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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죽은 나사로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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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한국교회가 나사로의 가정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여기를 가보아도 저기를 가보아도 절망적이다, 안 된다 하는 이야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된다, 희망이 있다. ”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는 일은 전부 비극적이고 괴로운 일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비극을 희극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115년이 된 어느 감리교회의 목사님이 11월 첫 주에 하신 설교가 감리교는 희망이 없다, 기독교는 희망이 없다는 내용이었다는 말을 듣고, 그 설교 테이프를 구해서 들어 보았더니, 정말로 희망이 없다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어떤 면으로 보더라도 우리 감리교회, 기독교는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사로의 집은 베다니라는 동네에 있었는데, 그 집은 예수께서 어디를 가실 때마다 들리면서 관심을 갖고 있던 행복한 집이었습니다. 이 가정은 오빠인 나사로가 아버지처럼 가정을 이끌고 있었으며 큰 여동생인 마르다와 막내 여동생인 마리아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덜컥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누이들이 예수님께 전갈을 보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이 들었나이다. ”
다른 때 같으면 예수께서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오셨을 터인데 이번에는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능력이 있으시고 말씀 한 마디만 하시면 병을 고치는 권세가 있는 예수님이 오지 않았으니 나사로의 누이들이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얼마나 울음이 북받쳐 올랐겠습니까 얼마나 원망으로 가득 찼겠습니까
요한복음 11장 33절에 의하면 온 동네가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와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이 되어 일인당 년 간 국민소득이 일만 일천 달러가 되었을 때, 전 세계의 사람들이 한국이 어떻게 경제가 그처럼 발전했는가 하고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러나 민주화가 이루어져서 문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국민의 정부가 세워지면서 우리나라는 초상집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시장에 가보아도 초상집 같고 회사에 가보아도 초상집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비극이 왔습니다.
게다가 이제 대입 수능시험이 끝났기 때문에 “우리 아들, 우리 딸은 꼭 대학에 합격하겠지!” 하고 은근히 모두들 기대하고 있지만 분명히 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학에 떨어진 집은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얼마나 괴로워하겠습니까 게다가 3수, 4수를 한 집은 더욱 심할 것입니다.
감독선거를 해보니까 참으로 못할 일입니다. 나는 감독선거에서 3수만에 붙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잘 붙었습니다. 왜냐하면 압도적인 표로 감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경기연회에서는 내내 5표로 앞서던 분이 마지막에 한 표 차이로 졌습니다. 이번 총회가 끝난 후 감독이 되신 분도 병이 나고 안 되신 분도 병이 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 대통령 선거도 결과가 매우 아슬아슬한 상태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플로리다 주의 개표결과에 따라서 당락(當落)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경제계, 교육계, 문화계, 종교계와 사상계를 비롯한 모든 분야가 마치 베다니의 나사로의 죽음처럼 슬픔과 고통과 비극과 아픔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전갈을 보냈으므로 장례식 전까지만 예수께서 오시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곧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만에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밖으로 나가서 예수님을 영접한 마르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으시고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비극적인 곳에 아주 상상을 초월하는 선포문이 날아 온 것입니다. 이 말씀은 놀라운 희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난 후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뒤쫓아왔으며 앞에는 홍해가 가로 놓여있었습니다. 어디로든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육십만 명의 백성이 아우성을 쳤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출 14:11)
백 명이 데모를 하여도 정신이 없는데 육십만 명이 모여서 모세를 향하여 데모를 하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아마 요즘 같으면 모세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태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희망이 무엇입니까 그 희망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인간의 희망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
그러므로 모세는 자기를 원망하는 무리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모세는 이러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육십만 명이 손가락질을 하면서 시위하는 것에 대해서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믿는 신앙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힘입니다.
마르다의 신앙으로는 예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 것이니라 하고 말씀하신 것이 수긍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
따라서 합시다. “우리의 신앙은 계산착오다. ” 왜냐하면 지금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이 다음으로 미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역사는 지금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산술법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라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벳세다 광야에서 사흘동안 설교하시면서 병을 고치고 있을 때 제자들은 한 명도 은혜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전부 불평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서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습니다. “사흘이 지나도록 사람들에게 식사를 하도록 하지 않으니 예수님은 시간관념도 날짜관념도 상식관념도 없으신 분인 것 같아. 그러니 누군가 예수님께 가서 이야기를 해야겠어. ”
그래서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가서 “무리를 보내어 마을로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 14: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안드레가 한 소년이 갖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기적을 일으키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따라서 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는 큰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적은 것을 가지고 한다. ” 왜냐하면 여러분이 소홀히 여기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은 귀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서 오천 명을 먹이고서도 남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희망은 암담한 때 생기는 것이다. ”
오라비가 죽은 후 이 집은 얼마나 암담했겠습니까 앞으로 살아갈 길이 참으로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마지막 부활에는 살 줄로 믿습니다. ”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그러자 마르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이처럼 믿음은 이치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져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고백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여, 믿습니다. ”하는 고백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오라비를 어디 두었느냐”하고 물으신 후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무덤을 돌로 막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덤 속에서 나사로의 썩는 냄새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축사를 하신 후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썩는 냄새가 나던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는 썩는 것을 생명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신앙이 부활해야 하고, 우리 교회의 신앙이 부활해야 하고, 한국 기독교의 신앙이 부활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다시 살 수 있습니까
 첫째, 주님이 찾아오실 때 희망이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합시다. “우리 집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이런 집은 희망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따라 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너무 바쁘다 보니 예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은 많은데 예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은 많은데 예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은 많은데 예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집은 지금으로부터 62년 전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지만 우리 맏형님은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늘 목탁만 두드리던 집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집이 되었습니다. 우리 집안에서 목사가 네 명이 배출되었으며 손자뻘 되는 사람까지 목사가 되면 전부 다섯 명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집안도 예수님이 오셔서 함께 사는 영광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님의 말씀이요 구원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요 영생의 말씀이요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것을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습니다. ” 하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주여, 나는 종입니다.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나를 주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을 믿습니다. ”하고 고백할 때, 여러분에게 믿음의 싹이 돋아나서 희망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모든 인간의 세계는 막히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남이 잘되지 않도록 막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을 때에는 친구보다 좋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해관계가 생겨서 경쟁이 붙으면 친구가 원수로 변하게 됩니다.
이처럼 잘 되는 것을 막는 것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프기 때문입니다. 내가 감독이 되자 “어디 잘하나 보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
내가 처음 은혜를 받은 후 보통으로 욕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보니까 사람들이 구렁이나 염소나 송아지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은혜가 충만했던지 그런 소리를 듣고서도 “할렐루야! 아멘!”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말씀하시자 죽었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요 11:4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나사로의 부활은 모든 인간의 슬픔과 아픔과 의심이 전부 풀어진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년이 가기 전에 사람과 얽힌 것, 돈에 얽힌 것을 전부 풀어놓고 2001년에 대한 기대를 하면서 새롭게 출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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