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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부활하신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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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의 이야기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의 기록들에 비하면 너무 적어서 자세하게 알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가장 중요한 일들은 모두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무덤 가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만을 만나신 것으로 되어 있고, 마태복음에는 무덤을 찾아 온 여인들을 모두 만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인들을 만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평안의 인사를 하십니다. 그리고 갈릴리로 가라고 하십니다. 거기서 주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을 만나십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통해 자세하게 알려주십니다. 이 제자들이 발걸음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보니, 시몬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는 따로 기록되지 않고 제자들의 말로만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에게도 찾아오십니다. 무서워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피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시고, 성경에 기록된 자신의 일들을 자세히 설명해서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침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자, 예수님은 다시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잡고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양들을 위탁하시고, 또 그의 앞날에 대하여 알려 주십니다.
그 후로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여러 가지 말씀으로 승천 이후를 준비하게 하시다가 영광 가운데 하늘나라로 올라가십니다.
이 모든 기록들을 살펴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일은 사람을 찾아다니신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찾아다니시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오는 쪽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다는 소문이 들리면 멀리서도 기꺼이 달려나왔고, 우리 동네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면 기를 쓰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후에는 예수님이 직접 만나야 할 사람들을 찾아가서 만나십니다. 널리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다니십니다. 병을 고치시거나 이적을 베푸시지도 않고, 그냥 조용히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잃고 너무나 상심하고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슬퍼하는 이유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나 여인들은 그들이 너무나 사랑하던 소중한 주님을 잃어버려서 슬펐습니다. 죽은 주님의 무덤이라도 찾아가서 시신이라도 확인하고 장례라도 제대로 치러 드리고 싶어할 정도로 사랑하는 주님과 이제 다시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나 슬펐습니다. 얼마나 슬펐던지, 자기들이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주님을 보고서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이었습니다. 주님만이 그들의 빈 가슴을 채울 수 있었고, 주님만이 그들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슬퍼하는 여인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슬퍼하기로는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엇보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불과 몇 일 사이에 자기를 포함에서 세상이 너무나 달라져 버린 듯한 낯설음 때문에 베드로는 당황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베드로는 뭐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고기를 잡으러 나갑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아마 지금 제일 괴롭고 힘든 건 슬픔과 실망과 죄책감이 뒤엉켜 걷잡을 수 없는 베드로일 겁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괘씸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어쨌든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베드로는 차라리 죽은 것만 못한 상태에 있었으니까요. 베드로의 마음을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괜찮다, 다 용서했다고 말씀하신다고 해도, 베드로의 슬픈 마음은 위로 받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리 주님이 용서하신다고 해도, 스스로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위로하시기 보다,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당신의 양을 맡기신 것입니다. 내 양을 먹여라. 이제부터는 네가 내 대신이다. 이 말씀은 백만 마디 말로도 줄 수 없는 위로와 용기를 베드로에게 주었습니다. 난 여전히 너를 믿는다, 네가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이제 너에게 내 뒤를 맡긴다. 이제부터는 네가 내 대신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자들을 찾아와 위로해 주십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 그들의 비어있는 마음을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십니다. 실제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빈 말로 위로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잃어버린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좋은 것으로 그들의 빈자리를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지금까지는 어떠했든지, 이제 앞으로의 삶을 더 소중하고 가치 있게 살게 하십니다. 다시는 그렇게 슬퍼하고 후회하지 않고 살아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실망해서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 가운데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 엠마오라는 마을을 향해 가는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마도 많이 실망하고 낙심해서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건 더 이상 예수의 제자로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겠지요. 왜냐하면, 예수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훌륭한 지도자로 생각했었는데,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 동안 자기들이 믿고 따랐던 일들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 버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훌륭한 지도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을 한탄하면서, 그들은 다 버리고 낙향을 하는 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대하고 바라던 일이 어긋나게 되면 실망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랬는데 그의 경쟁자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실망합니다. 이번 인사이동에선 승진하기를 바랬는데 또 다시 누락되면 실망합니다. 영화가 재미있기를 기대하고 보러 갔는데 재미없으면 실망합니다. 꿈과 기대가 클수록 그 기대가 깨지는 실망은 더 크게 마련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은 예수가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모처럼 가슴 부푸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예수는 죽고 말았고, 기대는 어처구니없이 깨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너무나 실망해서 지금까지 해 오던 일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다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이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 정말 바라고 기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기대가 깨진 것이 아니라 기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눈이 열리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망한 사람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정말 기대하고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사람들의 잘못된 기대, 헛된 바람을 채워주어서 사람들을 헛된 것으로 만족시키려고 하지 않으시고,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정말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시고, 그것을 바라게 하십니다. 내 생각, 내 이익을 따라 가졌던 기대와 바람들 대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바라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감옥에 갇히고 온갖 고난과 곤경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기뻐하며 만족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이제 더 이상 실망하고 낙심하는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너무나 두려워서 문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들도 예수님처럼 고난 당하고 죽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한 이유는 예수님이 떠나고 자기들만 남겨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전에도 예수님과 자기들을 해치려고 하는 시도는 끊임없이 있었지만, 그동안에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서 모든 일을 감당하셨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더 이상 자기들을 지켜줄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기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근거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죽음은 부활 앞에서는 무기력해집니다. 부활의 소망은 죽음의 공포를 사라지게 합니다. 다시 살아날텐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 생명의 주님은 죽음 앞에서 떠는 모든 자들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주님이 늘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옆에 없는 것 같아도,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니 두려워하고 겁낼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워하는 자들을 찾아오셔서 그 곁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만으로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지고 맙니다.
예수님은 의심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자기들이 직접 그분을 보았다고 말하는데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직접 보고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남의 말은 도무지 믿지 않고 자기가 직접 경험하고 확인한 것만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집불통에 자기 중심적이고 교만한 사람이지요. 자기의 경험만이 진리이고, 다른 사람의 경험은 모두 허깨비를 본 거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는 남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 남들에게는 자기 말을 믿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도 허깨비를 볼 수 있고, 자기가 본 것도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거꾸로 남들이 다 아니라고 해도 내가 봤으니까 확실하다고 믿습니다. 의심이 많은 것 같지만, 사실 이런 사람들이 더 쉽게 속고, 더 쉽게 사기를 당하는 걸 많이 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확신을 주십니다. 직접 보여주시고 확인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믿지 않았던 자기가 틀렸고,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틀렸다고 생각했던 다른 사람들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하심으로 주님은 의심하는 사람에게, 진리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변하지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의심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스스로 확실한 증거가 되셔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주님은 신실하시고 변함 없으신 분이시며, 그리고 이 세상과 역사는 주님 손안에 있음을 믿게 하십니다. 죽음까지도 주님을 가두지 못하고, 죽음 이후의 삶도 주님께서 주관하실 것을 믿게 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이 만나신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평소에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사람들, 예수님과 아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와 사랑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베드로를 믿지 못해서라거나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베드로 자신이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되는 일이나,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에게 대한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비록 아직 분명한 믿음은 가지고 있지 못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복음의 분명한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자기만이 옳고 자기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자기 이익과 상관없이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따라다니고,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님의 부활을,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적대하고 잡아죽인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기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하면 앞으로 선교하는데 더 큰 힘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고난받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영광스럽게 되신 주님이시니까, 이제는 갈릴리의 무지렁이들 보다는 예루살렘의 권력자와 지도층의 사람들과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과 어울리시기는커녕, 그들을 찾아가지도 않으셨습니다. 전에는 종종 부딪치기도 하시고 논쟁이라도 하셨는데, 이제는 아예 상대를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아직도 원한이 풀리지 않으셔서, 그 사람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거나 그래서 그러신 건 아니겠지요.
그들은 애당초 예수를 향해 마음을 열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수많은 말씀을 듣고, 수많은 이적을 보았으면서도, 그들은 예수를 믿기는커녕 잡아죽이고야 말았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듣고 똑같은 이적을 보고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들은 예수를 잡아죽일 궁리부터 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나타나면 그가 옳건 그르건, 심지어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제거하고야 마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사람들이 그 일 때문에 예수를 따르게 될 것이 겁이 나서 나사로를 다시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해 주지 않는 것이라면, 생명도 인간에 대한 사랑도 아무 가치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들 자신뿐이었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것을 보고서도 자기들의 일에 방해가 된다고 다시 죽여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진 생각은 도대체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들에게 예수님이 찾아가신다고 해도,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오히려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죽이려고 더 기를 쓰고 덤볐겠지요. 그들은 그들의 욕심과 이기주의 때문에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가신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에게도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이나 갈릴리라는 지역을 말씀하시려는 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가시고 함께 하시는 사람이 누구냐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전혀 평화롭지 못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셔서 맨 처음 건네시는 말씀은 항상 샬롬이었습니다. 자, 이제 내가 살아났다, 이제는 복수다, 나를 죽인 놈들 하나도 남김없이 싹 쓸어버리겠다, 그러지 않으십니다. 겁내지 말아라, 내가 살아났다, 이제 우리가 권력을 잡을 때가 왔다, 내가 왕위에 올라서 세상을 향해 호령할 때가 왔다, 그러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예수님은 조용하게, 평화를 전하실 뿐입니다.
복수를 한다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도 아니고, 힘으로 남들을 억누르고 짓밟는다고 영광스러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복수는 하고 나면 허탈하고 무의미해져버리는, 허깨비와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슬퍼하는 사람, 두려워 떠는 사람, 실망하고 낙심해서 무기력해진 사람,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고 떠는 사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사람,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십니다.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불안한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말고, 평화 가운데 거하라고 하십니다. 정말, 지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화일 겁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평화, 새로운 소망을 주는 평화 말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분의 부활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 영원한 나라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슬픔, 두려움, 불안, 무의미 가운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우리를 향한 모든 위협과 공격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서게 합니다.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소유하고, 부활의 소망 가운데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되면,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나를 향한 모든 공격과 비난도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의 악과 불의를 보고 두려워 도망하지 않고, 악과 불의를 선과 정의로 바꾸기 위해 기꺼이 우리의 생명을 바치게 됩니다. 악과 불의를 보고 원망하거나 혹은 악으로 악을 대항해서 정의를 이루려고 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희생해서 선으로 악을 이겨 악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불의한 자들을 회개하게 만들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자기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도 그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그의 삶이, 그리고 그의 존재 자체가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을 증거 하게 됩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에게 자기를 찾아 나서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분이 직접 슬퍼하고 실망하고 두려워하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우리가 알아보고 반겨주기를 기대하시면서, 그리고 이제 우리도 부활의 증인이 되어 부활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부활의 주님이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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