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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십시오

본문

오늘날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고린도 교인들도 부활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의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부활이 자신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부활을 잘 믿지 못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사람이 어떤 사실을 믿게 되는 것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은 분명하게 믿습니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듣고 간접적인 경험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경험한 것은 아닐지라도 내가 믿을만한 사람이 경험한 것은 믿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책을 통해서 학습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경험이 없을지라도 책을 읽고 학습하여 믿게 됩니다. 책을 통해서 학습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그 사실을 납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내가 경험하여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려면 먼저 죽어야 하는데 죽음은 미리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믿을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의 증언을 듣거나 아니면 책을 읽고 학습하여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도 바울의 권면을 듣기를 원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증언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얼마나 신뢰하느냐에 따라 듣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평소에 늘 거짓말을 하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우리에게 어떤 사실을 증언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기독교 2000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엘리트 학자였는데 자신이 기왕에 성취한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입니다. 바울의 삶과 죽음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그의 증언을 참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진실과 열정 그 자체였습니다. 이제 그가 목숨을 바쳐 증거했던 부활에 관해 사도 바울의 증언과 설명을 함께 상고하기를 원합니다.

I.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부활
35절을 보면, 고린도 교인들은 두 가지 의심을 품었습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첫 번째는 어떻게 썩어 없어진 몸이 다시 살 수 있느냐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부활한다면 어떤 몸으로 부활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심을 갖고 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세 가지 유추를 통해서 부활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설명하는 순서는 질문의 순서와 반대입니다. 질문에서는 죽은 자들이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 첫 번째 질문이고, 어떤 몸으로 사느냐는 것이 두 번째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답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36절부터 49절까지에서는 어떤 몸으로 사느냐 하는 것을 설명하고, 50절부터 58절까지는 어떻게 죽은 몸이 살 수 있는가를 다룹니다.
1. 어떤 몸으로 사는가
1) 씨의 비유 (36-38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여호와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우리가 씨를 뿌리면 그 씨가 썩어서 죽어야만 식물이 살아납니다. 그런데 씨와 식물은 그 생긴 모양에서 서로 다릅니다. 씨를 뿌릴 때, 씨의 모양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것이 장차 어떤 식물로 나타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씨는 하나의 알갱이이지만 뿌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뜻대로 형체가 생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썩어서 어떤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 땅에서 우리가 살고있는 동안에 우리의 육신을 보아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알 수는 없지만 그 속에는 분명히 살아있는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부활체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씨의 모양만 보고는 식물의 모양을 짐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형체가 있습니다. 그래서 씨앗을 심으면 그 속에서 식물이 탄생합니다. 생명의 씨앗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죽으면 우리도 반드시 부활합니다. 우리 안에 생명의 씨앗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씨앗은 곧 성령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생명의 씨앗인 성령님을 모시고 살면 반드시 부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38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주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시고 주관자이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씨의 형태는 그 씨로부터 자랄 식물의 형태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 식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식물에게 주신 고유의 형태를 갖게 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일입니다.
2) 어떤 육체로 부활하는가 (39-41절)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 등 우리가 이 땅에서 보는 육체도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육체를 갖고 있는 것이든 광채를 갖고 있는 것이든 서로 다릅니다. 각자는 고유한 것을 타고납니다. 각자는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되는 자기만의 고유한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이 땅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다양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이 땅위에 살고 있는 생물들도 각각의 고유한 형태를 갖고 있는데 하늘에 있는 것들도 각각의 고유한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존재하는 육체의 형태와 하늘에 존재하는 형태들, 곧 해, 달, 별 등은 서로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크게 나누어서 말하면, 이 땅에 있는 것들과 하늘에 있는 것들이 서로 다른 존재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바울이 이 논증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양한 존재를 이 땅과 하늘에 만드셨다면,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존재방식이 그렇게 다르다면 도대체 왜 당신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새로운 존재방식인 부활체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태양이나 달과 별들의 존재방식은 이 땅에 있는 생물들의 존재방식과 크게 다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단지 우리가 지금 경험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부활체를 믿지 못하고 부정합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양한 차원의 생명체를 만드셨다면 당연히 부활체도 그분의 계획 속에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주님께 와서 "선생님, 어느 남자가 결혼한 뒤에 죽었는데 그의 동생이 그 지방의 관습에 따라서 형수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그 동생도 죽게 됨으로 셋째가 형수와 살게 되었습니다. 계속 그런 식으로 계승하다가 7 형제가 모두 한 여자와 살게 되었었는데 부활 후에 그 여자는 도대체 누구와 살게 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실제로 발생한 상황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을 우습게 만들려고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한 마디로 "네가 오해했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에서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부부는 너무나 정이 좋아서 "우리 다음 세상에서도 만납시다"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일찌감치 꿈을 깨시기 바랍니다. 결혼해서 사는 것은 이 땅의 존재방식입니다. 부활한 후에는 그런 관계와 상관이 없습니다. 부부간에 사랑을 하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만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이렇게 걱정을 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결혼해서 함께 사는 재미로 인생을 살고 있는데 부활한 후에는 그런 것이 없다면 나는 차라리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 ' 그러나 그런 생각도 역시 우리의 사고가 이 땅의 한계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한 마디로 이 땅에서 사는 존재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이런 변화를 약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체는 우리의 부활체를 약간 예시해 준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와 같이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문이 닫혀있는데도 방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또 때로는 옆에 계셨는데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 땅의 존재방식과 다르기 때문에 이 땅의 육체를 입은 사람은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새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지금 우리가 경험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지극히 단세포적이고 어리석은 사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여러 생물체들의 다양한 존재방식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 4의 몸으로 변화시킬 것을 분명히 믿고 소망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두 종류의 몸 (42-44절)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이제 바울은 앞에서 설명한 비유들을 종합해서 설명합니다. 땅에 뿌려진 씨와 성장한 식물간에는 서로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썩을 몸과 부활한 몸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믿겠다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방식에 따라 다른 지각을 사용하여 경험합니다. 사물은 눈으로 보아 알고, 소리는 귀로 듣고 감별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것은 손으로 만져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공기는 코로 숨을 쉬어야 알 수 있고, 전파는 안테나를 세워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것들도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다면 부활체를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서 부인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고입니까
씨를 심으면 씨가 썩고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썩어질 육체가 죽어 없어지면 영적인 몸이 다시 삽니다. 바울의결론은 육의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 즉 영의 몸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가 있으면 이 육신이 썩어 없어진 후에 존재할 영적인 몸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체의 생명이 끝난 후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45절부터 49절까지에서 첫 사람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첫 아담은 흙으로 지어졌고 흙에 속한 자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아담 안에 속한 자이므로 흙으로 돌아가서 썩어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예수님과 같이 하늘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는 모두 죽습니다. 씨는 썩어 없어집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속한 자는 모두 삽니다. 새로운 몸으로 살아납니다.
2. 어떻게 죽은 몸이 살 수 있는가
이제 사도 바울은 직접적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우리가 부활할 날을 묘사합니다. 51절과 52절은 마지막 날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마지막 날에 나팔소리가 나면 우리 모두가 홀연히 변화됩니다. '홀연히'라는 말은 '순식간에' 혹은 '눈 깜짝할 사이에'라는 말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렇게 갑자기 변화됩니다. 그러면 죽은 자들은 썩지 않는 몸을 입고 다시 살고 우리 살아있는 자도 변화됩니다. 5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본문에 있는 '입는다'는 말은 '옷을 입는다'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날이 되면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원어의 의미는 입을 것이라는 미래가 아니라 입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리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말씀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의 몸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또한 사망이 사라집니다. 5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삼킨다'는 말은 목말랐던 사람이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셔버린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마셔버렸다는 말입니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었다'는 말을 원어에 따라 직역하면 '사망이 승리에게 삼켜졌다'는 말입니다. 이 문장의 주어는 사망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망은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실제 주어는 숨겨져 있습니다. 이 말속에 숨은 주어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망을 삼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수동태를 '거룩한 수동태'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25장 8절을 인용한 것인데, 이사야서에는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 주어로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사망을 삼켜버렸습니다. 다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이제 사망은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55절에서 바울은 당당하게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호세아 13장 14절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사망을 향해 그의 패배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에 동참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하게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망을 극복한 자만이 외칠 수 있는 외침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2. 바울의 권면 : 어떻게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부활에 동참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두 가지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1. 옛사람을 죽임으로 (50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혈과 육을 가진 자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혈과 육은 단순히 우리의 육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죄악된 본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없습니다.
뇌성마비 장애인 송 명희 시인이 어느 교회에서 설교할 때의 일입니다. 설교하는 중에 앞에 있는 어떤 전도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전도사님! 부활할 자신 있어요 어떻게 하면 부활할 수 있어요" 전도사님이 우물쭈물하면서 성경말씀을 이것저것 대면서 설명을 했습니다, "죽은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무덤이 열리고 어쩌고 저쩌고" 열심히 설명을 했습니다. 그 때 송명희 시인이 한 마디로 말했습니다. "죽어야 되요! 죽어야 부활할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부활합니까 죽어야 부활합니다. 무엇이 죽어야 합니까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매일 나의 옛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매일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옛 성품이 죽을 때 비로소 부활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혈과 육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비로소 부활할 수 있습니다. 이 부활의 영광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승리하신 주님과 연합함으로 (5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 이김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승리하신 주님과 연합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준비하는 것이 힘이 들지만 결혼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기쁨으로 준비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에게는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승리 때문입니다. 그 날이 되면 완전한 승리로 사망의 권세를 꽁꽁 묶어 놓고 살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여러 종류의 고난과 아픔을 겪고 삽니다. 그 모든 고통은 사실상 이 땅의 삶을 끝내는 종국, 즉 사망의 그림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날 사망이 삼킨 바 될 때에는 그 고통 역시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기대하십시오. 그 날을 소망하십시오.

3.결론 -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힘쓰라 (58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 마지막 구절에서결론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긍정적인 것입니다. 먼저 부정적인 명령은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부활에 대해 의심하게 하고 신앙을 흔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조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명령은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일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복음사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복음사역을 성실하게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사역을 맡겨주셨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역할은 다르고 삶의 자리도 다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사역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까운 주변의 사람들인 가족이나 이웃일 수 있습니다. 먼저 그들에게 여러분이 믿고 확신하고 있는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작정하고 복음을 전하십시오. 더 나아가서 그것이 직장동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일하고 있는 직장의 동료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라는 사명을 주셔서 나를 지금의 직장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려면 먼저 내가 부활신앙을 확신해야 합니다. 부활신앙을 확신한다면 내가 속한 삶의 자리에서 옛 성품을 죽이는 밀알의 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썩어도 다시 사는 것이고 죽어도 다시 사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약 10여 년 전에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휴거하겠다고 모여서 난리를 폈던 이단종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휴거하겠다고 삶을 전폐하고 난리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견고하게 서서 더욱 주의 일에 힘쓰며 살라고 권고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오늘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주의 약속을 믿고 눈물로 씨를 뿌리십시오. 당장에 열매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전해도, 아무리 전도하고 전도해도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에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열매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분명히 맺어 주십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둔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날이 가까울수록 부활의 확신 가운데 소망하고 기대하면서 오늘 여러분이 살고있는 그 자리에서 주의 일에, 복음 사역에 힘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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