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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부활신앙을 이해하는 길

본문

오늘은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입니다. 이 부활의 사건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믿어져야 구원받은 백성이 되며, 주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으면 구원받은 백성이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대학 캠퍼스에서 전도하는데 어떤 학생이 “목사님! 저는 예수님이 죽은 것은 믿어지는데 부활한 것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제가 크리스챤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만 믿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로마서10:9절에 “내가 만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너의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 그 믿음이라야 천국에 입성해서 영원히 함께 사는 믿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만약 기독교에 부활이 없다면 일반 다른 세속종교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 고백 가운데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을 우리가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구원받은 성도라야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으로 기록된 책인데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이 말씀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것은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쓰여진 성경은 성령 받은 사람만이 이해가 되어지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표현하자면 여러분 모두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믿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낳아주신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낳아주신 것을 믿습니다. 부모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 부모님을 믿습니까 여러분을 낳아주는 것을 보았습니까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습니까 아버지의 생명이 나에게 들어왔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 성령이 내 안에 들어와서 거듭나 구원받은 성도만이 이 부활의 사건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부활의 사건이 믿어진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이 사건이 믿어지는 모든 분들은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주셨으니 너무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는 교회를 다니지만 이 믿음이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직도 믿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는 변증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그런 분들을 위해서 우리가 부활을 믿는가 또한 부활이 무엇인가 부활의 신앙이 어떤 것인가 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금부터 약2600년 전에 에스겔 선지자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느 골짜기에 바짝 마른 뼈들이 얼마나 많은지 도저히 가망이 없는 뼈들을 보여주시며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때 에스겔 선지자는 “나는 모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시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내가 이 뼈들이 서로 연결되어 살이 붙고 신경이 생기도록 대언하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대언하였습니다. 그러자 뼈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살이 붙고 핏줄이 생겼으나 생명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생기야 들어가라”고 대언하자 그 많은 뼈들이 사람이 되어 일어나자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11절에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게 망했으나 망했던 민족이 도저히 가망이 없이 “우리가 이렇게 망했는데 어떻게 독립하겠나! 어떻게 이 민족이 부활할 수 있겠나!”라는 도저히 가능성이 없는 부분을 보여주시면서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은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1절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2600년 전 나라를 바벨론에 잃어버린 그 후에 변변히 나라다운 나라를 제대로 건설해 보지 못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런데 2600년이 지난 후 1948년에 독립을 했습니다. 여러분, 2600년 동안이나 민족이 없어지지 않고 2600년 후 나라가 새로 세워졌으니 부활입니까 아닙니까 도저히 가능성이 없는 죽은 나라가, 민족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절대로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생명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 민족을 2600년 만에 부활시킨 그분이 한사람을 부활시키기가 어려우셨겠습니까 저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능력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지금 복제인간을 만든다고 소리쳤지만 얼마 전 정식으로 복제인간은 불가능하다고 선포했습니다. 복제인간을 만들었다고 했으나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없고 자꾸 엉뚱한 일만 생겼습니다. 그래서 안 된다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을 만드는데 복제인간을 만들 듯 실험실이 필요합니까 실험도구가 필요합니까 막대한 비용이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애기 한명 만들려면 남자와 여자를 그저 한방에 넣어두시기만 하면 아기가 태어납니다.
저는 하수구에 모기의 유충인 장구벌레들이 얼마나 많은지 신기합니다. 실험실에서도 만들지 못하는 생명이 하수구에는 가득합니다. 생명의 능력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기 못 낳는 분들이 인공수정 하려면 많은 비용이 듭니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아기를 낳는 것은 비용이 들지 않고도 임신해서 생명을 낳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의 주권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분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부활을 믿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은 이 모든 자연계가 순종을 합니다.
여러분, 가장 간단한 예로 지구본을 앞에 두고 보면 바다가 지구의 3분의 2입니다. 육지는 3분의 1입니다. 그리고 둥글게 생겼습니다. 바다의 물이 조금만 출렁하면, 태평양의 물이 조금만 출렁해도 일본 열도와 대한민국이 바다에 들어가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다를 향하여 “한계를 정하여 명령하사”라고 했으므로 바다가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의 물은 한계까지만 올라왔다가 빠졌다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신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자연계와 만물이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도 “나사로야 일어나라”고 말씀으로 살리셨으며,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상여를 사람들이 메고 나갈 때에 “소년아 일어나라”고 말씀으로 살려주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 주님은 말씀으로 살려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능력을 아셔야합니다. 말씀의 능력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우찌무라 선생은 일본에서 유수한 신학자 입니다. 그분의 제자 중에는 지식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이 우찌무라 선생이 대학생 한명을 만나서 대화를 했습니다. 이 대학생은 “선생님, 성경에 나온 이야기가 저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뭐, 물 위를 걸어갔다. 또 처녀에게서 아기가 태어났다.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런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강조하십니까”라고 했습니다.
그 학생 참으로 똑똑하지요 그러자 이 우찌무라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래, 나는 성경을 보니 창세기 1장1장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맨 마지막을 보니 주 예수여 어서오시옵소서라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부가 기적인데 성경에서 기적을 빼고 나면 앞 뒤 껍데기 밖에 없겠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적의 책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모두가 기적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체도 기적입니다.
여러분, 백혈병에 걸리면 무균실에서 치료를 받습니다. 무균실이란 균이 없는 공간을 말하고 있는데 지금 이 공기 중에 얼마나 많은 균이 존재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 몸속에 백혈구가 막아주고 싸워주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한가지만 우리가 안다고 해도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이 모든 것을 하게 하시는 분이신데 그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이 부활하는 것은 그렇게 문제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이 불가능한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도 적용이 되어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2600년 만에 나라를 건설한 부활의 역사가 있었고, 우리는 3000년 , 4000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사실 우리 민족이 복음이 들어오기 직전인 120년 전만 하더라도 너무 가난하고, 너무 무지했으며 미신을 섬겼고, 유교전통 때문에 많은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제사라는 것이 귀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나라에 가는데 귀신에게 맨 날 제사를 지내던 망할 수밖에 없는 이 나라에 복음이 들어와서 지금은 불과 3, 40년 만에 우리가 6. 25동란에 모든 것이 다 소실되었지만 그런 잿더미 위에서 우리가 이렇게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이 사실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부활시키셔서 우리가 이렇게 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밤에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면 십자가로 물들어 있습니다. 이런 나라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새벽기도 하는 나라가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축복 받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지하자원이 풍부합니다. 그러나 못산다고 야단들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지만 이렇게 사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믿는 한 부활을 믿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언의 말씀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예언이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과, 성장하는 것, 고난당하시는 것, 죽으신 것, 부활하신 것, 모두 성경이 약속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4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했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라고 성경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저절로 믿어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 부활의 역사가 기독교안에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생동력이 있습니다.
인도의 초대 총리였던 네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 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인도의 종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늪지를 메우고 땜을 건설하도록 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칭송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네루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최고의 문명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대로 예언이 성취된 부활의 종교, 이 말씀의 성취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이사야26:19절에서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라고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부활”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만이 아니고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은 조금 다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은 썩을 육신은 죽고 다시 부활할 때에는 영원히 썩지 않고 죽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주선을 타려면 우주복을 입어야 되는 것과 같이 이 세상이 끝나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려면 영원히 사는 세계에 영원한 몸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고 썩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바뀌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이 그 첫 번째입니다. 문을 꼭꼭 닫아놓았는데도 들어오셔서 제자들이 유령이라고 했을 대에 먹을 것을 달라고 하시며, 영은 뼈와 살이 없는데 나는 있다고 하셨고, 금새 갈릴리에 계시다가 금새 다른 곳에도 나타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보면서 참으로 천국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집사님께서 좋은 차를 사주셔서 차를 탈 때마다 기분이 좋은데 천국가면 그 차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오고 가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몸으로 어디든지 가고 싶은 데로 순식간에 갈 수 있습니다. 이렇듯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우리 소망이기도 합니다.
지금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담이 범죄 한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도 영혼만 구원받았습니다. 육신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저도 죽어야 하고,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암으로 죽고, 여러 가지 병으로 육신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혼만 구원받아 낙원에 가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영혼은 음부에 가 있습니다. 세상 마지막 날까지 낙원과 음부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 낙원도 그렇게 좋더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마지막에 주님이 심판하러 오실신후 심판 때에는 구원받은 낙원에 있는 영혼은 영원한 천국으로, 음부에 있는 영혼은 영원한 지옥으로 나뉘어 집니다.
그래서 영원의 세계가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부활의 개념입니다. 이 부활의 개념을 분명히 붙드시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도대체 부활이라고 하는데 저는 하나도 믿어지지 않습니다”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설명이 더욱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이 부활이 없다하는 자들에게 씨앗의 원리를 적용하여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토마토나무가 있고, 토마토가 나무에 달려 있는데 토마토를 따서 먹어버렸습니다. 그 토마토가 없어졌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짐승이 그 토마토를 먹어 어디 가서 배설을 했다면 그 토마토 속에 씨가 있어서 그곳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어 또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원리인 것입니다.
이 씨앗이 있는 한 세상 마지막 때가 되어 심판하실 때에 우리 인격에 그대로 형태를 입히시되 신령한 썩지 않는 몸으로 입히셔서 천국으로 입성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 토마토속에 열매가 있어 끝까지 그 씨가 어디를 가든지 싹이 나고 꽃이 피어 계속 토마토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그 속에 생명이 다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원리로 우리의 부활을 준비해두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부활할 때에 받을 영광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별의 영광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늘에 해의 영광이 있고, 달의 영광이 있습니다. 해는 빛을 발하고, 달은 빛을 반사하며, 별의 영광이 있습니다. 여러분, 별은 높은 곳에서 자기 위치가 흔들리지 않고 빛나고 있습니다. 이런 영광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도 출세하면 스타라고 합니다. 장군, 탈랜트, 운동선수 등 뛰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스타는 위치가 자꾸 바뀌고 흔들리지만 하늘의 스타, 별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영광이 준비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에 별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너무 많아서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를 은하계라고 하며, 우주의 반경이 10억 광년라고 하는데 이 안에 별의 수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런 은하계가 또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은하계가 과학의 발달로 발견되고 있고, 그렇게 많은 별을 셀 수 없는데 제 생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많은 별을 만드셨을까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 모두에게 그 별을 하나씩 다 주시려고 이렇게 많은 만들었나보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잠깐 지나가는 안개와 같고, 나그네와 같은 삶이기에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며 살다가 가야지! 하는 마음의 결단과 각오가 있는 부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부활이 없다면 우리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주일날 놀지도 못하고, 구경도 가지 못하며 이곳에서 뭐하려고 이렇게 수고합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이 부활 소망과 영광이 있기 때문에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러한 부활의 소망과 영광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이 엄청난 축복입니다. 얼마나 이 축복이 큰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왜 이 부활의 영광을 준비해 두셨을 까요
여러분의 신분이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신분이 얼마나 고귀한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가서 죽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만큼 우리의 신분이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분이 크기 때문에 그 나라에서 영광도 크게 준비해두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영광에 부끄럽지 않는 신분으로서 이 세상에 살다가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을 가진 자의 삶입니다.
이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고 현실 속의 십자가를 지고 인내해야 합니다.
어느 여 집사님은 그림을 잘 그리는 분입니다. 미술을 하는 여 집사님은 신혼초기에 가난하고 완고한 집으로 시집을 가서 남편이 대학교수인데 월급을 조금 받아오는데 살기가 너무 힘들고 또 시동생들도 공부를 시켜야 했기 때문에 너무나 힘들어서 이 집사님이 젊을 때에 고민하다가 고민하다가 도대체 견딜수 없어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이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집사님, 순교가 따로 있습니까 시집와서 순교하겠다고 각오하세요. 시집와서 내가 죽어서 관으로 나오겠다고 생각하고 사십시오. 죽어야 부활의 영광이 있지요”라고 했습니다.
죽어야 부활의 영광이 있기에 죽도록 까지 참자. 그러면 비로소 나중에 가족들이 세월이 지나 내 아내가 최고야! 우리 엄마가 최고야! 우리 형수님이 최고야! 그럴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죽으셨을 때에 부활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죽기까지 참는 것을 배우며 살아가야합니다. 우리 일심교회 모든 성도님들도 다 이런 마음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내가 죽으면 여호와 하나님이 부활시켜주시고 영광 받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죽으면 영원한 천국에 아름다운 부활의 영광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바라보시고 그 믿음 안에서 우리 소망을 가지고 승리하시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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