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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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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가 복음을 처음 받았을 때에는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우선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자가 음부에 들어간다고 믿었습니다. 죽어서 가는 음부가 내세의 모든 것이라면 부활을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음부와 부활은 별개입니다.
음부는 부활에 참여하기까지 임시로 가는 중간적인 처소입니다. 부활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 어떤 몸으로 참여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 중의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합리주의자들이었습니다. 내세나 천사나 영적 존재를 믿지 않았고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이성이나 합리주의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죽으며 그만이다. 죽으면 끝이다. ” 인간적인 경험이 부활을 불신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힘으로 죽은 자를 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도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창조된 인간입니다.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죄짓고 심판 아래 있는 인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죽은 자를 다시 살립니다. 구원받은 인간입니다.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 부활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분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영생에 참여케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부활을 의심하게 된 것은 헬라 철학의 영향 때문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영혼의 불멸은 믿지만 육체의 불멸은 믿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육체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영혼의 감옥과 같습니다. 영혼보다 하등하고 악하고 추한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를 이원론적으로 봅니다. 둘은 갈등하고 불편합니다.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선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은 영혼 불멸을 말합니다. 현세는 천국의 그림자요 육체의 감옥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하루 속히 육체를 벗어나서 영혼 불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육체의 부활은 복된 소망이 아니라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악몽일 뿐입니다.
부활에 대한 의심은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바로 알지 못해서 생긴 오해입니다. 영혼과 육체는 함께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육체가 아름답고, 영혼도 아름답습니다. 생명은 영혼과 육체가 함께 하는 것이고, 죽음은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영혼과 함께 육체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육체의 구원이 없는 구원은 진정한 구원이 아닙니다. 몸의 부활은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원래 창조된 대로 육체와 영혼이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구원입니다.
부활에 대한 의심은 세상과 내세를 바로 알지 못해서 생긴 오해입니다. 지금은 세상과 내세를 구분하지만, 장차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할 때에는 세상과 내세는 하나가 됩니다. 지금 세상이 변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처음 하늘과 땅이 새로운 하늘과 땅으로 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부활한 몸은 장차 임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될 우리의 몸입니다. 신령하고 거룩한 몸입니다. 눈물과 질병과 배고픔과 죽음으로 고통 받는 지금의 몸과는 전혀 다른 영광스런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 의를 위하여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더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3-4).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인 증인들이 여럿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도마가 없는 자리에서 한번 나타나셨고,
도마가 있는 자리에서도 나타나셔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못자국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바울이 성경을 기록할 때까지 살아있는 자가 태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를 비롯해서 여러 지도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바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바울이 믿는 자를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을 때 밝은 빛 가운데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다른 증거도 있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합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과 진실에 근거해서 기록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약에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는데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처럼 기록한다면 성경은 완전히 거짓말투성이가 될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다면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천지 창조를 믿는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못 믿을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이 부활을 증거합니다. 혹자는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두고 무덤착오설, 기절설, 시체분실설 등을 주장하나 근거가 없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무덤입구를 굳게 지켰습니다. 시체를 도적질 할 수 없습니다. 시체를 분실했다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의 시체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예수가 입었던 수의가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빈 무덤을 사람의 착오로 돌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장 강력하게 증거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내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게 합니다. 성령은 부활의 주관적인 증인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성령을 받으면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를 대속하셨음을 고백하고, 성령을 받으면 그리스도가 죽은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고백합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한결같이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동일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의심 없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복이 있습니다. 도마에게 말씀하신대로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읍시다. 성령이 은혜 주시는 대로 믿습니다. 객관적인 증거와 주관적인 증거면 충분합니다. 누가 의심하고, 누가 조롱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성경에 기록한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에 많은 기적이 있고, 지혜와 교훈의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만 믿으면 충분합니다. 부활을 믿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참 신자입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의미
그리스도의 부활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부활은 모든 교리의 중심이고 초석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사건은 한 묶음입니다. 어느 하나를 버리면 다른 모든 것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하나를 믿지 아니하면 모든 것을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하였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여호와 하나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장차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셔서 구원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구원 사건 중의 구원 사건은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꽃입니다. 부활은 기독교를 굳게 지켜주는 견고한 요새입니다. 기독교 최대의 절기는 부활절입니다. 성탄절에 카드나 선물을 나눈다면 부활절은 더욱 뜻 깊은 절기로 지내야 할 것입니다. 삶은 계란 하나로는 부족합니다. 성탄절 분위기가 한 달 간다면 부활절 분위기는 더욱 오래 가야 합니다. 사순절 기간부터 부활절까지 그리스도의 발자취와 함께 해야 합니다. 부활절 휴가를 통해서 삶을 재충전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칭의의 기초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위함이고, 예수님의 다시 사심은 우리의 의를 위함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습니다. 죄 값을 완전히 지불하지 못해서 죄 가운데 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구원을 완전히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은 소극적인 것이고, 의를 위해 다시 사신 것은 적극적인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증거합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생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은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부활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께 가는 길이고,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지금까지 죽음이 왕노릇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무릎 꿇게 했습니다.
죽음은 항상 인간의 삶에 끝이었습니다. 최종적인 승리자로 굴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죽어도 다시 삽니다. 부흥사 무디는 죽음 직전에 가족들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계신다. 오늘은 나의 대관식이다. ” 죽음을 통해 기쁘고 영광스럽게 영원한 삶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예수가 부활한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읍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찾아서 안 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언행은 살아계신 그리스도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죄 가운데 죽은 자요 의 가운데 사는 자입니다. 법적으로만 의인된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이 의로워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도달합시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새싹이 돋아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한다면 지금부터 삶의 새싹이 돋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앞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사람의 눈이나 세상의 판단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법정에서 떳떳해야 합니다. 다니엘의 친구들과 같이 때로는 산해진미도 거절하고, 때로는 다니엘과 같이 사자굴을 두려워해서 안 됩니다. 신앙을 지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원받은 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나침반입니다.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것
바울을 바울되게 한 것이 부활 다메섹 도상의 체험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극악한 핍박자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죄인의 괴수였는데 지금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라. ” 무엇이 바울을 이처럼 바꾸었습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해서 다른 것은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했습니다. 로마시민권이나 율법이나 헬라철학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곧, 복음이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바울의 극적인 회심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와 적대감을 버릴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도메섹 체험이었습니다. 복음 중의 복음이 부활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모든 것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기적을 부인하고, 말씀을 부인합니다. 부활을 믿으면 모든 것을 다 믿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모든 성경 말씀을 다 알거나 모든 기적을 다 경험해서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만 믿으면 됩니다. 큰 것을 해결하면 작은 것은 저절로 해결됩니다. 큰 장애물이 제거되면 작은 것은 장애물로 아닙니다.
예수가 정말 부활했다면 예수에 관한 모든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단번에 얻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도 믿고 나서 성경도 연구도 하고 기도하고 훈련했지만,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다메섹 체험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가 나의 구주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월 간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해서 알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겸손합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 자신을 겸손하게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표현합니다. 진실로 회개합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9). ” 스데반을 죽이고 초대교회를 광적으로 핍박했던 자신을 회개했습니다. 그 회개는 과거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회개하는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죄의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은 감격을 잊지 않습니다. 죄의 용서가 헛되지 않는 감동을 가슴에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합니다. 십자가 은혜에 붙들립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10). ” 나의 나 된 것이라는 말을 인칭대명사로 받지 아니하고 중성 단수 관계대명사를 사용합니다. 지금의 바울은 본래 자신의 성품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고 깨닫게 됨으로 변화된 인격임을 의미합니다.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받고, 사도가 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더 많이 수고합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라(10). ”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웠습니다. 배고픔과 매 맞음과 질병과 풍랑과 환난을 몸으로 감당했습니다. 바울은 정신적인 수고도 감당했습니다.
사도가 아니라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살해의 위협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죄 없이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바울 곁을 떠나는 사람으로 인해 마음고생도 하고, 때로는 외롭기도 했습니다. 영적인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할 수 있으면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단의 대적을 물리치며 로마까지 가서 순교했습니다.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었다는 고백과 같이 자신의 생명을 헌신의 제물로 기꺼이 바쳤습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까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삶이 변했습니까 겸손합니까 은혜에 감격합니까 더 많이 수고합니까 바울처럼 고백합시다. 이전의 내가 아니라고. 나의 나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해 더 많이 수고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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