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죽음의 용기를 넘어 생명으로
본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교우님들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눈은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참 아름답고 화사한 것으로 여깁니다. 예전에 학생 시절 접했던 청춘예찬이니, 인생예찬이니 하는 글들을 보면 인생은 참으로 아름답고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음이선하고 착한 사람들이 대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살벌한 전쟁처럼 여깁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을 수백 만 명이나 죽인 히틀러는 인생을 투쟁처럼 여겼습니다. 그가 쓴 책의 제목조차도 나의 투쟁이라고 했습니다. 교우님들은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생을 아름답고 화사한 것으로 보는 부드러운 사람과 투쟁이라고 생각하는 강한 사람이 마주치면 누가 승리를 거둘까요 대개 사람들은 강한 투쟁 의식을 가지고, 불굴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 승리한다고 생각합니다. 일견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마치 전쟁터에 출전하는 듯한 비장한 결의에 찬 말 한 마디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으러 가자! 사람이 하는 많고 많은 말들 중에서 죽으러 가자는 말 보다 더 강하고 비장한 말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그러자 나사로의 여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빨리 와 주세요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웬 일인지 이틀이나 시간을 지체하셨고, 그 사이에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아신 예수님은 그제야 베다니로 가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얼마 전에도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베다니가 속한 유대 지역은 예수님께 대한 적개심이 가득했습니다. 매우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위험한 곳으로 다시 간다는 게 꺼림칙하고 못마땅했습니다.
바로 이 때 도마가 각오로 가득한 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기꺼이 주님과 함께 죽겠다는 말이지요. 대단한 말입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말 한 마디를 기억합니다. 그것은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에스더가 했던 말, 죽으면 죽으리이다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을 때 숙연해집니다. 대단한 말 앞에 존경심을 표시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도마의 이런 담대한 말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어떻게 이런 대단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도마가 죽음 후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도마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아쉽게도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도마가 도착했는데,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말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눈으로 보고, 그 상처를 만져보기 전에는 절대로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게 도마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도마는 부활을 믿지 않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인데, 도마가 부활을 믿고 죽으러 가자. 죽어도 우리는 부활할 게 아니냐 뭐가 두려우냐라는 식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부활을 믿지도 않으면서 죽으러 가자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떤 분은 도마의 용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입니다. 그리고 그 용기는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용기일 것입니다. 죽을 수 있는 용기, 얼마나 대단합니까 보통 사람은 상상도 못할 용기입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 중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라든지, 사람이 죽을 각오를 하면 무엇을 못하겠느냐는 식의 말들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의 결연한 모습에 찬사를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의 도마는 정말 찬사를 받아 마땅한 사람일까요 우리는 좀 더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 역시 죽음으로 나아간 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렌데 이 사람은 도마와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가 죽은 것은 주후 156년경입니다. 그가 죽은 후 사람들이 편지를 써서 다른 이들에게 알린 고대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총독은 맹세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가이사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그러면 당신을 풀어 주겠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라. ” “지난 팔십 육 년 동안 나는 주님을 섬겨왔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 분은 한 번도 나를 서운케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내가 나의 구원자이시며 왕이신 그 분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러자 총독은 이렇게 협박했습니다. “나에게는 맹수라는 수단이 있다.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맹수를 풀겠다. ” “그들을 부르시오. 선한 데서 악한 데로 떨어진 것을 회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요.
그러나 악한 데서 선한 데로 옮겨가는 것은 얼마나 고상하고 명예로운 일이겠오” “그대가 맹수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나는 불로 태워 죽일 수도 있다. ” “당신이 말하는 그 불은 겨우 한 시간쯤 탈 것이오. 그 후에는 꺼지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불경건한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심판과 영원한 형벌을 알지 못하고 있소. 왜 지체하는 것이오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시오“ 그가 이렇게 말할 때,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은혜로 충만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일로 낙심하기는커녕 오히려 총독을 놀라게 했습니다.
여러분, 로마 총독 앞에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서 있었던 이 분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 분은 서머나 교회의 목사님이었던 폴리캅입니다. 폴리캅은 순교하셨습니다. 그 분은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 분은 총독이 설득을 해도, 위협을 해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도마처럼 용기가 있었기 때문일까요 마치 무슨 투사처럼, 전쟁에 나간 군인처럼 정신력이 강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이 분이 죽음 앞에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인간적 정신력 때문이 아닙니다.
그 분에게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들이 자신을 죽이지만, 주님은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장차 이 몸까지도 부활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는 죽는 게 아니라, 영원히 사는 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도마와 폴리캅의 차이입니다. 도마는 마치 무슨 열사나 투사처럼 죽으러 가자고 했던 반면, 폴리캅은 영광스런 부활을 바라보면서 죽음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 죽습니다. 굳이 도마처럼 죽으러 가자고 외치지 않아도, 가만히 있어도 다 죽음을 향해 갑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우리도 죽음 앞에 서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를 꽉 깨물고 도마처럼 그래, 까짓 거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눈 딱 감고 죽자! 이렇게 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투쟁이나 하듯이 죽음을 맞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눈물을 뿌리면서 표정이 굳은 채로 죽음을 맞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찬송과 함께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고통 가운데서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이 도마의 말처럼, 무슨 투사의 죽음이었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정확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반만 맞습니다. 예수님은 장렬하게 죽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사실은 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아시고 다시 베다니로 가시려고 합니다. 위험한 지역으로 가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러 가시는 게 아닙니다. 꽃 한 송이를 무덤에 바치고, 문상하러 가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장례식 설교를 하신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바로 이게 생명입니다.
여기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장렬하게 죽어 존경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위대한 부활로 그 생명을 누리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죽음을 위한 죽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살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부활하실 것을 알고 죽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수난을 받고 죽을 것이다란 말씀만 하신 게 아니라, 반드시 그 뒤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천주교회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가 다릅니다. 천주교회의 십자가에는 예수님께서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주교회에서는 죽으신 예수님을 집중하여 바라봅니다. 매번 미사를 드릴 때마다 예수님께서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위대한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집중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천주교회가 죽은 예수님을 더 높인다면,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의 신앙으로 무장하십시오. 부활 신앙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십자가 신앙이 종점이 아닙니다. 부활 신앙이야말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우리를 울게 만들지만, 부활 신앙은 웃게 만듭니다. 십자가 신앙은 우리를 좌절에 떨어뜨리지만, 부활 신앙은 다시 떨치고 일어서게 만듭니다.
기독교인을 많이 핍박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황제가 있습니다. 그는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명상록이란 책으로 유명합니다. 황제는 철학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바라보았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고, 부활했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핍박을 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기독교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새 종교 집단이다. 사람이 죽어도 슬퍼하기는커녕 기뻐하며 그들의 신에게 감사의 예식을 드린다. 그들은 장례를 지내기 위해 묘지로 갈 때에도 마치 가벼운 소풍이나 가듯 노래를 부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행진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게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전쟁터로 나가고, 부활의 생명을 바라보면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죽으면 끝나는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남기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남겼으며, 예수는 영원한 생명을 남겼다 철학도, 과학도 줄 수 없는 영원한 생명, 부활의 생명을 우리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이 부활신앙으로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유명한 크리스챤 의사였던 폴 투니어,Paul Tournier가 아내와 그리스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 중 그의 아내가 심장마비를 일으켰습니다. 그곳의 의사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그녀는 별세하였습니다. 죽기 전 넬리는 평화스러운 미소를 띠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천국에 도착하면 당신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테니 정말 즐거울 거예요 그녀는 마치 기차를 타고 제네바에 돌아가서 가족을 만나는 것 같은 어조와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투니어는 모태신앙으로 70년 동안 기독교인이었으나 아내의 최후의 말을 듣고 비로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단순히 죽음으로 나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나가야 합니다. 죽는 게 용기라면, 사는 것은 더 큰 용기입니다. 차리리 죽자가 아니라, 힘있게 살자라고 말해야 합니다. 때로는 사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삶의 정황이 너무 어려우면 절망할 수 있고,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끝까지 아름답게 살아야 하는 것은 죽음이 우리의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 아래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부활의 생명을 누리고, 그 생명을 바라보면서 살아갑시다. 이 놀라운 은총이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눈은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참 아름답고 화사한 것으로 여깁니다. 예전에 학생 시절 접했던 청춘예찬이니, 인생예찬이니 하는 글들을 보면 인생은 참으로 아름답고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음이선하고 착한 사람들이 대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살벌한 전쟁처럼 여깁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을 수백 만 명이나 죽인 히틀러는 인생을 투쟁처럼 여겼습니다. 그가 쓴 책의 제목조차도 나의 투쟁이라고 했습니다. 교우님들은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생을 아름답고 화사한 것으로 보는 부드러운 사람과 투쟁이라고 생각하는 강한 사람이 마주치면 누가 승리를 거둘까요 대개 사람들은 강한 투쟁 의식을 가지고, 불굴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 승리한다고 생각합니다. 일견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마치 전쟁터에 출전하는 듯한 비장한 결의에 찬 말 한 마디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으러 가자! 사람이 하는 많고 많은 말들 중에서 죽으러 가자는 말 보다 더 강하고 비장한 말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그러자 나사로의 여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빨리 와 주세요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웬 일인지 이틀이나 시간을 지체하셨고, 그 사이에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아신 예수님은 그제야 베다니로 가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얼마 전에도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베다니가 속한 유대 지역은 예수님께 대한 적개심이 가득했습니다. 매우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위험한 곳으로 다시 간다는 게 꺼림칙하고 못마땅했습니다.
바로 이 때 도마가 각오로 가득한 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기꺼이 주님과 함께 죽겠다는 말이지요. 대단한 말입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말 한 마디를 기억합니다. 그것은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에스더가 했던 말, 죽으면 죽으리이다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을 때 숙연해집니다. 대단한 말 앞에 존경심을 표시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도마의 이런 담대한 말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어떻게 이런 대단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도마가 죽음 후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도마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아쉽게도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도마가 도착했는데,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말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눈으로 보고, 그 상처를 만져보기 전에는 절대로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게 도마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도마는 부활을 믿지 않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인데, 도마가 부활을 믿고 죽으러 가자. 죽어도 우리는 부활할 게 아니냐 뭐가 두려우냐라는 식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부활을 믿지도 않으면서 죽으러 가자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떤 분은 도마의 용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입니다. 그리고 그 용기는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용기일 것입니다. 죽을 수 있는 용기, 얼마나 대단합니까 보통 사람은 상상도 못할 용기입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 중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라든지, 사람이 죽을 각오를 하면 무엇을 못하겠느냐는 식의 말들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의 결연한 모습에 찬사를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의 도마는 정말 찬사를 받아 마땅한 사람일까요 우리는 좀 더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 역시 죽음으로 나아간 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렌데 이 사람은 도마와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가 죽은 것은 주후 156년경입니다. 그가 죽은 후 사람들이 편지를 써서 다른 이들에게 알린 고대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총독은 맹세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가이사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그러면 당신을 풀어 주겠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라. ” “지난 팔십 육 년 동안 나는 주님을 섬겨왔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 분은 한 번도 나를 서운케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내가 나의 구원자이시며 왕이신 그 분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러자 총독은 이렇게 협박했습니다. “나에게는 맹수라는 수단이 있다.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맹수를 풀겠다. ” “그들을 부르시오. 선한 데서 악한 데로 떨어진 것을 회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요.
그러나 악한 데서 선한 데로 옮겨가는 것은 얼마나 고상하고 명예로운 일이겠오” “그대가 맹수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나는 불로 태워 죽일 수도 있다. ” “당신이 말하는 그 불은 겨우 한 시간쯤 탈 것이오. 그 후에는 꺼지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불경건한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심판과 영원한 형벌을 알지 못하고 있소. 왜 지체하는 것이오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시오“ 그가 이렇게 말할 때,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은혜로 충만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일로 낙심하기는커녕 오히려 총독을 놀라게 했습니다.
여러분, 로마 총독 앞에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서 있었던 이 분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 분은 서머나 교회의 목사님이었던 폴리캅입니다. 폴리캅은 순교하셨습니다. 그 분은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 분은 총독이 설득을 해도, 위협을 해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도마처럼 용기가 있었기 때문일까요 마치 무슨 투사처럼, 전쟁에 나간 군인처럼 정신력이 강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이 분이 죽음 앞에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인간적 정신력 때문이 아닙니다.
그 분에게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들이 자신을 죽이지만, 주님은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장차 이 몸까지도 부활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는 죽는 게 아니라, 영원히 사는 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도마와 폴리캅의 차이입니다. 도마는 마치 무슨 열사나 투사처럼 죽으러 가자고 했던 반면, 폴리캅은 영광스런 부활을 바라보면서 죽음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 죽습니다. 굳이 도마처럼 죽으러 가자고 외치지 않아도, 가만히 있어도 다 죽음을 향해 갑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우리도 죽음 앞에 서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를 꽉 깨물고 도마처럼 그래, 까짓 거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눈 딱 감고 죽자! 이렇게 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투쟁이나 하듯이 죽음을 맞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눈물을 뿌리면서 표정이 굳은 채로 죽음을 맞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찬송과 함께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고통 가운데서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이 도마의 말처럼, 무슨 투사의 죽음이었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정확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반만 맞습니다. 예수님은 장렬하게 죽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사실은 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아시고 다시 베다니로 가시려고 합니다. 위험한 지역으로 가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러 가시는 게 아닙니다. 꽃 한 송이를 무덤에 바치고, 문상하러 가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장례식 설교를 하신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바로 이게 생명입니다.
여기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장렬하게 죽어 존경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위대한 부활로 그 생명을 누리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죽음을 위한 죽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살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부활하실 것을 알고 죽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수난을 받고 죽을 것이다란 말씀만 하신 게 아니라, 반드시 그 뒤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천주교회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가 다릅니다. 천주교회의 십자가에는 예수님께서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주교회에서는 죽으신 예수님을 집중하여 바라봅니다. 매번 미사를 드릴 때마다 예수님께서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위대한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집중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천주교회가 죽은 예수님을 더 높인다면,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의 신앙으로 무장하십시오. 부활 신앙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십자가 신앙이 종점이 아닙니다. 부활 신앙이야말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우리를 울게 만들지만, 부활 신앙은 웃게 만듭니다. 십자가 신앙은 우리를 좌절에 떨어뜨리지만, 부활 신앙은 다시 떨치고 일어서게 만듭니다.
기독교인을 많이 핍박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황제가 있습니다. 그는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명상록이란 책으로 유명합니다. 황제는 철학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바라보았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고, 부활했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핍박을 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기독교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새 종교 집단이다. 사람이 죽어도 슬퍼하기는커녕 기뻐하며 그들의 신에게 감사의 예식을 드린다. 그들은 장례를 지내기 위해 묘지로 갈 때에도 마치 가벼운 소풍이나 가듯 노래를 부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행진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게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전쟁터로 나가고, 부활의 생명을 바라보면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죽으면 끝나는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남기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남겼으며, 예수는 영원한 생명을 남겼다 철학도, 과학도 줄 수 없는 영원한 생명, 부활의 생명을 우리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이 부활신앙으로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유명한 크리스챤 의사였던 폴 투니어,Paul Tournier가 아내와 그리스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 중 그의 아내가 심장마비를 일으켰습니다. 그곳의 의사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그녀는 별세하였습니다. 죽기 전 넬리는 평화스러운 미소를 띠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천국에 도착하면 당신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테니 정말 즐거울 거예요 그녀는 마치 기차를 타고 제네바에 돌아가서 가족을 만나는 것 같은 어조와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투니어는 모태신앙으로 70년 동안 기독교인이었으나 아내의 최후의 말을 듣고 비로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단순히 죽음으로 나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나가야 합니다. 죽는 게 용기라면, 사는 것은 더 큰 용기입니다. 차리리 죽자가 아니라, 힘있게 살자라고 말해야 합니다. 때로는 사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삶의 정황이 너무 어려우면 절망할 수 있고,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끝까지 아름답게 살아야 하는 것은 죽음이 우리의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 아래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부활의 생명을 누리고, 그 생명을 바라보면서 살아갑시다. 이 놀라운 은총이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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