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하신 예수님(III)
본문
‘부활하신 예수님’시리즈 첫 번째에서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자유와 평강을 주셨습니다. 두 번째에서는 제자들이 인생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을 체험했습니다. 이번에는 생존의 문제와 생계의 문제를 단계적으로 해결해 주신 예수님께서 인생의 실존의 문제를 드루어주십니다. 즉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이 가치 있는 인생인가,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참다운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제시해 주십니다.
첫째, 나를 더 사랑하느냐
디베랴 바닷가에서 숯불을 피워놓고 제자들에게 고기를 먹이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게서 대제사장의 뜰에 잡혀 계실 때, 숯불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는 심한 죄책감이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성장과 사역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숯불가의 대화를 통해 그의 마음 깊은 고통을 용서하고 치유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날마다 새로운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어류만져주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그대로 주님 앞에 설 때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상처를 치유받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을 면전에서 배신한 베드로도,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죽이던 바울도,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음의 자리로 내몬 다윗도 결국은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받아 삶이 변화하고 신앙이 회복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의 '복음'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사랑을 나누기 원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고 말슴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 자신 있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첫째로, 신앙생활의 출발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신앙생활의 내용과 목적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셨느니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둘째로, 예수사랑은 삶의 기쁨과 만족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머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셋째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사랑은 실천하는 삶을 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9)
둘째, 내 어린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요 21:15)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의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을 회복시키신 후에, 다시 사명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사랑은 곧 사랑실천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양'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양'을 돌보는 것입니다. 충청도 속담에 “자기 마누라가 좋으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내가 싫어도, 나를 싫어해도 주님의 양인 성도끼리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어린양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어린양이란, 이 세상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들과 신앙의 초보자들을 가리킵니다. 고아, 가난한자, 장애인, 외국인 근로자, 실직자와 노숙자, 북한 주민과 탈북난민들, 그리고 독거노인들이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예수께서 행한 것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셋째, 내 양을 치라
어린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먹는 문제라면, 성장한 사람에게는 인생의 분명한 목적과 길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막대기'로 양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세상의 수없이 많은 시험과 유혹에 주님께서 부탁하신 양떼들이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길을 가는 잃어버린 양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막대기로 인도해서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지팡이'로 양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양들은 눈이 잘 보이지 않고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또한 두려움이 많고 자기 방어 능력이 없는 무력한 동물입니다. 인생의 지팡이 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임재하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주님의 양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이와 같이 우리가 '말슴의 막대기' 와 '성령의 지팡이'로 주님의 양들을 인도할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세상이 주는 어떤 고난과 질병도 전혀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게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넷째, 내 양을 먹이라
두 번을 영니어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주님게서는, 계속해서 필레오의 사랑으로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필레오의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게서는 베드로의 눈높이로 낮아지셔서 물어보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자발적인 자기부인의 사랑ㅇ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법은 몰랐습니다. 그의 사랑은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자기가 높아지려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기도 했고, 심지어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게서는 겸손과 사라으로 서로를 돌보기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도라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3-4)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양으로서 돌봄을 받는 곳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게서는 갓 태어난 양인 새신자부터, 장성한 양인 제작들가지 구별없이 돌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교회는 특정 계층의 모임과 만님이 아니라,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주님의 양으로서 돌봄을 받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어떤 소외와 따돌림도 없어야 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넘쳐나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성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우리의 생존의 문제, 그리고 실존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뿐입니다. 그 주님게서 우리를 사명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참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닮아서, 모든 영혼들을 아가폐의 사라으로 먹이고 입힘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첫째, 나를 더 사랑하느냐
디베랴 바닷가에서 숯불을 피워놓고 제자들에게 고기를 먹이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게서 대제사장의 뜰에 잡혀 계실 때, 숯불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는 심한 죄책감이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성장과 사역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숯불가의 대화를 통해 그의 마음 깊은 고통을 용서하고 치유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날마다 새로운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어류만져주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그대로 주님 앞에 설 때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상처를 치유받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을 면전에서 배신한 베드로도,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죽이던 바울도,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음의 자리로 내몬 다윗도 결국은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받아 삶이 변화하고 신앙이 회복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의 '복음'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사랑을 나누기 원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고 말슴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 자신 있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첫째로, 신앙생활의 출발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신앙생활의 내용과 목적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셨느니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둘째로, 예수사랑은 삶의 기쁨과 만족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머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셋째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사랑은 실천하는 삶을 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9)
둘째, 내 어린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요 21:15)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의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을 회복시키신 후에, 다시 사명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사랑은 곧 사랑실천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양'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양'을 돌보는 것입니다. 충청도 속담에 “자기 마누라가 좋으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내가 싫어도, 나를 싫어해도 주님의 양인 성도끼리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어린양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어린양이란, 이 세상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들과 신앙의 초보자들을 가리킵니다. 고아, 가난한자, 장애인, 외국인 근로자, 실직자와 노숙자, 북한 주민과 탈북난민들, 그리고 독거노인들이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예수께서 행한 것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셋째, 내 양을 치라
어린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먹는 문제라면, 성장한 사람에게는 인생의 분명한 목적과 길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막대기'로 양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세상의 수없이 많은 시험과 유혹에 주님께서 부탁하신 양떼들이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길을 가는 잃어버린 양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막대기로 인도해서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지팡이'로 양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양들은 눈이 잘 보이지 않고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또한 두려움이 많고 자기 방어 능력이 없는 무력한 동물입니다. 인생의 지팡이 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임재하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주님의 양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이와 같이 우리가 '말슴의 막대기' 와 '성령의 지팡이'로 주님의 양들을 인도할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세상이 주는 어떤 고난과 질병도 전혀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게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넷째, 내 양을 먹이라
두 번을 영니어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주님게서는, 계속해서 필레오의 사랑으로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필레오의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게서는 베드로의 눈높이로 낮아지셔서 물어보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자발적인 자기부인의 사랑ㅇ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법은 몰랐습니다. 그의 사랑은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자기가 높아지려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기도 했고, 심지어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게서는 겸손과 사라으로 서로를 돌보기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도라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3-4)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양으로서 돌봄을 받는 곳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게서는 갓 태어난 양인 새신자부터, 장성한 양인 제작들가지 구별없이 돌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교회는 특정 계층의 모임과 만님이 아니라,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주님의 양으로서 돌봄을 받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어떤 소외와 따돌림도 없어야 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넘쳐나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성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우리의 생존의 문제, 그리고 실존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뿐입니다. 그 주님게서 우리를 사명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참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닮아서, 모든 영혼들을 아가폐의 사라으로 먹이고 입힘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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