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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나도 여러분에게 전해 드립니다

본문

부활절을 상징하는 꽃은 백합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밤새 기도하실 때 그 동산의 모든 꽃들도 머리를 숙이며 함께 주님의 아픔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꽃 중에 이런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합은 고고하게 머리를 쳐들고 향기를 내 뿜으며 자신을 뽐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백합은 그 날 밤에 주님이 그토록 아파하시면서 기도하셨고, 그 동산의 모든 꽃들이 머리를 들지 못하고 주님과 함께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일을 아는 순간 백합은 얼굴을 붉어지면서 머리를 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백합은 평생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되었고, 꽃 안 쪽이 붉은 빛을 띠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더 없이 기쁜 날입니다.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주님이 다시 사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절 아침에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2년 전,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항에 도착했던 언더우드(Horace Underwood, 1859-1916) 와 아펜셀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 선교사가 그 땅에 엎드려 했던 입을 맞추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우리는 부활의 아침에 이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권세와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어두움의 권세에 매여 죽어가는 이 민족에게 빛을 비추소서. ” 생각해 보면 실로 엄청난 기도 아닙니까 그들의 기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세는 사망의 권세에 매여 죽어가던 우리 민족을 살리셨습니다. 그 덕분에 저와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아펜셀러 와 언더우드는 모두 캠퍼스 선교운동에서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1883년 커네티컷(Connecticut)의 하트포드(Hartford)에서 열린 전국 신학생대회(The American Inter-Seminary Alliance)에 언더우드는 뉴 브룬스위크(New Brunswick) 신학교 대표로, 아펜셀러는 드류(Drew) 신학교 대표로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조선 선교의 문을 여신다는 선교 보고를 받고 조선 선교를 결심했습니다. 이 때 그들의 나이 겨우 언더우드가 26살, 아펜셀러가 27살이었습니다. 두 청년의 아름다운 헌신이 우리 민족을 살렸습니다. 우리 민족은 이 두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부활 신앙이 중요합니까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14, 17). 이 말씀은 실로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우리 믿음의 근거, 우리 믿음의 기초(foundation)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모두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모두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곰곰이 묵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이 진실하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도 우리를 위한 진실한 사건으로 판명이 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만 우리가 믿고 확신하게 되면 모든 신앙상의 문제가 다 풀립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고도의 어려운 수학 문제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밖의 여러 수학문제들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1:3-4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 로마서 처음 시작부터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정말 능력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인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뒤집어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증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그 진실성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을 수 없다면 예수님이 하신 다른 모든 일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하다면 모든 것이 믿어집니다. 모든 것이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예수님의 사역도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도마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도마는 늘 앞에 수식어가 붙어 다닙니다. “의심장이” “불가지론자" “회의주의자” 이런 수식어가 따라 다닙니다. “내가 직접 예수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분의 못박힌 곳에 찔러 보고,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못 믿겠다(요한복음 20:25)”고 말했던 이유 때문에, 그런 수식어가 따라 다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도마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도마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대변(代辯)한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도마의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의 장애물들을 모두 걷어 주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에 찔러 보아라.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 이 때 도마가 주님께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나의 주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My Lord and my God)!”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성경에 도마가 이렇게 외쳤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순간에 그의 믿음의 눈이 확 떠진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데 모든 장애물들이 제거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십자가 형을 집행했던 로마의 백부장도 십자가 위에서 되어진 일을 모두 경험하고서는 “이 사람은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삶이 극적으로 변화됩니다. 극적이라는 말은 밖으로 드라마틱하게 보여지는 현상을 말할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내부적으로 조용하게 극적이 변화를 겪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극적인 체험은 사울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크리스천들이 그곳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크리스천들을 체포하러 가던 사람이 오히려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도 그의 변화가 극적이어서 크리스천들은 그의 변화를 믿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바나바라는 사람이 그의 변화된 삶을 증명해 주지 않았더라면 바울은 영원히 인정을 받지 못할 뻔 했습니다.
그의 말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 말씀이 NLT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passed on to you what was most important and what had also been passed on to me. Christ died for our sins, just as the Scriptures said. He was buried, and he was raised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just as the Scriptures said. ” 직역하면, “나는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역시 나에게 전해진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는 죽어 매장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3일만에 죽은 사람 중에서 살아 나셨습니다. 그것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
우리가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전해 주겠다고 했던 그것이 무엇일까 바울 자신도 그것을 전달 받았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pass on”이라는 말이 물건이나 사상을 전해 받고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자기 자신이 그것을 전달 받았기 때문에 그 자신도 이제 교린도 교회에게 이것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것을 “케리그마(Kerygma)”라고 합니다. “케리그마”는 “선포(proclamation)”라는 뜻입니다. “케리그마”는 기독교의 선포의 중심 메시지였습니다. 오늘날도 설교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케리그마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 그리고 그는 성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 그래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것, 우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전파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케리그마”를 누구를 통해서 전달 받았을까요 성경 어디를 보아도 바울에게 “케리스마를 전달해 준 사람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나는 바울이 예수님에게서 “케리그마”를 직접 전달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길가에서 그는 아주 극적인 경험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는 그에게 들려 오는 음성을 향해 누구시냐고 물었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그는 “내게 말씀하시는 저 분이 바로 예수시구나. 그는 그의 말대로 다시 살아나셨구나!” 이런 영적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바울은 운명처럼 “케리그마”를 전달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그것이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내릴 것입니다(고린도전서 9:16). ” 도대체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가 말하는 복음이란 케리그마를 말합니다. 복음을 전달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 화가 된다니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예전에는 가끔 이상한 편지가 전달되어 왔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당신은 몇 번째로 받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고 3일 안에 다른 사람에게 이 편지를 보내지 않으면 당신에게 저주가 내릴 것입니다. ” 이런 편지 받아 보왔습니까 요즘엔 이 메일로도 이런 편지가 옵니다. 아마 어떤 사람이 재미로 시작한 것 같은데요.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꽤 심각합니다. 안 보내자니 뭔가 찜찜합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 꼭 그런 것과 흡사합니다. “내가 받은 케리그마를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그것은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내가 전달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합니다. 그것은....... ” 오늘 여러분은 “케리그마”를 전달 받았습니다. 2007년 부활절 예배 때에 “케리그마”를 전달 받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케리그마”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운명이고, 여러분의 사명입니다. 전달하자니 그렇고, 전달하지 않자니 찜찜하고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나에게 전달되어 오는 이상한 편지는 아무 내용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사람을 살리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전달 받은 “케리그마”는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또 그 다음 세대에게도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 속에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5:12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바울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여호와 하나님의 “케리그마”를 들은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달해서 이제는 온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메시지가 전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 앞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객관성을 말합니다. 이것이 몇 사람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전달한 것이 여자들이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말을 잠재우기 위해서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게바(베드로), 열두 제자, 오 백 명의 형제들, 그 중에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만나 볼 수도 있고, 그들을 인터뷰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몇 몇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경험된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말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사람입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주님은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과거에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사도가 될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의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
지금 우리 시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가 힘을 잃어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가 없어도 설교가 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는 고전적인 메시지처럼, 그 메시지가 좋은 것도 알고, 소중한 것도 알지만, 고전(古典)들이 읽히지 않고 책꽂이에 꽂혀 있는 장식품이 되고 있는 것처럼,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가 그렇게 취급 받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설교자들이 먼저 “케리그마”를 그들의 설교의 주제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크리스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을 회복해야 합니다. 당장에 듣기 좋은 설교, 재미 있는 설교에만 열광하는, 그러나 그 속에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가 빠져 있는 설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아무리 설교가 재미 있어서 배꼽에 물이 나도록 웃었어도, 문제는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에는 사람을 변화 시키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한번 여러분 주변을 돌아 보십시오. 내가 입을 열어 가장 중요하게 말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 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나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이 말이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한번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메시지가 필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쩌면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가,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린 아이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그 사람을 찾아 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입을 열어 말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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