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마른 뼈의 부활
본문
19세기 최고의 시인 롱펠로우는 인생의 쓰라린 경험자였습니다. 아내가 젊어서 오랫동안 앓다가 죽었고 재혼한 아내마저 몇 년 안되어 부엌에서 화상을 입고 앓다가 또 세상을 떠났습니다. 롱펠로우가 75세가 되어 그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두 부인의 사별뿐 아니라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오신 것으로 아는데.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시들을 쓸 수가 있었습니까”
이에 롱펠로우는 마당에 보이는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사과나무는 몹시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립니다. 옛 가지에서 새 가지가 조금씩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새 생명을 계속 공급받아 인생의 새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생명과 부활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은 그 삶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풍성해 집니다. 부활의 세계는 지칠 줄 모르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절망에서 진정으로 다시금 사는 부활의 역사가 있기에 자신은 훌륭한 생을 살았으며 아름다운 시를 내놓을 수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읽어 드린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이라고 하는 나라에 잡혀가 10여 년 동안에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예약 없이 박해와 포로로 많은 고난 속에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전연 희망이 없이 절망과 죄절속에 살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인 에스겔이 나타나 이들에게 새로운 소망의 멧세지를 주었습니다. 그 냉용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에스겔 36장에서 이들에게 해방의 역사가 있을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전연 믿지를 않았고 관심조차 갖지를 않았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에스겔 골짜기에 마른 뼈들을 보여주면서 에스겔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마른 뼈들을 봅니다. 이 뼈들이 살아 날 수 있겠느냐 하시면서 물었습니다. 이 때 에스겔은 주께서 아니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이 때 주님은 이 뼈들을 살릴 것을 소망의 멧세지로 주셨습니다. 절망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의 멧세지를 주신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이 뼈들이 살수 있겠느냐
(겔37:1-3)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 이 뼈들이 능히 살수 있겠느냐 입니다. 전연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이성과 지성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며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마른 뼈들은 죽은 지 오래되었으며 햇볕에 나 뒹구는 뼈들이기에 인간이 온전히 해체된 상태입니다. 죽은지 오래되어 매장되지 못한 시체가 비맞고 햇볕으로 인하여 말라버린 상태였습니다. 분리되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상태였습니다. 능히 이 뼈들이 원상을 회복하여 인간이되는 것은 상상할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럼으로 도저히 살아 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이 같은 일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은 용납할 수 없으며 전연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다. 나라가 온전히 해체가 되었고 왕 이하 모든 신하들과 힘있는 모든 사람들은 잡혀온 터라 이들이 다시금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일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벨론에서 잡혀온지 1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제는 온전히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화되어 가는 처지에 있기에 이들이 민족해방의 회복은 감히 상상할수 없는 처지 였습니다. 뼈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사실은 죽음 후에 다시금 산다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주영씨의 죽음을 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부자라 하더라도 한번 왔다가 가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고 하는 신화를 깨고 말았습니다. 돈이면 모든 것이 될 수 있지만 죽음에서 인생이 다시금 산다고 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사건입니다. 한 때 재계를 주름잡던 사람이지만 그의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일은 돈도 그 위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죄의 무능함을 말합니다. 인간의 죽음은 죄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잡혀오게 된 동기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를 졌습니다. 그 죄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긴 일로 이들은 바벨론에게 잡혀간 것입니다. 그리고 마른 뼈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는 인공위성을 만들어 우주 여행을 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인간의 죄를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가 죄입니다. 개국 이래로 인간은 누구도 죄를 해결 할 수 없는 안타까움 속에 있습니다.
죄앞에 인간은 마른뼈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럼으로 죄앞에 인간은 죽음으로 영원히 살아 날 수없게 된 것입니다. 가난한 자의 고귀한 재산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가난에 대해 많는 절망과 번뇌를 느끼며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여!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자학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세상을 움직여 온 세기의 위대한 위인들 중에서 절반 이상의 사람들은 미천하고도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여 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가난함으로써 가질 수 있는 고귀한 재산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일에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굳센 용기와 어떤 일이라도 솔선해서 수행할 수 있는 힘, 이웃을 돌볼 줄 아는 아름다운 마음씨입니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두려운 것은 가난함과 곤고함이 아니라 물질적 풍요로 인해 정신이 황폐화된, 영혼이 가난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에머슨의 "빈곤은 가난하다고 느끼는 데 존재한다"는 말처럼 진정한 가난은 자신이 빈곤하다고 느끼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한 척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 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는 것처럼 가나한 이들의 진정한 재물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재산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싶어하는 가장 고귀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는 부자를 부러워하지도 않았고 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난 속에서도 부자로 살았던 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이 같은 주님의 마음을 소유한자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2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라
(겔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 하나님은 에스겔 보고하는 말씀이 이 마른 뼈들에게 대언하라고 합니다. 대언하니 놀라운 기적이 생겼습니다. (겔37:7-8)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얼마나 신기한 노릇입니까 나뒹구는 뼈들이 맞추어지고 힘줄이 생긱고 살이 오르게 되고 이제는 외형적으로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기적 중에 살아났습니다. 부활은 이 같이 말씀의 위력으로 되어지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말씀입니다. 말씀에 위력과 권위가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말씀으로 일으킴 (눅7:14-15)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죽은 나사로를 말씀으로 부활케 함 (눅11:42-44)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그리스도의 말씀 유명한 D. L. 무디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거듭난 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기로 서약하면서 생활을 했는데도 늘 넘어집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당황한 무디는 산으로 들어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중에 어떤 때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그를 휩싸기도 했습니다. 하늘의 신기한 복들이 자기 심령에 물밀 듯 쏟아졌습니다. "아, 이제 나는 됐다!"라고 생각한 무디가 산을 내려와 살아보면 그 은혜가 한 달을 못 갑니다. 그래서 아하, 혼자는 안되겠구나! 유명한 부흥목사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무디는 부흥집회마다 쫓아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깊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이제 이런 귀한 은혜 속에서 삶을 영위하리라" 그러고 나서 한 두주일이 지나고 나니까 또 비참한 자기를 보게 되었고, 또 넘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스스로 탄식하기를 "나는 화인맞은 양심인가보다. 성경 속에 비유에 나타나는 길가의 마음처럼 씨가 자라지 못하는 마음인가보다. "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저주하며 혐오하던 무디가 어느날 문득 펴든 성경이 로마서 13장 17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들음으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래서 무디는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훼 무디는 위대한 무디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미국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설교자가 된 것입니다. 부활은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 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도 항상 넘어지고 쓰러지는 가운데 다시금 일어나게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시19:8-10)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3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겔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게 될 때 놀라운 기적이 있었습니다. (겔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온전한 부활은 생기를 통하여 가능하게 된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생기는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을 의미합니다. 또한 인간을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게되자 그 생기는 생령이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야 진정한 사람이 되어질 것을 교훈한 말씀입니다. (롬8:9) 만일 너희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죽음에서 절망에서 다시금 부활의 역사는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인성령의 의하여 되어짐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불씨를 지키는 노력 제단의 불신화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무척 고심하는 것은 동서양 어느 곳에도 마찬가지 일이다. 먼전번에 철원 수도원에 가서 기도한적이 있습니다. 그 곳을 가보면 제단앞에 써붙인 말이 있습니다. 내용인 즉은 "제단에 붙은 불을 끄지말자"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끄지 말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령의 불씨는참으로 귀합니다. 우리인간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며 의욕을 주어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옛날 로마의 베스타 신전에서는 이 불을 지키는 일을 졍결한 쳐녀가 맡았다.
아주 옛날 불씨가 더할 수 없이 존중받을 시대에는 새로운 마을이 생기면 전에 살던 마을에서 불을 조심조심 옮겨서 그 불씨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오늘날에도 안더만사람은 불씨를 존중하여 사용하고 있다. 일본 비파호(비파호)에 있는 다케오에 섬의 궁에는 신화(신화)가 있는데, 그 불씨를 나누어 받은 사람은 이것을 고향에 가지고 돌아가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한다. 우리에게도 성령의 불을 지키기 위해 이 같은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불로 인하여 우리들은 낙망과 절망에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부활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불씨를 지킬 뿐만 아니라 활용하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맺는 말
놀라운 기적으로 큰 군대가 되어 고토로 향하여 이들의 꿈이 이루어 지는 부활에 역사가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마른 뼈들을 다시금 부활시킨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가 (겔37: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바벨론에서 다시금 부활하듯이 고토로 돌아가게 하시는 이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신적인 일임을 믿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부활이 되어진 것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임을 믿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구별된 선민으로서 삶을 살아가도록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바벨론에서 구별되게 하시기 위해 부활의 위대한 역사를 체험한 이스라엘은 진정으로 구별시킨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살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알아야 하고 그만을 경배하고 찬양하여야 하며 선택한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도록 힘쓰며 경주해야할 일이다.
이에 롱펠로우는 마당에 보이는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사과나무는 몹시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립니다. 옛 가지에서 새 가지가 조금씩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새 생명을 계속 공급받아 인생의 새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생명과 부활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은 그 삶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풍성해 집니다. 부활의 세계는 지칠 줄 모르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절망에서 진정으로 다시금 사는 부활의 역사가 있기에 자신은 훌륭한 생을 살았으며 아름다운 시를 내놓을 수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읽어 드린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이라고 하는 나라에 잡혀가 10여 년 동안에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예약 없이 박해와 포로로 많은 고난 속에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전연 희망이 없이 절망과 죄절속에 살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인 에스겔이 나타나 이들에게 새로운 소망의 멧세지를 주었습니다. 그 냉용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에스겔 36장에서 이들에게 해방의 역사가 있을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전연 믿지를 않았고 관심조차 갖지를 않았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에스겔 골짜기에 마른 뼈들을 보여주면서 에스겔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마른 뼈들을 봅니다. 이 뼈들이 살아 날 수 있겠느냐 하시면서 물었습니다. 이 때 에스겔은 주께서 아니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이 때 주님은 이 뼈들을 살릴 것을 소망의 멧세지로 주셨습니다. 절망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의 멧세지를 주신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이 뼈들이 살수 있겠느냐
(겔37:1-3)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 이 뼈들이 능히 살수 있겠느냐 입니다. 전연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이성과 지성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며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마른 뼈들은 죽은 지 오래되었으며 햇볕에 나 뒹구는 뼈들이기에 인간이 온전히 해체된 상태입니다. 죽은지 오래되어 매장되지 못한 시체가 비맞고 햇볕으로 인하여 말라버린 상태였습니다. 분리되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상태였습니다. 능히 이 뼈들이 원상을 회복하여 인간이되는 것은 상상할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럼으로 도저히 살아 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이 같은 일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은 용납할 수 없으며 전연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다. 나라가 온전히 해체가 되었고 왕 이하 모든 신하들과 힘있는 모든 사람들은 잡혀온 터라 이들이 다시금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일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벨론에서 잡혀온지 1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제는 온전히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화되어 가는 처지에 있기에 이들이 민족해방의 회복은 감히 상상할수 없는 처지 였습니다. 뼈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사실은 죽음 후에 다시금 산다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주영씨의 죽음을 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부자라 하더라도 한번 왔다가 가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고 하는 신화를 깨고 말았습니다. 돈이면 모든 것이 될 수 있지만 죽음에서 인생이 다시금 산다고 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사건입니다. 한 때 재계를 주름잡던 사람이지만 그의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일은 돈도 그 위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죄의 무능함을 말합니다. 인간의 죽음은 죄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잡혀오게 된 동기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를 졌습니다. 그 죄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긴 일로 이들은 바벨론에게 잡혀간 것입니다. 그리고 마른 뼈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는 인공위성을 만들어 우주 여행을 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인간의 죄를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가 죄입니다. 개국 이래로 인간은 누구도 죄를 해결 할 수 없는 안타까움 속에 있습니다.
죄앞에 인간은 마른뼈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럼으로 죄앞에 인간은 죽음으로 영원히 살아 날 수없게 된 것입니다. 가난한 자의 고귀한 재산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가난에 대해 많는 절망과 번뇌를 느끼며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여!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자학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세상을 움직여 온 세기의 위대한 위인들 중에서 절반 이상의 사람들은 미천하고도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여 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가난함으로써 가질 수 있는 고귀한 재산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일에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굳센 용기와 어떤 일이라도 솔선해서 수행할 수 있는 힘, 이웃을 돌볼 줄 아는 아름다운 마음씨입니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두려운 것은 가난함과 곤고함이 아니라 물질적 풍요로 인해 정신이 황폐화된, 영혼이 가난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에머슨의 "빈곤은 가난하다고 느끼는 데 존재한다"는 말처럼 진정한 가난은 자신이 빈곤하다고 느끼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한 척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 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는 것처럼 가나한 이들의 진정한 재물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재산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싶어하는 가장 고귀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는 부자를 부러워하지도 않았고 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난 속에서도 부자로 살았던 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이 같은 주님의 마음을 소유한자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2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라
(겔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 하나님은 에스겔 보고하는 말씀이 이 마른 뼈들에게 대언하라고 합니다. 대언하니 놀라운 기적이 생겼습니다. (겔37:7-8)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얼마나 신기한 노릇입니까 나뒹구는 뼈들이 맞추어지고 힘줄이 생긱고 살이 오르게 되고 이제는 외형적으로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기적 중에 살아났습니다. 부활은 이 같이 말씀의 위력으로 되어지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말씀입니다. 말씀에 위력과 권위가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말씀으로 일으킴 (눅7:14-15)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죽은 나사로를 말씀으로 부활케 함 (눅11:42-44)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그리스도의 말씀 유명한 D. L. 무디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거듭난 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기로 서약하면서 생활을 했는데도 늘 넘어집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당황한 무디는 산으로 들어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중에 어떤 때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그를 휩싸기도 했습니다. 하늘의 신기한 복들이 자기 심령에 물밀 듯 쏟아졌습니다. "아, 이제 나는 됐다!"라고 생각한 무디가 산을 내려와 살아보면 그 은혜가 한 달을 못 갑니다. 그래서 아하, 혼자는 안되겠구나! 유명한 부흥목사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무디는 부흥집회마다 쫓아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깊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이제 이런 귀한 은혜 속에서 삶을 영위하리라" 그러고 나서 한 두주일이 지나고 나니까 또 비참한 자기를 보게 되었고, 또 넘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스스로 탄식하기를 "나는 화인맞은 양심인가보다. 성경 속에 비유에 나타나는 길가의 마음처럼 씨가 자라지 못하는 마음인가보다. "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저주하며 혐오하던 무디가 어느날 문득 펴든 성경이 로마서 13장 17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들음으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래서 무디는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훼 무디는 위대한 무디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미국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설교자가 된 것입니다. 부활은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 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도 항상 넘어지고 쓰러지는 가운데 다시금 일어나게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시19:8-10)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3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겔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게 될 때 놀라운 기적이 있었습니다. (겔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온전한 부활은 생기를 통하여 가능하게 된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생기는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을 의미합니다. 또한 인간을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게되자 그 생기는 생령이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야 진정한 사람이 되어질 것을 교훈한 말씀입니다. (롬8:9) 만일 너희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죽음에서 절망에서 다시금 부활의 역사는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인성령의 의하여 되어짐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불씨를 지키는 노력 제단의 불신화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무척 고심하는 것은 동서양 어느 곳에도 마찬가지 일이다. 먼전번에 철원 수도원에 가서 기도한적이 있습니다. 그 곳을 가보면 제단앞에 써붙인 말이 있습니다. 내용인 즉은 "제단에 붙은 불을 끄지말자"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끄지 말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령의 불씨는참으로 귀합니다. 우리인간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며 의욕을 주어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옛날 로마의 베스타 신전에서는 이 불을 지키는 일을 졍결한 쳐녀가 맡았다.
아주 옛날 불씨가 더할 수 없이 존중받을 시대에는 새로운 마을이 생기면 전에 살던 마을에서 불을 조심조심 옮겨서 그 불씨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오늘날에도 안더만사람은 불씨를 존중하여 사용하고 있다. 일본 비파호(비파호)에 있는 다케오에 섬의 궁에는 신화(신화)가 있는데, 그 불씨를 나누어 받은 사람은 이것을 고향에 가지고 돌아가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한다. 우리에게도 성령의 불을 지키기 위해 이 같은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불로 인하여 우리들은 낙망과 절망에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부활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불씨를 지킬 뿐만 아니라 활용하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맺는 말
놀라운 기적으로 큰 군대가 되어 고토로 향하여 이들의 꿈이 이루어 지는 부활에 역사가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마른 뼈들을 다시금 부활시킨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가 (겔37: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바벨론에서 다시금 부활하듯이 고토로 돌아가게 하시는 이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신적인 일임을 믿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부활이 되어진 것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임을 믿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구별된 선민으로서 삶을 살아가도록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바벨론에서 구별되게 하시기 위해 부활의 위대한 역사를 체험한 이스라엘은 진정으로 구별시킨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살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알아야 하고 그만을 경배하고 찬양하여야 하며 선택한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도록 힘쓰며 경주해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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