그것을 넘어섰습니다. 이렇게 살면서 남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죽을 때까지 어떻게 여생을 어떻게 사느냐
저는 가장 두려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중풍이나 뇌졸증 같은 것이 걸려서 의식이 없어져 버리는 것 왜 그러냐.
내 몸의 전체가 병들어서 침대 위에 누워서 꼼짝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기도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여러분을 위해서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내 나라를 위해서 이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몸은 움직이지 못해도 기도할 수 있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결국엔 숨이 끊어지고 죽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보고 부활을 믿는 목사님은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그 때 죽은 다음에 목사님의 몸은 무덤 속에 들어가더라도 실제로 믿는 당신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이 만일에 나에게 물어보면 대단히 실망할지 모르지만 나는 모르겠다. 라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지 내 지식과 손 안에 있는 문제가 아니예요. 그것을 내가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천당에 가면 침대에 어디 제품으로 만들었고 그 보석은 어떤 보석으로 쓰는 것까지 다 말하는데 저는 그런 신앙이 없습니다.
내가 꼭 한 가지만 믿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롬8:39에 사도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바로 모든 것이 다 끝나고 끊어 질지라도 결단코 끊어지지 않는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안에서 나와 나를 사랑해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 그것은 내가 믿는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모르겠다. 되어봐야 알겠다. 그렇게 저는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드에서 우리가 정말 살아있으니까 우리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고 있고 내가 그 부활한 그 분안에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는가 부활한 예수는 교회당 안에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라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일하고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장소에서 만납니다.
거기에서 만난 예수는 무어라고 말합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이 사실이라면 불쌍한 내 양들을 먹여라' 그것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정말 부활을 믿는다면 내가 다른 모든 것이 있을지라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주님이 내게 부탁한 이 상처 입은 굶주리고 고통겪는 그 양들을 위해서 내가 살아야 되겠다. 그것이 첫째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행사는 우리 부활절에 대단히 좋은 일이 시작되었다고 저는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적고 적고 출발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주님이 맡긴 내 양을 돌봐달라고 하는 매맞고 쫓겨다니고 외롭고 항상 환멸 속에 있는 양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들을 우리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들을 돌보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이 양들을 와서 훔쳐가고 매를 때리고 목숨을 빼앗아가는 이 이리 때들을 막아주어야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리 때 들이 많습니까 나는 오늘 오후에 우리들이 시작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지난 연말에 우리 교회를 통해서 보고 그 때부터 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속에서 살지 않고 전부 이리 때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이 주검의 정치, 주검의 문화, 주검의 종교, 주검의 종교 , 주검의 경제 이것에서 생명을 빼앗겨서 상처를 입는 이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사람들을 착취하는 정치와 경제를 바꾸어야 합니다. 남과 북 사이에 가로 막히고 있는 여기에서 같은 동포로 같은 이산 가족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가로 막고 못하게 하는 이러한 비 인간적이고 반인간적!인 장벽들을 무너뜨리는 일을 해야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위해서 내 남은 여생을 바친다, 그리고 내가 정말로 부활을 믿는다면 결국에 죽어서 썩어 없어져버리고 말 몸뚱이를 완전히 이렇게 바쳐버리는데 이 썩을 몸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바뀌어 지고 내 모든 소유가 나에게는 아까울지는 모르지만은 그것이 참으로 사랑을 위해서 몽땅 바쳐버리는 때 그것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에 접한 생명을 만들어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냐 우리가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냐우리는 이러한 하나의 믿음을 가지고 넘어지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다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부활한 몸으로 찾아오는 그리스도를 보고 용기를 내고 일곱번 넘어졌다가고 여덟번 일어서면서 살아다가 그의 영원한 사랑이 지배하는 세계를 향하여 가는 그 신앙을 오늘 함께 다짐하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 잘 알듯이 세계가 기독교가 동쪽으로 서쪽으로 갈라졌습니다마는 우리는 서쪽으로 갈라진 교회 계통입니다.
근데 동쪽은 동방 정교회인데 이 교회는 크리스마스를 크게 지내지 않습니다.
그대신 일년의 가장 큰 명절이 부활주일입니다. 예수가 세상에 나셨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죽음이 이기고 부활했다는 것이 가장 클라이막스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72년도에 크레타에 가서 동방 정교회의 고난절과 예배에 참가했는데 부활절이 밤 12시에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해가 뜰때까지 계속됩니다.
근데 그러한 것을 우리 서방 교회에서는 본받지 않고 있지만 정말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라는 말은 저는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느냐 안 믿느냐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가장 근본되는 문제인데 사실에 부활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거든요.
죽음이라는 것은 있지만, 혹은 죽은 이후에 영혼 불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윤회 전생 ,내생이라는 것도 있지만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난다라는 것은 오직 기독교에서 믿는 예수에게서만 있는 사건인데, 그것을 어떻게 믿는냐
전 사실에 놀라게 생각하는 것은 교회 일년 동안에 다른 주일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목사의 설교도 듣고 성가대 따라 듣는 것이 다 이해가 되는데 ,왜 하필 이런 부활 주일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나와, 1부 예배도 꽉 찼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이런 예수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믿고 나오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저는 해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한 문제는 그런 2000년 전에 예수가 유대 나라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2000년 후에 살고 있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우리가 그런 야단 법석을 해야됩니까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면 "당신 도대체 어떻게 예수의 부활,그리고 그 부활의 나와 관계됨을 어떻게 믿습니까'라고 물어보면 물어보는 사람마다 그 대답이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제가 가평의 발암 연구소에서 40-50대 목사님들 모임을 여러번 했는데 제가 이야기하다가 불쑥 물어봅니다.
당신 죽음에 대한 설교를 많이 했을텐데 당신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되는지 말해보세요. "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또한 말하는 사람마다 또 달라요. 그 죽고난 뒤에 어떻게 되느냐라는 문제에 대해서 그것을 당신이 어떻게 되느냐 물어보면 다 설교를 하라면 다 잘하는데 '당신이 어떻게 되느냐 '물어보면 별로 신통한 대답을 잘하는 사람을 그렇게 못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는 가장 근본 문제다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정말 예수님의 부활 했다는 사실을 또한 이 부활의 구체적으로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믿는가를 물어보면 여러가지 대답이 나오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면 가장 당황을 하는 것이 나같은 목사일텐데 이제는 나이도 많고 조금 엉터리같은 이야기를 해도 다 이해해서 들을거라고 생각이되어서 정직하게 내 생각을 얘기하는 것으로 내 메세지를 삼으려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태초에 생명이라는 것, 또 천지만물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저는 여호와 하나님은 곧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에너지에 의해서 만물과 생명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된 만물가운데 사람 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여호와 하나님도 사람처럼 코가 있고 귀고 있고 입이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사람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자유가 없이는 하나의 법이 되어버리는데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을 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의 깊은 곳에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과 함께 탐욕이라는 내 중심으로 내 욕심을 채우고 살고 싶어하는 것 이 두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은 이 탐욕의 지배를 받던지 사랑의 지배를 받는데, 이 사랑의 지배를 받지 않고 탐욕의 나를 지배하게 될 때 그 때는 벌써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은 아니다.
그것은 결국에 생명에서 탈락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죄와 죽음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결국에 인간은 아담 이브의 선악과 이야기는 별 것이 아닙니다.
결국에 선택을 자기 욕심을 충족시키는 쪽으로 했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사랑에서 단절되어버렸다.
사랑과 끊어진 세계, 그것은 죽음으로 운명지어진 세계입니다.
이렇게 되어진 세상 안에는 이미 모든 것은 죽음으로 운명지어지고 궁극적으로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고 어떤 힘도 죽음보다 강한 힘이 존재하지 않는 죽음의 세력 가운데 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성서는 오늘 이사야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언젠가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들어와서 이런 탐욕이 지배하고 마지막에 죽음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이것을 끝내 버린다.
그것이 바로 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란 청년이 31살 정도 되는 청년, 즉 시골 청년이 신발도 안 신고 맨 발로 더벅더벅 걸어다니면서 무슨 말을 하는가 하면 "내가 곧 생명이다. " 내가 곧 생명이다.
그러니까. 나를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내가 내 몸을 몽땅 너에게 주겠다.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먹어라 그러면 네가 산다. 이런 말을 합니다.
만일에 예수가 그 말을 했을 때 내가 유대 나라에 있었다면 '저런, 세상에 미친 놈! 저것 정신 병원에 보내야지 저런 미친 놈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 분이 생명이고 저 분안에 생명이 있고 , 그 생명을 내게 거저 준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 내 살을 뜯어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이 도대체 따라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예수가 이 세상에서 모든데서 사람들에게 있는 탐욕이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것, 손과 발이 움직이는 전체가 하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독일의 본 회퍼는 예수란 이름을 'man for others'라고 불렀습니다. 남을 위해서 산 존재 그렇게 부르면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자기를 버리고 산다.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그래도 보고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자기의 몸을, 33살의 젊은 몸을 완전히 던져 버린 것이다.
바로 그 때 죽으러 가던 그 앞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떡을 떼어주면서 '먹어라 이것은 내 살이다. ', 포도주를 따라주면서 '이것은 내 피다. 마셔라. ' 내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면 내 안에 내 생명이 살고 내가 네 안에 살게 된다.
' 이것은 마치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내가 공기 안에 있고, 동시에 공기가 내 안에 들어와 있어서 내가 사는 것처럼 바로 그런 이야기라도. 그러고 나아가서 십자가에서 죽는다.
그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알아서 그것을 죽이던 총책임자인 로마의 백부장이라는 사람이 그 죽는 것을 가만히 보더니 이것은 사형 집행 때인데 '저는 과연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바로 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 성서는 우리가 사랑 사랑하지만 사랑인 것을 몰랐다. 우리가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지지 않은 사랑이라는 것만 알아왔다.
참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만 있다. 여호와 하나님만 아시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 않느냐
그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그 사랑이 단절되어버렸으니까 우리가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는 예수의 죽음 속에서 저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라고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그는 마지막 피의 한 방울까지 버리고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부활했다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더 강한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을 이겨낼 수 있는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이 이 세상인데 여기에 생명을 창조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들어와서 참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몸을 가지고 피의 마지막까지 쏟아가면서 참 사랑을 이 세상에서 보여주었다.
이 사랑은 죽음보다 훨씬 더 강한 것이다. 사람을 지배하는 탐욕의 뿌리라는 것은 굉장히 깊고 강한 것이다. 그러나 이 탐욕의 뿌리를 뽑아가지고 거기에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만드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 밖에 하실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러니까 부활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달리 생각해서는 그것은 알 수 없는 이야기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이니까, 다만 내 자신은 정말 사랑을 죽음으로 끝낼 수 없다. 근데 우리는 정말 참된 사랑을 해낼 수 없는 존재이니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강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면서 '내 살을 뜯어 먹어라 새 피를 마셔라'하는 바로 그 분 안에 있는 사랑에서 죽음은 이겨내지 못합니다.
죽음을 정복해버렸다. 죽음을 이겼다. 그것이 예수의 부활이다.
저는 바로 그렇게 예수의 부활은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어느 고린도전서에다가 '그는 결국에 주검아 네가 오늘까지는 모든 것을 승리하고 이겼지만은 네 승리는 끝났다.
네 승리는 어디에 있느냐 오늘까지 그 주검이 찌르는 가시와 독은 누구도 뽑아낼 수 없었는데 주검은 있지만 그 가시는 이미 빠졌다.
왜냐면 주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 안에 삼켜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얘깁니다.
저는 여기서 확실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천년 전에 저 갈보리 언덕 위에서 예수가 살아난 것이 사실이다.
또 세상의 끝날에 예수가 재림하던 때에 부활이 일어난다. ' 이런 것을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믿어서야, 그것을 믿는다고 해서 오늘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진정한 부활을 믿는다면 그 부활은 현재 살아 있는 나의 삶 속에 일어나야 됩니다.
그것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것이 증명을 보여줄 도리는 없습니다.
증명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정말로 믿을 때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만은 그것을 나 자신의 삶 속에서 매일 매일 경험해야됩니다.
그것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경험한다. 이런 점에서 저는 대단히 이 어렵고 중대한 문제에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굉장한 모험입니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바르트가 어떻게 생각했고, 불트만이 어떻게 생각했고 하는 것은 이해가 갈 수 있지만, 나는 나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이 부활의 사건 이것을 되풀이 되풀이 살아오면서 경험을 하고 살아오는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까지 사는 동안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것이 나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이 닥쳐오는구나.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구나. '하는 경험을 곰곰히 계산해 보니까 9번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삶 속에서 나 자신이 이제 죽는다 할 때 나 아무렇지도 않다'라는 그런 영웅이 절대로 나는 아닙니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죽음에 대해서 말로 하고 글로 쓰지만 정말 죽음이 찌르는 가시라는 것을 경험한 것은 제 6살 먹은 아들의 죽음을 보고나서입니다.
그 때는 저는 죽음에 대한 설교를 할 수 없고 글을 쓸 수가 없어요. 남의 이야기만 할 수 있는데 할 수 없어요. 그러한 때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부활 믿으니까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 어떤 장례식 설교를 하면서 죽으면 죽자 마자 여호와 하나님 나라 천국에 가서 즐겁게 지내는 것이라면 장례식에 와서 "아이구, 당신 아버지 세상 떠난 것을 축하드립니다. '라고 하지 왜 조문을 하냐 그것은 거짓입니다.
죽음은 두려운 것입니다. 죽음은 정말로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사랑하는 것 만큼 슬픈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의 죽음은 슬프지 않습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슬픕니다. 그러기때문에 여기에서 결국에 이 사랑 때문에 슬프고 아픈 이것은 참 여호와 하나님 만이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진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란 부활이란 그것이 정말 이것을 이기고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을 나는 내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경험한 사람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그 믿는 사람은 어떤 고통이 오게 되면 다 신앙으로서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 있는 신앙 체계는 없어요.
비겁하기도 하고 정말 고통은 괴롭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많은 고통 속에서도 예를 들면 1979년 바로 이 고난절 주간 동안에 저는 중앙 정보부 지하실에서 1주일 동안 곁에서 내 직원들이 고문을 받으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으면서 그 안에서 지낼 때 참으로 지옥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가운데서 내 믿음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물을 때 내 살아오는 중에 맨날 '십자가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내 몸이 십자가를 예수처럼 지는 것은 아니라도 예수의 십자가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 내가 왔다는 것은 그 때 느끼고 석방되어 나와서 여러분과 부활절을 지키던 때 내 생애 가장 기가막힌 부활절이이었습니다. 뭐 이런 시간도 없는데 일일이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적어도 목사를 50-60년 했으니까 어떤 욕심도 없고 그러고 무슨 다 사랑만 있고 탐욕도 없고, 자꾸 신문에는 목사를 성자로 나옵디다마는 그러나 내가 죽으면 여러분은 절대로 저를 성자라 부르지 마십시요.
왜냐면 나는 좋은 것은 보면 가지고 싶고 또 가지면 놓치고 싶지 않고, 저는 욕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있는 것을 내가 아는데 이것은 정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면 잘못된 것인데라고 깨닫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죄란 관념이 아닙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진짜 남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나 자신만의 욕심만으로 사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때 그 때가 내가 죄인인 것을 나는 압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닫는 때 그보다 더 훨씬 더 큰 그리스도 안에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하는 사랑이 바로 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나는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죄 짓는 사람이지만 내가 짓는 죄보다 훨씬 더 강한 훨씬 쌘, 그리스도한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와서 나를 이기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 많았습니다만은 1985년 내가 이 아무 것도 없는 땅위에다가 고학생 몇 사람을 데리고 시작한 이 교회에서 제가 물러가야할 나이가 되서 은퇴하던 때 실직을 하니까 그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시작되어서 그 이후에 국제적으로 그 돌아다니면서 내다녔던 국제 기관에서 모든 하나씩 하나씩 은퇴를 하게 되고 그러고 맨날 전에는 마지막으로 제 아카데미에서도 은퇴를 하고 보니까 그런 무슨 말인가 하면 그 자체가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오래 수고를 했으니까. 편히 쉬십시요 '라는데 그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 왜 이것이 고통스러운 것인가 하면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할 일은 끝났다. 이제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또 내게서 사람들도 자꾸 떠난다. 그것은 숨을 쉴지 알뿐이지만 관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점에서 나이 많은 노인들을 꼭 생리적인 것만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세상에서 버림받는 사람으로서의 인간이 여기서 맞이하게 되는 나 자신의 필요없는 존재라고 느껴지는 때라고 사람이 가지는 모든 힘들이 빠져 버리는 것이고 그것은 죽음 바로 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일하던 기관에서라면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때 이 세상에 내가 해야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왜 지금까지 나는 해 오던 일을 하려고 하느냐
새로운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립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되지 않느냐 그래서 그것을 넘어섰습니다. 이렇게 살면서 남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죽을 때까지 어떻게 여생을 어떻게 사느냐
저는 가장 두려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중풍이나 뇌졸증 같은 것이 걸려서 의식이 없어져 버리는 것 왜 그러냐.
내 몸의 전체가 병들어서 침대 위에 누워서 꼼짝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기도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여러분을 위해서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내 나라를 위해서 이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몸은 움직이지 못해도 기도할 수 있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결국엔 숨이 끊어지고 죽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보고 부활을 믿는 목사님은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그 때 죽은 다음에 목사님의 몸은 무덤 속에 들어가더라도 실제로 믿는 당신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이 만일에 나에게 물어보면 대단히 실망할지 모르지만 나는 모르겠다. 라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지 내 지식과 손 안에 있는 문제가 아니예요. 그것을 내가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천당에 가면 침대에 어디 제품으로 만들었고 그 보석은 어떤 보석으로 쓰는 것까지 다 말하는데 저는 그런 신앙이 없습니다.
내가 꼭 한 가지만 믿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롬8:39에 사도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바로 모든 것이 다 끝나고 끊어 질지라도 결단코 끊어지지 않는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안에서 나와 나를 사랑해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 그것은 내가 믿는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모르겠다. 되어봐야 알겠다. 그렇게 저는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드에서 우리가 정말 살아있으니까 우리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고 있고 내가 그 부활한 그 분안에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는가 부활한 예수는 교회당 안에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라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일하고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장소에서 만납니다.
거기에서 만난 예수는 무어라고 말합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이 사실이라면 불쌍한 내 양들을 먹여라' 그것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정말 부활을 믿는다면 내가 다른 모든 것이 있을지라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주님이 내게 부탁한 이 상처 입은 굶주리고 고통겪는 그 양들을 위해서 내가 살아야 되겠다. 그것이 첫째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행사는 우리 부활절에 대단히 좋은 일이 시작되었다고 저는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적고 적고 출발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주님이 맡긴 내 양을 돌봐달라고 하는 매맞고 쫓겨다니고 외롭고 항상 환멸 속에 있는 양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들을 우리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들을 돌보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이 양들을 와서 훔쳐가고 매를 때리고 목숨을 빼앗아가는 이 이리 때들을 막아주어야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리 때 들이 많습니까 나는 오늘 오후에 우리들이 시작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지난 연말에 우리 교회를 통해서 보고 그 때부터 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속에서 살지 않고 전부 이리 때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이 주검의 정치, 주검의 문화, 주검의 종교, 주검의 종교 , 주검의 경제 이것에서 생명을 빼앗겨서 상처를 입는 이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사람들을 착취하는 정치와 경제를 바꾸어야 합니다. 남과 북 사이에 가로 막히고 있는 여기에서 같은 동포로 같은 이산 가족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가로 막고 못하게 하는 이러한 비 인간적이고 반인간적!인 장벽들을 무너뜨리는 일을 해야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위해서 내 남은 여생을 바친다, 그리고 내가 정말로 부활을 믿는다면 결국에 죽어서 썩어 없어져버리고 말 몸뚱이를 완전히 이렇게 바쳐버리는데 이 썩을 몸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바뀌어 지고 내 모든 소유가 나에게는 아까울지는 모르지만은 그것이 참으로 사랑을 위해서 몽땅 바쳐버리는 때 그것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에 접한 생명을 만들어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냐 우리가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냐우리는 이러한 하나의 믿음을 가지고 넘어지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다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부활한 몸으로 찾아오는 그리스도를 보고 용기를 내고 일곱번 넘어졌다가고 여덟번 일어서면서 살아다가 그의 영원한 사랑이 지배하는 세계를 향하여 가는 그 신앙을 오늘 함께 다짐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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