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예수님의 부활은
본문
만물이 생기를 얻고 생명으로 피어나는 부활의 계절입니다. 시절을 속일 수 없이 화단에는 목련의 꽃망울이 맺혀있고 매화가 피고 산수유가 피어나는 모습, 어제 동로를 타고 시내에서 들어오다 보니 노오란 개나리가 일부 피어 있었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다 죽은 듯이 있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꽃을 피운 것을 보면 생명의 신비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생명의 부활로 우리 앞에 나타나셨고, 그 주님은 장차 우리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부활의 기쁨과 영광이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일과 우리 교회와 모든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 나라위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지난 한 주간은 고난주간으로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경건의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주님 자신이 아닌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3장16절 말씀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그대로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 십자가의 고난이었고, 그로 인하여 저와 여러분은 소망가운데 구원받은 성도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의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부활은 기독교신앙의 근본이요 뿌리입니다.
고린도전서15:17-19절 말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사건이 없다면, 장차 우리에게도 부활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활은 그 어떤 직분이나 사회적 명예로 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감리교를 창설한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천국에 가는 꿈을 꾸었답니다.
천국에 갔더니 듣던 대로 베드로 사도께서 천국 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웨슬레 목사님은 천국에 ‘감리 교인이 몇 명이나 왔을까’ 몹시 궁금해서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님, 천국에는 감리교인가 몇 명이나 왔습니까 ”
“웨슬레씨 감리교인는 천국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
웨슬레 목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장로교인는 몇 명이나 왔습니까”
“천국에는 장로교인도 한 사람도 없습니다. ”
웨슬레 목사는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인는 몇 명이나 왔습니까”
“천주교도도 한 사람도 없습니다. ”
웨슬레 목사는 더욱 궁금해 졌습니다.
“베드로 사도님, 그렇다면 천국에는 누가와 있습니까”
“천국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와 있습니다. ”
웨슬레 목사님은 ‘그러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시 천사를 따라 웨슬레 목사를 지옥으로 갔습니다. 웨슬레 목사는 또 궁금했습니다.
“천사님, 지옥에는 감리교인이 있습니까”
“예, 아주 많이 있습니다. ”
웨슬레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큰일이구나!
“그렇다면 장로교인도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장로교인도 많이 있습니다. ”
“그렇다면 천주교인은요”
“물론 천주교인도 많이 있습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지옥에 들어오지 않습니까”하고 물으니 천사가 대답하였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지옥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부활신앙고백을 확실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담겨 있는 사도행전10장 전체 내용은 이방인 고넬료 가족과 부하직원들 가운데 역사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내려주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와서 설교한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부활신앙은 어떤 신앙이어야 하는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 설교한 내용을 보면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인간들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부탁을 하셨는가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차별이 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 34-35절 말씀,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 각 나라 중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베드로가 큰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유대인들만이 받는다고 생각했던 구원을 이제는 이방인들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려 할 때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완전히 개방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3장16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는 자 마다’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누구든지’라는 속에 포함되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배운 사람이나 못배운 사람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이나 어른이나, 장애인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할 것 없이, 그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조건이 따릅니다. 자격조건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구분하는 일반적인 자격조건은 필요 없습니다. 천국 들어가는 데는 그 어떤 조건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재림하심을 믿으면 됩니다. 세상에서는 차별받을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게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에스겔 18장2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고 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5장16절 말씀을 보면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라고 했습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공평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공평하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공평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뇌성마비로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송명희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은 공평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이유로 여호와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여호와 하나님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하면, 여호와 하나님 말씀대로 우리가 공평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평하지 못하니까 여호와 하나님도 공평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주님의 공평함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항상 공평하게 대해야 합니다. 로마서3장22절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10:12절 말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고 하셨습니다. 아울러 야고보2장 1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만일 출입하는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기를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기를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고 한다면 결국 차별하는 것으로 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2장9절에 보면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성도는 차별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는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로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은혜의 사건입니다.
36-38절 말씀을 봅시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 여호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마태복음28장에 보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는 순간 두려워했습니다. 그 후에 천사를 만나 확인한 후에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으로, 한편으로는 기쁜 마음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기전에 이미 일러주셨던 말씀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고 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여인들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달하려고 달음질하면 내려가는 중에 예수님께서 그 여인들을 만나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안하냐”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0장 11-12절 말씀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화평의 복음입니다. 다툼의 복음이 아닙니다. 분열의 복음도 아닙니다. 오직 평화의 복음, 살롬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화목제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들어가는 곳,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화평이 나타나야 합니다.
부활절을 앞두고 지난 20일 목요일에 기쁜 소식을 안겨주었습니다. 소식인즉 손양원 목사님을 배출했던 여수 돌산읍에 있는 돌산읍 교회가 15년에 교인들 간의 갈등으로 절반정도가 갈라져서 돌산제일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갈라진 교인들은 원수처럼 지냈습니다. 어떤 가정은 부모는 돌산읍 교회에, 자녀는 돌산제일교회에 출석하는 등 교인들의 갈라짐은 가족의 분열까지 가져왔습니다. 이제 목회자가 바뀌면서 화합의 물꼬를 터기 시작해서 오늘 그 두 교회가 함께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돌산읍교회 목사님의 나이가 많아 담임목사가 되고 돌산제일 교회 목사는 부목사가 되기로 했다고 합니다. 두 교회의 모든 항존직들은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 걸림돌이 된다면 자신들의 직분도 다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내려놓음이 없이는 평화하기 어렵습니다. 연합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복음의 소식은 우리의 삶을 화평케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화평을 주러 오셨습니다. 화목제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연합예배를 드리는 것도 기독교인은 연합해야 합니다. 개교회적으로 지나치게 분리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교파가 하나 되지 못하면 연합이라도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평화롭게 지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믿는 성도들의 바람직한 삶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는 우리에게 증인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37-39절 말씀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 여호와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43절 말씀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고넬료 가족들을 향하여 설교할 때 백성들에게 전도하라고 했고, 증인이 되라고 했습니다. 무엇에 대한 증인인가 부활하심에 대한 증인이겠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를 증언하라고 했습니다.
첫째로는 42절에 보면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오신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증언하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1장21-22절에 보면 가롯 유다 대신에 다른 제자를 세울 때 제자의 조건과 제자를 세우는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자격은 요한의 세례로부터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제자들과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정확한 증언자는 직접 목격한 사람입니다. 비록 당시에 제자는 안되었지만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았던 사람 중에서 택해야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힘있게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에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국을 떠나 낯선 땅 이역만리에 와서 복음하나 때문에 죽은 희생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로 많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우리나라에 기독교 선교사로서 복음을 가장 먼저 전한 사람이 언더우드와 아펜셀러입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가 1885년 4월5일 부활절이었습니다. 그때의 이 선교사의 기도내용이 이렇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어사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소서”
이 한반도 땅에 여러 가지 풀어야 할 결박이 많이 있던 백성들에게 선교사님들을 통하여 하나씩 하나씩 벗겨주셨습니다. 문화 전통에 대한 결박, 술과 담배에 대한 결박, 제사와 귀신에 대한 결박, 놀음과 무식함과 무지함에 대한 결박 등 다양하게 묶여있는 것을 끊고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자유로 참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하고, 그 증거를 통해서 불신앙으로 묶어놓은 모든 관습과 제도 등을 끌러주어야 합니다. 죄사함이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고, 주님을 믿지 않고는 죄사함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분명히 증거 해야 합니다.
부활절을 맞아 우리는 막연히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이 기쁨과 영광을 모르는 자들에게 증거 해야 합니다. 우리는 증인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전교인 출석주일로 정했습니다만 사실은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의 설교를 고넬료 식솔들에게 전했을 때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44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라고 했습니다.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부활절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감동이 있었습니다.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방언도 했다고 46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음을 확인한 베드로는 서슴없이 물세례를 베풀었다고 47-8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한 주님에 대한 증언을 통해서 나타난 역사입니다.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구하던 중 한 미이라를 발견하였다. 미이라 손에는 꽃 한 송이가 있었는데, 공기와 접촉하는 순간, 그 꽃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 꽃을 다시는 볼 수 없었으나, 떨어진 몇알의 꽃씨를 발견하여 영국으로 가지고 와 심었더니 싹이 나고 자라 꽃이 피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꽃들 중에 갖은 종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꽃 재배에 관여했던 스웨덴의 식물학자 다알의 이름을 따 다알리아로 이름을 붙였는데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꽃입니다.
정말, 기막힌 사건입니다! 3천년이 지난 꽃씨가 살아 있다니.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다알리아의 꽃씨가 새로 날 수 있었던 것은 씨앗 속에 생명이 있어 다시 살아난 것처럼, 우리가 살면서 아무리 극한 고통이 와도 반드시 목적을 이루거나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소망을 버리지 않는 한 반드시 꽃을 피우고, 성공을 거두고 빛난 영예까지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이 내안에 있음으로 나도 부활합니다. 주님의 부활의 소식보다 더 중요한 소식은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위대한 소식은 없습니다. 이것을 믿고 이것을 전할 때 귀신은 쫓겨납니다. 저주가 물러갑니다.
가난이 물러갑니다. 질병이 치유 받습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평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엄청난 감격의 사건을 믿으면서도 우리가 감동하지 못하고 그것을 전하지 못한다면 나의 신앙은 과연 올바른 신앙인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부활을 믿는 신앙인가를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생명의 부활로 우리 앞에 나타나셨고, 그 주님은 장차 우리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부활의 기쁨과 영광이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일과 우리 교회와 모든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 나라위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지난 한 주간은 고난주간으로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경건의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주님 자신이 아닌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3장16절 말씀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그대로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 십자가의 고난이었고, 그로 인하여 저와 여러분은 소망가운데 구원받은 성도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의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부활은 기독교신앙의 근본이요 뿌리입니다.
고린도전서15:17-19절 말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사건이 없다면, 장차 우리에게도 부활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활은 그 어떤 직분이나 사회적 명예로 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감리교를 창설한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천국에 가는 꿈을 꾸었답니다.
천국에 갔더니 듣던 대로 베드로 사도께서 천국 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웨슬레 목사님은 천국에 ‘감리 교인이 몇 명이나 왔을까’ 몹시 궁금해서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님, 천국에는 감리교인가 몇 명이나 왔습니까 ”
“웨슬레씨 감리교인는 천국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
웨슬레 목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장로교인는 몇 명이나 왔습니까”
“천국에는 장로교인도 한 사람도 없습니다. ”
웨슬레 목사는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인는 몇 명이나 왔습니까”
“천주교도도 한 사람도 없습니다. ”
웨슬레 목사는 더욱 궁금해 졌습니다.
“베드로 사도님, 그렇다면 천국에는 누가와 있습니까”
“천국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와 있습니다. ”
웨슬레 목사님은 ‘그러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시 천사를 따라 웨슬레 목사를 지옥으로 갔습니다. 웨슬레 목사는 또 궁금했습니다.
“천사님, 지옥에는 감리교인이 있습니까”
“예, 아주 많이 있습니다. ”
웨슬레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큰일이구나!
“그렇다면 장로교인도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장로교인도 많이 있습니다. ”
“그렇다면 천주교인은요”
“물론 천주교인도 많이 있습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지옥에 들어오지 않습니까”하고 물으니 천사가 대답하였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지옥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부활신앙고백을 확실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담겨 있는 사도행전10장 전체 내용은 이방인 고넬료 가족과 부하직원들 가운데 역사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내려주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와서 설교한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부활신앙은 어떤 신앙이어야 하는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 설교한 내용을 보면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인간들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부탁을 하셨는가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차별이 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 34-35절 말씀,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 각 나라 중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베드로가 큰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유대인들만이 받는다고 생각했던 구원을 이제는 이방인들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려 할 때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완전히 개방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3장16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는 자 마다’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누구든지’라는 속에 포함되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배운 사람이나 못배운 사람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이나 어른이나, 장애인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할 것 없이, 그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조건이 따릅니다. 자격조건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구분하는 일반적인 자격조건은 필요 없습니다. 천국 들어가는 데는 그 어떤 조건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재림하심을 믿으면 됩니다. 세상에서는 차별받을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게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에스겔 18장2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고 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5장16절 말씀을 보면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라고 했습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공평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공평하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공평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뇌성마비로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송명희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은 공평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이유로 여호와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여호와 하나님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하면, 여호와 하나님 말씀대로 우리가 공평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평하지 못하니까 여호와 하나님도 공평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주님의 공평함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항상 공평하게 대해야 합니다. 로마서3장22절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10:12절 말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고 하셨습니다. 아울러 야고보2장 1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만일 출입하는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기를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기를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고 한다면 결국 차별하는 것으로 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2장9절에 보면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성도는 차별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는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로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은혜의 사건입니다.
36-38절 말씀을 봅시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 여호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마태복음28장에 보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는 순간 두려워했습니다. 그 후에 천사를 만나 확인한 후에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으로, 한편으로는 기쁜 마음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기전에 이미 일러주셨던 말씀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고 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여인들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달하려고 달음질하면 내려가는 중에 예수님께서 그 여인들을 만나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안하냐”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10장 11-12절 말씀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화평의 복음입니다. 다툼의 복음이 아닙니다. 분열의 복음도 아닙니다. 오직 평화의 복음, 살롬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화목제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들어가는 곳,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화평이 나타나야 합니다.
부활절을 앞두고 지난 20일 목요일에 기쁜 소식을 안겨주었습니다. 소식인즉 손양원 목사님을 배출했던 여수 돌산읍에 있는 돌산읍 교회가 15년에 교인들 간의 갈등으로 절반정도가 갈라져서 돌산제일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갈라진 교인들은 원수처럼 지냈습니다. 어떤 가정은 부모는 돌산읍 교회에, 자녀는 돌산제일교회에 출석하는 등 교인들의 갈라짐은 가족의 분열까지 가져왔습니다. 이제 목회자가 바뀌면서 화합의 물꼬를 터기 시작해서 오늘 그 두 교회가 함께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돌산읍교회 목사님의 나이가 많아 담임목사가 되고 돌산제일 교회 목사는 부목사가 되기로 했다고 합니다. 두 교회의 모든 항존직들은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 걸림돌이 된다면 자신들의 직분도 다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내려놓음이 없이는 평화하기 어렵습니다. 연합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복음의 소식은 우리의 삶을 화평케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화평을 주러 오셨습니다. 화목제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연합예배를 드리는 것도 기독교인은 연합해야 합니다. 개교회적으로 지나치게 분리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교파가 하나 되지 못하면 연합이라도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평화롭게 지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믿는 성도들의 바람직한 삶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는 우리에게 증인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37-39절 말씀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 여호와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43절 말씀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고넬료 가족들을 향하여 설교할 때 백성들에게 전도하라고 했고, 증인이 되라고 했습니다. 무엇에 대한 증인인가 부활하심에 대한 증인이겠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를 증언하라고 했습니다.
첫째로는 42절에 보면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오신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증언하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1장21-22절에 보면 가롯 유다 대신에 다른 제자를 세울 때 제자의 조건과 제자를 세우는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자격은 요한의 세례로부터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제자들과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정확한 증언자는 직접 목격한 사람입니다. 비록 당시에 제자는 안되었지만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았던 사람 중에서 택해야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힘있게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에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국을 떠나 낯선 땅 이역만리에 와서 복음하나 때문에 죽은 희생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로 많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우리나라에 기독교 선교사로서 복음을 가장 먼저 전한 사람이 언더우드와 아펜셀러입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가 1885년 4월5일 부활절이었습니다. 그때의 이 선교사의 기도내용이 이렇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어사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소서”
이 한반도 땅에 여러 가지 풀어야 할 결박이 많이 있던 백성들에게 선교사님들을 통하여 하나씩 하나씩 벗겨주셨습니다. 문화 전통에 대한 결박, 술과 담배에 대한 결박, 제사와 귀신에 대한 결박, 놀음과 무식함과 무지함에 대한 결박 등 다양하게 묶여있는 것을 끊고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자유로 참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하고, 그 증거를 통해서 불신앙으로 묶어놓은 모든 관습과 제도 등을 끌러주어야 합니다. 죄사함이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고, 주님을 믿지 않고는 죄사함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분명히 증거 해야 합니다.
부활절을 맞아 우리는 막연히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이 기쁨과 영광을 모르는 자들에게 증거 해야 합니다. 우리는 증인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전교인 출석주일로 정했습니다만 사실은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의 설교를 고넬료 식솔들에게 전했을 때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44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라고 했습니다.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부활절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감동이 있었습니다.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방언도 했다고 46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음을 확인한 베드로는 서슴없이 물세례를 베풀었다고 47-8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한 주님에 대한 증언을 통해서 나타난 역사입니다.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구하던 중 한 미이라를 발견하였다. 미이라 손에는 꽃 한 송이가 있었는데, 공기와 접촉하는 순간, 그 꽃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 꽃을 다시는 볼 수 없었으나, 떨어진 몇알의 꽃씨를 발견하여 영국으로 가지고 와 심었더니 싹이 나고 자라 꽃이 피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꽃들 중에 갖은 종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꽃 재배에 관여했던 스웨덴의 식물학자 다알의 이름을 따 다알리아로 이름을 붙였는데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꽃입니다.
정말, 기막힌 사건입니다! 3천년이 지난 꽃씨가 살아 있다니.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다알리아의 꽃씨가 새로 날 수 있었던 것은 씨앗 속에 생명이 있어 다시 살아난 것처럼, 우리가 살면서 아무리 극한 고통이 와도 반드시 목적을 이루거나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소망을 버리지 않는 한 반드시 꽃을 피우고, 성공을 거두고 빛난 영예까지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이 내안에 있음으로 나도 부활합니다. 주님의 부활의 소식보다 더 중요한 소식은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위대한 소식은 없습니다. 이것을 믿고 이것을 전할 때 귀신은 쫓겨납니다. 저주가 물러갑니다.
가난이 물러갑니다. 질병이 치유 받습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평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엄청난 감격의 사건을 믿으면서도 우리가 감동하지 못하고 그것을 전하지 못한다면 나의 신앙은 과연 올바른 신앙인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부활을 믿는 신앙인가를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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