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신앙의 영광을 주목하라!
본문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의 축복된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부활은 아나스타시스(Anastasis)로 표현됩니다. 그 뜻은 회복 혹은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다(Resurrection)입니다. 그렇습니다. 만물이 생기를 회복하는 계절에 우리의 신앙과 영적 생기를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활의 은총으로 부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는 부활사건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
이는 부활사건과 교회존립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뜻합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가 부활신앙 위에 서 있다면 성도 한사람 한사람도 부활신앙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중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리를 보고 "나의 주시며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가장 완벽하고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는 이 부분을 요한복음의 절정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에서 이 부활신앙의 고백을 빼버린다면 마치 심장없는 사람처럼 껍데기 신앙에 불과할 것이며 암흑과 공포만 있을 것입니다.
지난 교회역사 이천년간 흑암의 세력들이 이 부활신앙에 대해 얼마나 공격했는지 모릅니다. 어떤 경우에는 교묘하게 어떤 경우에는 무력으로, 때로는 이성적으로 때로는 감성적으로, 어떤 경우에는 실증주의로 또 어떤 경우에는 신비주의를 등에 업고 교회의 생명맥박이 더 이상 뛰지 못하도록 공격해 왔습니다. 우리의 대적들은 부활신앙을 가진 교회를 맹신자들의 집단으로 매도하기 위해 시체도난설, 무덤오인설, 기절설, 환상설, 신화설과 같은 이론으로 도전했으나 이 모든 잘못된 이론들은 깨어지고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부활신앙만이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순간도 대한민국의 각 교회에서 그리고 전 지구촌에서 부활찬송의 소리가 높이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예수 다시 사셨네!” 그러므로 성도는 부활신앙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죄의 삯을 받아 마땅하나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롬6:23). 죄는 사망을 낳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이 생명으로 반전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불신앙은 죽음의 서곡이라면 부활은 생명의 서곡입니다.
어떤이는 부활에 대해서 “지금은 부활절의 시기이다. 부활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시작하여 구원받은 자들의 부활로 끝난다”라고 묘사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두 부활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첫번째 부활에 대한 확고한 신앙에서 출발하여 장차 이땅에 재림하여 이루실 성도의 부활을 대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실증하면서 삽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새천년의 부활절이 우리에게 영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은혜의 부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있기전 약 일천년 전의 다윗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초대교회를 잉태케했던 베드로의 메시지 안에 등장합니다. 다윗의 신앙체험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일치되어 나타납니다. 이 베드로의 사도행전 2장의 부활메시지 위에 초대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태동의 메시지였던 부활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약의 예언을 통해 증거하셨고, 성령님이 은혜로 보증하셨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한 완벽한 사건입니다(22절).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부활신앙의 영광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 영광을 주목하고 부활신앙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의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살아계신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25절).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25절). 이것은 부활신앙을 마음에 간직한 다윗의 삶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그가 내 우편(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자리, 능력의 자리)에 계시도다”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던 다윗이 이와 같이 고백했다면 이천년 전 주님의 부활을 경험한 우리는 더 분명하고 확신있는 부활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지상의 어느 철학자나 종교지도자들도 다 무덤에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지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초대교회의 역동성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철벽같은 신앙고백에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의 현재성입니다.
2. 삶의 기쁨은 주님의 부활하심을 통해 옵니다(26절).
다윗은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라”고 찬송합니다(26절). 세상사람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나이가 들수록 절망에 가까워지나 우리 믿는 자들은 겉사람은 비록 후패할지라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소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활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이 가죽이 썩은 후 여호와 하나님을 보리라”고 했습니다. 살아계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영광된 만남은 오직 부활신앙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람의 복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때 오게 됩니다. 그래서 부할신앙이 있는자는 강한 사람입니다. 이를 깨달은 다윗은 “주께서 생명의 길(부활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기쁨이 충만하다”고 고백합니다(28절). 죄가 역사하는 곳에는 절망과 탄식이 있지만 부활이 있는 곳에는 기쁨과 생명이 역사합니다.
초대교회 첫순교자 스데반 집사는 돌팔매질 가운데에도 그의 얼굴이 천사처럼 환하게 빛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일어서서 자신을 영접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세계 저 너머에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좌절과 낙망이 있습니까 부활신앙으로 몰아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의 새생명으로 채워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우리에게 놀라운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31절).
다윗은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고 주님의 부활을 예언합니다(31절). 다윗은 자신의 몸이 썩을지라도 주님이 다시 오시면 부활의 생명으로 변화될 것을 믿었습니다. 사도바울도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고전15:20-25절).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음을 향해 나아갔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자들이 생명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미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부활의 주님께 대한 소망과 부활신앙이 진정 불꽃같이 타오르는 성도는 그의 임종시에 결코 “잘 있으시오(Good Bye!)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다시 만납시다(See you Again!)”라고 확신있게 외칠수 있습니다.
4. 우리가 부활사건의 증인이 되게 합니다(32절).
초대교회 믿음의 선배들은 부활사건을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내어던지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자 곧, 증거자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전도하는 일 때문에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었습니다. 전도는 전도받는 사람이 주님앞에 돌아오는 유익이 있지만 전도하는 사람도 영적인 힘을 얻게 합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사건을 증거하는 자에게 가장 가까이 동행하실 줄 믿습니다. 신앙생활이 무기력하고 생명력이 약하다고 생각된다면 전도하십시오. 부활의 생명이 다시 약동할 것입니다.
우리 새로남 교회가 새천년에도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전도의 사역이 힘있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오, 부활의 생명되시는 주님!”진리가 도전받는 세태 가운데서 우리로 부활의 권능으로 무장하게 하소서! 무기력과, 무의미를 질그릇같이 깨뜨려 버리고 부활의 주님과 동행케 하소서! 부활의 주님을 자랑케 하소서!
부활은 아나스타시스(Anastasis)로 표현됩니다. 그 뜻은 회복 혹은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다(Resurrection)입니다. 그렇습니다. 만물이 생기를 회복하는 계절에 우리의 신앙과 영적 생기를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활의 은총으로 부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는 부활사건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
이는 부활사건과 교회존립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뜻합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가 부활신앙 위에 서 있다면 성도 한사람 한사람도 부활신앙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중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리를 보고 "나의 주시며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가장 완벽하고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는 이 부분을 요한복음의 절정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에서 이 부활신앙의 고백을 빼버린다면 마치 심장없는 사람처럼 껍데기 신앙에 불과할 것이며 암흑과 공포만 있을 것입니다.
지난 교회역사 이천년간 흑암의 세력들이 이 부활신앙에 대해 얼마나 공격했는지 모릅니다. 어떤 경우에는 교묘하게 어떤 경우에는 무력으로, 때로는 이성적으로 때로는 감성적으로, 어떤 경우에는 실증주의로 또 어떤 경우에는 신비주의를 등에 업고 교회의 생명맥박이 더 이상 뛰지 못하도록 공격해 왔습니다. 우리의 대적들은 부활신앙을 가진 교회를 맹신자들의 집단으로 매도하기 위해 시체도난설, 무덤오인설, 기절설, 환상설, 신화설과 같은 이론으로 도전했으나 이 모든 잘못된 이론들은 깨어지고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부활신앙만이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순간도 대한민국의 각 교회에서 그리고 전 지구촌에서 부활찬송의 소리가 높이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예수 다시 사셨네!” 그러므로 성도는 부활신앙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죄의 삯을 받아 마땅하나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롬6:23). 죄는 사망을 낳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이 생명으로 반전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불신앙은 죽음의 서곡이라면 부활은 생명의 서곡입니다.
어떤이는 부활에 대해서 “지금은 부활절의 시기이다. 부활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시작하여 구원받은 자들의 부활로 끝난다”라고 묘사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두 부활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첫번째 부활에 대한 확고한 신앙에서 출발하여 장차 이땅에 재림하여 이루실 성도의 부활을 대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실증하면서 삽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새천년의 부활절이 우리에게 영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은혜의 부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있기전 약 일천년 전의 다윗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초대교회를 잉태케했던 베드로의 메시지 안에 등장합니다. 다윗의 신앙체험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일치되어 나타납니다. 이 베드로의 사도행전 2장의 부활메시지 위에 초대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태동의 메시지였던 부활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약의 예언을 통해 증거하셨고, 성령님이 은혜로 보증하셨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한 완벽한 사건입니다(22절).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부활신앙의 영광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 영광을 주목하고 부활신앙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의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살아계신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25절).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25절). 이것은 부활신앙을 마음에 간직한 다윗의 삶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그가 내 우편(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자리, 능력의 자리)에 계시도다”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던 다윗이 이와 같이 고백했다면 이천년 전 주님의 부활을 경험한 우리는 더 분명하고 확신있는 부활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지상의 어느 철학자나 종교지도자들도 다 무덤에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지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초대교회의 역동성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철벽같은 신앙고백에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의 현재성입니다.
2. 삶의 기쁨은 주님의 부활하심을 통해 옵니다(26절).
다윗은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라”고 찬송합니다(26절). 세상사람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나이가 들수록 절망에 가까워지나 우리 믿는 자들은 겉사람은 비록 후패할지라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소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활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이 가죽이 썩은 후 여호와 하나님을 보리라”고 했습니다. 살아계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영광된 만남은 오직 부활신앙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람의 복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때 오게 됩니다. 그래서 부할신앙이 있는자는 강한 사람입니다. 이를 깨달은 다윗은 “주께서 생명의 길(부활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기쁨이 충만하다”고 고백합니다(28절). 죄가 역사하는 곳에는 절망과 탄식이 있지만 부활이 있는 곳에는 기쁨과 생명이 역사합니다.
초대교회 첫순교자 스데반 집사는 돌팔매질 가운데에도 그의 얼굴이 천사처럼 환하게 빛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일어서서 자신을 영접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세계 저 너머에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좌절과 낙망이 있습니까 부활신앙으로 몰아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의 새생명으로 채워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우리에게 놀라운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31절).
다윗은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고 주님의 부활을 예언합니다(31절). 다윗은 자신의 몸이 썩을지라도 주님이 다시 오시면 부활의 생명으로 변화될 것을 믿었습니다. 사도바울도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고전15:20-25절).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음을 향해 나아갔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자들이 생명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미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부활의 주님께 대한 소망과 부활신앙이 진정 불꽃같이 타오르는 성도는 그의 임종시에 결코 “잘 있으시오(Good Bye!)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다시 만납시다(See you Again!)”라고 확신있게 외칠수 있습니다.
4. 우리가 부활사건의 증인이 되게 합니다(32절).
초대교회 믿음의 선배들은 부활사건을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내어던지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자 곧, 증거자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전도하는 일 때문에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었습니다. 전도는 전도받는 사람이 주님앞에 돌아오는 유익이 있지만 전도하는 사람도 영적인 힘을 얻게 합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사건을 증거하는 자에게 가장 가까이 동행하실 줄 믿습니다. 신앙생활이 무기력하고 생명력이 약하다고 생각된다면 전도하십시오. 부활의 생명이 다시 약동할 것입니다.
우리 새로남 교회가 새천년에도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전도의 사역이 힘있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오, 부활의 생명되시는 주님!”진리가 도전받는 세태 가운데서 우리로 부활의 권능으로 무장하게 하소서! 무기력과, 무의미를 질그릇같이 깨뜨려 버리고 부활의 주님과 동행케 하소서! 부활의 주님을 자랑케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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