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사랑의 추적자 2
본문
쿠바의 바닷가에 늙은 어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 마리도 낚아 올리지 못했습니다. 하루, 이틀, 열흘, 스무 날이 넘어 무려 83일이나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배는 여전히 빈배였습니다. 마침내 84일째 되는 날, 길이가 무려 18척이나 되는 거대한 청새치(Marlin)가 낚시 바늘에 걸렸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커서 사흘 밤낮에 걸친 사투 끝에 간신히 포획되어집니다. 그 정도의 크기라면 지난 83일 동안 공친 것을 충분히 벌충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늙은 어부는 뜻하지 아니한 상어 떼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자신이 잡은 청새치를 지키기 위해 상어 떼와 사투를 벌입니다. 그러나 해안에 도착했을 때 남은 것이라곤 앙상한 뼈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쓰레기 이상의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늙은 어부는 쓰레기 조각을 위해 무려 90여 일을 바다에서 허비한 것이었습니다.
1953년 소설 부문 퓰리처상 수상작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84여 일 동안 쉬임없이 낚시를 던졌습니다. 또 사흘은 낚싯줄을 잡고 밤낮으로 청새치와 사투를 벌였습니다. 다 됐다 싶었는데, 이제 내 것이라 생각되어진 것, 내 소유로 안전하게 확보되었다고 생각되었는데, 상어 떼가 출현했습니다. 내 것, 내 소유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 썼지만, 결국 남은 것은 앙상한 가시뿐이었습니다. 쫓을 수 없는 것을 끝까지 쫓으려다 허망한 빈손으로 남겨진 늙은 어부, 찢어질 대로 찢어지고 상처투성이 되도록 애썼는데, 그 속에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하고 서글픈 빈배, 오늘 우리의 살아가는 삶이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난 장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에 "그 후에"는 20장의 사건 이후라는 것이지요. 20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덤을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고, 그 날 저녁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의 다락방에 나타나셨으며, 그로부터 여드레 후 다시 다락방으로 제자들을 찾아오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 후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소는 '디베랴 바다'였습니다.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호수를 가리키는데 호수치고는 워낙 광활한 크기여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갈릴리 바다 주변에는 로마의 디베랴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도시 디베랴가 있어서 그 호수를 로마 정복기에는 디베랴 바다라고도 불렀습니다.
그 후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즉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또 나타나셨습니다. 14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그리고 2-13절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다 상세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 7명이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씩이나 대면하고도 갈릴리로 가서 자기들의 옛 직업인 고기 잡는 일을 다시 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갈릴리 바다는 밤에 고기가 많이 잡히기 때문에 그 날도 밤에 바다로 나가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 보라 하십니다. 정말 오른 편에 던졌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 때 주님을 알아보게 되고 해뜨는 갈릴리 바닷가 해변에서 주님이 준비해 놓으신 떡과 생선을 먹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상적인 사건의 나열 이면에 보다 깊은 의미가 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헬라어 원어 성경으로 본문을 읽어보면, 고기 또는 생선을 의미하는 말이 세 가지 다른 단어로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어 번역 성경은 모두 'Fish'라는 말로 번역했지만 원어 성경은 세 가지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5절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Children, you have no fish, have you' 이 때 고기, fish는 'prosfagion'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영어 성경은 'meat'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당시 갈릴리 지역 주민들의 주 수입원은 갈릴리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였습니다. 갈릴리 바다에는 잉어, 돌잉어, 청어 등 20여 가지의 고기가 풍부했다고 합니다. 이 고기들은 맛과 생김새가 다른 데서 나는 고기보다 맛있고 독특했다고 합니다. 막달라, 겐네사렛, 티베리아 같은 도시들은 매우 발달된 어획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보관술이나 시장화하는 기술 역시 매우 뛰어났다고 합니다. 막달라의 '막달'이라는 말 자체가 '물고기 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갈릴리 주변 지역은 수산업에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특히 여기에서 잡힌 고기들은 말리고 소금에 절여져서 로마에까지 수출되었다고 합니다.
'prosfagion'이라는 말은 성경 전체에서 오늘 이 본문에 유일하게 사용된 말인데, fish 중에서도 특히 말리고 소금에 절여져 있는 고기를 의미합니다. 금방이라도 밥상에 오를 수 있는, 로마인들의 식욕을 돋구어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고기를 의미하는 겁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지고 있던 제자들에게 '고기가 있느냐' 'Paidia, me ti prosfagion exete' 라고 물으신 것은 '그래, 돈 좀 벌었느냐' 라고 물으신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저들은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무려 일곱명의 장정이 한 배에서 수고했는데 빈뱁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 출신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가 있었는데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마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과 같습니다. 그렇게 수고했건만 빈배 빈손 뿐이었습니다.
주님이 저들에게 다시 말씀합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 저들은 아직 말하는 분이 주님이신 줄 모르고 있습니다. 어두운 밤이고 서로 오십 간쯤 떨어져 있었습니다. 오십 간이라면 약 100미터 정도의 거리입니다. 전혀 사람을 알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물을 던집니다. 던졌더니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헬라어 성경은 이 때의 고기라는 말로 'iksus'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iksus'는 보통 물고기를 의미하는 말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8절과 11절에서도 'iksus'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는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순종했더니 심히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5:6절에 보면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는 그물이 찢어졌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전하려는 것입니까
그리고 누가복음 5장에서는 깊은 데에서 고기를 잡았고, 오늘 본문에서는 육지에서 불과 10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얕은 곳에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입니다. 어부들에게 고기는 깊은 데에서 많이 잡힌다는 것은 기본 상식 중에 상식입니다. 누가복음 5장의 베드로는 아직 자아가 살아 있던 때였습니다. 그의 자아를 어느 정도 인정해주신다는 의미로 깊은 데로 가서 던지라 하셨고, 오늘 본문에서는 베드로의 자아가 완전히 Give-up된 채 비록 100미터밖에 안 떨어진 곳, 어부들의 이성과 경험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장소에서 큰 고기들을 낚아 올리게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 이후의 베드로는 어떠합니까 아직도 자아가 살아 있고, 자기 욕망의 불길이 아직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소리도 들었고, 기도하지 않는다고 꾸중도 들었고, 급기야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씩이나 직접 대면하고도 다시 자기 과거의 생업으로 돌아가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 있는 그였습니다. 그런 베드로의 그물은 찢어지는 그물이었습니다. 다 잘해 놓고도,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요 기적이라고 하면서도 인생의 그물이 찢어져버리고 맙니다. 자기 욕망이 살아 있는 한 그물은 찢어집니다. 마치 노인이 청새치를 잡고도 상어 떼에게 다 뜯겨 앙상한 가시만 남은 빈손 빈배로 돌아오듯, 아무리 종교적 체험으로 자위하고 교회에서의 공로를 내세운다 하여도 욕망의 뿌리가 남아 있는 한 인생의 그물은 찢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께 완전히 굴복하고 철저히 모든 것을 드릴 때 우리의 그물은 찢어지지 아니하고 온전히 인생의 결실을 낚아 올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오늘 본문 9절과 10절, 그리고 13절에서 Fish라는 말로 'Hopsarion'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은 '생선'이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Hopsarion'은 첫 번째로 말씀드린 'Prosfagion'과 비슷한 말입니다. 다르다면 'Prosfagion'은 보다 비즈니스적인 차원에서 상품으로서의 Fish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고, 'Hopsarion'은 보통 가정에서 요리해서 먹는 생선으로서의 Fish를 가리킵니다. 특별히 오병이어 기적에서 어린아이가 가지고 바친 두 마리의 고기를 'Hopsarion'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Hopsarion'이라 하셨을 때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떠올렸음은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한 사랑과 헌신의 증표로서 물고기 'Hopsarion' 두 마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Hopsarion'은 남을 섬기고 봉사하는 삶의 표시로서 'Hopsarion'입니다.
9절은 이렇습니다.
육지에서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Hopsarion)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제자들이 고기 잡는데 사용한 그물은 '딕티온'이라는 그물입니다. 딕티온은 3-4개의 작은 그물을 연결해서 만든 것으로 길이가 총 15미터 정도 되는 그물이었습니다. 그물 위에 나무 막대기를 달고 아래에는 돌을 달아서 물 속에 던져 놓고 노로 부채질하듯 고기를 몰아서 잡았습니다. 그러니 혼자서는 할 수 없었고 여러 명이 동업으로 함께 했어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도 7명 제자가 함께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이렇게 큰 그물로 밤새 헛그물질만 했습니다. 밤새 자신의 욕망에 불타서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밤을 새웠으니 얼마나 지치고 배고팠겠습니까 그런 저들을 위해 주님이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거기에 생선(Hopsarion)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미리 준비하신 떡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막 잡은 생선, 이것도 Hopsarion이지요, 그 생선도 좀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싱싱한 고기도 구워 먹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선뜻 음식에 손을 대지 못합니다. 한 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주님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친 것이 불과 열흘 전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똑바로 보고 있는 현장에서 누가 협박하거나 꾀이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하찮은 계집아이 하나가 '너도 그 당이지'라고 묻는 말에 아니라고 아니라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저주하고 맹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주님 뵐 면목이 없지요. 그런 저들에게 주님이 13절에서 이렇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지금 이 상황에서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욕을 하고 주먹을 휘두를 것입니다.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너희들에게 얼마나 잘 해 주었는데, 너희는 도대체 왜 나를 배신하였느냐' 고 그 이유와 책임을 따지려 들 것입니다. 아니면, 감정을 아주 극도로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지나간 과거는 일단 불문에 붙일 터이니다시는 인간답지 못한 배신 행위를 하지 말라고 점잖게, 그러나 따끔하게 훈계할 것입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 세 가지 반응 중에 한 가지로 반응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전혀 다르게 행하십니다. 보복이나 훈계가 아닌 봉사와 섬김을 보이십니다. 숯불에 생선(Hopsarion)을 맛있게 구우시고 떡을 미리 준비하여 두십니다. 그야말로 완전한 사랑입니다. 상대를 보고 따져서 하는 계산적인 사랑이 아니라 전적인 헌신과 봉사,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추적자이신 주님이십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고기, Fish라는 말을 세 가지로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철저히 생존과 소유만을 위한 prosfagion, 주님을 만나서 따르고는 있지만 아직도 세상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여 결국 인생의 그물을 찢어트리고야 마는 iksus, 그리고 완전한 사랑으로 제자들에게 봉사와 섬김을 아끼지 않으시는 Hopsarion.
부활절을 맞으시는 여러분, Hopsarion 까지 자라나십시오. 주님은 제자들이 헛그물질 하고 있을 그때부터 저들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저들이 필요로 하는 물고기를 채워주셨고, 허기진 배도 만족케 하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고 도우시며 채워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느 자리에 있느냐고.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오직 생존과 소유만을 위해 자기 욕망을 불태우는 Profagion에 있으십니까
믿기는 하는데, 주를 따르노라고는 하는데 아직 세상의 욕망이 더 큰 Iksus 상태이십니까 인생의 그물이 찢어집니다.
Hopsarion 으로 자라나십시오. 완전한 사랑으로 오신 사랑의 추적자,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와 섬김을 닮으십시오.
마지막으로 지난달 3월 묵상 에세이 가운데 하나 읽어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3월 3일 것인데, 장석환이라는 독자가 쓴 에세이입니다. 제목은 '4C의 차이'입니다.
목욕탕에 갔습니다. 온탕에 들어갔는데 물이 너무 미지근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열탕으로 옮기려고 발을 담그는 순간, 뜨거워서 흠칫 놀랐습니다. 그 옆의 해수열탕은 너무 뜨거워서 발을 담갔다가 바로 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온도를 살펴보았습니다. 온탕의 온도는 37. 6 C, 열탕의 온도는 41. 6 C, 그리고 해수열탕은 43. 6 C 였습니다. 저는 온도를 보면서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온탕과 겨우 4 C, 6 C 차이인데 이렇게 다르단 말인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승리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항상 사탄에게 얻어터지면서 삽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좋으신 분인 것을 고백하지 못합니다. 어떤 차이일까요 그것은 헌신의 차이일 것입니다. 관심도의 차이일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고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기에 '세상 사람'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도 되지 못한 채 힘들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승리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헌신도가 온탕과 열탕 혹은 해수열탕의 온도처럼 아주 조금밖에 차이 나지 않는 것을 종종 봅니다. 조금만 더 헌신한다면, 조금만 더 영적인 일에 눈을 뜬다면 승리하면서 살 수 있을 텐데, 그 조금이 안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조금만 더 뜨겁게 헌신한다면 사탄이 우리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할 텐데, 4 C 혼은 6 C 차이로 사탄이 우리 안에서 활개 치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영적 온도를 조금만 더 높입시다.
여러분, Profagion과 Iksus와 Hopsarion은 사실 그렇게 큰 차이가 아닙니다. 4 C, 6 C 정도 차입니다. 조금 더 용서의 폭을 넓히고, 한 번 더 이해하고,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인내하면 됩니다. 그렇게 크게 어려운 것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 디베랴 바닷가에 계셨던 주님, 사랑의 추적자이십니다. 그 주님 본 받아서 우리도 사랑과 헌신, 봉사와 섬김의 삶으로 성숙하고 열매맺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그러나 기쁨도 잠시, 늙은 어부는 뜻하지 아니한 상어 떼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자신이 잡은 청새치를 지키기 위해 상어 떼와 사투를 벌입니다. 그러나 해안에 도착했을 때 남은 것이라곤 앙상한 뼈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쓰레기 이상의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늙은 어부는 쓰레기 조각을 위해 무려 90여 일을 바다에서 허비한 것이었습니다.
1953년 소설 부문 퓰리처상 수상작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84여 일 동안 쉬임없이 낚시를 던졌습니다. 또 사흘은 낚싯줄을 잡고 밤낮으로 청새치와 사투를 벌였습니다. 다 됐다 싶었는데, 이제 내 것이라 생각되어진 것, 내 소유로 안전하게 확보되었다고 생각되었는데, 상어 떼가 출현했습니다. 내 것, 내 소유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 썼지만, 결국 남은 것은 앙상한 가시뿐이었습니다. 쫓을 수 없는 것을 끝까지 쫓으려다 허망한 빈손으로 남겨진 늙은 어부, 찢어질 대로 찢어지고 상처투성이 되도록 애썼는데, 그 속에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하고 서글픈 빈배, 오늘 우리의 살아가는 삶이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난 장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에 "그 후에"는 20장의 사건 이후라는 것이지요. 20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덤을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고, 그 날 저녁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의 다락방에 나타나셨으며, 그로부터 여드레 후 다시 다락방으로 제자들을 찾아오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 후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소는 '디베랴 바다'였습니다.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호수를 가리키는데 호수치고는 워낙 광활한 크기여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갈릴리 바다 주변에는 로마의 디베랴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도시 디베랴가 있어서 그 호수를 로마 정복기에는 디베랴 바다라고도 불렀습니다.
그 후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즉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또 나타나셨습니다. 14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그리고 2-13절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다 상세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 7명이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씩이나 대면하고도 갈릴리로 가서 자기들의 옛 직업인 고기 잡는 일을 다시 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갈릴리 바다는 밤에 고기가 많이 잡히기 때문에 그 날도 밤에 바다로 나가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 보라 하십니다. 정말 오른 편에 던졌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 때 주님을 알아보게 되고 해뜨는 갈릴리 바닷가 해변에서 주님이 준비해 놓으신 떡과 생선을 먹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상적인 사건의 나열 이면에 보다 깊은 의미가 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헬라어 원어 성경으로 본문을 읽어보면, 고기 또는 생선을 의미하는 말이 세 가지 다른 단어로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어 번역 성경은 모두 'Fish'라는 말로 번역했지만 원어 성경은 세 가지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5절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Children, you have no fish, have you' 이 때 고기, fish는 'prosfagion'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영어 성경은 'meat'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당시 갈릴리 지역 주민들의 주 수입원은 갈릴리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였습니다. 갈릴리 바다에는 잉어, 돌잉어, 청어 등 20여 가지의 고기가 풍부했다고 합니다. 이 고기들은 맛과 생김새가 다른 데서 나는 고기보다 맛있고 독특했다고 합니다. 막달라, 겐네사렛, 티베리아 같은 도시들은 매우 발달된 어획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보관술이나 시장화하는 기술 역시 매우 뛰어났다고 합니다. 막달라의 '막달'이라는 말 자체가 '물고기 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갈릴리 주변 지역은 수산업에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특히 여기에서 잡힌 고기들은 말리고 소금에 절여져서 로마에까지 수출되었다고 합니다.
'prosfagion'이라는 말은 성경 전체에서 오늘 이 본문에 유일하게 사용된 말인데, fish 중에서도 특히 말리고 소금에 절여져 있는 고기를 의미합니다. 금방이라도 밥상에 오를 수 있는, 로마인들의 식욕을 돋구어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고기를 의미하는 겁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지고 있던 제자들에게 '고기가 있느냐' 'Paidia, me ti prosfagion exete' 라고 물으신 것은 '그래, 돈 좀 벌었느냐' 라고 물으신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저들은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무려 일곱명의 장정이 한 배에서 수고했는데 빈뱁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 출신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가 있었는데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마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과 같습니다. 그렇게 수고했건만 빈배 빈손 뿐이었습니다.
주님이 저들에게 다시 말씀합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 저들은 아직 말하는 분이 주님이신 줄 모르고 있습니다. 어두운 밤이고 서로 오십 간쯤 떨어져 있었습니다. 오십 간이라면 약 100미터 정도의 거리입니다. 전혀 사람을 알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물을 던집니다. 던졌더니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헬라어 성경은 이 때의 고기라는 말로 'iksus'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iksus'는 보통 물고기를 의미하는 말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8절과 11절에서도 'iksus'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는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순종했더니 심히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5:6절에 보면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는 그물이 찢어졌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전하려는 것입니까
그리고 누가복음 5장에서는 깊은 데에서 고기를 잡았고, 오늘 본문에서는 육지에서 불과 10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얕은 곳에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입니다. 어부들에게 고기는 깊은 데에서 많이 잡힌다는 것은 기본 상식 중에 상식입니다. 누가복음 5장의 베드로는 아직 자아가 살아 있던 때였습니다. 그의 자아를 어느 정도 인정해주신다는 의미로 깊은 데로 가서 던지라 하셨고, 오늘 본문에서는 베드로의 자아가 완전히 Give-up된 채 비록 100미터밖에 안 떨어진 곳, 어부들의 이성과 경험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장소에서 큰 고기들을 낚아 올리게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 이후의 베드로는 어떠합니까 아직도 자아가 살아 있고, 자기 욕망의 불길이 아직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소리도 들었고, 기도하지 않는다고 꾸중도 들었고, 급기야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씩이나 직접 대면하고도 다시 자기 과거의 생업으로 돌아가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 있는 그였습니다. 그런 베드로의 그물은 찢어지는 그물이었습니다. 다 잘해 놓고도,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요 기적이라고 하면서도 인생의 그물이 찢어져버리고 맙니다. 자기 욕망이 살아 있는 한 그물은 찢어집니다. 마치 노인이 청새치를 잡고도 상어 떼에게 다 뜯겨 앙상한 가시만 남은 빈손 빈배로 돌아오듯, 아무리 종교적 체험으로 자위하고 교회에서의 공로를 내세운다 하여도 욕망의 뿌리가 남아 있는 한 인생의 그물은 찢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께 완전히 굴복하고 철저히 모든 것을 드릴 때 우리의 그물은 찢어지지 아니하고 온전히 인생의 결실을 낚아 올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오늘 본문 9절과 10절, 그리고 13절에서 Fish라는 말로 'Hopsarion'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은 '생선'이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Hopsarion'은 첫 번째로 말씀드린 'Prosfagion'과 비슷한 말입니다. 다르다면 'Prosfagion'은 보다 비즈니스적인 차원에서 상품으로서의 Fish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고, 'Hopsarion'은 보통 가정에서 요리해서 먹는 생선으로서의 Fish를 가리킵니다. 특별히 오병이어 기적에서 어린아이가 가지고 바친 두 마리의 고기를 'Hopsarion'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Hopsarion'이라 하셨을 때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떠올렸음은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한 사랑과 헌신의 증표로서 물고기 'Hopsarion' 두 마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Hopsarion'은 남을 섬기고 봉사하는 삶의 표시로서 'Hopsarion'입니다.
9절은 이렇습니다.
육지에서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Hopsarion)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제자들이 고기 잡는데 사용한 그물은 '딕티온'이라는 그물입니다. 딕티온은 3-4개의 작은 그물을 연결해서 만든 것으로 길이가 총 15미터 정도 되는 그물이었습니다. 그물 위에 나무 막대기를 달고 아래에는 돌을 달아서 물 속에 던져 놓고 노로 부채질하듯 고기를 몰아서 잡았습니다. 그러니 혼자서는 할 수 없었고 여러 명이 동업으로 함께 했어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도 7명 제자가 함께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이렇게 큰 그물로 밤새 헛그물질만 했습니다. 밤새 자신의 욕망에 불타서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밤을 새웠으니 얼마나 지치고 배고팠겠습니까 그런 저들을 위해 주님이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거기에 생선(Hopsarion)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미리 준비하신 떡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막 잡은 생선, 이것도 Hopsarion이지요, 그 생선도 좀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싱싱한 고기도 구워 먹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선뜻 음식에 손을 대지 못합니다. 한 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주님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친 것이 불과 열흘 전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똑바로 보고 있는 현장에서 누가 협박하거나 꾀이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하찮은 계집아이 하나가 '너도 그 당이지'라고 묻는 말에 아니라고 아니라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저주하고 맹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주님 뵐 면목이 없지요. 그런 저들에게 주님이 13절에서 이렇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지금 이 상황에서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욕을 하고 주먹을 휘두를 것입니다.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너희들에게 얼마나 잘 해 주었는데, 너희는 도대체 왜 나를 배신하였느냐' 고 그 이유와 책임을 따지려 들 것입니다. 아니면, 감정을 아주 극도로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지나간 과거는 일단 불문에 붙일 터이니다시는 인간답지 못한 배신 행위를 하지 말라고 점잖게, 그러나 따끔하게 훈계할 것입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 세 가지 반응 중에 한 가지로 반응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전혀 다르게 행하십니다. 보복이나 훈계가 아닌 봉사와 섬김을 보이십니다. 숯불에 생선(Hopsarion)을 맛있게 구우시고 떡을 미리 준비하여 두십니다. 그야말로 완전한 사랑입니다. 상대를 보고 따져서 하는 계산적인 사랑이 아니라 전적인 헌신과 봉사,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추적자이신 주님이십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고기, Fish라는 말을 세 가지로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철저히 생존과 소유만을 위한 prosfagion, 주님을 만나서 따르고는 있지만 아직도 세상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여 결국 인생의 그물을 찢어트리고야 마는 iksus, 그리고 완전한 사랑으로 제자들에게 봉사와 섬김을 아끼지 않으시는 Hopsarion.
부활절을 맞으시는 여러분, Hopsarion 까지 자라나십시오. 주님은 제자들이 헛그물질 하고 있을 그때부터 저들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저들이 필요로 하는 물고기를 채워주셨고, 허기진 배도 만족케 하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고 도우시며 채워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느 자리에 있느냐고.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오직 생존과 소유만을 위해 자기 욕망을 불태우는 Profagion에 있으십니까
믿기는 하는데, 주를 따르노라고는 하는데 아직 세상의 욕망이 더 큰 Iksus 상태이십니까 인생의 그물이 찢어집니다.
Hopsarion 으로 자라나십시오. 완전한 사랑으로 오신 사랑의 추적자,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와 섬김을 닮으십시오.
마지막으로 지난달 3월 묵상 에세이 가운데 하나 읽어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3월 3일 것인데, 장석환이라는 독자가 쓴 에세이입니다. 제목은 '4C의 차이'입니다.
목욕탕에 갔습니다. 온탕에 들어갔는데 물이 너무 미지근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열탕으로 옮기려고 발을 담그는 순간, 뜨거워서 흠칫 놀랐습니다. 그 옆의 해수열탕은 너무 뜨거워서 발을 담갔다가 바로 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온도를 살펴보았습니다. 온탕의 온도는 37. 6 C, 열탕의 온도는 41. 6 C, 그리고 해수열탕은 43. 6 C 였습니다. 저는 온도를 보면서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온탕과 겨우 4 C, 6 C 차이인데 이렇게 다르단 말인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승리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항상 사탄에게 얻어터지면서 삽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좋으신 분인 것을 고백하지 못합니다. 어떤 차이일까요 그것은 헌신의 차이일 것입니다. 관심도의 차이일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고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기에 '세상 사람'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도 되지 못한 채 힘들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승리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헌신도가 온탕과 열탕 혹은 해수열탕의 온도처럼 아주 조금밖에 차이 나지 않는 것을 종종 봅니다. 조금만 더 헌신한다면, 조금만 더 영적인 일에 눈을 뜬다면 승리하면서 살 수 있을 텐데, 그 조금이 안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조금만 더 뜨겁게 헌신한다면 사탄이 우리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할 텐데, 4 C 혼은 6 C 차이로 사탄이 우리 안에서 활개 치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영적 온도를 조금만 더 높입시다.
여러분, Profagion과 Iksus와 Hopsarion은 사실 그렇게 큰 차이가 아닙니다. 4 C, 6 C 정도 차입니다. 조금 더 용서의 폭을 넓히고, 한 번 더 이해하고,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인내하면 됩니다. 그렇게 크게 어려운 것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 디베랴 바닷가에 계셨던 주님, 사랑의 추적자이십니다. 그 주님 본 받아서 우리도 사랑과 헌신, 봉사와 섬김의 삶으로 성숙하고 열매맺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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