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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더 좋은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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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여, 승리로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의 크고 놀라운 은총이 여러분과 여 러분의 가정에 차고 넘치기를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혈 안이 되었던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종교를 빙자하여 권세와 이익을 누리던 자들은 눈에 가시였던 예수님을 죽임으로 자기들의 뜻이 다 이루어진 줄로 알았습니다. 그렇게 철 저히 핍박을 가하고 그렇게 철저히 죽도록 하였으니, 이제는 예수로 인한 모든 고민거리는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축배를 들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비롯한 신실한 무리들은 이만저만 실망이 큰 것이 아니었 습니다. 그렇게 허망하게, 그렇게 힘도 한번 못써보고, 그렇게 철저히 배신을 당하면서, 그런 모함과 모욕과 수치를 당하시면서, 자기들이 주로 믿고 의지했던 분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 한 것입니다. 이제는 어디 가서 무엇을 해야 하나, 무엇을 진리라고 외쳐야 하나, 제자들은 그저 망연자실한 상태로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1815년에 되어진 일이라고 합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펼치고 있었는데, 대규모 해전이 벌어지게 되었답니다. 당시 영국군의 함대는 웰링턴 장군이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지금처럼 무선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때라 해전의 결과를 본토에 알리기 위해 서는 배에서 보내는 연기 등으로 사인을 정해서 표시했다고 합니다. 온 국민이 해전의 결과 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에 전쟁에 나간 아내, 아들이 전쟁에 나간 부모, 모두 가슴을 졸이며 전쟁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바다에서부터 사인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웰링턴이 패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온 영국은 졸지에 슬픔의 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 자욱한 안개가 걷히면서 다시금 바다로부터 사인이 올라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인은 "웰링턴의 군대가 프랑스 군대를 궤멸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슬픔에 잠겨 있던 온 영국은 졸지에 기쁨의 잔치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은 자들은 자기네들이 이겼다고 크게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제 자들은 크게 실망하고 실의에 빠져 뒷일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려온 소식이 무 엇입니까 그는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는 것이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절망 이 변하여 희망이 되는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의 승리 소식에 온 세상에 울려 퍼진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이 전파되는 곳에 참된 승리의 역사가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을 보면, 처음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으 로부터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 온 예루살렘 거리를 뛰어 다니며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에 의해 패배하고 없어진 것 같았던 교회는 드디어 힘있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더욱 강력히 제재를 가하였지만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전 진하는 교회를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울되기 이전에 사울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후, 그 의 인생이 180도로 바꿔지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복음을 반대하며 극심히 핍박하던 자가 이 제는 온 세계를 뛰어다니며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부활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한 사망 권세에 대한 통쾌한 승리의 부활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예언처럼 사탄의 머리통을 밟아 누르고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모든 비진리의 세력들이 무 릎을 꿇게 된 진리의 승리인 것입니다. 부활의 복음이 바로 선포되어지고 바로 고백되어지 는 자리에는 반드시 큰 승리가 함께 하였습니다.
부활 신앙은 놀라운 것입니다. 기독교의 생명력은 바로 이 부활 신앙에서 나왔습니다. 2천년 교회역사는 바로 이 부활 신앙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고난 중에 살다간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여자들 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 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않았습니다. 더 좋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초대교 회 성도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이 땅의 생명은 어차피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또 다시 같은 육신으로 부활한다 하여도 그 몸은 다시 병들고 다시 죽고 맙니다. 무덤에서 나왔던 나사로 도 다시 죽었고, 야이로의 딸로 다시 죽었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 청년도 다시 다 죽고 말았 습니다. 이 땅 생명의 부활은 같은 죽음을 또다시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한 부활입니다. 다시 절대로 죽지 않는 부활입니다. 그래서 더 좋은 부활입니다. 고린도 전도 15장 흔히 부활 장이라고 부르는 성경을 보면, 우리의 부활을 일컬어,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42-43절) 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부활의 소망이 있던 성도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것과 돌 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참아냈습니다. 그들이 거처한 곳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이었습니다. 그들은 산 사람으로 죽은 사람들이 내려가는 곳에 내려가 살았습니다. 땅 속과 동굴 속에서 그들이 살았는데, 그곳은 바로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는 곳이 아닙니까 지금도 초대교회 성도들이 숨어 신앙생활 하던 카타콤 지하동굴을 가보면 그들의 삶이 얼마 나 비참하였었는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 까 바로 더 좋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형경기장에서 사자들에게 그 몸이 뜯기면서도 그들이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더 좋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더 좋은 부활은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새벽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예수님의 부활하 신 몸은 단순한 육신의 재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현재 생명과 연속성이 있으면서도 분 명히 불연속성이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육신은 반드시 시공의 제약을 받으면서 상 하고 병드는 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썩지 않는 병들지 않는 신령한 몸이 었습니다. 시공을 초월할 수 있으면서도, 보고 듣고 말하고 만질 수 있는 몸이었습니다. 우 리는 그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죽으면 더 좋은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사람이 꾸며낸 말이 아니고 진리 되신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이고,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시며 증거 하신 일입니다.
교회는 이 신앙을 따라 부흥하면 진정한 승리의 역사를 경험해 왔습니다. 죽음을 이긴 승리, 이것이 없었다면 오늘의 교회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에 우리는 초 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이 더 좋은 부활에 대한 소망을 견고히 해야 될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분명 미래와 연결된 것이지만 현재와도 밀접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부활신 앙은 현재에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부활 신앙이 확실한 곳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역 사가 나타납니다. 개인의 신앙이 부활 신앙으로 굳게 세워질 때, 그 사람의 믿음생활이 달라 집니다. 한 교회가 부활 신앙으로 굳게 무장될 때, 그 교회의 영적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한 민족이 부활 신앙의 접촉을 받을 때, 그 민족이 달라집니다.
우리 나라에 공식적으로 정식 선교사가 발을 내디딘 때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이었습니다. 이날 오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목사는 제물포 항에 상륙하여 이 땅의 복음화에 불을 당기게 되었습니다. 물론 목사가 아닌 의료선교사로 1884년 9월 알렌이 들어온 것 을 공식적 선교 원년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1884년을 선교 100주년의 해로 삼았 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격적 복음 전파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때, 부활의 은총이 이 민족에 넘쳐 이와 같은 엄청난 부흥을 가져오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땅이 어떤 땅이었습니까 불교와 유교와 조상숭배와 귀신숭배로 쩔어 있던 땅 이 아닙니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복음을 받아들 이기에는 너무나 모든 환경이 나빴던 땅이 아닙니까 지금 만약 여러분이 그런 집단과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갑갑하고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보십시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교회와 성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통계로 이 제는 기독교 인구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같은 날 같은 시 간, 오늘 이 오전 11시 같은 경우, 전국 각지의 교회가 다 회집을 같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 난 파워입니까 부활의 복음이 이 땅에 울려퍼질 때 이 땅에 개벽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에 저는 이러한 부활의 생명의 역사가 저 자신은 물론, 여러분의 심령 심령에, 여러분의 가정 가정에, 그리고 주의 피로 세우신 교회 교회에, 그리고 이 민족 위에 차고 넘 치기를 소망합니다. 더 좋은 부활 에 대한 소망이 이 시간 여러분의 심령에 차고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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