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그리스도 부활의 중요성
본문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스퍼전목사가 하루는 새장 속의 새를 괴롭히는 불량 소년을 보았습니다. "새를 어떻게 할래" 스퍼전이 묻자, 소년은 "괴롭히다가 죽일 거예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스퍼전은 2파운드를 주고 그 새를 사서 멀리 날려 보냈습니다.
이틀 후 부활주일에 스퍼전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마귀는 인간을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주는 엄청 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요, 부활의 역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 개선장, 승리의 노래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경적 사실이요, 역사적이고 객관성이 있는 사실이요, 개별적이요 주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 있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 신앙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매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거창하게 행사를 치르기는 하지만, 실상 진정으로 자신이 죽었다가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감격하며 그러한 부활 신앙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올바로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 주위에서 뜨거운 부활 신앙을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간의 생활을 비교해 보더라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의 중요성에 대해 다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복음의 핵심 진리입니다. (고전15: 1-6)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도덕적 교훈들은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장사되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것으로 생각지 않고 믿기를 꺼려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사실은 기독교의 모든 진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행4:33, 행5:30- 32)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주이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를 믿는 성도도 주 안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얻게 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내세(來世)가 있으며 영적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永生)을 주시겠다 하신 그 약속이 진실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를 믿는 자는 모두 죄사함을 받고 영원히 사망에 처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바로 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을 올바로 가진 자를 참 성도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바로 기독교의 진리 전부를 믿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기 때문에 절대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성도의 신앙은 헛것입니다. (고전 15: 14- 17)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믿음도 헛것이라거 말합니다. 즉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바울이 전하는 것이나 우리가 믿는 바는 아무런 내용이나 효력이 없고, 뿌리가 없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더 이상 믿을 가치도 없고, 전도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부활이 이 모든 것의 가치를 담보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부활을 믿는 자는 소망을 얻습니다. (57,58절)
1967년 6월 30일 열일곱 살의 운동 선수 조니 에릭슨은 체사피크 만에서 다이빙을 하다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로 인해 목 아래부터 전신이 마비된 그녀는 쓰라림, 좌절, 원망, 분노, 심지어 자살하고 싶은 침체까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재활 훈련 및 치료 기간을 통해, 그리고 부모님, 자매들과 친구들의 열렬한 후원을 통해 점차 깊은 블랙홀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녀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후원하는 모임도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변화의 중심에는 성경을 재발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무력하며 마비된 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환상을 보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부활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늘에서 ‘영화롭게’된다고 말합니다. 그때는 내가 여기에서 죽은 후 내 발로 춤을 출 때다. 손가락은 오그라들어 구부러지고, 근육은 쇠약해지고, 무릎은 비틀리고, 어깨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 내가, 언젠가는 가볍고 밝으며 강력하고 눈부신 의로 옷 입은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처럼 척추를 다친 사람에게, 뇌 손상을 입은 환자 혹은 조울증 환자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지 상상할 수 있는가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도 새로운 몸과 정신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 안에서만, 상처 입은 사람이 이처럼 놀라운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
4. 믿는 자를 구원하는 힘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아주 변했습니다. 슬퍼하던 제자들이 참을 수 없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져 있던 제자들이 새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패배감에 사로잡혀 몸둘 바를 몰라하던 제자들이 승리감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의심스러운 것 뿐이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겁해졌던 제자들이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새로운 용기와 담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어떻게 그처럼 비겁하고 나약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담대하게 주님의 복음, 부활의 사건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 까 베드로 같은 제자는 공갈치며 제지하는 공회 앞에서 "내가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으냐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 나는 보고 듣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히 증거하였습니다. 어디서 이런 담력이 생겼습니까 예수 부활하신 사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활하신 주님 안에만 있으면 나도 주님처럼 부활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보이는 사람이, 권력이 무섭지 아니한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5. 그리스도인의 삶의 능력의 기반이 됩니다. (갈2: 19, 20)
사도 바울이 세상적으로 볼 때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을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다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에게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3:8) 또한 사도 바울이 그토록 많은 박해를 견디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 전파에 전력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부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29- 34절) 이처럼 부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그의 소망을 이 세상에 두지 않고 하늘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고 이 세상의 어떤 환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그의 소망을 이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에 죄악된 세상과 타협하거나 환난이 있을 때 곧 넘어지고 좌절하게 됩니다.
혹자들은 부활 신앙이 혀재의 생활에 충실치 못하게 하고 내세 지향적으로 살게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현재 생활에 충실치 못하게 하는 것은 부활 신앙 자체가 아니라 현세 도피적인 잘못된 신앙관입니다.
부활 신앙은 결코 현재 생활과 무관한 것이 아니며, 현재의 신앙 생활에 따라 부활의 때에 얻게 될 영광이 결정되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부할 신앙은 현재 생활에 확실한 목표를 가지게 하며 신앙 생활에 가장 힘있는 활력소가 되는 것입니다.
6. 성도의 미래 유업의 기초가 됩니다. (벧전1: 3,4)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죽음을 완성으로 이끄는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 역사적 사건이란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결국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없는 셈입니다. 언젠가 키에르케고르는 그와 같은 생각을 부드럽고 편편한 돌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편편한 돌을 연못의 수면 위로 던지게 되면 춤을 추듯 물 위를 미끄러져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더니 물 속으로 쑥 가라앉아 버리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수면이 잔잔해집니다. 마치 이것은 사후의 소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극작가인 사무엘 베케트는 '호흡'이라는 희곡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막이 오르면 쓰레기가 잔뜩 어질러져 있는 무대가 등장합니다.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아기의 첫 울음 소리로 시작한 연극은 한 노인의 임종의 헐떡거림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막이 내려옵니다. 여기서 베케트가 말하고자 한 요지는 인생은 허무하고, 존재는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벧전 1:3, 4). 이것은 한 마디로 소망을 의미합니다.
7. 성도의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고전15: 20- 23)
부활절이 우리에게 가장 기쁘고 소중한 축하의 날이 된 것은 온 인류를 사로잡고 있던 죄의 권세, 마귀의 권세,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는 무덤을 자랑하고 무덤 앞에서 슬퍼하며 울고 괴로워하고 허무해 합니다. 세계의 위대한 인물도 모두 무덤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덤이 없습니다. 무덤에 들어가셨던 주님이 지금 살아계셔서 이천년동안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다스리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과 저주와 죽음을 넘어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의 큰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가 되셨고,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 우리가 다음 차례인 것의 보증이 된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행26:23)
8. 그리스도의 하늘 제사장직의 기초가 됩니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7:27)
성도 여러분!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은 우리들의 참으로 크나큰 소망입니다. 그 기쁨과 영광은 생각만 해도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여러분은 진정 부활 신앙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혹 부활에 대한 소망은 없이 지나치게 현재의 삶에 얽매여 세상과 타협하고 죄와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에 이 땅에서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 마치 그것이 영원한 멸망인 것처럼 좌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부활 신앙을 회복합시다. 그래서 더욱 활기있고 힘있는 신앙 생활로 매진합시다. 오직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갑시다. (빌3:14)
이틀 후 부활주일에 스퍼전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마귀는 인간을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주는 엄청 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요, 부활의 역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 개선장, 승리의 노래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경적 사실이요, 역사적이고 객관성이 있는 사실이요, 개별적이요 주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 있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 신앙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매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거창하게 행사를 치르기는 하지만, 실상 진정으로 자신이 죽었다가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감격하며 그러한 부활 신앙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올바로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 주위에서 뜨거운 부활 신앙을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간의 생활을 비교해 보더라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의 중요성에 대해 다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복음의 핵심 진리입니다. (고전15: 1-6)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도덕적 교훈들은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장사되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것으로 생각지 않고 믿기를 꺼려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사실은 기독교의 모든 진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행4:33, 행5:30- 32)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주이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를 믿는 성도도 주 안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얻게 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내세(來世)가 있으며 영적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永生)을 주시겠다 하신 그 약속이 진실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를 믿는 자는 모두 죄사함을 받고 영원히 사망에 처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바로 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을 올바로 가진 자를 참 성도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바로 기독교의 진리 전부를 믿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기 때문에 절대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성도의 신앙은 헛것입니다. (고전 15: 14- 17)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믿음도 헛것이라거 말합니다. 즉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바울이 전하는 것이나 우리가 믿는 바는 아무런 내용이나 효력이 없고, 뿌리가 없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더 이상 믿을 가치도 없고, 전도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부활이 이 모든 것의 가치를 담보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부활을 믿는 자는 소망을 얻습니다. (57,58절)
1967년 6월 30일 열일곱 살의 운동 선수 조니 에릭슨은 체사피크 만에서 다이빙을 하다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로 인해 목 아래부터 전신이 마비된 그녀는 쓰라림, 좌절, 원망, 분노, 심지어 자살하고 싶은 침체까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재활 훈련 및 치료 기간을 통해, 그리고 부모님, 자매들과 친구들의 열렬한 후원을 통해 점차 깊은 블랙홀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녀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후원하는 모임도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변화의 중심에는 성경을 재발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무력하며 마비된 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환상을 보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부활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늘에서 ‘영화롭게’된다고 말합니다. 그때는 내가 여기에서 죽은 후 내 발로 춤을 출 때다. 손가락은 오그라들어 구부러지고, 근육은 쇠약해지고, 무릎은 비틀리고, 어깨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 내가, 언젠가는 가볍고 밝으며 강력하고 눈부신 의로 옷 입은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처럼 척추를 다친 사람에게, 뇌 손상을 입은 환자 혹은 조울증 환자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지 상상할 수 있는가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도 새로운 몸과 정신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 안에서만, 상처 입은 사람이 이처럼 놀라운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
4. 믿는 자를 구원하는 힘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아주 변했습니다. 슬퍼하던 제자들이 참을 수 없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져 있던 제자들이 새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패배감에 사로잡혀 몸둘 바를 몰라하던 제자들이 승리감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의심스러운 것 뿐이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겁해졌던 제자들이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새로운 용기와 담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어떻게 그처럼 비겁하고 나약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담대하게 주님의 복음, 부활의 사건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 까 베드로 같은 제자는 공갈치며 제지하는 공회 앞에서 "내가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으냐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 나는 보고 듣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히 증거하였습니다. 어디서 이런 담력이 생겼습니까 예수 부활하신 사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활하신 주님 안에만 있으면 나도 주님처럼 부활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보이는 사람이, 권력이 무섭지 아니한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5. 그리스도인의 삶의 능력의 기반이 됩니다. (갈2: 19, 20)
사도 바울이 세상적으로 볼 때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을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다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에게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3:8) 또한 사도 바울이 그토록 많은 박해를 견디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 전파에 전력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부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29- 34절) 이처럼 부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그의 소망을 이 세상에 두지 않고 하늘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고 이 세상의 어떤 환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그의 소망을 이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에 죄악된 세상과 타협하거나 환난이 있을 때 곧 넘어지고 좌절하게 됩니다.
혹자들은 부활 신앙이 혀재의 생활에 충실치 못하게 하고 내세 지향적으로 살게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현재 생활에 충실치 못하게 하는 것은 부활 신앙 자체가 아니라 현세 도피적인 잘못된 신앙관입니다.
부활 신앙은 결코 현재 생활과 무관한 것이 아니며, 현재의 신앙 생활에 따라 부활의 때에 얻게 될 영광이 결정되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부할 신앙은 현재 생활에 확실한 목표를 가지게 하며 신앙 생활에 가장 힘있는 활력소가 되는 것입니다.
6. 성도의 미래 유업의 기초가 됩니다. (벧전1: 3,4)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죽음을 완성으로 이끄는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 역사적 사건이란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결국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없는 셈입니다. 언젠가 키에르케고르는 그와 같은 생각을 부드럽고 편편한 돌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편편한 돌을 연못의 수면 위로 던지게 되면 춤을 추듯 물 위를 미끄러져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더니 물 속으로 쑥 가라앉아 버리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수면이 잔잔해집니다. 마치 이것은 사후의 소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극작가인 사무엘 베케트는 '호흡'이라는 희곡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막이 오르면 쓰레기가 잔뜩 어질러져 있는 무대가 등장합니다.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아기의 첫 울음 소리로 시작한 연극은 한 노인의 임종의 헐떡거림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막이 내려옵니다. 여기서 베케트가 말하고자 한 요지는 인생은 허무하고, 존재는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벧전 1:3, 4). 이것은 한 마디로 소망을 의미합니다.
7. 성도의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고전15: 20- 23)
부활절이 우리에게 가장 기쁘고 소중한 축하의 날이 된 것은 온 인류를 사로잡고 있던 죄의 권세, 마귀의 권세,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는 무덤을 자랑하고 무덤 앞에서 슬퍼하며 울고 괴로워하고 허무해 합니다. 세계의 위대한 인물도 모두 무덤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덤이 없습니다. 무덤에 들어가셨던 주님이 지금 살아계셔서 이천년동안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다스리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과 저주와 죽음을 넘어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의 큰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가 되셨고,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 우리가 다음 차례인 것의 보증이 된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행26:23)
8. 그리스도의 하늘 제사장직의 기초가 됩니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7:27)
성도 여러분!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은 우리들의 참으로 크나큰 소망입니다. 그 기쁨과 영광은 생각만 해도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여러분은 진정 부활 신앙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혹 부활에 대한 소망은 없이 지나치게 현재의 삶에 얽매여 세상과 타협하고 죄와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에 이 땅에서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 마치 그것이 영원한 멸망인 것처럼 좌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부활 신앙을 회복합시다. 그래서 더욱 활기있고 힘있는 신앙 생활로 매진합시다. 오직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갑시다. (빌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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