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하신 주를 생각하라
본문
성경을 구약에서 부터 신약에까지 쭉 묵상해 가면서 알게 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은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죄인이고, 그 죄로 인한 죗값을 치루고 살아가게 되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그러한 인생을 사랑하셔서 "살길"을 준비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희생제물'로 양이나 소나 비둘기 같은 짐승 중 흠없는 것이 제단에 드려지면 그것을 드린자의 죄가 씻기우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성은 소멸되지 않기에 끝없이 많은 제물들이 '대신 죽는 죽임'을 당하여야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인생의 소망 없음을 보시고 영원한 효력을 발휘하는 단 한 번의 제사와 제물을 준비하시는데, 이정도로 특별한 효력을 발생하는 제물이 되려면 보통 '흠없는 짐승 정도를 가지고는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친히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인간의 당할 수 있는 모든 배고픔과 유혹과 분쟁과 미움과 도전과 고통, 치욕을 다 맛보게 하시고, 그 모든 것을 짊어지신 채 희생 제물로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갈보리 십자가의 실체 입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 죽음으로 구속이 완성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죽음으로 모든 죄를 짊어 지셨지만 그것으로 끝이 난다면 그동안 희생 제물로 죽어간 양들과 다를 게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다른 분이신가 그분은 그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류구속(믿는 이들 모두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심)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이들은 구약시대에 자기 죄책감에 시달리며 때마다 묵은 죄를 해결 받기위하여 양을 끌고 제사장에게 나오는 침울한 성도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죄는 십자가 죽음으로 다 해결되었으며 우리의 영과 육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영생"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침울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근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근거가 무언지 아시는가 우리의 자발적 헌신과 열심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성공과 구제 봉사는 어디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비롯됩니다.
결국 우리 기독교의 중심에는 "부활신앙"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66권도 결국은 예수님의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든 그 지역의 명소 상징물이 있습니다.
뉴욕에 가면 자유의 여신상이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명물이고 워싱턴에 가면 백악관이나 링컨기념관에는 가봐야 하고 홍콩에서는 홍콩섬의 야경을 봐야 하고 싱가포르에서는 사자상을 봐야하고 서울에서는 63빌딩엘 올라가 봐야 하고 수원에서는 화성에 올라가보고 갈비를 먹어봐야 한다는 것은 그 도시의 상징이자 자랑이다.
몇 년 전 중국 서안이라는 도시엘 가보니 거기서는 꼭 봐야 할 것이 진시황의 무덤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하길 "세상에 무덤이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구나"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자랑 우리 기독교의 상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일까 예루살렘 성저일까 마구간일까 아닙니다. 빈 무덤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으면 우리 기독교의 어떤 면도 무효가 되고 맙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나서 그의 제국은 사라졌습니다.
히틀러도 나폴레옹도 그랬고 우리 정치계에서도 권력자에게서 권력이 떠나가면 그를 따르던 세력이 다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사건 이후 사람들은 예수님께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기독교는 전 세계로 확산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믿는 자나 믿지않는 자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주의 시작은 "주일"부터 시작입니다.
어떤 이는 일요일 이라고 노는날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의날이 기준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완전히 죽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 즉 주일새벽 부활하심으로 그동안 지켜온 안식일(토요일)이주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매 주일 아침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안식일입니다'하고 출발을 하야여 합니다.
예수 부활은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동안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보통 죄인들 중 사형수는 '목베임'을 당하는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처참하지만, 고통을 최소화하는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죄가 너무 중하여 '고통'을 당하며 서서히 죽어가게 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임을 당하신 이후에 부활하심으로써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하던 것에서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180도 의미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엠블란스에도,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펴는 국제 적십자에도 "십자" 표시는 "살리는" 표시이지 더 이상 '죽음'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16살 먹은 김연아라는 소녀와 17살 먹은 박태환이라는 소년이 온 국민에게 기쁨과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아직은 너무나 어린 소년, 소녀이지만 그들이 세계무대에 나아가서 자신들의 갈고닦은 기량을 떨칠때, 우리는 마음으로 응원하고, 메달을 땄을때 내가 금메달 딴 것처럼 기뻐하지를 않았습니까
십자가의 의미가 '죽음의 형틀'에서 '생명의 길' 부활과 연계될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이므로 그것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인 것입니다.
죽은 예수를 만나러 무덤에 간 여인들은 거기서 예수님을 못 만났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곳은 무덤 안에서가 아니고, 무덤 밖에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의 선조를 높이기 위하여 무덤을 잘 만드는 일에 몰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부모님 양지바른 곳,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지리학적 명당에 모셨다고, 앞이 탁 트인 자리에 무덤 만들었다고 좋아합니다.
이미 영혼이 떠난 몸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달 전에 큰소리치고, 일주일전에 미래를 계획하고 있었어도, 오늘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인간입니다.
그 육신을 땅에 묻으면서 얼마나 따지는게 많은지 모릅니다.
무덤을 얼마나 크나, 어디에 모셨냐가 중요한 줄 아는 인간이 그 무덤에서 사망을 이기고, 살아나신 분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볼 줄을 모릅니다.
아무리 잘난 인생도 무덤을 넘어서질 못하는데 오직 그 무덤에서 살아나온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들의 남은 생애를 한가지에 쏟아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 그 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신 것은 바로 나와 너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함이었다.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바로 이것을 전하기 위하여 그들은 "순교"도 마다하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두려워한 로마정부는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돈을 주고, "예수님의 시신을 제자들이 훔쳐다가 어딘가에 숨겨두고, 예수가 살았다고 거짓 소문을 내고 다닌다"고 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로마의 군사력이 얼마나 칼날이 시퍼렇는지 잘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시체를 몰래 숨겨두었다면 어떻게 그 제자들 중 한사람의 양심선언이 있었겠는가.
로마 정부는 거짓으로라도 '양심선언'을 받아내려고 온갖 고문과 핍박을 자행하였지만 제자들은 순교를 당하면서까지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저는 예수님을 똑똑히 만나 뵈었습니다. " 놀라운 것은 순교자들의 의연한 태도를 목격한 로마인들 가운데 "예수님부활"을 믿는 이들이 생겨났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전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에 의하여 기독교는 세계종교가 되었습니다.
"진리는 능력이 있다" 예수님 부활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크리스천이 되었고, 예수님 부활을 부정하고 외면한 이들은 크리스천을 핍박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어떤 초신자가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것이었으면 무엇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냥 죽지 않고 초자연적 능력으로 죽음을 피하셨으면 이 복잡한 부활논쟁이 필요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 나의 죄가 대신죽어주시는 대속의 죽음으로만 해결되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셔서 나의 죄문제를 완전히 감당하셔야만 나의 생명을 구속하시는 구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완전한 사랑에 이르고 난 후 전례가 없는 완전한 부활을 하심으로 우리들 죄로 죽은 우리들이 다시 살게 되는 첫 증거가 되시는 것입니다.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던 주님이 왜 죽으셨을까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누가 하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만 부활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은 누구나 다 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심판의 부활과 영생의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는 사람은 영생의 부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살다 죽고 다시 살아날 사람은 영벌의 부활, 심판의 부활, 죽지 않는 고통의 지옥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 죗값을 다 지불하셨기 때문에 영생의 부활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 영생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미 사망에서 벗어난 사람이요, 생명의 주를 믿으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여전히 사망의 권세에 매인 인생과 같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사고방식과 언어와 양심과 가치와 도덕성을 가지고 살면 안 됩니다.
죽은 자의 삶은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음란과 거짓과 슬픔과 원망과 술 취함과 방탕함과 우상숭배와 불의, 악한 습관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아직도 죽은사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죽음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인생은 병들어도, 부도가 나도, 취직 안되어도, 빚에 쪼들려도, 죽겠다는 표정으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얘기 한번 더 드려야 하겠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낙심과 좌절 가운데 있을 때 그의 아내는 검은 상복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면서 '누가 돌아가셨느냐'고 물었습니다. 루터부인은 '예, 예수님이 돌아가셨어요. 그분이 살아계신다면 내 남편이 이토록 절망을 할리가 없지요'
이말을 듣고 루터가 종교개혁을 완수하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 생명의 부활을 보장받아놓고 사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까
그것은 인생은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죄인이고, 그 죄로 인한 죗값을 치루고 살아가게 되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그러한 인생을 사랑하셔서 "살길"을 준비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희생제물'로 양이나 소나 비둘기 같은 짐승 중 흠없는 것이 제단에 드려지면 그것을 드린자의 죄가 씻기우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성은 소멸되지 않기에 끝없이 많은 제물들이 '대신 죽는 죽임'을 당하여야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인생의 소망 없음을 보시고 영원한 효력을 발휘하는 단 한 번의 제사와 제물을 준비하시는데, 이정도로 특별한 효력을 발생하는 제물이 되려면 보통 '흠없는 짐승 정도를 가지고는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친히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인간의 당할 수 있는 모든 배고픔과 유혹과 분쟁과 미움과 도전과 고통, 치욕을 다 맛보게 하시고, 그 모든 것을 짊어지신 채 희생 제물로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갈보리 십자가의 실체 입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 죽음으로 구속이 완성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죽음으로 모든 죄를 짊어 지셨지만 그것으로 끝이 난다면 그동안 희생 제물로 죽어간 양들과 다를 게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다른 분이신가 그분은 그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류구속(믿는 이들 모두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심)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이들은 구약시대에 자기 죄책감에 시달리며 때마다 묵은 죄를 해결 받기위하여 양을 끌고 제사장에게 나오는 침울한 성도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죄는 십자가 죽음으로 다 해결되었으며 우리의 영과 육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영생"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침울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근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근거가 무언지 아시는가 우리의 자발적 헌신과 열심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성공과 구제 봉사는 어디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비롯됩니다.
결국 우리 기독교의 중심에는 "부활신앙"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66권도 결국은 예수님의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든 그 지역의 명소 상징물이 있습니다.
뉴욕에 가면 자유의 여신상이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명물이고 워싱턴에 가면 백악관이나 링컨기념관에는 가봐야 하고 홍콩에서는 홍콩섬의 야경을 봐야 하고 싱가포르에서는 사자상을 봐야하고 서울에서는 63빌딩엘 올라가 봐야 하고 수원에서는 화성에 올라가보고 갈비를 먹어봐야 한다는 것은 그 도시의 상징이자 자랑이다.
몇 년 전 중국 서안이라는 도시엘 가보니 거기서는 꼭 봐야 할 것이 진시황의 무덤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하길 "세상에 무덤이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구나"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자랑 우리 기독교의 상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일까 예루살렘 성저일까 마구간일까 아닙니다. 빈 무덤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으면 우리 기독교의 어떤 면도 무효가 되고 맙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나서 그의 제국은 사라졌습니다.
히틀러도 나폴레옹도 그랬고 우리 정치계에서도 권력자에게서 권력이 떠나가면 그를 따르던 세력이 다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사건 이후 사람들은 예수님께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기독교는 전 세계로 확산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믿는 자나 믿지않는 자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주의 시작은 "주일"부터 시작입니다.
어떤 이는 일요일 이라고 노는날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의날이 기준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완전히 죽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 즉 주일새벽 부활하심으로 그동안 지켜온 안식일(토요일)이주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매 주일 아침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안식일입니다'하고 출발을 하야여 합니다.
예수 부활은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동안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보통 죄인들 중 사형수는 '목베임'을 당하는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처참하지만, 고통을 최소화하는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죄가 너무 중하여 '고통'을 당하며 서서히 죽어가게 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임을 당하신 이후에 부활하심으로써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하던 것에서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180도 의미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엠블란스에도,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펴는 국제 적십자에도 "십자" 표시는 "살리는" 표시이지 더 이상 '죽음'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16살 먹은 김연아라는 소녀와 17살 먹은 박태환이라는 소년이 온 국민에게 기쁨과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아직은 너무나 어린 소년, 소녀이지만 그들이 세계무대에 나아가서 자신들의 갈고닦은 기량을 떨칠때, 우리는 마음으로 응원하고, 메달을 땄을때 내가 금메달 딴 것처럼 기뻐하지를 않았습니까
십자가의 의미가 '죽음의 형틀'에서 '생명의 길' 부활과 연계될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이므로 그것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인 것입니다.
죽은 예수를 만나러 무덤에 간 여인들은 거기서 예수님을 못 만났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곳은 무덤 안에서가 아니고, 무덤 밖에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의 선조를 높이기 위하여 무덤을 잘 만드는 일에 몰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부모님 양지바른 곳,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지리학적 명당에 모셨다고, 앞이 탁 트인 자리에 무덤 만들었다고 좋아합니다.
이미 영혼이 떠난 몸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달 전에 큰소리치고, 일주일전에 미래를 계획하고 있었어도, 오늘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인간입니다.
그 육신을 땅에 묻으면서 얼마나 따지는게 많은지 모릅니다.
무덤을 얼마나 크나, 어디에 모셨냐가 중요한 줄 아는 인간이 그 무덤에서 사망을 이기고, 살아나신 분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볼 줄을 모릅니다.
아무리 잘난 인생도 무덤을 넘어서질 못하는데 오직 그 무덤에서 살아나온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들의 남은 생애를 한가지에 쏟아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 그 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신 것은 바로 나와 너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함이었다.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바로 이것을 전하기 위하여 그들은 "순교"도 마다하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두려워한 로마정부는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돈을 주고, "예수님의 시신을 제자들이 훔쳐다가 어딘가에 숨겨두고, 예수가 살았다고 거짓 소문을 내고 다닌다"고 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로마의 군사력이 얼마나 칼날이 시퍼렇는지 잘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시체를 몰래 숨겨두었다면 어떻게 그 제자들 중 한사람의 양심선언이 있었겠는가.
로마 정부는 거짓으로라도 '양심선언'을 받아내려고 온갖 고문과 핍박을 자행하였지만 제자들은 순교를 당하면서까지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저는 예수님을 똑똑히 만나 뵈었습니다. " 놀라운 것은 순교자들의 의연한 태도를 목격한 로마인들 가운데 "예수님부활"을 믿는 이들이 생겨났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전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에 의하여 기독교는 세계종교가 되었습니다.
"진리는 능력이 있다" 예수님 부활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크리스천이 되었고, 예수님 부활을 부정하고 외면한 이들은 크리스천을 핍박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어떤 초신자가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것이었으면 무엇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냥 죽지 않고 초자연적 능력으로 죽음을 피하셨으면 이 복잡한 부활논쟁이 필요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 나의 죄가 대신죽어주시는 대속의 죽음으로만 해결되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셔서 나의 죄문제를 완전히 감당하셔야만 나의 생명을 구속하시는 구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완전한 사랑에 이르고 난 후 전례가 없는 완전한 부활을 하심으로 우리들 죄로 죽은 우리들이 다시 살게 되는 첫 증거가 되시는 것입니다.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던 주님이 왜 죽으셨을까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누가 하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만 부활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은 누구나 다 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심판의 부활과 영생의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는 사람은 영생의 부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살다 죽고 다시 살아날 사람은 영벌의 부활, 심판의 부활, 죽지 않는 고통의 지옥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 죗값을 다 지불하셨기 때문에 영생의 부활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 영생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미 사망에서 벗어난 사람이요, 생명의 주를 믿으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여전히 사망의 권세에 매인 인생과 같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사고방식과 언어와 양심과 가치와 도덕성을 가지고 살면 안 됩니다.
죽은 자의 삶은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음란과 거짓과 슬픔과 원망과 술 취함과 방탕함과 우상숭배와 불의, 악한 습관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아직도 죽은사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죽음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인생은 병들어도, 부도가 나도, 취직 안되어도, 빚에 쪼들려도, 죽겠다는 표정으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얘기 한번 더 드려야 하겠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낙심과 좌절 가운데 있을 때 그의 아내는 검은 상복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면서 '누가 돌아가셨느냐'고 물었습니다. 루터부인은 '예, 예수님이 돌아가셨어요. 그분이 살아계신다면 내 남편이 이토록 절망을 할리가 없지요'
이말을 듣고 루터가 종교개혁을 완수하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 생명의 부활을 보장받아놓고 사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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