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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부활이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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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보통 성탄절보다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은 주님께서 이 땅에 승리하러 오신 날이고,
부활절은 주님께서 승리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부활절이 주는 교훈을 살펴봅시다.
부활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첫째, 부담을 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란 무엇일까요
십자가란 거룩한 부담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어느 정도의 부담을 감수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날 부담이 되기 때문에 큰 교회 간다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말인지를 알고나 그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은 십자가 없이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연약한지라 이해가 되긴 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겠다는 것은 자유입니다. 자기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담 없는 부분만 생각하지 말고 그 다음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고, 승리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초를 닦지 않으면 집을 지을 수 없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열매를 맺게 할 수 없습니다.
부담이 되지만 기초를 닦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특히 "부담 없이!"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정말 믿는다면 해서는 안될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정말 믿는다면
"부담 없이!"라는 말을 꺼내서는 안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믿을 때 부담을 가지고 믿어야 합니다.
사교단체나 라이온스 클럽 같은 곳에는 부담 없이 다닐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거기에서도 부담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느 단체에 가든지
그곳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부담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일대 일 친구관계도 그렇습니다.
일대 일 친구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부담을 가져야 합니다.
항상 전화만 받을 생각만 하고 전화할 생각은 안 하면
점차 그 친구관계는 멀어지게 됩니다.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부담을 가져야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절한 부담을 지려고 해야 우리의 신앙은 열매맺는 신앙이 됩니다.
이 세상의 어느 것이든지 부담을 지지 않고 열매를 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부담은 우리의 영혼을 튼튼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오뚜기가 시험에 들어 넘어져도 왜 쉽게 다시 일어섭니까
오뚜기 밑바닥에 바닥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트가 거센 풍랑을 만나 전복되어도 왜 쉽게 다시 원상으로 회복됩니까
요트 밑에 무거운 바닥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도 이러한 바닥짐이 있어야 합니다.
적절한 부담을 가지면 어려움이 닥쳐도 금방 일어섭니다.
친구관계에 무슨 일이 생겨,
예를 들어, 친구가 결혼을 해서 멀리 지방에 가서 살게 되었어도
그 동안 쌓았던 서로간의 헌신의 정 때문에 그 관계가 유지됩니다.
우리는 가끔 어떤 사람이 부담이 없어서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로 간에 부담이 없는 친구가 되면 좋을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관계는 깊은 관계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바뀌면 언제든지 그 관계는 깨어져 버립니다.
그 사이에 무슨 변함없는 우정이 생기겠습니까
그렇다고 서로 부담을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서로 부담을 지라는 말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헌신의 부담을 지어야 우정과 사랑을 얻듯이
영적인 원리에서도 똑같습니다.
십자가의 부담을 지어야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으면서 좋은 열매를 얻으려는 관심은 많습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고, 가꾸고, 좋은 나무가 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씨를 뿌리고, 좋은 나무가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의 영광의 있기 전에
십자가의 부담이 먼저 있음을 항상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 둘째, 죽음은 절대 끝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 12-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
죽음은 끝이 아니고 반드시 부활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절망적인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으면 끝납니다.
훌륭한 일을 해서 이름이 남고 많은 사람이 그를 추모해도
죽은 당사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영원히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죽고 끝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재산을 많이 남기면 후손들이 좋아합니다.
그러나 후손들 좋아하는 것이 본인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제사상 더 잘 받기 위해서 남긴 것도 아닌데 좋아할 것도 없습니다.
죽고 완전히 끝나 버렸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악한 일만 하고, 나쁜 이름 남긴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이름을 남기고, 좋은 영향력 남긴다고 해도
죽고 끝이라면 본인에게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면
악한 일 하고, 자기 멋대로 나쁜 일 한 사람이 더 수지맞는 것 같습니다.
죽고 영원히 끝나는 것이라면 많이 남긴 사람은
죽으면 끝이기 때문에 가진 것을 다 뺏긴 셈이 됩니다.
반대로 나쁜 일 하다가 사회에 빚만 남긴 사람은
죽으면 끝이기 때문에 그 빚은 다 탕감 받는 셈이 됩니다.
그러니까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은 가장 불의한 원리가 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처럼 나쁜 사상이 없고
그것처럼 불합리하고, 그것처럼 무질서한 원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끝이라는 것을 믿는 선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고 끝이라면 악은 다 끝나서 좋겠지만
우리가 한 선한 일은 어디에서 보상받습니까
죽고 끝이라면 선한 일, 착한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 끝이 아니어야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는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이라고 하니까 너무 겁낼 필요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무서운 날이겠지만
믿는 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정말 기쁜 날입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의 우리의 수고하고 고생한 것을 다 갚아 주십니다.
그때 우리의 눈물과 정성과 땀을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은 꼭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셋째, 우리에게는 무한한 희망이 있다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죽고 끝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까지 극복하고 희망을 얘기한다면
살아서 희망이 없을 수 없습니다.
희망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무한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희망이 있으면 됩니다.
희망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우리는 참을 수 있습니다.
1998년 6월 30일 저의 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후에 얼마나 누님과 더 가까워졌는지 모릅니다.
이 땅에서는 명절날 가끔 만나긴 하지만
평소에는 거의 누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님 돌아가신 후 얼마나 자주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생각을 하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희망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소화할 수 있고 참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죽어도 희망이 있는데, 살아서는 희망이 없겠습니까
항상 희망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위 사람 눈치보고, 주위 사람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면 됩니다.
희망을 가진 자가 현재를 가진 자보다 훨씬 부요한 자입니다.
현재 눈앞의 것을 가지고 판단한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현재의 부족함을 극복하고 충분히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4. 넷째, 구원의 길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다는 교훈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을 정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죽음을 정복한 분만이 그 길을 열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에서는 다 창시자들이 죽었습니다.
창시자가 죽었는데 후계자가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주보에 나와 있는 사랑의 칼럼을 보십시오.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모하멧,
다 나름대로 훌륭한 일을 했다고 생각은 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분들이 우리에게 영생의 길, 구원의 길을 열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는 부활이 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부활에 관한 위대한 진리 몇가지를 말해준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12절).
2)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은 틀림없이 있다는 것입니다(13절).
3) 만약 부활이 없다면 믿음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핵심은 부활이라는 것입니다(14절).
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17절).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입니다.
5)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18-19절).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윤리 도덕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부활의 삶을 체험하고, 장래에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오면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다음 두 가지 삶이 여러분들에게 나타나길 바랍니다.
1) 첫째, 현재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십시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이 살아 계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에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생명의 변화가 일어나고,
계속해서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고, 생활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강단에서 아무리 말씀이 흘러나와도 그것이 생명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좋은 말씀이니까 생활의 변화는 일어납니다. 이것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활의 변화 이상으로 생명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살아 계신 예수님과 만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만납니까 오늘 새벽에 두 가지 말씀을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제일 처음 맞은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는데,
그녀가 주님을 처음 만난 큰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녀가 주님을 가장 먼저 찾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녀가 주님을 만나려고 끝까지 사모하며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오늘날의 삶에 적용해 보면 이런 말입니다.
우선 교회를 자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가장 위대한 비결은 여기에 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생명의 변화를 이루어 가길 바랍니다.
2) 항상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사십시오.
주님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이 땅에 살면서 모든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죽음에는 특별대우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언젠가 나에게도 찾아올 것입니다.
이 얼마나 허무한 사실입니까
가끔 오랜만에 아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무슨 전화일까. 상당히 많은 전화가 누군가 죽었다는 전화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연락이 너무 없어서 섭섭해! 그럴 수 있어! 그 사람이…"
여러분 생각을 바꾸십시오. 무소식이 희소식입니다.
우리도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부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게 하는 부활신앙이 얼마나 큰 능력입니까
죽기를 무서워하면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가 됩니다(히 2:15).
여유도 없고, 넉넉함도 없고, 용기도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육신이 죽기도 전에 마음이 죽어버린 사람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죽기 전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가장 최후로 두려워하는 대상입니다.
그 죽음을 초월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다른 능력 찾지 말고, 이런 능력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런 능력이 주어졌음을 아십시오. 활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미래에 있을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어떤 일에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영원을 향해 가는 사람은 순간적인 것에 분노하거나 불평하지 않는 법입니다.
영원의 미소를 잊지 않는 사람은 순간적인 아픔에 좌절과 분노에 빠지지 않습니다.
영생의 삶을 든든한 보증으로 삼고 항상 여유를 가지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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