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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부활신앙과 성령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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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주 부활주일날 주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와 순교하면서까지 주님의 부활을 외칠 수 있었던 배경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헛것을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주님이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제자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습니다. 바돌로매는 몸의 가죽을 벗기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순교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도하며 순교하였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를 했습니다. 안드레는 에데사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습니다.
맛디아는 예수살렘에서 돌에 맞고 쓰러진뒤 목메임을 당했습니다. 누가는 헬라에서 감람나무에 메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칼에 목이 떨어지면서도 예수 이름을 부르다 죽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백살까지 온갖 시련을 다 겪다가 죽었습니다.
죽음이 무서워서 도망쳤던 모든 제자들이 이렇게 순교하면서까지 외쳤던 메시지가 주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이들이 순교하면서까지 주님의 부활을 외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부활주일 제 설교가 여러분 마음에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 제 설교의 목적은 여러분에게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주는 것만이 제 설교의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을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을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부활신앙으로 이어지는 것이 제 설교의 목적입니다.
지난주 제 설교를 들으시면서 '맞어! 주님의 부활은 사실이야. 주님의 부활은 거짓이 아니야' 여러분에게 감동을 주기 위하여, 여러분에게 좀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설교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감동이나 이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활주일이 지났지만 이번 주도 주님의 부활에 대하여 설교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를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믿는 것으로 끝나지 마십시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이 부활신앙으로 이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활을 믿고 부활을 찬양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부활신앙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신앙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부활을 믿고, 부활을 찬양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뛰어난 명작이라고 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탠버그의 십자가'라고 하는 유명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는 이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스탠버그라고 하는 유명한 화가가 성 베드로 성당 위고 신부의 요청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성당의 부탁을 받고 그림을 조심스럽게 그려가다가 도중에 그만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림값이 너무 싸게 흥정되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면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림값을 다시 흥정할 생각으로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페피타라고 하는 집시여자 모델을 놓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을 그리다가 잠깐 쉬게 되었는데 페피타라고 하는 여인이 저 한곳에 초안만 만들어 놓은 그림을 보면서 "저 그림은 무엇인가요"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그림입니다. "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모습이군요. " "그렇습니다. " "무슨 사연입니까" 교회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한 집시 여인의 질문입니다. 좀 귀찮았지만 설명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통속적인 성경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좋은 일을 많이 하시다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이 페피타라는 여인은 그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슬퍼합니다. 너무너무 슬퍼하니까 화가인 스탠버그는 그 우는 여인을 위로할 마음으로
"울지 마세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셨다가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셨으니까 울지 마세요" 그랬더니 눈을 번득이면서 "정말로 부활하셨습니까" 이 여인의 얼굴이 다시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기쁜 얼굴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는 순간 스탠버그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지금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만 백성을 위해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셨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듣고 저 사람은 저렇게 밝은 새 생명을 얻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 나의 삶은 어떠했는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리면서 돈 적게 준다고 흥정이나 하려고 하고.. 그는 여태까지 주님의 부활을 머리로 알고, 믿는다고 말은 했으나, 삶은 전혀 부활신앙과는 상관없이 살았던 것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그림을 다시 그렸습니다.
부활 신앙을 회복하면서 그린 그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스탠버그의 십자가는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고 영감을 주는 그림으로 기독교사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 부활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말로 하는 것으로 끝낼 수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그렇다면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기 있는 성경이 사실이고, 여호와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주시라면 주님의 부활도 사실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습니다.
발명왕 아이작 뉴톤에게 무신론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뉴톤이 작은 태양계 모형을 만들어서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많은 별들이 비치는 모양을 만들어 놓고 그 친구를 초청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태양의 모형을 보더니 "야 정밀하게 잘 만들었군. 이거 누가 이렇게 잘 만들었나"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뉴톤은 대답하기를 "하룻밤 자고 났더니 저절로 생겨났어. 만든 사람은 아무도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황당해서 말합니다. "이 사람 누구를 바보로 아는가 만든 사람이 없이 어떻게 이런 정밀한 태양계 모형이 생겨날 수 있는가"
그때 뉴톤은 "이런 작은 것 하나도 저절로 생겨날 수가 없다면 이것보다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정밀하고 질서 정연한 태양계와 우주 만물은 어떻게 설계한 분과 만드신 분이 없이 저절로 생겨날 수가 있겠는가"하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는 이 시계를 설명하면서 많은 쇠붙이를 깡통에 넣고 손으로 흔들고 발길로 차고 이리저리 뒹굴렸다가 나중에 깡통을 열어보니깐 이렇게 잘 돌아가는 시계가 되어있었다고 하면 말이 됩니까
이 시계를 설계한 사람이 있고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우연히 태양이 생기고, 우연히 지구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만드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우주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시라면, 이 성경도 사실입니다. 성경이 사실이라면 주님의 부활도 사실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우리는 살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계셨을 때 선포하신 모든 말씀이 진리라는 확증인 것과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확증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서 선포하신 모든 메시지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영원토록 살아계셔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알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부활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부활신앙이 되고, 우리의 삶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주님께서는 40여일 동안 제자들과 자주 만나셨습니다.
4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여자들이나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난 것 외에도 열 제자들과 한꺼번에 만나셨고, 나중에는 열한 제자들과 함께 만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을 따랐던 500여명에게도 보이셨다고, 고전 15:6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이처럼 성경은 주님의 부활에 대하여 상세하게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보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의 부활을 희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보이셨다는 것을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알고 감동받고 기뻐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분들이 많습니다. 마치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처럼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감동받고, 기뻐하고, 놀란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갈리리 바다에서 아침 식사도 하였습니다. 부활의 주님과 대화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그들의 삶에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감동하고, 기뻐하고, 흥분은 하였지만 부활신앙의 삶이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다 다락방에서 숨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언제 그들에게 부활신앙이 나타났습니까 주님의 부활사건 이후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오순절 성령충만 사건이 일어납니다. 신앙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이적을 체험했더라도 오순절 성령 사건이 없이는 안됩니다. 우리 인간의 상태를 최고로 잘 아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모든 제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 외에 주님을 따르던 오백여명에게도 만나 주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부활신앙의 삶을 살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을 때 감동받았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도 했습니다. 기뻐뛰면서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심, 그 감격이, 그 기쁨이 삶 속에 이어지려면 성령충만를 받아야 그 결심과 그 감격과 기쁨이 삶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 이제 부활한 내 모습을 직접 보았으니깐 예루살렘에 나가서 복음을 담대해 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을 세상에 보내시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 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성령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활을 목격한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감격한 것만으로도 안됩니다. 부활신앙의 삶이 되려면 성령 충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은 선택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성령충만을 선택이라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기적을 보고 기도의 응답이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이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 뭐래도 오순절 교단의 목사가 되어 성령님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오순절 교단의 목사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주님의 부활의 선포도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선포할 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선포할 수 있는 능력, 부활신앙의 삶을 살수 있었던 능력은 바로 오순절 성령충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아무리 잘났어도 인간입니다. 인간은 천사가 아닙니다. 아무리 거룩한 척해도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첫사람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 죄의 자녀들입니다. 억울해도 할 수 없습니다. 원통해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비행사 잘못 만나면 잘못 만난 비행사 때문에 그 비행기안에 있는 사람이 다 죽을 수 있습니다.
억울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때 비행사 행동은 비행기 안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대표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처럼 우리들도 죄의 속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죄의 속성이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분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독일의 아우슈비츠의 참담한 수용소의 생존자였던 유대인 예이옐 디무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1961년에 예루살렘에서 히틀러 나치의 잔당들에 대한 전범 재판이 열렸을 때 히틀러의 가장 측근 참모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증인으로 소환이 되었습니다.
재판관이 예이옐 디무르에게 옆에 앉아 있는 아이히만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을 똑똑히 봐 주십시오. 저 사람이 아이히만이 맞습니까 좀더 다가가셔서 똑바로 보시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재판관의 요구에 예이옐이 한참 동안 아이히만을 쳐다 보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졸도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깨어난 그에게 쓰러진 이유를 물었습니다.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서 졸도 하셨습니까아닙니다. 그러면 증오심 때문에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미움 때문에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졸도 하셨습니까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랬습니까"
그때 그 사람의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을 봤을 때 그 사람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저는 놀랐습니다.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나의 동료들을, 그 많은 어린아이들을, 노인들을 어떻게 저 비참한 가스실로 몰아내도록 명령하고 집행한 사람일수가 있었겠는가 저는 그 사실 앞에 놀란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이런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나도 아이히만이 될수 있다는 사실 앞에 놀랐습니다. 나도 저 아이히만이 될 수가 있다. 내 속에도 아이히만이 살고 있다는 사실 앞에 놀란 것입니다.
내가 아히만을 보았을 때 내 속에도 아히만처럼 광기가 있고 미움이 있고 증오가 있고 살인의 광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 앞에 놀랐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남의 죄를 손가락질 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그와 같은 죄를 범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 속에 죄의 속성이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이 죄의 속성을 이기며 살 수 있는 비결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죄의 속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기며 사는 비결은 있습니다. 죄의 속성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적을 체험하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그 많은 기적을 본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잡히실 때 왜 모두 도망자가 되었습니까
병이 고침받으면 됩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고쳐주신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병고침, 기적. 이러한 사건들이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고, 기쁨을 주기는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순절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눅 24:4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그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떠나시기 직전에 무엇을 우리에게 주실까 기대했습니다.
어쩌면 이 제자들은 오병이어와 같은 능력을 행할수 있는 권능을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바람이나 파도를 명령하는 능력을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병든 자, 귀신들린 자들을 다 치료하는 능력을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성령충만이었습니다.
세계 복음화라는 엄청난 사명을 맡기고 떠나시면서 주신 약속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 성령충만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능력은 성령충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부활신앙의 삶을 살려면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사모해 보셨습니까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구해 보셨습니까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아 보십시오. 오늘날도 초대교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처럼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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