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예수 다시 사셨다
본문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이 아침에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무한하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일날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사람들의 호산나 외침 속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다가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셔서 둘러보신 후에 베다니로 물러 가셨습니다.
그 이튿날인 월요일 아침 다시 예루살렘에 가셔서 성전으로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쫓으시면서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일로 해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어떻게 잡아 없앨까를 의논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월요일 밤은 다시 베다니 에서 쉬시고 화요일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셔 서 하루종일 비유로 가르치시기도 하고, 반대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종말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수요일에는 베다니에 머무시면서 쉬셨고, 저녁식사 때에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있었으며, 가룟유다는 그 밤에 대제사장을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줄 것을 제안하였던 것입니다.
목요일,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음모가 점점 구체화되고 있는 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어 예루살렘 성내에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이날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 예비된 유월절 식탁 에 둘러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섬김 의 본을 보여주셨고, 이어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유다의 배신과 제자들 이 배신,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셨습니다.
이 때에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로 가고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은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밤을 새워 홀로 고통스러운 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기도하신 예수님은 금요일 새벽에 찾아온 유다의 배반의 입맞춤으로 제사장들이 보낸 무리들에게 체포되셨습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다 도망가 버리고 예수님 홀로 붙잡히셔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끌려가 심문을 받으신 후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셨습니다.
이 때에 가룟유다는 자기가 한 일을 뉘우치고 목매어 자살을 하였고, 예수님은 빌라도나 헤롯의 심문에 침묵으로 일관하셨으며, 빌라도는 죄를 찾지 못하겠노라며 놓아주려 하였으나 제사장들에 의해 동원된 무리들의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외침에 못 이겨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 주었던 것입니다.
오전 9시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오후 3시 경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울부짖으신 후 숨을 거두셨습니다.
저 물었을 때에 예수님의 시신은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청하여 바위 속에 판 새 무덤에 장사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인 토요일이 지나고 그 이튿날 이른 새벽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한 이른 새벽 무덤 을 찾아갔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확인하였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리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고,
그 후 문을 걸어 잠그고 모였던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 가롯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들과 그리고 엠마오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를 만난 두 사람의 제자가 함께 모여 예수님께서 과연 다시 살아나셨음을 신기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그 가운데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시며 은혜와 평안을 빌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제자들은 놀라서 무서워 떨며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의심하고 있느냐 손과 발을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데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하시며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시므로 완전하신 부활의 몸을 확증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이제 다시 사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과거, 현재, 미래적인 의미를 한 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1. 부활 사건의 과거는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합니다.
성경을 상고해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여려 차례 여러 장면으로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신 역사적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1) 향유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 개인에게 나타나 보이심 (요20:14)
2)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러 가는 여인들에게 나타나심(마28:9)
3) 베드로 개인에게 나타나 보이심(고전15:5)
4) 열 두 제자에게 나타나 보이심(고전15:5)
5)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 보이심(고전15:5)
6)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나타나 보이심(녹24:15)
7) 열 한 제자(도마가 빠졌을 때)에게 나타나 보이심(요20:19)
8) 열 한 제자와 도마까지 함께 모였을 때 나타나 보이심(요20:26)
9) 열 한 사도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와 다른 사도들이 함께한 자 리에 나타나 보이심(눅24:36)
아라비아 사막의 대상이었던 한 회교도가 기독교인을 만나서 자랑하기를 “우리 회교는 메카에 가면 우리들의 교주 마호멧의 분묘가 있으며 지금도 분묘 안의 관속에는 시신이 있어서 마호멧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나,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더라도 빈 무덤밖에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기독교인은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무덤이 비인 것은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호멧은 이 세상에서 살아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지만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하고 대답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마호멧이 창시한 회교는 죽음으로 끝난 죽은 종교이나, 기독교는 부활이 있는 산 종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며 다음의 여러 가지 학설을 내세워 부인하려 하기도 합니다.
1) 기절설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의식을 잃었든가 죽음 직전의 상태에서 장사되었다가 후에 다시 깨어났을 것이라는 설입니다.
그러나 어림도 없는 말입니다.
당시 법으로는 죽은 것을 확인하지 않고 매장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그들은 확인하였습니다. 창으로 옆구리에 찔렀습니다.
죽음 확인을 위해 무릎을 꺾는 법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너무도 확실히 죽었기에 꺽지도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2) 시체 도난설
예수님께서 생전에 3일만에 다시 사실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서 부활을 조작했다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로마의 군병들이 창을 들고 밤낮으로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환상설
실제적인 부활이 아니라 주님을 사모하여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부활이 환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환상을 40일 동안이나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볼 수 있었단 말입니까
4) 조작절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사실이 아닌 부활사건을 조작하여 유포하고 기록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모두 다 어이없는 사단의 말들입니다.
이는 성경을 불신하는 마귀들의 장난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거해 주고 있으며, 오늘의 교회들이 빈 교회가 아니라 넘치도록 채워지고 있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구주임을 웅변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나간 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는 실례는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첫째, 죽음을 두려워하며 비겁하게 십자가를 등졌던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강하고 담대한 복음의 증언자로 순교하였습다.
둘째, 죽음을 두려워하며 비겁하게 십자가를 등졌던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강하고 담대한 복음의 증언자로 순교하였습니다.
셋째, 빈 무덤을 보고 슬피 울던 막달라 마리아도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 뵌 후에 그의 눈에서 눈물이 말라 버렸습니다.
넷째, 교회의 설립은 부활 사건을 확신한 무리들의 모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섯째, 엠마오로 걸어가던 실망한 제자들의 발걸음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소망에 찬 생의 행진으로 변하였습니다.
여섯째, 살기가 등등하여 그리스도를 핍박하러 가던 사울의 발걸음은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전환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으로 끝난 죽은 종교가 아니라 부활이 있는 산 종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부활신앙의 현재는 우리의 삶을 바르고 강하게 해 줍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대할 때 대체로 아래 세 가지 형의 인간으로 나누어집니다.
1) 죽음을 자기와 상관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어리석게 방관하는 사람들
2)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고 미리 겁을 먹고 두려워 떠는 사람들
3) 죽음 너머의 부활을 믿고 기쁨으로 소망 중에 생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앙은 죽음 앞에서도 우리의 생을 힘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부활 신앙의 확신이 생기면 죽어도 산다는 믿음이 와지기 때문에 인간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만들어 주며, 새로운 의미를 찾아 살아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죽음처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금력이 굉장한 힘을 가진 것 같으나 돈으로도 죽음을 이기지 못하여 억만장자라도 죽음에게 이끌려가고 있습니다.
권력이 있어서 천하를 호령하는 것 같으나 결국 권세도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맙니다.
과학의 위력이 우주여행을 시도하고 있으나 과학의 힘으로도 죽음을 막아 내지 못합니다.
아름다움도, 젊음도 죽음 앞에서는 썩어져 감으로 무색해지고 맙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죽음에 항거하여 이길 힘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죽음을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사망에 대한 승리입니다.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생명의 삼킨 바 되리라”고 하신 말씀이 응하였다고 부활신앙을 소유한 사도바울은 사망에 대한 개선가를 불렀습니다(고전15:55).
우리도 이번 부활절을 맞이하여 십자가에 죽고 성령으로 다시 산 심령을 가지고 이런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욕구 가운데 생명에 대한 욕구 이상으로 강한 것이 없는데 이와 같은 인간의 가장 크고 근본적인 생명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허무와 절망이 지배하는 캄캄하고 어두운 무덤에서 사망의 돌문을 굴려내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실로 인류의 빛이요, 소망이며, 새 힘을 주는 생명이십니다.
오늘 무덤 속에 있는 것 같은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 도덕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소식이 임하여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은 오늘 현재 속에서도 우리들의 삶을 강하게 지배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교회의 선교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 속에 역사적인 사실로써 나타나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동시에 현재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바르고 강하게 이끌고 가며, 미래의 모든 소망을 채워 주는 인류를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선물입니다.
3. 부활 신앙의 미래는 만남의 소망을 채워줍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우리 주님은 부활의 약속을 성경에서만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봄에 자라는 나무 잎새마다 쓰셨다”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옳습니다.
우리는 이 새 봄에 모든 식물들에게서도 주님의 부활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지난 겨울 얼어붙었던 때를 생각해 보면 이 새 봄의 대지는 꿈만 같습니다.
그러나 꿈이 아닌 현실이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부활절에 나누어주는 계란의 의미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것 먹으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계란을 우리 봤을 때 죽은 것 같습니다.
“여기에 무슨 생명이 있겠나”라고 생각합니다.
어미 닭이 21일을 품고 있으면 거기에 생명이 태어납니다.
이것은 죽어도 다시 산다는 의미를 내포해 주는 것입니다.
계란을 보면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심같이 우리가 다시 부활한다는 소망을 충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왜 그러면 생것으로 주지 삶아 주는냐!
그것은 보관상의 문제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가운데는 부모, 자식, 아내, 남편을 저 세상에 먼저 보낸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헤어지기 싫은 사랑하는 사이를 죽음이라고 하는 괴물이 우리들을 이쪽 저쪽으로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견딜 수 없는 슬픔의 함정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들이 지금 저 하늘나라에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나 그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희미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거울 속으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을 서로 대하여 보는 것 같이 확실할 것이며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완전히 알 것이라”(고전13:12)고 하셨습니다.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11:25-26)
부활 신앙에 대한 소망은 미래의 우리들을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앞서 간 모든 성도들과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의 만남을 이룩해 줄 것입니다.
이 만남은 다시 헤어짐이 없는 영원한 만남이 될 것입니다.
죽음은 썩어지게 하는 것이요 이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장차 우리들에게 만남의 소망을 채워 줄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전15장에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전도도 헛것이요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도 헛것이요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거짓 증인이 될 것이요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도 침륜할 것이요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모든 사람 중에 더욱 가련한 자가 될 것이요
부활이 없으면 세례를 받으면 무엇하며
부활이 없으면 어느 때던지 모험은 무엇 때문에 하며
부활이 없으면 맹수와 격투한들 무슨 유익이 있으며
부활이 없으면 마시고 먹자 내일이면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부활은 우리의 소망의 목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장차 있을 진실한 부활을 소망하고 믿으면서 오늘의 역경을 극복하십시다.
부활을 말하지 않고는 죽음을 말하지 않았던 예수님은 그의 부활로 삭막한 인간의 심령 속에 새로운 생기를 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로 역사는 전환되었고 삶에 대한 의미도 죽음에 대한 이해도 새로워졌습니다.
여러분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싹터 새로운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 받는 심령은 생명의 부활, 영광의 부활에 참예하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은 낙담과 상심과 절망한 자들에게 희망과 위로와 환희를 주셨습니다.
사탄의 속박아래 죄의 종이였던 인류를 해방하사 자유와 승리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사망의 권세아래 허덕이는 인류에게 생명의 길을 보이사 믿는 자의 부활을 보증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도 사도바울처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이번 부활절을 맞이하여 십자가에 죽고 성령으로 다시 산 심령을 가지고 이런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무덤 속에 있는 것 같은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 도덕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소식이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주일날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사람들의 호산나 외침 속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다가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셔서 둘러보신 후에 베다니로 물러 가셨습니다.
그 이튿날인 월요일 아침 다시 예루살렘에 가셔서 성전으로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쫓으시면서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일로 해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어떻게 잡아 없앨까를 의논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월요일 밤은 다시 베다니 에서 쉬시고 화요일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셔 서 하루종일 비유로 가르치시기도 하고, 반대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종말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수요일에는 베다니에 머무시면서 쉬셨고, 저녁식사 때에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있었으며, 가룟유다는 그 밤에 대제사장을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줄 것을 제안하였던 것입니다.
목요일,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음모가 점점 구체화되고 있는 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어 예루살렘 성내에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이날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 예비된 유월절 식탁 에 둘러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섬김 의 본을 보여주셨고, 이어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유다의 배신과 제자들 이 배신,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셨습니다.
이 때에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로 가고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은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밤을 새워 홀로 고통스러운 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기도하신 예수님은 금요일 새벽에 찾아온 유다의 배반의 입맞춤으로 제사장들이 보낸 무리들에게 체포되셨습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다 도망가 버리고 예수님 홀로 붙잡히셔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끌려가 심문을 받으신 후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셨습니다.
이 때에 가룟유다는 자기가 한 일을 뉘우치고 목매어 자살을 하였고, 예수님은 빌라도나 헤롯의 심문에 침묵으로 일관하셨으며, 빌라도는 죄를 찾지 못하겠노라며 놓아주려 하였으나 제사장들에 의해 동원된 무리들의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외침에 못 이겨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 주었던 것입니다.
오전 9시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오후 3시 경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울부짖으신 후 숨을 거두셨습니다.
저 물었을 때에 예수님의 시신은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청하여 바위 속에 판 새 무덤에 장사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인 토요일이 지나고 그 이튿날 이른 새벽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한 이른 새벽 무덤 을 찾아갔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확인하였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리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고,
그 후 문을 걸어 잠그고 모였던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 가롯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들과 그리고 엠마오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를 만난 두 사람의 제자가 함께 모여 예수님께서 과연 다시 살아나셨음을 신기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그 가운데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시며 은혜와 평안을 빌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제자들은 놀라서 무서워 떨며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의심하고 있느냐 손과 발을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데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하시며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시므로 완전하신 부활의 몸을 확증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이제 다시 사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과거, 현재, 미래적인 의미를 한 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1. 부활 사건의 과거는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합니다.
성경을 상고해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여려 차례 여러 장면으로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신 역사적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1) 향유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 개인에게 나타나 보이심 (요20:14)
2)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러 가는 여인들에게 나타나심(마28:9)
3) 베드로 개인에게 나타나 보이심(고전15:5)
4) 열 두 제자에게 나타나 보이심(고전15:5)
5)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 보이심(고전15:5)
6)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나타나 보이심(녹24:15)
7) 열 한 제자(도마가 빠졌을 때)에게 나타나 보이심(요20:19)
8) 열 한 제자와 도마까지 함께 모였을 때 나타나 보이심(요20:26)
9) 열 한 사도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와 다른 사도들이 함께한 자 리에 나타나 보이심(눅24:36)
아라비아 사막의 대상이었던 한 회교도가 기독교인을 만나서 자랑하기를 “우리 회교는 메카에 가면 우리들의 교주 마호멧의 분묘가 있으며 지금도 분묘 안의 관속에는 시신이 있어서 마호멧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나,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더라도 빈 무덤밖에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기독교인은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무덤이 비인 것은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호멧은 이 세상에서 살아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지만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하고 대답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마호멧이 창시한 회교는 죽음으로 끝난 죽은 종교이나, 기독교는 부활이 있는 산 종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며 다음의 여러 가지 학설을 내세워 부인하려 하기도 합니다.
1) 기절설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의식을 잃었든가 죽음 직전의 상태에서 장사되었다가 후에 다시 깨어났을 것이라는 설입니다.
그러나 어림도 없는 말입니다.
당시 법으로는 죽은 것을 확인하지 않고 매장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그들은 확인하였습니다. 창으로 옆구리에 찔렀습니다.
죽음 확인을 위해 무릎을 꺾는 법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너무도 확실히 죽었기에 꺽지도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2) 시체 도난설
예수님께서 생전에 3일만에 다시 사실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서 부활을 조작했다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로마의 군병들이 창을 들고 밤낮으로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환상설
실제적인 부활이 아니라 주님을 사모하여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부활이 환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환상을 40일 동안이나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볼 수 있었단 말입니까
4) 조작절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사실이 아닌 부활사건을 조작하여 유포하고 기록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모두 다 어이없는 사단의 말들입니다.
이는 성경을 불신하는 마귀들의 장난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거해 주고 있으며, 오늘의 교회들이 빈 교회가 아니라 넘치도록 채워지고 있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구주임을 웅변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나간 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는 실례는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첫째, 죽음을 두려워하며 비겁하게 십자가를 등졌던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강하고 담대한 복음의 증언자로 순교하였습다.
둘째, 죽음을 두려워하며 비겁하게 십자가를 등졌던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강하고 담대한 복음의 증언자로 순교하였습니다.
셋째, 빈 무덤을 보고 슬피 울던 막달라 마리아도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 뵌 후에 그의 눈에서 눈물이 말라 버렸습니다.
넷째, 교회의 설립은 부활 사건을 확신한 무리들의 모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섯째, 엠마오로 걸어가던 실망한 제자들의 발걸음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소망에 찬 생의 행진으로 변하였습니다.
여섯째, 살기가 등등하여 그리스도를 핍박하러 가던 사울의 발걸음은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전환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으로 끝난 죽은 종교가 아니라 부활이 있는 산 종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부활신앙의 현재는 우리의 삶을 바르고 강하게 해 줍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대할 때 대체로 아래 세 가지 형의 인간으로 나누어집니다.
1) 죽음을 자기와 상관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어리석게 방관하는 사람들
2)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고 미리 겁을 먹고 두려워 떠는 사람들
3) 죽음 너머의 부활을 믿고 기쁨으로 소망 중에 생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앙은 죽음 앞에서도 우리의 생을 힘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부활 신앙의 확신이 생기면 죽어도 산다는 믿음이 와지기 때문에 인간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만들어 주며, 새로운 의미를 찾아 살아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죽음처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금력이 굉장한 힘을 가진 것 같으나 돈으로도 죽음을 이기지 못하여 억만장자라도 죽음에게 이끌려가고 있습니다.
권력이 있어서 천하를 호령하는 것 같으나 결국 권세도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맙니다.
과학의 위력이 우주여행을 시도하고 있으나 과학의 힘으로도 죽음을 막아 내지 못합니다.
아름다움도, 젊음도 죽음 앞에서는 썩어져 감으로 무색해지고 맙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죽음에 항거하여 이길 힘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죽음을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사망에 대한 승리입니다.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생명의 삼킨 바 되리라”고 하신 말씀이 응하였다고 부활신앙을 소유한 사도바울은 사망에 대한 개선가를 불렀습니다(고전15:55).
우리도 이번 부활절을 맞이하여 십자가에 죽고 성령으로 다시 산 심령을 가지고 이런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욕구 가운데 생명에 대한 욕구 이상으로 강한 것이 없는데 이와 같은 인간의 가장 크고 근본적인 생명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허무와 절망이 지배하는 캄캄하고 어두운 무덤에서 사망의 돌문을 굴려내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실로 인류의 빛이요, 소망이며, 새 힘을 주는 생명이십니다.
오늘 무덤 속에 있는 것 같은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 도덕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소식이 임하여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은 오늘 현재 속에서도 우리들의 삶을 강하게 지배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교회의 선교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 속에 역사적인 사실로써 나타나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동시에 현재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바르고 강하게 이끌고 가며, 미래의 모든 소망을 채워 주는 인류를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선물입니다.
3. 부활 신앙의 미래는 만남의 소망을 채워줍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우리 주님은 부활의 약속을 성경에서만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봄에 자라는 나무 잎새마다 쓰셨다”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옳습니다.
우리는 이 새 봄에 모든 식물들에게서도 주님의 부활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지난 겨울 얼어붙었던 때를 생각해 보면 이 새 봄의 대지는 꿈만 같습니다.
그러나 꿈이 아닌 현실이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부활절에 나누어주는 계란의 의미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것 먹으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계란을 우리 봤을 때 죽은 것 같습니다.
“여기에 무슨 생명이 있겠나”라고 생각합니다.
어미 닭이 21일을 품고 있으면 거기에 생명이 태어납니다.
이것은 죽어도 다시 산다는 의미를 내포해 주는 것입니다.
계란을 보면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심같이 우리가 다시 부활한다는 소망을 충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왜 그러면 생것으로 주지 삶아 주는냐!
그것은 보관상의 문제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가운데는 부모, 자식, 아내, 남편을 저 세상에 먼저 보낸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헤어지기 싫은 사랑하는 사이를 죽음이라고 하는 괴물이 우리들을 이쪽 저쪽으로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견딜 수 없는 슬픔의 함정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들이 지금 저 하늘나라에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나 그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희미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거울 속으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을 서로 대하여 보는 것 같이 확실할 것이며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완전히 알 것이라”(고전13:12)고 하셨습니다.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11:25-26)
부활 신앙에 대한 소망은 미래의 우리들을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앞서 간 모든 성도들과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의 만남을 이룩해 줄 것입니다.
이 만남은 다시 헤어짐이 없는 영원한 만남이 될 것입니다.
죽음은 썩어지게 하는 것이요 이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장차 우리들에게 만남의 소망을 채워 줄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전15장에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전도도 헛것이요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도 헛것이요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거짓 증인이 될 것이요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도 침륜할 것이요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모든 사람 중에 더욱 가련한 자가 될 것이요
부활이 없으면 세례를 받으면 무엇하며
부활이 없으면 어느 때던지 모험은 무엇 때문에 하며
부활이 없으면 맹수와 격투한들 무슨 유익이 있으며
부활이 없으면 마시고 먹자 내일이면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부활은 우리의 소망의 목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장차 있을 진실한 부활을 소망하고 믿으면서 오늘의 역경을 극복하십시다.
부활을 말하지 않고는 죽음을 말하지 않았던 예수님은 그의 부활로 삭막한 인간의 심령 속에 새로운 생기를 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로 역사는 전환되었고 삶에 대한 의미도 죽음에 대한 이해도 새로워졌습니다.
여러분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싹터 새로운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 받는 심령은 생명의 부활, 영광의 부활에 참예하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은 낙담과 상심과 절망한 자들에게 희망과 위로와 환희를 주셨습니다.
사탄의 속박아래 죄의 종이였던 인류를 해방하사 자유와 승리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사망의 권세아래 허덕이는 인류에게 생명의 길을 보이사 믿는 자의 부활을 보증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도 사도바울처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이번 부활절을 맞이하여 십자가에 죽고 성령으로 다시 산 심령을 가지고 이런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무덤 속에 있는 것 같은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 도덕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소식이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