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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부활의 권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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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핵심은 부활 신앙에 있습니다.
부활을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끔은 현실에 치중하는 교인들 중에서
부활신앙만을 예외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부활을 빼면 기독교는 없어집니다.
기독교의 골자는 부활입니다.
인도의 선교사 썬다 싱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대학교수 한 분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오래 동안 젖은 전통의 힌두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믿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즉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바꾸었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오늘 이 부활신앙이 무엇인지 깨닫는 부활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있는 빌3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빌립보 교회는 상당히 모본적인 교회였습니다.
한마디로 기쁨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는
유대주의자들이 가만히 몰래 들어와 교인들을 선동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의 특징은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상당히 독선적 우월주의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다분히 세속적이며 외식적입니다.
지금 형식으로 표현한다면
그래도 교회 직분자가 되려면 유아세례를 받아야 하고
가문도 좋아야 하고, 대학도 나와야 하고
철저하게 주일성수 십일조도 드려야 하고
이렇게 신앙의 형식과 행위를 지나치게 강조를 하니
교인들은 또 예수 잘 믿는 것이 그런 건가 하고 솔깃해집니다.
이런 소문을 들은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이런 사람들을 개들, 행악하는 자들, 손할례당이라고 표현하며
이들을 삼가라 즉 경계하라고 하며
육체를 신뢰한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나도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2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그런데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에는 이보다 더 핵심적인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이다.
내일 가족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세례 받고 직분자가 되고 열심으로 교회 충성 봉사하고
십일조 드리고 성수주일 지키는 것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핵심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요
그리고 예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부활의 생명 즉 부활의 권능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여기에 눈이 뜨여지고 보니 가치관이 달라진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 만나 눈이 뜨여지기 전에는
세상에 것이 더 중요했고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만 그러나 예수님 만나 눈이 뜨여지고 보니 가치관이 바뀌어지고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도리어 해가 되고 걸림돌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영국 런던에 가면 구세군 숙박소가 있다고 합니다.
그곳은 아주 청결하면서도 숙박료가 비싸지 않기 때문에
여행자를 위해서 싼 요금을 받는 곳과
오갈 데가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숙소로 나뉘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는 아주 귀한 분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청소하고 봉사하는 연세 드신 여자분입니다.
이 분은 남편이 대학 총장이었는데
갑자기 그 남편이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남편이 남겨 놓은 유산만으로도 호의호식하며 남은 삶을 잘 살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남매가 있는데 둘 다 대학교수입니다.
그러니 얼마든지 노년을 평안하게 살 수 있는데도
그것을 뒤로하고 그 낮은 곳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한국의 목사님 한 분이 이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 분이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일을 찾았습니다. 내가 여기서 청소 봉사할 수 있다는 것 너무나 기쁩니다.
내 남은 인생에 가장 보람있는 일을 찾았거든요
오늘날 교회 안에도 얼마나 껍데기 신앙만 가지고
예수 잘 믿는척하며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꼬 하는데
우리에게 너무나 신선한 충격을 주는 삶입니다.
얼마 전에 옷로비 사건에 대한 국회 청문회에서
재벌 부인과 고관 부인들이 신앙과 교회를 들먹이며 자신들의 무죄를 강변하는 것을 보며 도덕성과 생명력을 상실한 교회의 치부를 보는것 같아 마음이 무척 씁쓸했습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교회의 권사들이었고 기독교 지성인들이었지만
신앙의 핵심이 없으니 사람들의 얼굴을 찌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한 일로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신앙인들이 가슴 치며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내일 가족 여러분 ! 우리의 병든 신앙과 잘못된 신앙태도를 고칩시다.
껍데기 보다 알맹이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집시다.
내 속에, 나의 삶에 예수 생명있느냐 에 더 삶의 비중을 두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바울은 8절에
전에 좋아하던 세상 것을 이제는 배설물같이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8절에서 자신이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을
무익한 것으로 여기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세상 지식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8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바울은 우선 예수를 아는 지식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즉 그는 예수를 알기 위하여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무익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는
예수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은 주님을 알아 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의 것들이나 혹은 자신에게 속한 것들에 의하여 붙잡혀 있게 되면 주님을 알아 가는 신앙의 과정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합니다. 바울은 이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바로 그리고 풍성히 알고자 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살펴보니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들이 거기에 해당됨을 발견합니다.
그 중 괜찮을 듯 싶은 한가지만이라도 붙들고 있다가는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놓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망설일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모든 것을 무익한 것으로 여기고 속히 손을 텁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모든 것을 주저하지 않고 쉽게 포기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진리를 발견했기 대문입니다. '가장 고상하다', 헬라어로 'uJperevcw'(휘페레코)인데 견줄 것이 없는 가장 위대하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들이 크게 보였고 이 땅에 속한 것들이 화려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주 예수를 만나고 보니까 별안간 눈이 번쩍 떠집니다.
눈앞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게 보입니다. 주님의 영광에 완전히 압도됩니다.
그 순간 이 전에 자신의 눈에 화려하게 보이던 그 모든 것들은 너무 초라하다 못해 도무지 붙잡고 있지 못할 더럽고 가증한 것들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더 귀하고 값진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자신에게 있는 것들을 쉽사리 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값진 보배를 발견하게 되면 달라집니다.
더 좋은 쪽을 택하고자 기를 쓸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하신 분이었습니다.
이 발견한 진리는 바울로 하여금 완전히 달라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으로 비쳐집니까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알려고 힘을 씁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귀한 분으로 발견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자신들에게 있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보배를 주님께 바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으로 우리의 머리를 채우고 가슴을 흥건히 적시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라는 진리를 5 영혼 깊숙이 깨닫기 전에는
신앙의 진전의 발걸음은 단 한 발자국이라도 떼어놓지 못할 것입니다.
블란서의 루이 14세는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사치스러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져보고, 모든 것을 다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해
종래는 심각한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유명한 의사들이 찾아와 진찰을 하였으나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의사가
 대왕의 병은 보통병이 아닙니다. 마음의 병입니다.
이 병을 고치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빌려 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루이 14세는 신하를 보내어 행복한 사람을 찾았으나 돈 있는 사람도, 지식 많은 사람도, 명예를 얻은 사람도
하나같이 행복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하는 행복한 사람 찾기가 힘이 든다고 했습니다.
실망한 왕이 하루는 시골길을 행차하다가
나무 밑에서 양치는 목자가 하프를 켜며 노래하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행복하느냐 예, 정말로 행복합니다.
루이 14세는 자기의 사정을 얘기하면서
당신의 속옷을 얻어 입으면 병이 낫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이 목동이 웃으며 겉옷을 들어 보이는데 속옷이 없었습니다.
그때 루이 14세는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있어도 행복한 사람의 속옷은 없구나! 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행복을 갖다 주는 속옷은
겉으로 걸치는게 아니라 마음으로 입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행복의 옷은
세상에 부나 권력이나 명예의 화려한 겉옷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기를 바랍니다.
이 행복의 속옷을 발견하면
세상의 겉옷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닫게 될 줄 믿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세상의 것을 다 해로 여긴다고 하면서
바울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즉 바울의 최대관심사가 무엇입니까 6
그건 바로 예수님이고 나아가 예수 생명 즉 부활의 권능인 것입니다.
예수 부활의 사건이 불과 30여년 지난 사건입니다.
이 땅에 6. 25동란 5. 16군사혁명이 일어난 지가 40, 50년 되었지마는
아직도 생생한 증인들이 살아있으니 곧잘 화젯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부활의 사건은
비록 30년이 지났지마는 바울에게는 너무나 생생한 사건이요
개인적으로도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이 지금 이렇게 강력하게 너무나 확신있게
찬213장 3절 가사같이
세상 부귀 영화와 즐겨하던 모든 것 주를 믿는 내게는 분토만도 못하다
너무나 당당하게 외칩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바로 부활의 권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부활의 권능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죽기까지 알려고 하는 부활의 권능이 무엇입니까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능력이 십자가 안에 나타나 있음을 안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능력이 십자가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삶의 용기와 희망을 주는 능력이 예수의 부활의 능력에 있음을 안 것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고치고 세우는 능력이
부활의 권능 속에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세상 부가 지식이 명예가 주지 못하는
참된 평안이 부활의 권능 속에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의 권능을 알기 위하여
예수의 고난과 죽으심을 본받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활의 권능을 덧입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십자가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의 고통, 그 죽음 뒤 에 부활사건이 있음을 중시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창조는 무에서 유의 창조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권능으로 나타나는 창조는 십자가 위에 세워지는 창조입니다. 이것이 더 놀랍고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임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의 결정체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수록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지식과 모든 노력과 모든 희생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좀더 알기 위해서 고난에 참여하려합니다.
같은 경험에 들어가기 전에는
같은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처럼 고난 당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려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몸에 가득 채우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귀한 고백을 합니다.
고전15:31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은 아주 귀한 말입니다 .
시간 시간마다 사건 사건마다에서 그는 날마다 죽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처럼 죽으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본 것처럼
그는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죽으려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 받아야 비로소 그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 대문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죽어야 그리스처럼 살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십자가 없는 부활을 바라고 있습니까
오래 살아야 하고, 편해야 하고, 성공해야 하며,
십자가가 없어야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어리석은 말을 아직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들아 가실 때
그 밑에서 소리지르며 "뛰어 내려라. 그러면 우리가 믿을 것이다"라는 그 외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간혹 괴변을 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우리의 고난을 담 당하셨으니
우리는 편안해야 한다는 얌체 같은 발상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를 쳐다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찌 편안하기만을 바랄 수 있습니까
생각한다는 것이 겨우 편안해야 한다니 말이 안됩니다.
이것은 헛된 신학입니다.
죄로 인한 죽음 저주의 고통, 심판의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고난, 선물로 주시는 시련, 우리를 교육하시는 훈련, 의로운 자의 고난, 그리스도인의 순교,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순교를 영광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이 고난은 곧 부활의 능력을 함께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앞에 있는 부활을 볼뿐만 아니라,
현재도 그리스도 인해 당한 고난만큼, 죽은 것만큼 살리시는 능력을
오늘 깨닫고 오늘 체험하고 오늘 감격해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이루려 하노라 고 말합니다. 앉아서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부활을 이루려 했습니다.
왜 그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절망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능력으로 사망을 이기고
불의를 이기고 영원히 승리하는 자가 되십시다.
바울이 지금 왜 부활의 권능을 알기 위하여
죽으심을 본받는 삶을 살려고 합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삶의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함인 것입니다.
12-14절까지 보면 바울에게는
신앙생활의 푯대가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닮아가고
그리스도인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에
바울은 전적인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기도 생활을 했고
세 번에 걸쳐서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선교 여행을 하면서
자신의 생명의 진액을 다 바쳤습니다.
그는 철저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이제 다되었다든지,
신앙에 완전한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12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고 합니다. 그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할 만큼 복음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그는 아직 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불타는 사명감과 함께 그의 겸손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조금 일해 놓고 할 일을 다한 것인 양 떠들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다 된 것처럼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고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13절에서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 합니다.
이 말씀처럼 성도는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전진하는 순례자입니다. 이제 다 되었다고 그 자리에 머무르면
그 순간 성도는 생명력을 잃고 타락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천국의 상급을 바라보며 전진해야 합니다.
결론
오늘 나는 부활의 권능을 위해 무엇에 힘을 써야 합니까
주님의 고난에 참예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고난에 참예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지신 십자가 질려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일본의 미우라 아야꼬는
척추 카니미소 라는 병을 11년간이나 앓고 있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결국은 아야꼬 여사는 육신의 병뿐만이 아니라 병과 씨름하면서
 빙점 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써서
전 세계에 복음의 불을 붙였습니다.
부활의 권능을 덧입은 사람은
자신의 상황은 물론이고 세상을 바꿉니다.
오늘 우리들도 부활의 권능을 덧입기 위해
내가 죽기까지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 부활의 능력을 덧입어
세상을 바꾸며 사는 능력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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