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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본문

신자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함을 믿는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에서 부활을 빼놓는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면 부활을 믿는 것이 과연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며 또한 무엇이 유익한가
본문을 보면 나사로란 사람이 죽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예수님은 비로소 그곳에 도착하셨다. 많은 유대인들이 조문(弔問)하기 위하여 그곳을 찾았다. 그런데 마르다라는 여자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맞이하러 나갔다. 그녀는 예수님에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라고 말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만 하였다면 자기 오라버니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을 보면 그녀는 예수님이 죽지 않도록 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줄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마르다는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라고 말했다. 그래도 그녀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마르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마르다는 그 말씀을 받아서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라고 반응했다.
‘마지막 부활 때에는’이라는 마르다의 말을 보면 마르다는 부활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생각하는 부활은 마지막 어느 시점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다. 즉 사람이 지금은 비록 죽어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사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죽은 상태이지만 언젠가 마지막 때에는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 때에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활이란 그것만이 아니다. 단지 부활을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는 정도로만 이해한다면 부활에 대한 표면적 이해일 뿐이다. 이런 생각은 지금(now), 여기에서(here)의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런 식의 삶은 우리에게 편안한 삶이 마련되면 기뻐하고, 어려움이 닥쳐오면 원망하는 삶으로 만들 뿐이다. 현재의 고통을 그저 회피하려고 하거나 운명 정도로 여길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행복한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활은 단지 사람이 육신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식의 부활은 다른 종교에서도 주장한다. 사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부활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윤회사상조차도 일종의 부활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이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부활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단지 사람이 육신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는다. 나사로를 보자. 나사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난 자이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결국 그도 죽고 말았다.
나사로는 전능자이신 예수님이 살려주신 만큼 죽지 않고 계속 살면서 각 교회마다 돌아다니면서 이른바 ‘간증’이란 것을 하고 다닌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겠는가 오늘날 120년만 살아도 기적과 같은 일인데 거의 2,000살이나 되는 사람이 각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간증한다면 교회 부흥은 식은 죽 먹기 아니겠는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런 쉬운 방법을 제쳐두고 힘들고 어렵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는가
나사로는 예수님이 직접 살려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그도 죽고 말았다. 그렇다면 나사로가 부활한 다음 죽고 말았다면 도대체 부활이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이란 단지 사람이 육신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정도로만 이해할 것은 아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이요 이삭의 여호와 하나님이요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마 22:32)
예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 이삭의 여호와 하나님,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이요 이삭의 여호와 하나님이요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산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다른 말로 하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죽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부활이란 단지 사람이 육신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정도로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부활이란 어떤 것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N4)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다, 그리고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시간적으로 미래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 마르다 앞에 서 계신 분이 바로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을 시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이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 그 자체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부활을 시간적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부활은 언젠가 다시 살아나게 될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서 살다가 죽으면 공백 기간을 거친 후, 언젠가는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지고 부활이라고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고 생명이시기에 지금, 여기에서 그분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곧 부활이고 생명인 것이다. 부활은 언젠가 마지막 때에 비로소 붙잡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지금(now)과 그때(then)로, 여기(here)와 거기(there)가 나누어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이시라면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부활과 생명에 참예한 것이다. 부유하거나 가난해도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미 부활과 생명에 동참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존재 이유가 부활과 생명에 있음을 뜻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오셨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육신적인 것들로 인해 신앙이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부활신앙이란 단지 육신이 죽었다가 나중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신앙관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체험할 수 없다. 부활신앙은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환경이나 조건에 관계없이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서 기뻐하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이 세상의 조건과 환경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더 이상 예수님으로 인한 그 어떤 유익도 체험할 수가 없다. 예수님을 믿으면 형편이 더 나아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예수 믿은 것으로 인한 이득(利得)이 없기에 불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기에서는 아무런 기쁨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다가 언젠가는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만을 기다리게 될 뿐이다. 그러나 참된 부활신앙은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부활이신 그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성도는 군대에 가서 지금은 고생이지만 어쩔 수 없이 참고 지내면서 대충 생활하면서 제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듯이 하는 자가 아니다. 물론 언젠가는 분명히 제대한다. 그러나 이미 부활한 자로서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도는 병이 들었을 때 고쳐지면 감사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평하는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믿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도는 장차 천국에 갈 것을 기대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천국에 도달해 있는 자로서 살아가는 자이다. 부활을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부활된 자로 살아가는 자인 것이다. 이런 부활신앙이야말로 우리의 삶에 힘이 되며, 진정한 유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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