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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믿음이 뜨겁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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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카우만이라는 사학자가 미국 시카고의 한 거리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소년이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는 상점 앞에 서서 무엇인가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너무도 진지해서 카우만은 그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습니다. 얘야, 저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니
그러자 그 소년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예, 선생님 저분은 저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구세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인 병사들이고요. 울고 있는 분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카우만은 참으로 기특하다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얼마 걷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소매를 잡아끌어서 돌아다보니 조금 전에 말을 했던 그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제가 드릴 말씀이 더 있는데 깜박 잊었거든요. 그래서 그걸 알려 드리려 구요. 그래 뭔데 예수님은 그 십자가 위에 더 이상 계시지 않습니다. 그 분은 부활하셨거든요. 그래서 살아 계시고요.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답니다.
그 소년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오늘도 살아 계시는 구세주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복음의 진수를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복음의 절정은 부활입니다.
오늘날 설교가 아무리 감동적일지라도 만일 그 설교가 예수님을 십자가나 무덤 속에 그냥 놓아 둔 설교라면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기독교를 빈 무덤의 종교라고 합니다.
오늘은 2007년 부활 주일입니다. 부활절은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절기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며 생명을 살리는 종교는 기독교뿐입니다.
다른 종교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평안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생명을 얻고 영생을 누리게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다같이 은혜 받을 말씀은 믿음이 뜨겁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라는 제목이 되겠습니다. 함께 힘차게 아멘 이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십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란 생산물의 처음 익은 것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림으로 인하여 생산물의 전부를 바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출 23:19; 레 02:12).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지 사흘 만에 살아나심으로 인하여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길을 열어주셨고 예수님은 이들의 첫 스타트가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아레오바고에 서서 아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을 때 아덴 사람들은 그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이 있었습니다(행 17:22~34).
그 이유는 그들의 합리적인 사고를 따라 죽은 자의 부활은 도무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날도 과학만능주의와 합리주의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아덴 사람들과 같은 불신앙으로 인해 과학으로 입증되는 것만을 믿으려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님은 요 11:25,26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부활이 보증되는 것이며 생명을 얻는 것이고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을 따라 행복한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가장 행복한 자는 죽음을 극복한 사람이며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님을 믿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야말로 죽음을 진정으로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역사 이래 처음으로 죽음에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우리 신자들은 종종 성경에 기록된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과 나인 성 과부의 독자가 살아난 사건을 예수님의 부활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요 11:43,44)와 나인 성 과부의 아들(눅 07:14,15)은 다시 죽을 수밖에 없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이 산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임을 아십시오.
예수님은 살아나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인간이 죽음에서 깨어나는 수는 혹 있을지라도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은 결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계십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예수님이 온전한 부활을 성취하신 유일한 분이심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역사상 부활하신 첫 열매라는 사실은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온전한 부활을 이루심으로 인해 신자들에게는 부활의 증거와 보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롬 0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프랑스의 황제 루이 14세(1638. 9,5~1715. 9,1)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짐(朕)이 곧 국가다고 외치면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의 권위를 만방에 널리 떨쳤던 인물인데 별칭은 루이 대왕(Louis le Grand Monarque)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신교를 방해하는 데 앞장섰는데 신교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의 손길을 뻗쳐 칙령 거역 죄로 세오졸프를 체포하여 파리 탑의 높은 감옥 속에 감금하여 버렸습니다.
때 마침 부활절이 되어 그는 황제의 권위를 갖추고 호화찬란한 부활절 행렬대를 앞세워 파리 시가를 행진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때 높은 감옥의 탑 위에서 이 행렬을 바라 본 세오졸프는 하늘의 영감을 받아 부활절 찬송을 힘차게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다 함께 찬송 부르자 영광의 왕은 우리 주 이 날에 다시 사셨네. 할렐루야 할렐루야(160장).
이렇게 찬송이 힘차게 울려 퍼지자 황제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듣는데 의기양양하게 행진해 가던 자신의 양심이 고동치기 시작합니다.
이윽고 황제는 영혼에 큰 충격과 가책을 받으면서 부활하신 주님이야말로 왕 중의 왕이 되신다는 사실을 겸손히 받아들이고는 부활 축제 행렬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감옥으로 들어가 세오졸프의 손을 잡고 자신의 잘못을 빌고 석방하여 신앙의 자유인이 되게 하였다고 합니다.
2. 예수님은 어두움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성경에서 어두움은 사단의 세력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서 인류와 세상은 어두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악한 행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빛을 배척합니다(요 03:19).
예수님은 이러한 어두움을 물리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참 빛이시며(요 01:04~09) 이 참 빛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①어둠을 사랑하여 빛을 거부하였으며 ②다른 하나는 빛을 받아들여 어둠을 몰아내었습니다.
교회 성도들은 빛을 받아들여 어두움을 몰아내야 합니다. 따라서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 없음을 잘 아시지요.
세상의 참 빛이 되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어둠의 세력이 패했기 때문에 성도들은 생명의 빛이 되신 예수님의 빛을 받고 그 빛을 비추면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일시적으로 지배하는 사단의 강력한 권세는 그 무서운 사망이며 너와 나 할 것 없이 죽음 앞에서는 공포감에 사로잡히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도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우리도 사망의 권세를 능히 이기게 됩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우리 성도들은 더 이상 죽음의 권세를 휘두르는 사단을 두려워하거나 피할 필요가 없이 도리어 담대하게 죽음의 권세를 대적해서 승리를 쟁취하여야 합니다.
독일의 히틀러 밑에서 순교한 목사 본 훼퍼가 감옥에 있을 때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제 나의 신앙에 관하여 완전히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신앙은 무거운 짐 아래서도 깨어지지 않고 항거한다. 주저하거나 절망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좀 이상하게 들릴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감옥 안에서 기뻐하는 것을 배웠다. 처형당하는 날 교도관이 그를 불러 낼 때 그는 이 말을 남겼습니다. 이로써 끝이다. 그러나 생명의 시작이다.
3. 이제부터 나의 믿음도 뜨겁게 부활해야 합니다.
눅 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이 말씀은 글로바와 그의 친구가 엠마오로 낙향하는 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심령이 믿음으로 뜨거워졌을 때 한 말입니다(눅 24:13~34).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나의 부활이요 나의 생명의 출발점임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오늘 나와 여러분의 믿음이 뜨겁게 부활한다면 이제부터 그 믿음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놀라운 믿음의 자리에 이를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능력에 대해서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까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한계를 그어야만 하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그 절박한 상황으로 인해 우리가 넘어지고 포기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으나 부활의 믿음을 회복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다시 축복의 자리로 돌아갈 수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으로 인하여 믿음을 회복하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여기가 한계라고 여겨질 때 간절한 소원으로 여러분의 손을 뻗으세요. 예수님은 내게 힘을 주셔서 그 한계를 분명 뛰어넘게 하실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가 몇 번 있었죠 그런데 하필이면 처음 찾아오신 날 그곳에 없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군지 잘 아시죠
도마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그는 동료들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해도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는 말을 합니다(요 20:25).
이후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그때는 도마도 함께 있었는데 주님께서 오셔서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배당을 출입하면서 신앙의 연륜은 쌓여만 가는 데도 예수님의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는 지상명령을 우리에게 주셨지만(막 16:15~18) 우리는 계속 믿음의 잠을 깊이 자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서야 어떻게 복음을 모른 채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인해 내 믿음이 먼저 부활해야 합니다. 그러면 힘이 솟아요. 기쁨이 넘쳐요. 답답했던 마음이 얼마나 시원해지는지 몰라요.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부활하신 주님은 만나야 하고 내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영적인 체험을 하여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지식적으로 주님을 알고 지식적으로 복음을 안다면 그곳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신령한 기쁨이 솟아나지를 않습니다. 믿음을 알려고만 하지 마시고 가지려 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뜨겁게 믿음이 회복된 사람들이 크게 쓰임 받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내 모습을 한 번 진단해 보십시오.
돈은 사랑하지만 사람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 건 아닙니까 물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희생하면서도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생명 받쳐 일하지 않는 건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여러분의 믿음이 먼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영혼을 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함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한 생명을 살리는 일을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미국에서 스탠포드 대학(캘리포니아 주(州) 팰러앨토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하면 최고의 명문대학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한 사람이 바로 리랜드 스탠포드(Leland Stanford, 1824-1893))입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으로서 상당한 부자인데 대학을 설립한 동기가 이렀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잘 생기고 수재였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극도의 슬픔에 잠긴 아버지 스텐포드는 장례식에서 말을 잃은 채 슬픔 속에 지내고 있었는데 꿈에 아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저 대신 청년들을 도와주셔요. 스탠포드는 이 환상을 보고난 이후 인생관이 확 바뀌고 말았습니다. 예수님도 살아 계시고 내 아들도 살아있구나. 스탠포드는 믿음이 생기면서 아들의 소원을 들어 주기고 하고 청년 교육에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거액인 2천만 달러를 바쳐서 스탠포드대학을 설립하고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죽을 때 이런 유서를 남겼습니다.
나의 재산은 10원짜리 동전 하나 남기지 말고 청년 교육에 사용하라.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는 예수님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만 왕의 왕 되심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동시에 나의 미지근한 믿음을 회복하는 절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7년 부활 주일을 맞이하여 나의 미지근한 믿음을 뜨거운 믿음으로 전환하는 축복된 절기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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