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의 능력
본문
우리가 예수를 믿으려고 하면 맨 먼저 부딫치는 문제가 셋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불가사의 이기도한 문제이고 가장 이해 하기가 힘든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해결되지 안으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하나는 동정녀의 탄생입니다.
이것은 합리적으로는 설명되어지지 안는 기적입니다. 동정녀가 사람을 잉태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태어 나셨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출발됩니다.
다음은 십자가의 죽음 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믿어집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오늘 우리의 죄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문제에는 회의가 많은 것이 사실 입니다. 그의 죽음이 오늘 우리의 죄를 대속시킨다는 이론이 어떻게 성립되느냐는 것입니다.
즉 당대의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같은 시대, 같은 민족, 같은 땅도 아닌 그 옛날 중동의 어느 조그만 지역에서 있었던 한 사람의 죽음이 오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를 위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고백 하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고 믿음의 출발점 입니다. 그래야 신앙이 비로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부활입니다.
부활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나의 마음 속에 믿어지기 까지에는 많은 고뇌가 따르는 문제입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이같이 모든 문제가 신비스러울 뿐 입니다. 도저히 합리적으로 인간의 사고로서는 인지되고 동의되고 납득되어지지 안는 어려운 문제들 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입니다.
이상의 세가지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고 근간입니다. 이 세가지는 어느 누구도 흉내 조차 낼 수 없는 것이고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그 중에서도 부활은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같은 신비적인 부활사건을 믿기가 어렵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부활을 부인하는 이론이나 학설들이 많이 발표되어 왔습니다.
1)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도난설입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예수의 무덤을 지켰지만 한 밤에 피곤하여 졸고 있는 사이에 제자들이 훔쳐 갔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소문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2)그리고 환상설도 있습니다.
신앙은 주관적인 것인데 예수를 사모하다 보니까 환상으로 나타난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나타난 환상을 보고서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전했다는 것입니다.
3) 또 가사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기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갖다 장사를 지냈는데 그가 묻힌 무덤이 굴이었기 때문에 후에 깨어나서 빠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4) 그리고 신화설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예수의 존재 자체도 의문시 된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죽음도 없었고 더구나 부활이나 무덤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후대의 추종자들이 하나의 신화로 만들어서 소문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가설들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는 이 한가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적 신앙에는 신비한 기적들이 수반된다는 사실과 그것이 믿어져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는 믿음에서 부터 출발합니다. 신앙은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믿는 믿음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신앙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그 믿음의 지점에서 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수년전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부활절 연합예배가 있었을 때 어느 신학자 한분이 열열하게 부활에 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분은 평소에 부활신앙이 없는 학자로 인식되어 왔던 분입니다.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 그분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 이제 정말 부활을 믿습니까" 그 때 그 신학자가 대답을 하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대답은 "글세요" 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이렇게 어려운 문제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몰라서 부인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다가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강단에서 이것이 불확실 하면서도 부활을 외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무서워 하니 천사가 가로되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안고 살아 나셨느니라". 사도신경도 우리에게 확실하게 고백시켜 주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 오시리라-".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로 이 땅에 주어진 멧시지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이 땅에 주어진 중요한 유산이 몇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정의의 힘" 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 가운데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정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겨야 하고 승리 하여야 하고 빛을 보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의는 한 때 죽은 것 같고 넘어지는 것 같이 보일 때도 있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입증해 준 사건이 바로 예수의 부활사건 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죽으셨습니다. 누구에게 해를 끼친 일이 없습니다. 죽을만큼 실수한 일도 없습니다. 순전히 정치적으로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강도들의 틈에 끼워져
서 조롱과 질시를 받아가며 한 마디의 변명도 없이 조용히 죽어 갔습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볼 때 마치 실패자 같이도 보였을 것입니다. 아마 무력하게 죽어가는 그 모습을 보고서는 분통이 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죽은 후에 그의 시체는 돌무덤 속에 넣어 졌습니다. 그리고 돌을 굴려 무덤문을 막고 군인들이 지켰습니다. 아마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마음을 놓았을 것입니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이렇게 해서 끝날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해서 끝날 수 있다 하는 생각 때문에 지금도 똑 같은 부정들이 져질러지고 있고 똑 같은 시행착오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요. 매번 똑같은 아픈 대형 사고들이 자꾸만 터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이같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숨기려 해도 숨겨 지지가 안는 것입니다. 불의는 권세로 아무리 누르고 감추고 밟아도 은폐되지 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준 교훈입니다. 그래서 권불십년이라고 하였고, 화무십일홍이라고 하였습니다.
죄 없는 예수를 죽이고 무덤문을 돌로 막고 지키면 될 수 있는 일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려 내시는데 누가 막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만일 예수님이 무덤에 묻혀 있는 그대로 끝이 나고 말았다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곳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세상의 권세와 불의는 늘 승자로 군림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우리 모든 인류에게 소망의 멧
시지를 전하여 준 사건인 것입니다.
두번째는 "죽음을 극복하는 힘"이 주어졌습니다.
인간사에 있어서 제일의 관심사는 죽는 문제입니다. 이것 처럼 심각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죽음은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신앙 안에서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는 힘을 제공하여 준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값을 알게 하여 주고 가치를 일깨워 준 사건입니다.
세번째는 "새 능력의 힘" 입니다.
예수님 생존시의 제자들은 메시야관이 흐렸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주님의 죽음에 대해서 큰 뜻을 부여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다만 주님을 따르되 스승으로, 지도자로만 따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할 수 있었던 것이고,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을 수 있었던 것이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밤에 제자들이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신적인 요소 보다는 인간적인 요소를 더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의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그들은 신적인 권위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비로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완전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제자들은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해 낼 수 있었고 십자가의 죽음도, 맹수에게 찟김도, 화형장에 끌려 가는 것도 두려워 하지 안는 사람들로 바뀐 것입니다. 이같은 담력과 용기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그들은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부활의 예수를 만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별 재주를 가졌어도 효과적일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비로서 제자다운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활의 예수를 만남으로 새 능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 입니다.
넷째는 "새 출발의 힘" 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 출발의 삶을 갖게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부르게 먹었으면서도 그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를 못하였습니다. 죽은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나오는 나사로를 보고서도 주님을 믿지를 못하였습니다. 제자들 조차도 물위를 걸어 오시는 주님을 보고서도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을 정도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동생들 조차도 예수님을 믿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은 새 출발의 깃점이 된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신앙과 인생관이 변화되어 가던 길을 되돌아 서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동생 야고보는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고서야 무릎을 꿇고 " 주여 어찌하여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나이까" 하고 회개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개인 뿐이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수 많은 가정들이 이방종교로 부터 개종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돌아 오고, 수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로 부터 개종하여 돌아왔고, 수 많은 민족들과 나라들이 주께로 돌아와 새 출발을 하지 않았습니까. 과연 예수님의 부활은 이 땅에 강력한 힘과 능력과 소망의 멧시지를 전하여 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이었습니다.
그 하나는 동정녀의 탄생입니다.
이것은 합리적으로는 설명되어지지 안는 기적입니다. 동정녀가 사람을 잉태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태어 나셨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출발됩니다.
다음은 십자가의 죽음 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믿어집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오늘 우리의 죄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문제에는 회의가 많은 것이 사실 입니다. 그의 죽음이 오늘 우리의 죄를 대속시킨다는 이론이 어떻게 성립되느냐는 것입니다.
즉 당대의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같은 시대, 같은 민족, 같은 땅도 아닌 그 옛날 중동의 어느 조그만 지역에서 있었던 한 사람의 죽음이 오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를 위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고백 하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고 믿음의 출발점 입니다. 그래야 신앙이 비로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부활입니다.
부활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나의 마음 속에 믿어지기 까지에는 많은 고뇌가 따르는 문제입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이같이 모든 문제가 신비스러울 뿐 입니다. 도저히 합리적으로 인간의 사고로서는 인지되고 동의되고 납득되어지지 안는 어려운 문제들 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입니다.
이상의 세가지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고 근간입니다. 이 세가지는 어느 누구도 흉내 조차 낼 수 없는 것이고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그 중에서도 부활은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같은 신비적인 부활사건을 믿기가 어렵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부활을 부인하는 이론이나 학설들이 많이 발표되어 왔습니다.
1)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도난설입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예수의 무덤을 지켰지만 한 밤에 피곤하여 졸고 있는 사이에 제자들이 훔쳐 갔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소문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2)그리고 환상설도 있습니다.
신앙은 주관적인 것인데 예수를 사모하다 보니까 환상으로 나타난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나타난 환상을 보고서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전했다는 것입니다.
3) 또 가사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기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갖다 장사를 지냈는데 그가 묻힌 무덤이 굴이었기 때문에 후에 깨어나서 빠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4) 그리고 신화설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예수의 존재 자체도 의문시 된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죽음도 없었고 더구나 부활이나 무덤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후대의 추종자들이 하나의 신화로 만들어서 소문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가설들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는 이 한가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적 신앙에는 신비한 기적들이 수반된다는 사실과 그것이 믿어져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는 믿음에서 부터 출발합니다. 신앙은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믿는 믿음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신앙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그 믿음의 지점에서 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수년전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부활절 연합예배가 있었을 때 어느 신학자 한분이 열열하게 부활에 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분은 평소에 부활신앙이 없는 학자로 인식되어 왔던 분입니다.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 그분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 이제 정말 부활을 믿습니까" 그 때 그 신학자가 대답을 하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대답은 "글세요" 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이렇게 어려운 문제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몰라서 부인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다가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강단에서 이것이 불확실 하면서도 부활을 외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무서워 하니 천사가 가로되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안고 살아 나셨느니라". 사도신경도 우리에게 확실하게 고백시켜 주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 오시리라-".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로 이 땅에 주어진 멧시지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이 땅에 주어진 중요한 유산이 몇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정의의 힘" 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 가운데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정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겨야 하고 승리 하여야 하고 빛을 보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의는 한 때 죽은 것 같고 넘어지는 것 같이 보일 때도 있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입증해 준 사건이 바로 예수의 부활사건 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죽으셨습니다. 누구에게 해를 끼친 일이 없습니다. 죽을만큼 실수한 일도 없습니다. 순전히 정치적으로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강도들의 틈에 끼워져
서 조롱과 질시를 받아가며 한 마디의 변명도 없이 조용히 죽어 갔습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볼 때 마치 실패자 같이도 보였을 것입니다. 아마 무력하게 죽어가는 그 모습을 보고서는 분통이 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죽은 후에 그의 시체는 돌무덤 속에 넣어 졌습니다. 그리고 돌을 굴려 무덤문을 막고 군인들이 지켰습니다. 아마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마음을 놓았을 것입니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이렇게 해서 끝날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해서 끝날 수 있다 하는 생각 때문에 지금도 똑 같은 부정들이 져질러지고 있고 똑 같은 시행착오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요. 매번 똑같은 아픈 대형 사고들이 자꾸만 터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이같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숨기려 해도 숨겨 지지가 안는 것입니다. 불의는 권세로 아무리 누르고 감추고 밟아도 은폐되지 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준 교훈입니다. 그래서 권불십년이라고 하였고, 화무십일홍이라고 하였습니다.
죄 없는 예수를 죽이고 무덤문을 돌로 막고 지키면 될 수 있는 일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려 내시는데 누가 막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만일 예수님이 무덤에 묻혀 있는 그대로 끝이 나고 말았다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곳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세상의 권세와 불의는 늘 승자로 군림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우리 모든 인류에게 소망의 멧
시지를 전하여 준 사건인 것입니다.
두번째는 "죽음을 극복하는 힘"이 주어졌습니다.
인간사에 있어서 제일의 관심사는 죽는 문제입니다. 이것 처럼 심각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죽음은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신앙 안에서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는 힘을 제공하여 준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값을 알게 하여 주고 가치를 일깨워 준 사건입니다.
세번째는 "새 능력의 힘" 입니다.
예수님 생존시의 제자들은 메시야관이 흐렸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주님의 죽음에 대해서 큰 뜻을 부여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다만 주님을 따르되 스승으로, 지도자로만 따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할 수 있었던 것이고,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을 수 있었던 것이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밤에 제자들이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신적인 요소 보다는 인간적인 요소를 더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의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그들은 신적인 권위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비로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완전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제자들은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해 낼 수 있었고 십자가의 죽음도, 맹수에게 찟김도, 화형장에 끌려 가는 것도 두려워 하지 안는 사람들로 바뀐 것입니다. 이같은 담력과 용기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그들은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부활의 예수를 만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별 재주를 가졌어도 효과적일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비로서 제자다운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활의 예수를 만남으로 새 능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 입니다.
넷째는 "새 출발의 힘" 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 출발의 삶을 갖게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부르게 먹었으면서도 그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를 못하였습니다. 죽은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나오는 나사로를 보고서도 주님을 믿지를 못하였습니다. 제자들 조차도 물위를 걸어 오시는 주님을 보고서도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을 정도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동생들 조차도 예수님을 믿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은 새 출발의 깃점이 된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신앙과 인생관이 변화되어 가던 길을 되돌아 서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동생 야고보는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고서야 무릎을 꿇고 " 주여 어찌하여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나이까" 하고 회개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개인 뿐이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수 많은 가정들이 이방종교로 부터 개종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돌아 오고, 수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로 부터 개종하여 돌아왔고, 수 많은 민족들과 나라들이 주께로 돌아와 새 출발을 하지 않았습니까. 과연 예수님의 부활은 이 땅에 강력한 힘과 능력과 소망의 멧시지를 전하여 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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