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신앙을 가진 자는
본문
오늘 우리는 조금전에 교사들이 연출한 부활에 대한 성극을 보았습니다. 부활을 보다 더 실감있게 꾸며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사흘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부활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믿는데 부활을 믿지 않으시는 분 계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믿는데 부활을 믿지 못하는 분 없습니까 부활이 있다는 것은 죽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죽음이 없는데 부활은 없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6대 철학이 있습니다.
1)‘다 정해진 대로 되는 거야. 몸부림쳐 봐야 소용이 없어’ 라는 숙명론
2)‘신은 있지만 인간의 이성이 신의 계시보다 더 낫지. 신은 있지만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아’라는 이신론.
3)‘사람은 동물이 잔화한 거야. 죽으면 사람이나 짐승이 다 같다. 개처럼 살다가 개처럼 죽는데 무슨 걱정이야’라는 진화론.
4)‘아무것도 확실히 몰라. 부활을 어떻게 알아’라는 회의주의.
5)‘인생은 카바레야. 즐기기만 하면 되는 거야’라는 쾌락주의.
6)‘우리의 시작도 다 같고 끝도 다 같아. 다 죽는데 무슨 걱정이야’라는 보편주의가 있습니다.
1980년대 미국에서 사망학을 고등학교와 대학교 커리큘럼에 넣어 죽음의 독침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사망학자 스나이더만 교수가 하버드 대학에서 사망학 강좌를 개설했을 때 20명만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에 200여명이 몰렸습니다. 그 이후로 미국 전역에서 각 대학들이 사망학 강좌를 개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사망학자가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람들의 죄의 독침을 제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사심으로써 친히 죽음을 이기시고 사람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길을 제공하셨습니다. 고전15:21-22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사실 죽음에 대한 6대 철학을 이야기 했습니다만 죽음에 대한 철학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여 상실된 인간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인간들, 이렇게 두 부류입니다. 사망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기는 길이 있습니다.
고전15장 55-57절에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7절에서 사망을 이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극복합니다. 부활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버리는 순간에는 사망이 그를 지배합니다. 자기를 길러 준 가정의 기독교를 버린 대문호 헤밍웨이는 이렇게 탄식을 했습니다.
“인생의 어떤 문제든 해결이 없다. …죽음이 나의 불행들의 주권적인 처방이다. 나는 밧데리 나간 라디오처럼 외롭고 텅 빈 상태에서 산다. 그런데 전기를 꽃을 데가 없다”19세기 유명 강사요 변호사요 불경한 회의주의자로서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기독교를 비판했던 로버트 잉어솔은 자기 형제의 무덤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인생은 두 개의 영원의 차가운 봉우리와 공허한 봉우리 사이에 있는 좁은 계곡, 우리는 저 꼭대기 저 너머를 보려고 하지만 헛된 짓이다.
우리는 크게 부르짖지만 유일한 대답은 우리의 울부짖는 통곡의 메아리뿐이다”이것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들의 좌절과 절망의 탄식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가진 자들인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죽음을 이미 이기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한 믿음의 삶이 되는지요
그 해답이 57절 말씀입니다.
첫째,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에 견고해야 합니까 우리를 견고하지 못하게 흔들어 놓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무를 심어놓고 바람이 심하게 불면 뿌리를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흔들어 놓는 바람, 영적으로 부활의 신앙을 흔들어 놓는 바람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단이나 미혹의 영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에 굳게 서야 합니다.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교훈의 풍조란 바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리새인들 술책과 회유 등을 말합니다.
골2:6-8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여기서도 보면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 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행하여야 하며, 그 안에 믿음의 뿌리를 깊이 박아서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고 했습니다. ‘가랑비에 옷젖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닌 것도 자꾸 맞다고 하면 맞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단이다’ ‘잘못되었다’고 하면서도 자꾸 접촉하여 그들의 주의 주장을 듣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미혹되어 넘어갑니다. 이단들은 그것을 노립니다. 여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말씀에 굳게 서야 합니다.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교회안에서 시행하는 성경공부에 열심히 참여하여야 합니다. 교회서하는 성경공부 외에는 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밖에 있는 성경공부를 하고 싶을 때는 반드시 담임목사나 교역자들에게 물어보고 확인을 하고 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교계에 아무 교묘하게 침투하고 있는 이단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성회”라는 안상홍파, 구약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신천지 교회라는 이름을 걸고 무료로 성경공부를 시켜준다고 하면서 접근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이들은 큰 교회의 성도들에게 접근해서 그들을 세뇌시켜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어지럽게 만드는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 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는 안하면서 다른 곳에 성경공부를 하러 다니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무료성경공부를 통해 신천지 ‘이만이’ 교주를 섬기는 어리석은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부활신앙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아내가 해 주는 음식을 먹고 식중독에 걸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외식한 후에 식중독에 걸립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담임목사의 목회 속에서 주시는 말씀과 가르침을 받으면 탈이 없는데 다른 가르침을 받으니 탈이 나는 것입니다. 진리에 굳게 서시고 미혹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환란에 흔들리면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쉽게 흔들리기 쉬운 환경이 고난입니다. 환란입니다. 환란이 오면 쉽게 흔들립니다. 믿음이 좋다고 여겨지는 성도라도 어려운 환경이 닥치면 믿음의 뿌리가 흔들흔들 합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 선지자였습니까 바알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서 승리할 정도로 믿음이 좋은 선지자였습니다.
열왕기상19장에 보면 그 후에 이세벨이 자기 남편 아합왕의 이야기를 듣고는 사람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는 도망하였습니다. 광야 길로 하룻길 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바라며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그러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엘리야를 어루만지면서 하는 말이 “일어나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갖다 준 음식을 먹고 정신을 차려서 그 힘으로 사십일을 걸어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이르렀습니다. 그 산에 있는 굴속에 들어가 머물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엘리야를 찾아와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했을 때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10절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엘리야의 이 말을 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이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엘리야 자기만 남았다고 했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숨겨두신 자가 칠천명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믿음 좋은 엘리야 선지자도 순간적으로 낙심이 되어 안절부절 하는 나약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떤 환란이 다가오더라도 오히려 기뻐하며 이겨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환란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기 때문입니다.
어떤 핍박과 환란이 다가오더라도 절대로 낙심하거나 흔들리면 안됩니다. 인간은 마음이 약하여 잘 넘어집니다. 여러분 요즘 우리 정치 사회에 보세요. 나름대로 깨끗하다고 생각했던 거물급 정치인들이 부인들이 거두어들인 공천자금 때문에 너무 처절한 모습으로 퇴장하는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의롭게 나름대로 깨끗한 정치를 한다고 했으나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이유가 뭡니까 순간적으로 돈에 눈이 어두워서 돈에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흔들리기 쉬운 것은 세상의 풍조입니다. 미혹입니다.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유혹을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의 풍조를 조심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쉽게 흔들리는가 사랑의 대상의 우선순위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대상의 우선순위가 바뀌면 어떻게 됩니까 아내를 저버리게 됩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함이 세상의 그 무엇과 바뀌는 순간 우리는 넘어집니다. 돈이 유혹합니다. 물질의 유혹이 가장 심합니다. 요즘은 이성의 유혹이 있습니다. 이성이 결국 인생을 무너지게 만듭니다. 삼손은 이방 여인에게 넘어갔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의 사람들을 보러갔다가 강간을 당했습니다. 롯이 세상 풍조에 밀려서 전도도 하지 않고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가 결국은 살았으나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11:3에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혹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뱀이, 즉 사단이 하와를 미혹한 것처럼 우리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부활신앙에서 떠나 부패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염려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심지가 견고하여 복을 받은 인물들도 많았습니다.
우선은 요셉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자기를 유혹해도 ‘여호와 하나님께 득죄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그 자리를 피함으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삼손과는 대조적입니다. 부활의 신앙에 확실하게 설 때에 믿음에 파선하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이 확고할 때에 어떤 환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든든히 서갈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유지하면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오늘 58절 말씀에 “주의 일에 더욱 힘써라”고 했습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씀으로 흔들리지 않게 되기도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주의 일에 더욱 힘쓰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는 어느 것이 앞선다고 하기 보다는 함께 병행되는 것이 된다고 보면 됩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는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로마서12장11절에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성실한 자세로 섬겨야 합니다. 부활신앙이 확실하면 죽음인들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나 일이 없고 한가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사단이 침투합니다. 그래서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의 일을 열심히 감당해야 합니다. 열심히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예배도 열심히 드려야 합니다. 봉사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성경전체를 보면 힘써 하라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서3장8절에 보면 기도할 때 힘써 부르짖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힘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호세아6:3에 보면 여호와를 알려고 할 때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일에 힘써 일하되 주의 일에는 더욱 힘쓰라고 했습니다.
주의 일에 열심히 한 사람을 지적하라고 하면 누구를 지적하겠습니까 자타가 공인하는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바울만큼 열심히 주의 일을 열심히 한 사람이 없습니다. 사실 바울은 자기가 하는 모든 일, 자기가 옳다고 생각되는 모든 일은 열심히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도 열심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3:6에 “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고 할 정도록 그는 엄청나게 핍박을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14에 “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바울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바울은 그 열심을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 내어놓았습니다. 고린도후서11:2에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니까 주님이 좋아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더라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봉사를 하더라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일을 하더라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4: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많이 하되 더욱 힘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통 하는 것보다는 더 힘을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세상의 일을 하는 것보다는 주의 일을 할 때 좀더 힘을 써라고 했습니다. 열심으로 주를 섬기고 봉사하며 헌신하면 누가 해치지 못합니다. 베드로전서 3:13에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욱 힘써 주의 일을 할 때에 부활신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든든히 서가며 승리하게 됩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가 이렇게 살면 여호와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삶의 열매를 거두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하15:7절에 보면 ‘행위에는 상급이 있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6:10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으로 성도를 섬긴 행위를 잊어버리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졌다면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더욱 힘써서 일합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확실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상주시는 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부활절을 맞아 메마른 땅에서 싹이 돋아나듯이, 죽음의 흑암을 이기시고 밝고 광명한 세상으로 나오셔서 새로운 희망을 주셨듯이 우리도 모든 나태한 믿음에서 성실한 믿음의 싹을 틔웁시다. 어떤 역경이 덕치더라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주님의 재림의 그날이 옴을 볼수록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다 정해진 대로 되는 거야. 몸부림쳐 봐야 소용이 없어’ 라는 숙명론
2)‘신은 있지만 인간의 이성이 신의 계시보다 더 낫지. 신은 있지만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아’라는 이신론.
3)‘사람은 동물이 잔화한 거야. 죽으면 사람이나 짐승이 다 같다. 개처럼 살다가 개처럼 죽는데 무슨 걱정이야’라는 진화론.
4)‘아무것도 확실히 몰라. 부활을 어떻게 알아’라는 회의주의.
5)‘인생은 카바레야. 즐기기만 하면 되는 거야’라는 쾌락주의.
6)‘우리의 시작도 다 같고 끝도 다 같아. 다 죽는데 무슨 걱정이야’라는 보편주의가 있습니다.
1980년대 미국에서 사망학을 고등학교와 대학교 커리큘럼에 넣어 죽음의 독침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사망학자 스나이더만 교수가 하버드 대학에서 사망학 강좌를 개설했을 때 20명만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에 200여명이 몰렸습니다. 그 이후로 미국 전역에서 각 대학들이 사망학 강좌를 개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사망학자가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람들의 죄의 독침을 제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사심으로써 친히 죽음을 이기시고 사람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길을 제공하셨습니다. 고전15:21-22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사실 죽음에 대한 6대 철학을 이야기 했습니다만 죽음에 대한 철학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여 상실된 인간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인간들, 이렇게 두 부류입니다. 사망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기는 길이 있습니다.
고전15장 55-57절에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7절에서 사망을 이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극복합니다. 부활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버리는 순간에는 사망이 그를 지배합니다. 자기를 길러 준 가정의 기독교를 버린 대문호 헤밍웨이는 이렇게 탄식을 했습니다.
“인생의 어떤 문제든 해결이 없다. …죽음이 나의 불행들의 주권적인 처방이다. 나는 밧데리 나간 라디오처럼 외롭고 텅 빈 상태에서 산다. 그런데 전기를 꽃을 데가 없다”19세기 유명 강사요 변호사요 불경한 회의주의자로서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기독교를 비판했던 로버트 잉어솔은 자기 형제의 무덤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인생은 두 개의 영원의 차가운 봉우리와 공허한 봉우리 사이에 있는 좁은 계곡, 우리는 저 꼭대기 저 너머를 보려고 하지만 헛된 짓이다.
우리는 크게 부르짖지만 유일한 대답은 우리의 울부짖는 통곡의 메아리뿐이다”이것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들의 좌절과 절망의 탄식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가진 자들인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죽음을 이미 이기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한 믿음의 삶이 되는지요
그 해답이 57절 말씀입니다.
첫째,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에 견고해야 합니까 우리를 견고하지 못하게 흔들어 놓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무를 심어놓고 바람이 심하게 불면 뿌리를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흔들어 놓는 바람, 영적으로 부활의 신앙을 흔들어 놓는 바람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단이나 미혹의 영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에 굳게 서야 합니다.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교훈의 풍조란 바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리새인들 술책과 회유 등을 말합니다.
골2:6-8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여기서도 보면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 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행하여야 하며, 그 안에 믿음의 뿌리를 깊이 박아서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고 했습니다. ‘가랑비에 옷젖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닌 것도 자꾸 맞다고 하면 맞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단이다’ ‘잘못되었다’고 하면서도 자꾸 접촉하여 그들의 주의 주장을 듣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미혹되어 넘어갑니다. 이단들은 그것을 노립니다. 여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말씀에 굳게 서야 합니다.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교회안에서 시행하는 성경공부에 열심히 참여하여야 합니다. 교회서하는 성경공부 외에는 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밖에 있는 성경공부를 하고 싶을 때는 반드시 담임목사나 교역자들에게 물어보고 확인을 하고 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교계에 아무 교묘하게 침투하고 있는 이단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성회”라는 안상홍파, 구약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신천지 교회라는 이름을 걸고 무료로 성경공부를 시켜준다고 하면서 접근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이들은 큰 교회의 성도들에게 접근해서 그들을 세뇌시켜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어지럽게 만드는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 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는 안하면서 다른 곳에 성경공부를 하러 다니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무료성경공부를 통해 신천지 ‘이만이’ 교주를 섬기는 어리석은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부활신앙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아내가 해 주는 음식을 먹고 식중독에 걸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외식한 후에 식중독에 걸립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담임목사의 목회 속에서 주시는 말씀과 가르침을 받으면 탈이 없는데 다른 가르침을 받으니 탈이 나는 것입니다. 진리에 굳게 서시고 미혹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환란에 흔들리면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쉽게 흔들리기 쉬운 환경이 고난입니다. 환란입니다. 환란이 오면 쉽게 흔들립니다. 믿음이 좋다고 여겨지는 성도라도 어려운 환경이 닥치면 믿음의 뿌리가 흔들흔들 합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 선지자였습니까 바알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서 승리할 정도로 믿음이 좋은 선지자였습니다.
열왕기상19장에 보면 그 후에 이세벨이 자기 남편 아합왕의 이야기를 듣고는 사람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는 도망하였습니다. 광야 길로 하룻길 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바라며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그러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엘리야를 어루만지면서 하는 말이 “일어나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갖다 준 음식을 먹고 정신을 차려서 그 힘으로 사십일을 걸어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이르렀습니다. 그 산에 있는 굴속에 들어가 머물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엘리야를 찾아와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했을 때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10절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엘리야의 이 말을 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이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엘리야 자기만 남았다고 했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숨겨두신 자가 칠천명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믿음 좋은 엘리야 선지자도 순간적으로 낙심이 되어 안절부절 하는 나약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떤 환란이 다가오더라도 오히려 기뻐하며 이겨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환란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기 때문입니다.
어떤 핍박과 환란이 다가오더라도 절대로 낙심하거나 흔들리면 안됩니다. 인간은 마음이 약하여 잘 넘어집니다. 여러분 요즘 우리 정치 사회에 보세요. 나름대로 깨끗하다고 생각했던 거물급 정치인들이 부인들이 거두어들인 공천자금 때문에 너무 처절한 모습으로 퇴장하는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의롭게 나름대로 깨끗한 정치를 한다고 했으나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이유가 뭡니까 순간적으로 돈에 눈이 어두워서 돈에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흔들리기 쉬운 것은 세상의 풍조입니다. 미혹입니다.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유혹을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의 풍조를 조심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쉽게 흔들리는가 사랑의 대상의 우선순위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대상의 우선순위가 바뀌면 어떻게 됩니까 아내를 저버리게 됩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함이 세상의 그 무엇과 바뀌는 순간 우리는 넘어집니다. 돈이 유혹합니다. 물질의 유혹이 가장 심합니다. 요즘은 이성의 유혹이 있습니다. 이성이 결국 인생을 무너지게 만듭니다. 삼손은 이방 여인에게 넘어갔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의 사람들을 보러갔다가 강간을 당했습니다. 롯이 세상 풍조에 밀려서 전도도 하지 않고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가 결국은 살았으나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11:3에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혹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뱀이, 즉 사단이 하와를 미혹한 것처럼 우리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부활신앙에서 떠나 부패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염려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심지가 견고하여 복을 받은 인물들도 많았습니다.
우선은 요셉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자기를 유혹해도 ‘여호와 하나님께 득죄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그 자리를 피함으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삼손과는 대조적입니다. 부활의 신앙에 확실하게 설 때에 믿음에 파선하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이 확고할 때에 어떤 환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든든히 서갈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유지하면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오늘 58절 말씀에 “주의 일에 더욱 힘써라”고 했습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씀으로 흔들리지 않게 되기도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주의 일에 더욱 힘쓰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는 어느 것이 앞선다고 하기 보다는 함께 병행되는 것이 된다고 보면 됩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는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로마서12장11절에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성실한 자세로 섬겨야 합니다. 부활신앙이 확실하면 죽음인들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나 일이 없고 한가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사단이 침투합니다. 그래서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의 일을 열심히 감당해야 합니다. 열심히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예배도 열심히 드려야 합니다. 봉사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성경전체를 보면 힘써 하라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서3장8절에 보면 기도할 때 힘써 부르짖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힘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호세아6:3에 보면 여호와를 알려고 할 때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일에 힘써 일하되 주의 일에는 더욱 힘쓰라고 했습니다.
주의 일에 열심히 한 사람을 지적하라고 하면 누구를 지적하겠습니까 자타가 공인하는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바울만큼 열심히 주의 일을 열심히 한 사람이 없습니다. 사실 바울은 자기가 하는 모든 일, 자기가 옳다고 생각되는 모든 일은 열심히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도 열심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3:6에 “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고 할 정도록 그는 엄청나게 핍박을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14에 “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바울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바울은 그 열심을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 내어놓았습니다. 고린도후서11:2에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니까 주님이 좋아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더라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봉사를 하더라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일을 하더라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4: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많이 하되 더욱 힘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통 하는 것보다는 더 힘을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세상의 일을 하는 것보다는 주의 일을 할 때 좀더 힘을 써라고 했습니다. 열심으로 주를 섬기고 봉사하며 헌신하면 누가 해치지 못합니다. 베드로전서 3:13에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욱 힘써 주의 일을 할 때에 부활신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든든히 서가며 승리하게 됩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가 이렇게 살면 여호와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삶의 열매를 거두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하15:7절에 보면 ‘행위에는 상급이 있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6:10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으로 성도를 섬긴 행위를 잊어버리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졌다면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더욱 힘써서 일합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확실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상주시는 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부활절을 맞아 메마른 땅에서 싹이 돋아나듯이, 죽음의 흑암을 이기시고 밝고 광명한 세상으로 나오셔서 새로운 희망을 주셨듯이 우리도 모든 나태한 믿음에서 성실한 믿음의 싹을 틔웁시다. 어떤 역경이 덕치더라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주님의 재림의 그날이 옴을 볼수록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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