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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십자가와 부활!

본문

예수그리스도는 왜 십자가에 못박혔나 이 질문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 대부분 쉽게 대답할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증거하며 동시에 인간의 죄와 저주와 멸망을 증거하고 있다.
어떻게 동시에 그럴 수 있는가
원리는 간단하다.
예) 도쿄 지하철에서 취객을 구하려다 죽은 유학생 이수현씨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역시 두가지 사실을 함께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는 이수현씨의 조건 없는 사랑과 의로움을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이 사건의 원인제공자 취객에게는 그가 있는 자리가 그가 한 행동은 바로 죽음이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의 사건을 이렇게 생각해보자. 왜 주님은 자기 백성에게 버림을 받았는가 왜 유대인은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는가
이 질문에는 쉽게 정확한 대답을 내기 어렵다.
물론 그는 정치적인 피해자였고, 종교권력에 의한 대표적인 희생자였다. 오늘 본문 18절에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시기로서 넘겨준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답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다 했다고 치자. 그러나 그 백성들은 그래도 예수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았는가 불과 수일전만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하여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그를 왕으로 맞아들이지 않았는가
그러면 왜 도대체 무엇이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를 버리도록 했는가
오늘 본문에는 빌라도와 백성들의 재판광경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재판과정에서 이방인 총독인 빌라도는 계속해서 예수를 놓으려고 하고 있으며, 그에게 떡을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주 열렬하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빌라도는 예수를 놓기 위해서 명절을 당하면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중에 하나를 놓아주는 선심식민정책의 조항을 들어서 백성에게 직접 묻는다.
이제 유월절이 가까웠으니 내가 너희에게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바라바와 예수그리스도를 백성 앞에 세웠다. 성경은 이 바라바를 민란과 살인에 가담한 강도라고 묘사하고 있다.
자 빌라도가 이 두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마도 에수를 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빌라도는 아마도 속으로 관원들은 예수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지만 백성들은 분명히 에수를 택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전혀 뜻밖의 사태를 직면하게 되었다. 백성들이 에수를 원하지 않고, 바라바를 원한 것이다.
빌라도는 이어서 자신이 예수의 죄를 조사해 보았으나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백성들을 설득하려고 하지만 백성들은 끝까지 바라바를 구하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댄다.
성경은 이 상황을 가리켜서 만일 빌라도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그대로 조금만 시간이 가면 폭동이 일어날 정도로 백성이 흥분한 상태였다고 묘사하고 있고, 재판에 관해서는 심리와는 관계없이 "저희의 소리가 이겼다. "고 표현하고 있다.
심지어 빌라도가 "내가 너희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고 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은 오직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열정으로 "시저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라고 대답한다. 머뭇거리는 빌라도에게 "자신을 왕이라고 하는 자를 놓으면 시저의 충신이 아닙니다. "라고 그를 압박해 들어온다.
그리고 빌라도는 대야에 물을 담아 손을 씻고,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 무죄하다. "라고 선언하고, 백성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라고 스스로 저주함으로 예수를 죽이려 든다.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진다.
여기서도 한가지 의문이 떠나질 않을 것이다. 도대체 왜 백성들은 예수그리스도를 그토록 죽이기를 열망한 것일까 강도를 택하고 그들의 주를 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들이 자기의 행복을 사모하는 소원에 집착함으로 예수를 버렸고, 십자가에 못박도록 한 것이다.
정리해보자.
그들은 한 때 주님을 열심히 따랐었다.
왜 주님을 따랐는가
정답은 예수가 그들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예) 기적과 병고침과 능력과 권위, 그리고 떡을 주셨기 때문이다.
또 예루살렘성에 입성할 때만해도 백성들은 열렬히 예수님의 편이었다. 그들은 그 능력 많은 예수가 이제는 자기들의 왕이 되어 그들이 소원하는 것들을 다 이루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들의 기대대로 되는 것처럼 보였다.
주님은 거의 개혁의 기수처럼 보였다.
성전에 들어가서 짐승들을 몰아내시고, 장삿꾼들을 꾸짖으셨다. 상을 엎어버리셨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의 권위를 묻고 따져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을 차례로 논쟁하여 아무소리 하지 못하게 입을 막아 버리셨다. 그리고 즉시로 그들의 은밀한 죄를 드러내 신랄하게 책망하셨다. 이 회칠한 무덤들아, 이 위선자들아… 하며 그들의 권위를 완전히 무너뜨리셨다. 사람들은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시원했다. 그들이 알면서도 혹은 모르고 있던 그들의 비리가 드러나자 더욱 예수를 기대했다.
그러나 상황은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예수로부터 직격탄을 얻어 맞고, 공개망신을 당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하나가 되어서 예수를 없앨 모의를 꾸미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소위 예수의 비리를 캐기 지작했다. 이들은 먼저 가룟유다를 매수했고, 그를 끄나풀 삼아서 예수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불법으로 일단 체포했다. 그리고 많은 위증자들을 세워서 예수를 빌라도에게 고소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용의주도하게 사람과 돈을 풀어서 백성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예수는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고, 만일 그를 그대로 두면 로마 군이 우리 모두를 멸할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그리고 만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데 성공하면 한 턱을 크게 낼 것이라고 금품으로 무지한 백성들을 매수한 것이다.
자 이제 기적적인 능력을 기대했던 예수는 힘없이 잡혔고, 취조를 받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이제 불똥아 자신들에게로 튈 것이 거의 확실해지자 백성들은 금방 마음이 바뀌었다.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던 군중들은 다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열렬히 외치고 있다. 이 극적인 전환이 그들에게는 쉬웠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예수가 의롭든지 악하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요, "예수가 자신들의 바라는 소원을 들어줄 것인가"하는 것 만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차라리 강도를 풀어달라" "우리의 왕은 시저밖엔 없다. "라고 미친 듯이 고함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에수를 따랐던 것도, 예수를 버린 것도 오직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 자신의 행복과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이 극적이 역전이 이들에게는 아무 것도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들의 욕구가 예수를 따르게 했고,
동일한 사람들의 욕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다.
예)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 이후에 사람들은 예수를 억지로 잡아 왕을 삼으려고 했다. 이 때 주님은 그들에게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도 아니고, 기적을 보아서도 아니다. 단지 너희가 나에게서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다. "라고 그들의 정확하게 주님을 따르는 의도를 드러내셨다.
예)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고, 저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요, 자기의 배를 섬길 뿐이라고 말하였다.
바로 이러한 욕구가 오늘날도 예수를 따르게 하고 있고, 그를 찬양하게도 하며, 동시에 에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하게 욕을 보이고 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오늘을 부활주일이다. 예수께서 십자게에 죽으시고, 장사 지낸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날이다.
사람들은 부활을 대단히 좋아한다.
부활의 능력, 부활의 영광, 부활로 인한 영생…
이 모든 것들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요, 축복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부활의 영광에는 십자가의 죽음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처럼 보이는 어느 무엇도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없는 능력과 부활은 꾸며진 가짜임을 기억해야 한다. 진정한 부활의 능력의 기초는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교회는 십자가 위에 세워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십자가를 제거한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화려한 종교적인 예식, 엄청난 규모의 예배당, 좋은 옷을 입은 많은 무리들... 이 모든 것이 Nothing인 것이다.
만일 십자가가 없다면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있지 않다면 현대 교회가 주장하는 영광과 능력과 부귀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그들 스스로의 종교심으로 만들어낸 사상누각이요, 신기루일 뿐이다.
예) 중세의 십자군 전쟁이 무엇인가 바로 십자가를 부적 삼아 치룬 십자가에 정 반대가 되는 전쟁이었다. 마치 강한 블레셋을 이기기 위해서 법퀘를 전쟁터에 앞세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것이다. 법궤는 빼앗기고, 그들은 패전하였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싸움이 무엇인가
오늘날 한국 성도들의 싸움은 무엇인가
십자가를 부적 삼아 그 능력을 의지하고 싸워 나도 성공하리라.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말리라.
예) 금요일 저녁 기도회 후에 인터넷을 통해서 교회성장 연구소 소장이 하는 세미나를 잠시 들었다. 그가 한 말 중에 성장하는 교회의 특성을 잘 살펴보니까 세가지 단어를 많이 사용하더라는 것이다. "축복, 믿음, 성령" 이 세가지 단어가 설교중에 많이 사용되는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세 단어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열망하는 소원을 들어 줄 수 있는 단어이다. 그들의 욕구에 아주 부합하는 단어인 것이다. 그들의 욕구를 들어준다는 메시지를 들으니 사람들은 모이는 것이다. 십자가 없는 부활의 열매만을 따먹기 원하는 사람들이 매우 좋하하는 단어이다.
반면에 죄와 심판, 십자가를 질 것을 외치는 교회는 부흥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 말은 저들의 모든 욕구를 거스리는 말이다. 자신들의 욕구가 거절 당하고 자신들의 소원이 성취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에 사람들은 기피하는 것이다.
분명히 복음에는 용서와 사랑과 병고침과 축복과 역사의 개념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체험하고 확인한 이후에는 무엇인가 계속 그것만을 더욱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가 아니다. 그 이후에는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등에는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산 제물로 드려서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삶을 사는 것이 성경의 믿음이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십자가로 인해서 부활의 영광과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다..
100년전 이 복음의 불모지인 조선 땅에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가 바로 순교의 피,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자신을 산제물로 드렸던 믿음의 선배들의 순교의 십자가로 인해서 세워진 것이다.
수많은 성도들과 주의 종들이 십자가를 짐으로 그 피로서 그 믿음을 지켰고, 교회의 기초가 된 것이다. 매 맞는 것과 옥에 갖히는 것과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왕따를 당하는 것과 가문에 쫒겨나는 것과 고문과 목베임과 사약을 받았다. 그리고 그 기초 위에 한국 교회는 세워졌고, 지금 우리는 구원의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이다.
만일 그들이 십자가를 거부했더라면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이 이루어졌을까
우리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피 값으로 21세기의 교회를 물려받은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선배들이 십자가를 달게 지고, 순교의 피를 흘림으로서 세워주고, 지켜 준, 교회를 가지고 세력다툼이나 하고 있으면 않된다. 영웅주의적 발상을 가지고 자기의 세력을 키우는 도구로 삼아서는 않된다. 성도들은 이 거룩한 교회의 상속자로서 이제 달콤한 자신의 욕구만을 성취해 줄 것을 요구하는 종교로 타락시켜서는 않된다.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야 한다.
이 모습을 여호와 하나님은 21세기 한국교회에 원하시는 것이다.
21세기를 맞는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거룩한 순교의 피로서 우리에게 전달된 교회를 기적의 행상꾼이나 사람에게 아첨하는 광대나 저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창녀와 같은 존재로서의 교회를 만들어서는 안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진정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묵묵히 자기 십자가 시대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교회를 원하신다. 그러한 성도가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 한국교회가 들레지 아니하고, 세상과 다투지 아니하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여호와 하나님은 진정한 부활의 능력과 영광을 교회에 허락하실 것이고, 세상에 참된 소망을 주는 한국 교회가 될 것이다.
주님은 요한복음 12:24절을 함께 찾아서 읽도록 하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진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교회가 이 진리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요,
교회가 이 진리 안에 거하면, 모든 여호와 하나님의 부활의 진정한 능력이 한국 교회 안에 오늘 예배하는 우리 교회 안에 머물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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