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하신 예수님( II )
본문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 경제, 교육이 아니라 "불신의 문제"입니다. 여와 야, 노와 사, 정부와 국민, 스승과 제자, 심지어 부모와 자녀까지 서로 믿지 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성령님을 보혜사로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각종 이단 사설 등 절대로 믿어서는 안될 것을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인생들이 거짓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해서 방황하고, 불안과 의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런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도마입니다.
도마는 불신의 세계에서 믿음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현대인을 상징합니다. 도마는 현대인들처럼, 자신이 보고 확인한 것 외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약속하시고, 함께 한 제자들이 증거했음에도, 자신이 보고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 20:25). 우리에게도 도마와 같은 의심과 불신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믿고 싶은데, 도대체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혹시 내가 의심 많은 그 도마는 아닙니까
그러면, 의심하는 도마를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어떻게 해야 불신의 유혹에서 장성한 믿음으로 날마다 성장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은혜의 자리에 없던 도마
도마의 의심은 제자들과 함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믿어야 할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요 20:24)고 증거합니다. 의심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의심이 불신앙으로 바뀌면, 그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이 의심의 늪에 빠지지 않고, 언제나 믿음을 지키는 길이 있습니다.
먼저, 도마처럼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예배와 기도회 등의 신앙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신앙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고, 함께 하지 않으면,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사단은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와 구역식구들을 싫어하게 해서, 은혜 받는 자리를 멀리하고 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말세가 다가올수록 모이기를 힘쓰고, 사랑으로 화목하고 힘 모아 주의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히 10:24-25). 아울러 전도와 봉사, 양육 등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사촌이 땅을 사는데 내가 왜 이렇게 좋지"라는 말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함께 하고, 서로 보살피고, 기도할 때, 주님도 함께 하십니다(마 18:20).
다음으로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말씀의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설령 말씀의 자리에 나왔다 할지라도 아멘으로 화답하여 "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무슨 말씀이든지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면 그 말씀이 은혜와 기적, 위로가 됩니다. 도마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도마는 제자들의 말을 들었음에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사시대가 암흑시대였던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삿 17:6; 21:25). 따라서 모든 것이 잘 믿어지지 않고, 신앙이 연약하다면, 말씀 앞에 서십시오(요 20:31). 고넬료의 가족이 성령충만하게 된 것도 말씀의 자리로 나아갔기 때문이요(행 10:44), 문제로 인해 고통 당하는 성도들을 여호와 하나님이 도우시는 방법도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시 107:19-20).
둘째, 도마 한 사람을 위해서 그 몸을 보이신 예수님
현대인들은 돈은 귀하게 여기지만, 사람은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단 한 사람을 위해서도 일하지만, 대가 없이 한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조차도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데, 예배에 빠져도 무관심합니다. 헌금을 수전하다가 천 원만 비어도 밤을 새워 맞춥니다. 그런데 늘 함께 하던 성도가 신앙 모임에서 안 보여도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마 한 사람의 믿음을 위해 찾아오시고, 그 몸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요 20:27). 예수님의 이 사랑은 지금도 변함 없이 우리를 향해서 비취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직분자인데 구원의 확신이 없고, 존경받는 사역자이지만 말씀이 안 믿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위선적으로 신앙생활 하지말고, 솔직하게 나의 영적 상태를 예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믿음을 회복시키셔서, 도마처럼 최고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우리도 신앙이 어리고, 문제가 있는 성도를 예수님이 사랑하시듯이 사랑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와서 착하고 선한 사람만을 만나기 원하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교회는 죄인, 병자, 가난하고 저주받은 자, 어리석은 자가 모이는 곳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이기에 내 마음에 맞지 않고, 매사에 부정적이고, 성격이 까다롭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머니가 자녀를 돌보듯이,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살전 2:7-8).
셋째,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복
전도할 때,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주면 교회에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도 말씀보다는, 꿈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보고, 천사나 귀신을 보거나, 기사와 이적을 보는 데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기독교는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이고, 알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복된 것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이요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롬 10:17). 그런데도 우리는 많은 기사와 이적을 보고, 놀라운 체험을 많이 하면 더 잘 믿고, 신앙이 성숙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인류 역사상 출애굽 1세대는 열 가지 재앙, 홍해가 갈라짐,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등 누구보다도 많은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1세대 모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듣고, 믿은" 기생 라합은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드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무엇인가를 보고 믿기 원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우리가 말씀을 듣는 자가 되면, 주님의 영광과 역사를 보는 자가 됩니다.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기사와 이적은 언제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반대로 말씀을 듣지 않으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없고, 대신 죄와 죽음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렘 22:21-22).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듣지 않고 보려고만 하면 우상이나 잘못된 이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모세나 욥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처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죄악된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마음에 의심과 절망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그런 마음조차도 이해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심이 들수록 예배의 자리, 은혜의 자리, 말씀의 자리에 나아가서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도마는 불신의 세계에서 믿음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현대인을 상징합니다. 도마는 현대인들처럼, 자신이 보고 확인한 것 외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약속하시고, 함께 한 제자들이 증거했음에도, 자신이 보고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 20:25). 우리에게도 도마와 같은 의심과 불신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믿고 싶은데, 도대체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혹시 내가 의심 많은 그 도마는 아닙니까
그러면, 의심하는 도마를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어떻게 해야 불신의 유혹에서 장성한 믿음으로 날마다 성장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은혜의 자리에 없던 도마
도마의 의심은 제자들과 함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믿어야 할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요 20:24)고 증거합니다. 의심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의심이 불신앙으로 바뀌면, 그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이 의심의 늪에 빠지지 않고, 언제나 믿음을 지키는 길이 있습니다.
먼저, 도마처럼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예배와 기도회 등의 신앙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신앙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고, 함께 하지 않으면,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사단은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와 구역식구들을 싫어하게 해서, 은혜 받는 자리를 멀리하고 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말세가 다가올수록 모이기를 힘쓰고, 사랑으로 화목하고 힘 모아 주의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히 10:24-25). 아울러 전도와 봉사, 양육 등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사촌이 땅을 사는데 내가 왜 이렇게 좋지"라는 말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함께 하고, 서로 보살피고, 기도할 때, 주님도 함께 하십니다(마 18:20).
다음으로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말씀의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설령 말씀의 자리에 나왔다 할지라도 아멘으로 화답하여 "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무슨 말씀이든지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면 그 말씀이 은혜와 기적, 위로가 됩니다. 도마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도마는 제자들의 말을 들었음에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사시대가 암흑시대였던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삿 17:6; 21:25). 따라서 모든 것이 잘 믿어지지 않고, 신앙이 연약하다면, 말씀 앞에 서십시오(요 20:31). 고넬료의 가족이 성령충만하게 된 것도 말씀의 자리로 나아갔기 때문이요(행 10:44), 문제로 인해 고통 당하는 성도들을 여호와 하나님이 도우시는 방법도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시 107:19-20).
둘째, 도마 한 사람을 위해서 그 몸을 보이신 예수님
현대인들은 돈은 귀하게 여기지만, 사람은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단 한 사람을 위해서도 일하지만, 대가 없이 한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조차도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데, 예배에 빠져도 무관심합니다. 헌금을 수전하다가 천 원만 비어도 밤을 새워 맞춥니다. 그런데 늘 함께 하던 성도가 신앙 모임에서 안 보여도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마 한 사람의 믿음을 위해 찾아오시고, 그 몸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요 20:27). 예수님의 이 사랑은 지금도 변함 없이 우리를 향해서 비취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직분자인데 구원의 확신이 없고, 존경받는 사역자이지만 말씀이 안 믿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위선적으로 신앙생활 하지말고, 솔직하게 나의 영적 상태를 예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믿음을 회복시키셔서, 도마처럼 최고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우리도 신앙이 어리고, 문제가 있는 성도를 예수님이 사랑하시듯이 사랑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와서 착하고 선한 사람만을 만나기 원하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교회는 죄인, 병자, 가난하고 저주받은 자, 어리석은 자가 모이는 곳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이기에 내 마음에 맞지 않고, 매사에 부정적이고, 성격이 까다롭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머니가 자녀를 돌보듯이,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살전 2:7-8).
셋째,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복
전도할 때,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주면 교회에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도 말씀보다는, 꿈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보고, 천사나 귀신을 보거나, 기사와 이적을 보는 데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기독교는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이고, 알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복된 것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이요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롬 10:17). 그런데도 우리는 많은 기사와 이적을 보고, 놀라운 체험을 많이 하면 더 잘 믿고, 신앙이 성숙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인류 역사상 출애굽 1세대는 열 가지 재앙, 홍해가 갈라짐,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등 누구보다도 많은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1세대 모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듣고, 믿은" 기생 라합은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드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무엇인가를 보고 믿기 원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우리가 말씀을 듣는 자가 되면, 주님의 영광과 역사를 보는 자가 됩니다.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기사와 이적은 언제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반대로 말씀을 듣지 않으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없고, 대신 죄와 죽음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렘 22:21-22).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듣지 않고 보려고만 하면 우상이나 잘못된 이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모세나 욥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처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죄악된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마음에 의심과 절망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그런 마음조차도 이해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심이 들수록 예배의 자리, 은혜의 자리, 말씀의 자리에 나아가서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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