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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새 소망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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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사회 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Homo esperans, 곧 소망하는 인간"이라고 정의합니다. 인간은 꿈과 소망을 가진 존재라고 멋있게 정의합니다. 소망하는 인간! 그래서 대우 자동차에서도 Espero라는 이름의 차종이 있습니다. 이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소망을 주는 차라는 뜻입니다.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했습니다. 쥐를 잡아서 독 안에 넣은 다음에 밀폐하고 빛이 전혀 들어가지 않도록 뚜껑을 닫아놓으면 그 안에 있는 쥐는 30분 안에 죽는답니다. 밖으로 나가려는 희망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독 안에 쥐를 넣고 뚜껑에 유리를 통해 빛이 조금 들어가게 해놓으면, 이 쥐는 36시간이나 살아 있답니다. 똑같은 여건입니다. 쥐가 스스로 밖에 나올 수도 없고, 먹을 것을 넣어준 것도 아닙니다.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 빛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신학자 에밀 부르너는 "허파에 산소가 필요하듯이 삶의 의미에는 소망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반드시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소망을 먹고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지 드디어 사흘만에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절 이하를 보시면,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은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고 침착하게 사흘을 기다렸다가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무덤 가에 갔을 때 그들은 놀라운 현장을 발견합니다. 이미 무덤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 무덤은 텅비어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지 사흘만에 동녘의 해가 밝게 뜨는 새 아침과 함께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주 말씀하시던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전15장 3-4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
그래서 우리는 오늘 새벽예배 때에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다고 찬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책 중의 인물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추억속의 인물이 아닙니다. 현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겨울이 아무리 춥고 길어도 봄이 오면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 모두에게 기쁨을 주듯이, 죽음에서 다시 사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소망을 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 3절에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고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는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내일이 없습니다. 오직 살아 계신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만 산 소망이 있습니다. 인본주의 자들은 세상은 갈수록 나아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갈수록 나아지는게 아니라 더 어두워져 가며, 더 나빠져 가고, 절망적이 되어 가고, 점점 더 소망이 없어져 갑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산 소망이시오, 유일한 새 소망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절망 가운데 사는 우리에게 새 소망이 되십니다. 산 소망이 되십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이런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시편 71편 5절을 통해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고 노래합니다. 오늘도 낙심과 실의와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새 소망을 주시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보십니다.
1. 부활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요, 또한 부활의 종교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들은 죽은 교주의 큰 무덤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덤 앞에 가서 교주를 숭배합니다. 그러므로 죽은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빈 무덤의 종교입니다. 아니, 빈 무덤의 종교라기보다는 열린 무덤의 종교입니다. 단순히 "빈 무덤"이 아니라, "열린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열고 죽음에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살아 계신 주님이십니다.
어느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이 종려주일에 학생들에게 조그만한 상자를 나누어주면서 다음주일 부활주일인데 부활을 의미하는 것을 넣어오라고 했습니다. 부활주일날 어떤 학생들은 상자에 계란을, 어떤 학생들은 이쁜 꽃을 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반에는 좀 모자라는 것 같은 애가 한 명 있었는데 그 학생이 무엇을 담아왔는지에 대해 궁금해했습니다. 선생님이 "애야 너는 무엇을 가져왔지" 묻자 "그 학생은 선생님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무덤이 비었듯이 이 상자는 빈 상자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무덤은 주님오시는 날 모두 다 열린 무덤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기에 오늘도 우리를 능히 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 믿습니까 이제 예수님은 죽음의 쇠사슬을 끊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능력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능히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살아 계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인생의 어떤 문제도 간단히 해결됩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보시겠습니다.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러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예수님의 무덤 가에 다가갔던 여인들에게 어떤 큰 숙제가 있었습니까 무덤을 막아 놓은 큰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살펴드리는데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들어본즉 그 큰돌은 벌써 굴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모든 것이 간단합니다. 인생의 그 어떤 난제도 거뜬히 해결 해주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부활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용기를 주십니다.
서울에서 제가 학생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어떤 여학생이 "전도사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자 마자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래서 제가 "여호와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에게 자기를 제일 먼저 나타내시지 않겠냐" 했더니 "아니예요. 베드로의 이름을 생각하면 이해가 갑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반석, 곧 돌이죠. 원래가 돌이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할 것 같아 쉽게 깨닫는 여인들에게 먼저 나타나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자들은 입이 싸서 부활의 소식이 빨리 퍼질 수 있기 때문이었을 거야"하고 같이 웃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자 마자 가장 먼저 주신 복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본문 7절입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가서 뵈오리라 하는지라" 우리는 이 본문에서 두 가지 점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갈릴 리가 어떤 곳입니까 예루살렘과 달리 이스라엘의 변두리였고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 촌놈, 가난뱅이,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멸시와 천시를 받던 곳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운동이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출발하자는 것입니다. 둘째는 제자들과, 특히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켜 주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실패할 것을 다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14:8). 그처럼 자신만만하게 호언장담했던 베드로가 너무나 무력하게 주님을 배반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이 말을 전해 들으므로 얼마나 가슴 설레이며 새 용기를 갖게 되었을까요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3절에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합니다. 사기가 저하된 그들에게 새 용기를 주셨으며, 슬픔에 묻혀있던 그들에게 기쁨을 심어 주셨고, 실망한 그들에게 소망을 품게 해주셨으며, 좌절한 그들에게 재기의 힘을 주신 것이요, 고뇌에 차있던 그들에게 감격스런 소식이요, 불안으로 시달리던 그들에게 평안을 안겨 주셨고, 의욕을 상실한 그들에게 새 소망의 뉴스요, 절망에 부딪쳤던 그들에게 새 꿈의 메시지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새 소망을 주십니다.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했으나, 주님은 그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특별히 마가는 이 메시지를 힘주어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부터가 실패의 아픈 경험이 있었습니다. 제 1차 선교사역의 실패자입니다(행13:13). 그러나 그는 베드로를 통하여 다시 재기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 간단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사람은 자기와 비슷한 실패자를 힘있게 일으켜줍니다. 오늘 우리도 서로 일으켜주고 세워주는 주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예수님이 여러 부분에서 좋지만,
"예수님이 가장 좋은 것은 내가 범한 실패의 분야에서도 끝까지 우리를 믿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첫 사역을 하셨던 바로 그 갈릴리 호수에 다시 오셔서 아침 일찍부터 새 소망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베드로야! 우리 다시 시작하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경주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시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안 믿어 주고, 더 이상 기대를 걸어주지 않아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믿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산 소망이 되십니다. 기독교는 갱생의 종교요, 새 출발의 신앙을 표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다시 시작하는 부활의 새 아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부활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비전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자 마자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에게 찾아오시고, 그리고는 12절과 13절을 보시면 꿈과 의욕을 상실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던 두 제자에게도 찾아 오셨습니다. 낙향하던 자들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3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하루 종일 이들과 동행하시면서 상담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심령은 새로운 열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4:32). 침체와 의욕상실에 빠졌던 마음이 새로운 열정을 회복하였습니다. 새 심령이 되었습니다. 어두운 심령이 밝아졌습니다. 무력한 심령이 생기가 솟아났습니다. 꿈을 상실한 마음에 새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본문 13절입니다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여기 돌아갔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간 것입니다. 잃어버린 꿈을 되찾은 것입니다. 비전을 회복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왜 새 소망이 있습니까 살아계신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언제든지 새 심령으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언제든지 새 비전으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꿈과 비전의 회복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내려가던 길에서 다시 올라갑니다. 돌아가던 길에서 다시 돌아옵니다 상심하던 자가 다시 원기를 회복합니다. 꿈을 잃은 자가 꿈을 다시 찾게 됩니다. 인생을 포기한 자가 새롭게 도전합니다. 낙심가운데 있던 자가 다시 일어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꿈을 잃은 두 사람을 다시 비전과 확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낙심과 좌절가운데 있던 베드로에게는 위대한 순교자가 되는 꿈을 갖게 하셨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곧 새 비전의 주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본문 15절입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제는 용기를 회복한 제자들에게 얼마나 웅대한 비전을 품게 하시는지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 게 복음을 전파하라" 저는 이 대목을 읽기만 하면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가슴이 설레입니다. 지극히 연약한 제자들, 실패한 제자들에게 얼마나 웅대한 비전을 품게 하시는지요! All Nations & All Peoples! 자기 믿음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던 자들에게 세계 선교의 거대한 비전을 품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2001년 부활의 아침이 우리 모두에게 비전의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꿈이 되살아나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곧 비전입니다. 새 비전을 품는 새 소망의 부활주일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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