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영원한 부활
본문
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일만큼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이별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이별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날 희망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에 의한 이별입니다. 이별하는 일도 싫은 일이지만 죽음으로 이별하는 일은 정말로 싫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죽음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있어야 합니다. 죽음의 사건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은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죽음은 꼭 있어야 합니다. 사실 죽음이란 사실이 없이는 삶이란 사실도 없기 때문입니다. 천년, 만년 그대로 존재하는 바위를 보십시오. 바위는 죽음이 없기에 삶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죽음은 싫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의 해결"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종교는 참 종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부활의 종교만이 참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가 참 종교이겠습니까
불교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버섯나물을 먹고 복통이 나서 병들어 죽었습니다. 어느 날 80세의 석가모니가 숲 속에 있는 대장장이 춘다의 집에 갔는데 그가 공양한 버섯나물을 먹고 식중독을 일으켜 죽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두 그루의 사라나무 사이에서 죽으면서 말했습니다. "가죽끈이 끊어지고 수레바퀴가 무너지는도다. 모든 인생들이 가는 길을 나도 이제 마침내 가는구나. "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유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어느 날 제자인 계로가 공자에게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대답했습니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이 말을 들고 계로는 다시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살아 생전의 일도 아직 잘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 그리고 공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철학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철학에 대해 정의를 내리길 "철학은 죽는 연습이다"라고 말하며 죽음의 문제에 통달한 것처럼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웃집에서 닭 한 마리 꾼 것 갚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이슬람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에 가면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멧의 무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 최고의 기쁜 소식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던 빈 무덤에서 흘러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한다는 인생의 당연한 계명 속에서도 다시 살 수 있는 희망을 가진 자는 오직 기독교인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윤리 도덕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그저 나온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오면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부활이 현재 우리들의 삶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에도 그 부활의 역사가 우리들에게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부활의 삶이 우리들의 삶이 되도록 우리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일년 365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성탄절도 부활절의 영광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사단 마귀와 싸우러 오신 날이지만 부활절은 예수님께서 사단 마귀와 싸워 승리의 깃발을 올린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부활절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만은 꼭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첫째, 과거에 부활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확실히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기록은 예수님의 영이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은 채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수많은 목격자가 있었고 수많은 기록이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수많은 설교가 있습니다. 여러 상황에서 여러 설교를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장례식 설교는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장례식에 가실 때마다 그 장소를 영광스러운 부활의 장소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또한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장례식에 가서 그 장소를 환희의 장소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부활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2. 둘째, 현재의 부활을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오늘날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의 삶에 예수님의 부활의 삶이 역동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활 사건은 참으로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사건이 현재의 나의 삶 속에서 역사하지 않으면 그 부활은 죽어버린 것이 됩니다.
어떤 부활을 의심하던 신학자가 마가복음 16장을 읽으면서 "예수스 에겔데헤"라는 말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다. "예수스 에겔데헤"란 말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에서 현재의 부활을 체험한 것이다. 낙심과 좌절에 빠진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어떻게 다시 기쁨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현재의 예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부활하셨던 예수님을 우리는 현재 만나 우리의 삶에 부활을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신앙의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이것이 신앙의 부활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더라도 형식적으로 교회에 나오던 사람이 예수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 살아 계신 예수님으로 믿어지게 된다면 이것이 신앙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축복된 사실입니까 믿는다는 사실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별 차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네 개의 방향밖에 없습니다. 즉 동서남북뿐입니다. 그래서 일이 전후좌우에서 밀려올 때는 참으로 엄청난 고난에 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질그릇처럼 부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그릇과 같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동서남북 이외의 제 5방향을 가지게 됩니다. 그 방향이란 위로 향하는 방향입니다. 능력은 바로 위로부터 내려옵니다.
주의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해변에 좌초한 배와 같습니다. 그리고 마치 멀리 북극해에 동결되어 있는 얼어붙은 배와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 심장에 깊은 감격으로 부딪치기 전까지 우리는 그저 무능하게 누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얼어붙은 배의 선원처럼 오직 부활의 훈훈한 바람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부활시킵시다. 교회를 오래 다닌 분도 오늘 이 순간에 부활의 신앙을 다시 한번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때때로 "나는 모태신앙으로 교회에서 자라났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들 중 많은 분들이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지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챤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비극적인 사실은 그러한 분들이 머리와 가슴의 거리인 약 30센치 차이로 부활의 삶을 이루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녀서 머리로 많이 아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나의 삶에 부활의 신앙이 펼쳐지느냐 아니냐 하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부활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생활도 부활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부활하여 우리의 인격이 변화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활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속이 변하지 않으면 겉이 변할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어떤 술주정뱅이가 대단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처자식을 다 불러모은 뒤 평생 처음 근엄한 얼굴로 말하였습니다. "내가 이때까지는 너희들에게 부끄러운 아버지였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새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을 보이기 위해 나는 오늘 이 술 먹는 손가락을 자르겠다. " 그리고 그는 자기 결심을 보이기 위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 손가락을 내리쳤습니다.
그 후 그는 몰라보게 달라져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술친구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얼마 안 가서 다시 술꾼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왜 이와 같은 좋은 결심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사람의 근본 마음이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크리스챤들 가운데 좋은 열매를 맺는 데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좋은 나무가 되는 데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이전에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고 나면 그 속에서 우러나오는 생명의 진액으로 말미암아 사랑하게 되고 인내하게 되고 절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행위가 변화되기 이전에 본질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사람이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부활의 생활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신앙으로 우리의 가슴에 불을 붙여야 합니다. 우리의 차가운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불을 붙여야 합니다. 늙은 신앙이 아니라 청춘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러한 분들의 신앙이 우리들의 가슴속에 용솟음쳐야 합니다. 불이 타고 물이 끓고 홍수가 터지듯 그러한 열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열정 없이 위대한 일이 이루어진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심을 부활시켜 보십시오. 목적 없이 살아가던 인생이 부활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업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도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3. 셋째, 미래의 부활을 소망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이 있는 곳에 반드시 나중도 있습니다. 알파가 있는 곳에 반드시 오메가가 있습니다. 창조가 있는 곳에 반드시 종말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반드시 사망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곧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야 할 필연의 사실입니다. 죽음이란 말을 꺼낸다고 재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음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을 보십시오. 신문이나 방송은 우리가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에는 특별대우가 없습니다. 앤드류 카네기가 죽음의 손을 멈추게 해서 자기에게 떨어지지 못하게 하는 자에게는 100만불을 주겠다고 광고를 했으나 결국 이것은 죽음을 피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따름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조차도 죽음을 막거나 연기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아무리 크고 열렬해도 죽음의 차가운 손길이 사랑하는 자의 심장 위에 놓이면 그는 우리를 떠나갑니다. 갈 때가 오면 우리는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음에는 특별대우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언젠가 나에게도 찾아올 것입니다. 이 얼마나 허무한 사실입니까 그래서 신의 존재를 부인한 실존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생은 허무와 죽음의 한 가운데에 내어진 존재다"라고 슬프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히브리서 2장 15절에서도 인생들을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라고 묘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분명 우리들은 일생을 통해서 죽기 전에 죽어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기억할 사실이 있습니다. 크리스챤들에게는 죽음 너머에 아름다운 세계가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별이란 없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뛰어 넘어 사망권세를 정복하고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미래에 우리는 부활한 몸을 가지고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믿는 자에게 이삿날에 불과한 것입니다. 죽음은 지상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복된 순간이 되며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사실입니까 그런데 오늘날 이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파스칼은 "인생은 우주의 영광이 되든지 우주의 쓰레기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은 우주의 영광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죄송한 말씀이지만 쓰레기가 되어 쓰레기 소각장과 같은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지위, 지식, 권세를 자랑해도 죽으면 다 허무로 돌아가는 법입니다. 모든 사람은 우주의 영광으로 나아가느냐, 혹은 우주의 쓰레기로 나아가느냐의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미래에 있을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과거의 부활에 뿌리를 박고 현재 부활의 삶을 살며 미래의 부활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떠한 일을 만나도 분노하거나 불평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은 주로 우리가 무엇을 찾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영원을 향해 가는 사람은 순간적인 것에 분노하거나 불평하지 않는 법입니다. 영원의 미소를 잊지 않는 사람이 순간적인 아픔에 동조하여 좌절과 분노에 빠지겠습니까
그러므로 미래의 부활을 바라보며 구체적인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영광 이전에 십자가가 먼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도 부활의 영광을 이루시기 전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과거의 부활, 현재의 부활, 미래의 부활도 기억해야 할 사실이지만 땀흘림의 십자가, 수고의 십자가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멀리하고 횡재만 바라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땀을 흘려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수고를 합시다. 십자가를 거절하는 것은 사단 마귀의 고문도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감사히 받는 것은 위대한 승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주신 고상한 멍에가 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눈물 뒤에야 비로소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이 다가왔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난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잠깐 동안은 더 심한 고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남으로 고난의 의미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고난이 변해서 감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밭길을 걸어가면서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피하고 부활의 아침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두운 밤을 거쳐서 부활의 새벽이 오는 법인데 밤은 피하고 새벽만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때로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믿음의 절개를 꺽지 맙시다. 교회에 다니는 이 고상한 일을 져버리지 맙시다. 십자가 뒤에 연이어 나타날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며 위로를 얻읍시다!
겨울 추위가 심한 해는 봄의 잎이 더욱 푸르른 것입니다. 땀흘린 수고 후의 수확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나태하게 살면서 풍요하기를 기도하는 신앙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멀리하면서 축복 받기를 바라는 신앙도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기도는 나태한 사람의 도피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성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면을 심고, 용서를 심고, 정직을 심읍시다!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구체적인 땀흘림의 수고를 합시다! 그런 사람만이 이생과 내생에서 거둘 것이 있을 것입니다.
머지 않아 우리의 머리에도 살구나무에 꽃이 피듯이 하얀 백발의 신호가 찾아올 것입니다. 또한 바이얼린의 마지막 현이 끊어지듯 최후의 숨결이 끊어지는 그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생명을 주셨기에 이 생명을 다시 불러 가시는 그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도모합시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주님과 함께 어우러져 성숙한 내일을 해산하는 수고를 감수합시다. 밝아오는 새벽녘에 부끄럼 없이 다시 주님의 시선을 대하기 위해 노력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아 여러분들에게 이와 같은 전인격적인 부활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만날 희망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에 의한 이별입니다. 이별하는 일도 싫은 일이지만 죽음으로 이별하는 일은 정말로 싫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죽음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있어야 합니다. 죽음의 사건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은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죽음은 꼭 있어야 합니다. 사실 죽음이란 사실이 없이는 삶이란 사실도 없기 때문입니다. 천년, 만년 그대로 존재하는 바위를 보십시오. 바위는 죽음이 없기에 삶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죽음은 싫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의 해결"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종교는 참 종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부활의 종교만이 참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가 참 종교이겠습니까
불교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버섯나물을 먹고 복통이 나서 병들어 죽었습니다. 어느 날 80세의 석가모니가 숲 속에 있는 대장장이 춘다의 집에 갔는데 그가 공양한 버섯나물을 먹고 식중독을 일으켜 죽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두 그루의 사라나무 사이에서 죽으면서 말했습니다. "가죽끈이 끊어지고 수레바퀴가 무너지는도다. 모든 인생들이 가는 길을 나도 이제 마침내 가는구나. "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유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어느 날 제자인 계로가 공자에게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대답했습니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이 말을 들고 계로는 다시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살아 생전의 일도 아직 잘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 그리고 공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철학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철학에 대해 정의를 내리길 "철학은 죽는 연습이다"라고 말하며 죽음의 문제에 통달한 것처럼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웃집에서 닭 한 마리 꾼 것 갚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이슬람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에 가면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멧의 무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 최고의 기쁜 소식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던 빈 무덤에서 흘러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한다는 인생의 당연한 계명 속에서도 다시 살 수 있는 희망을 가진 자는 오직 기독교인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윤리 도덕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그저 나온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오면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부활이 현재 우리들의 삶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에도 그 부활의 역사가 우리들에게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부활의 삶이 우리들의 삶이 되도록 우리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일년 365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성탄절도 부활절의 영광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사단 마귀와 싸우러 오신 날이지만 부활절은 예수님께서 사단 마귀와 싸워 승리의 깃발을 올린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부활절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만은 꼭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첫째, 과거에 부활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확실히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기록은 예수님의 영이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은 채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수많은 목격자가 있었고 수많은 기록이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수많은 설교가 있습니다. 여러 상황에서 여러 설교를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장례식 설교는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장례식에 가실 때마다 그 장소를 영광스러운 부활의 장소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또한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장례식에 가서 그 장소를 환희의 장소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부활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2. 둘째, 현재의 부활을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오늘날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의 삶에 예수님의 부활의 삶이 역동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활 사건은 참으로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사건이 현재의 나의 삶 속에서 역사하지 않으면 그 부활은 죽어버린 것이 됩니다.
어떤 부활을 의심하던 신학자가 마가복음 16장을 읽으면서 "예수스 에겔데헤"라는 말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다. "예수스 에겔데헤"란 말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에서 현재의 부활을 체험한 것이다. 낙심과 좌절에 빠진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어떻게 다시 기쁨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현재의 예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부활하셨던 예수님을 우리는 현재 만나 우리의 삶에 부활을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신앙의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이것이 신앙의 부활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더라도 형식적으로 교회에 나오던 사람이 예수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 살아 계신 예수님으로 믿어지게 된다면 이것이 신앙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축복된 사실입니까 믿는다는 사실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별 차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네 개의 방향밖에 없습니다. 즉 동서남북뿐입니다. 그래서 일이 전후좌우에서 밀려올 때는 참으로 엄청난 고난에 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질그릇처럼 부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그릇과 같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동서남북 이외의 제 5방향을 가지게 됩니다. 그 방향이란 위로 향하는 방향입니다. 능력은 바로 위로부터 내려옵니다.
주의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해변에 좌초한 배와 같습니다. 그리고 마치 멀리 북극해에 동결되어 있는 얼어붙은 배와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 심장에 깊은 감격으로 부딪치기 전까지 우리는 그저 무능하게 누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얼어붙은 배의 선원처럼 오직 부활의 훈훈한 바람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부활시킵시다. 교회를 오래 다닌 분도 오늘 이 순간에 부활의 신앙을 다시 한번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때때로 "나는 모태신앙으로 교회에서 자라났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들 중 많은 분들이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지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챤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비극적인 사실은 그러한 분들이 머리와 가슴의 거리인 약 30센치 차이로 부활의 삶을 이루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녀서 머리로 많이 아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나의 삶에 부활의 신앙이 펼쳐지느냐 아니냐 하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부활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생활도 부활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부활하여 우리의 인격이 변화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활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속이 변하지 않으면 겉이 변할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어떤 술주정뱅이가 대단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처자식을 다 불러모은 뒤 평생 처음 근엄한 얼굴로 말하였습니다. "내가 이때까지는 너희들에게 부끄러운 아버지였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새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을 보이기 위해 나는 오늘 이 술 먹는 손가락을 자르겠다. " 그리고 그는 자기 결심을 보이기 위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 손가락을 내리쳤습니다.
그 후 그는 몰라보게 달라져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술친구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얼마 안 가서 다시 술꾼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왜 이와 같은 좋은 결심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사람의 근본 마음이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크리스챤들 가운데 좋은 열매를 맺는 데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좋은 나무가 되는 데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이전에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고 나면 그 속에서 우러나오는 생명의 진액으로 말미암아 사랑하게 되고 인내하게 되고 절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행위가 변화되기 이전에 본질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사람이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부활의 생활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신앙으로 우리의 가슴에 불을 붙여야 합니다. 우리의 차가운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불을 붙여야 합니다. 늙은 신앙이 아니라 청춘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러한 분들의 신앙이 우리들의 가슴속에 용솟음쳐야 합니다. 불이 타고 물이 끓고 홍수가 터지듯 그러한 열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열정 없이 위대한 일이 이루어진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심을 부활시켜 보십시오. 목적 없이 살아가던 인생이 부활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업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도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3. 셋째, 미래의 부활을 소망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이 있는 곳에 반드시 나중도 있습니다. 알파가 있는 곳에 반드시 오메가가 있습니다. 창조가 있는 곳에 반드시 종말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반드시 사망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곧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야 할 필연의 사실입니다. 죽음이란 말을 꺼낸다고 재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음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을 보십시오. 신문이나 방송은 우리가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에는 특별대우가 없습니다. 앤드류 카네기가 죽음의 손을 멈추게 해서 자기에게 떨어지지 못하게 하는 자에게는 100만불을 주겠다고 광고를 했으나 결국 이것은 죽음을 피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따름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조차도 죽음을 막거나 연기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아무리 크고 열렬해도 죽음의 차가운 손길이 사랑하는 자의 심장 위에 놓이면 그는 우리를 떠나갑니다. 갈 때가 오면 우리는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음에는 특별대우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언젠가 나에게도 찾아올 것입니다. 이 얼마나 허무한 사실입니까 그래서 신의 존재를 부인한 실존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생은 허무와 죽음의 한 가운데에 내어진 존재다"라고 슬프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히브리서 2장 15절에서도 인생들을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라고 묘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분명 우리들은 일생을 통해서 죽기 전에 죽어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기억할 사실이 있습니다. 크리스챤들에게는 죽음 너머에 아름다운 세계가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별이란 없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뛰어 넘어 사망권세를 정복하고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미래에 우리는 부활한 몸을 가지고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믿는 자에게 이삿날에 불과한 것입니다. 죽음은 지상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복된 순간이 되며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사실입니까 그런데 오늘날 이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파스칼은 "인생은 우주의 영광이 되든지 우주의 쓰레기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은 우주의 영광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죄송한 말씀이지만 쓰레기가 되어 쓰레기 소각장과 같은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지위, 지식, 권세를 자랑해도 죽으면 다 허무로 돌아가는 법입니다. 모든 사람은 우주의 영광으로 나아가느냐, 혹은 우주의 쓰레기로 나아가느냐의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미래에 있을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과거의 부활에 뿌리를 박고 현재 부활의 삶을 살며 미래의 부활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떠한 일을 만나도 분노하거나 불평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은 주로 우리가 무엇을 찾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영원을 향해 가는 사람은 순간적인 것에 분노하거나 불평하지 않는 법입니다. 영원의 미소를 잊지 않는 사람이 순간적인 아픔에 동조하여 좌절과 분노에 빠지겠습니까
그러므로 미래의 부활을 바라보며 구체적인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영광 이전에 십자가가 먼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도 부활의 영광을 이루시기 전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과거의 부활, 현재의 부활, 미래의 부활도 기억해야 할 사실이지만 땀흘림의 십자가, 수고의 십자가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멀리하고 횡재만 바라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땀을 흘려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수고를 합시다. 십자가를 거절하는 것은 사단 마귀의 고문도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감사히 받는 것은 위대한 승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주신 고상한 멍에가 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눈물 뒤에야 비로소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이 다가왔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난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잠깐 동안은 더 심한 고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남으로 고난의 의미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고난이 변해서 감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밭길을 걸어가면서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피하고 부활의 아침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두운 밤을 거쳐서 부활의 새벽이 오는 법인데 밤은 피하고 새벽만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때로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믿음의 절개를 꺽지 맙시다. 교회에 다니는 이 고상한 일을 져버리지 맙시다. 십자가 뒤에 연이어 나타날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며 위로를 얻읍시다!
겨울 추위가 심한 해는 봄의 잎이 더욱 푸르른 것입니다. 땀흘린 수고 후의 수확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나태하게 살면서 풍요하기를 기도하는 신앙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멀리하면서 축복 받기를 바라는 신앙도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기도는 나태한 사람의 도피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성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면을 심고, 용서를 심고, 정직을 심읍시다!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구체적인 땀흘림의 수고를 합시다! 그런 사람만이 이생과 내생에서 거둘 것이 있을 것입니다.
머지 않아 우리의 머리에도 살구나무에 꽃이 피듯이 하얀 백발의 신호가 찾아올 것입니다. 또한 바이얼린의 마지막 현이 끊어지듯 최후의 숨결이 끊어지는 그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생명을 주셨기에 이 생명을 다시 불러 가시는 그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도모합시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주님과 함께 어우러져 성숙한 내일을 해산하는 수고를 감수합시다. 밝아오는 새벽녘에 부끄럼 없이 다시 주님의 시선을 대하기 위해 노력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아 여러분들에게 이와 같은 전인격적인 부활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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