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본문
금년도 부활 주일은 바로 4월 4일인 오늘 주간입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평강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해 드립니다.
부활절 날짜는 해마다 달라지고 있습니다.
춘분을 지나고 보름달이 지난 다음에 맞이하는 첫 주일을 부활절로 지킵니다.
과춘분 과망월 후 제 일주일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신 유월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니산월 14일 저녁 그러니까 음력으로 열나흘 저녁에 해당하는 저녁에 지키는 절기였고 그 니산월이라는 달은 오늘날 로마력으로는 3,4월이 해당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보름달을 중심해서 그 부활절 날짜가 한달 가량 차이가 있습니다. 3월 23일이 될 수도 있고 4월 22일경 정도의 한달 차이를 두고 오가는 날짜가 됩니다.
제가 79년도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 두 곳이 있는데 천주 교회에서 예수님 무덤 터로 알려 져서 거기에 교회를 짓고 그 실내에 장식된 무덤 터가 있습니다. 거기를 서로 들어가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사람들은 많고 참 거 어렵습니다.
그래도 저는 염치 불구하고 거기까지 갔으니까 기어 들어가서 사진을 찍고 나온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 밖에 가서 가든 텀이라고 하는 전원 무덤으로 불려지는 무덤 장소가 있는데 포도즙 틀이 그 밑에 있고 우리 나라로 얘기하면 석두레와 같은 그런 지형으로 된 곳에 반듯이 내려진 곳이 있고 큰 무덤이 있습니다. 대단히 큰 무덤인데 그 무덤 머리 위에 또 하얀 송판에 페인트를 칠해가지고 파란 글씨로 영어로 써놓은 글자가 눈에 띈 걸 지금도 기억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 구절을 적어 놓은 글자 입니다.
그 글자에는 뭐라고 써 있는고 하니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He is not here, He is risen. )
그렇게 써 놓았습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습니다. 이 간결한 선언문은 무덤을 찾아 갔던 여인들에게 천사가 들려준 음성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무덤에 누워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고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아침 거기는 황홀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빛과 밝은 그 신비한 경지를 이루었고 청년으로 불리워진 사람이지만 천사들이 왕래하면서 찾아간 여인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만나기로 했던 일을 왜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쪽에 가보면 주님을 만나 뵐 수 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소식을 듣고 무덤을 향한 다음에 갈릴리로 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건은 인간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리적인 진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의 권능으로 행하신 신비한 사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증거하는 사건이 됐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으로 절망에 처했던 제자들은 새힘을 얻게 됐습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실망한 제자들이 모인 곳곳 마다 찾아 가셔서 부활하신 신비한 모습을 드러내 보여 주셧습니다.
한 번은 의심 많은 도마에게 '내가 창으로 찔린 옆구리를 만져 보아라' 이렇게까지 확인을 하시고 그리고 제자들이 문을 닫고 있는 곳에도 거기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음식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디베랴 호숫가에서 음식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어떤 신학자는 뭐라고 표현한고 하니 영체란 말을 씁니다. 못썼던 얘기죠. 영혼이면 영이고 육체면 육체인데 영체란 말을 씁니다.
왜 그런고 하니 문이 닫혀있는데 그냥 들어오셨다는 얘기는 우리 육체가 통과할 수 없는것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를 들어오신 사건이 있고 그것을 의심하게 되면 물고기를 같이 잡수셨다는 사실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몸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몸을 영체라 그렇게 표현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사람이 알고 있는 상식이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빈 무덤을 드러내시고 부활하신 몸을 보여 주시면서 죽음에 직면해서 절망으로 낙망했던 제자들에게 다시 용기를 주었고 그들은 희망을 가지고 그 소식을 증거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이후에는 다시 오신다는 약속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복음을 증거하게 됐습니다. 이 부활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의 복음 전파로 초대 교회는 환란과 핍박을 이겨 내고 성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토대로 견고하게 세워졌고 지금까지 성장해 온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중에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절망과 고통중에 시름하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소망 있는 기쁨과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제가 새벽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이 세상 사람들은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면 남긴 만큼 그 묘소를 훌륭하게 장식을 하게 됩니다. 우리 나라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필리핀 사람들은 가난하면서도 묘소를 굉장히 훌륭하게 단장을 해 놓습니다. 돌간이 굉장히 많아요. 또 중국에 가면 중국 사람들은 묘택을 짓습니다.
기와집 추녀같이 산의 묘소에 집을 지어 넣고 거기서 그 묘택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왕의 묘가 제일 크죠. 또 왕을 모시고 있던 벼슬이 높으면 높은 사람일수록 그 묘소를 크게 장식을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성현들은 다 묘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의 묘소는 없습니다. 아브라함, 다윗 그분들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신 무덤이기 때문에 빈 무덤으로 놓고 무덤이 장식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그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서너가지의 의미를 여러분들에게 오늘 제가 설명을 드릴려고 합니다.
첫째는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장차 우리도 예수님의 그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를 받을 것이다. 또 고린도 전서 15장 20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살아나시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리고 고린도 전서의 설명은 아담이라고 하는 우리의 시조는 이 세상에 죽음을 가져온 분이고 그리스도는 생명을 가져온 분이다.
그래서 아담은 사망의 시조로 보고 그리스도는 생명의 시조로 보고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신 영생과 부활을 우리 기독교의 교리를 창조해 주는 이런 사건이 됐습니다. 그래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범죄도 하고 나쁜 짓을 많이 합니다. 어느 사회 심리학자는 한국 사람들이 왜 나쁜일을 많이 하느냐. 종교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거칠게 사는 것 같아도 거의 그들에게 물어 보면 기독교적인 뿌리 속에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잘못하면 여호와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
대개 이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이고 죽이면 그만이다. 그래서 어떤 사건을 저지른 뒤에는 그걸 무마하기 위해서 죽여버리는 이런 일들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은 신앙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뒤를 이은 모든 사람들은 우리에게는 영생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오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두번째는 빌립보서 3장 10절로 11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또 부활에 이르기위해 매일같이 노력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같이 고난과 고통을 겪는 것을 십자가 지신 주님의 고난에 비유하고 또 그 속에서 우리가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가지면서 예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생활을 현실적으로 해 나가는 이런 생활을 바울 사도는 가르치는거고 내가 그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지 않고 지금도 이 믿음을 향해서 계속 전진하고 달음질 한다고 하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어려움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언제나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5장은 이 부활에 대해 가장 많이 증거한 글인데 마지막 순식간에 다 변화하고 나팔소리가 날때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에 대한 새로운 그 생활을 가르치게 됐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의미는 우리가 선과 악, 의와 불의 이런 문제에 처해 있을 때 항상 우리는 실리적인 것을 취하는 행동을 많이 합니다. 옳은 길을 따르기 보다 내게 이로운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길을 따르기 보다는 내게 이로운 쪽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는 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했습니다. 옳은 일을 하던 분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존경하는 스승이 돌아가셨다. 무력 앞에는 누구도 대항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 십자가에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다시 사신 뒤에는 의의 최후 승리를 믿게 되고 의를 주장하게 되고 정의 구현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기도 하는 이런 그 생활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옳지 않은 것에 머리를 숙이거나 협조한 일이 없습니다. 어떤 그 권세나 무력 앞이라도 생명을 바치면서 순교를 했지 거기에 따라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까닭은 의의 최후를 승리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설명을 드렸습니다마는 이런 말씀들을 여러분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기위해 기도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순종할 때 이 부활과 영생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신앙을 체험할 수 있는 신령한 생활에 힘쓰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첫 열매로 보시고 우리도 그분처럼 영원한 변화와 부활을 믿는 신앙을 든든히 다지시기를 바랍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평강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해 드립니다.
부활절 날짜는 해마다 달라지고 있습니다.
춘분을 지나고 보름달이 지난 다음에 맞이하는 첫 주일을 부활절로 지킵니다.
과춘분 과망월 후 제 일주일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신 유월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니산월 14일 저녁 그러니까 음력으로 열나흘 저녁에 해당하는 저녁에 지키는 절기였고 그 니산월이라는 달은 오늘날 로마력으로는 3,4월이 해당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보름달을 중심해서 그 부활절 날짜가 한달 가량 차이가 있습니다. 3월 23일이 될 수도 있고 4월 22일경 정도의 한달 차이를 두고 오가는 날짜가 됩니다.
제가 79년도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 두 곳이 있는데 천주 교회에서 예수님 무덤 터로 알려 져서 거기에 교회를 짓고 그 실내에 장식된 무덤 터가 있습니다. 거기를 서로 들어가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사람들은 많고 참 거 어렵습니다.
그래도 저는 염치 불구하고 거기까지 갔으니까 기어 들어가서 사진을 찍고 나온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 밖에 가서 가든 텀이라고 하는 전원 무덤으로 불려지는 무덤 장소가 있는데 포도즙 틀이 그 밑에 있고 우리 나라로 얘기하면 석두레와 같은 그런 지형으로 된 곳에 반듯이 내려진 곳이 있고 큰 무덤이 있습니다. 대단히 큰 무덤인데 그 무덤 머리 위에 또 하얀 송판에 페인트를 칠해가지고 파란 글씨로 영어로 써놓은 글자가 눈에 띈 걸 지금도 기억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 구절을 적어 놓은 글자 입니다.
그 글자에는 뭐라고 써 있는고 하니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He is not here, He is risen. )
그렇게 써 놓았습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습니다. 이 간결한 선언문은 무덤을 찾아 갔던 여인들에게 천사가 들려준 음성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무덤에 누워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고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아침 거기는 황홀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빛과 밝은 그 신비한 경지를 이루었고 청년으로 불리워진 사람이지만 천사들이 왕래하면서 찾아간 여인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만나기로 했던 일을 왜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쪽에 가보면 주님을 만나 뵐 수 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소식을 듣고 무덤을 향한 다음에 갈릴리로 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건은 인간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리적인 진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의 권능으로 행하신 신비한 사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증거하는 사건이 됐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으로 절망에 처했던 제자들은 새힘을 얻게 됐습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실망한 제자들이 모인 곳곳 마다 찾아 가셔서 부활하신 신비한 모습을 드러내 보여 주셧습니다.
한 번은 의심 많은 도마에게 '내가 창으로 찔린 옆구리를 만져 보아라' 이렇게까지 확인을 하시고 그리고 제자들이 문을 닫고 있는 곳에도 거기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음식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디베랴 호숫가에서 음식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어떤 신학자는 뭐라고 표현한고 하니 영체란 말을 씁니다. 못썼던 얘기죠. 영혼이면 영이고 육체면 육체인데 영체란 말을 씁니다.
왜 그런고 하니 문이 닫혀있는데 그냥 들어오셨다는 얘기는 우리 육체가 통과할 수 없는것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를 들어오신 사건이 있고 그것을 의심하게 되면 물고기를 같이 잡수셨다는 사실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몸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몸을 영체라 그렇게 표현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사람이 알고 있는 상식이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빈 무덤을 드러내시고 부활하신 몸을 보여 주시면서 죽음에 직면해서 절망으로 낙망했던 제자들에게 다시 용기를 주었고 그들은 희망을 가지고 그 소식을 증거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이후에는 다시 오신다는 약속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복음을 증거하게 됐습니다. 이 부활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의 복음 전파로 초대 교회는 환란과 핍박을 이겨 내고 성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토대로 견고하게 세워졌고 지금까지 성장해 온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중에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절망과 고통중에 시름하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소망 있는 기쁨과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제가 새벽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이 세상 사람들은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면 남긴 만큼 그 묘소를 훌륭하게 장식을 하게 됩니다. 우리 나라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필리핀 사람들은 가난하면서도 묘소를 굉장히 훌륭하게 단장을 해 놓습니다. 돌간이 굉장히 많아요. 또 중국에 가면 중국 사람들은 묘택을 짓습니다.
기와집 추녀같이 산의 묘소에 집을 지어 넣고 거기서 그 묘택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왕의 묘가 제일 크죠. 또 왕을 모시고 있던 벼슬이 높으면 높은 사람일수록 그 묘소를 크게 장식을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성현들은 다 묘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의 묘소는 없습니다. 아브라함, 다윗 그분들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신 무덤이기 때문에 빈 무덤으로 놓고 무덤이 장식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그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서너가지의 의미를 여러분들에게 오늘 제가 설명을 드릴려고 합니다.
첫째는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장차 우리도 예수님의 그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를 받을 것이다. 또 고린도 전서 15장 20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살아나시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리고 고린도 전서의 설명은 아담이라고 하는 우리의 시조는 이 세상에 죽음을 가져온 분이고 그리스도는 생명을 가져온 분이다.
그래서 아담은 사망의 시조로 보고 그리스도는 생명의 시조로 보고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신 영생과 부활을 우리 기독교의 교리를 창조해 주는 이런 사건이 됐습니다. 그래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범죄도 하고 나쁜 짓을 많이 합니다. 어느 사회 심리학자는 한국 사람들이 왜 나쁜일을 많이 하느냐. 종교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거칠게 사는 것 같아도 거의 그들에게 물어 보면 기독교적인 뿌리 속에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잘못하면 여호와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
대개 이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이고 죽이면 그만이다. 그래서 어떤 사건을 저지른 뒤에는 그걸 무마하기 위해서 죽여버리는 이런 일들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은 신앙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뒤를 이은 모든 사람들은 우리에게는 영생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오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두번째는 빌립보서 3장 10절로 11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또 부활에 이르기위해 매일같이 노력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같이 고난과 고통을 겪는 것을 십자가 지신 주님의 고난에 비유하고 또 그 속에서 우리가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가지면서 예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생활을 현실적으로 해 나가는 이런 생활을 바울 사도는 가르치는거고 내가 그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지 않고 지금도 이 믿음을 향해서 계속 전진하고 달음질 한다고 하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어려움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언제나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5장은 이 부활에 대해 가장 많이 증거한 글인데 마지막 순식간에 다 변화하고 나팔소리가 날때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에 대한 새로운 그 생활을 가르치게 됐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의미는 우리가 선과 악, 의와 불의 이런 문제에 처해 있을 때 항상 우리는 실리적인 것을 취하는 행동을 많이 합니다. 옳은 길을 따르기 보다 내게 이로운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길을 따르기 보다는 내게 이로운 쪽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는 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했습니다. 옳은 일을 하던 분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존경하는 스승이 돌아가셨다. 무력 앞에는 누구도 대항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 십자가에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다시 사신 뒤에는 의의 최후 승리를 믿게 되고 의를 주장하게 되고 정의 구현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기도 하는 이런 그 생활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옳지 않은 것에 머리를 숙이거나 협조한 일이 없습니다. 어떤 그 권세나 무력 앞이라도 생명을 바치면서 순교를 했지 거기에 따라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까닭은 의의 최후를 승리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설명을 드렸습니다마는 이런 말씀들을 여러분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기위해 기도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순종할 때 이 부활과 영생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신앙을 체험할 수 있는 신령한 생활에 힘쓰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첫 열매로 보시고 우리도 그분처럼 영원한 변화와 부활을 믿는 신앙을 든든히 다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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