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본문
요한복음은 다른 성경 각권과 다르게 기록한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한 마디로 예수 믿고 생명 곧 영생을 얻게 하려고 이 책을 썼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런 목적 하에 내용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기록했습니다. 우선 1장에서 12장까지 전반부는 일곱 개의 표적과 일곱 개의 “나는 ... 이다”라는 자기소개 통해서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13장 이후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하신 사건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명을 주시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 전개의 마지막 부분에 오늘 본문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 굳건한 부활신앙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고사성어 가운데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최후의 중요한 부분을 마무리 함으로써 그 일이 완성되는 것이며 또한 일 자체가 돋보인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전체로 볼 때 오늘 본문 이야기는 마치 화룡점정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도마의 믿음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되면 확실하게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요 10:10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씀 그대로 도마와 같은 믿음을 갖게 되면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그 생명을 풍성히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도마가 갖게 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도마의 믿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별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믿음과 만난 이후의 믿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이전 도마의 믿음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이전 즉 초창기 믿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요 11장에서 도마의 초창기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리자 주님께 도와달라는 청이 왔습니다. 주님께서 이틀을 지체하신 뒤에 나사로가 있는 유대 지역으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서 겨우 유대 지역을 빠져나왔는데 다시 그곳으로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만류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 주님께서 정 죽는 길로 가시겠다면 우리도 함께 가서 죽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일견 용기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마가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제자들에게 이것을 보이셔서 믿음을 굳게 세우시려 하신 것입니다. 도마는 이런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도마는 자기중심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믿는다고는 했지만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신자들이 참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뒷전이고 늘 자기 생각대로 예수를 믿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믿는다고는 하는데 주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믿음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요 14장에 보면 또 다른 도마의 초창기 믿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떠나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3) 주님께서 저 천국에 관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적인 차원의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도마가 나름대로 대꾸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니이까” 도무지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답답해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육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기에 영적 차원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도마는 이성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영적 차원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생각과 판단이 이 땅과 육신에 속한 것에만 집중되어있습니다. 저 하늘에 속한 것에는 무지했습니다.
오늘도 이런 신자들이 참 많습니다. 영적 차원에 대해 무지합니다. 저 하늘에 속한 것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아는 것 모두 이 땅에 속한 것들뿐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성적인 믿음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요 20장에서 또 다른 도마의 초창기 믿음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미 두 번 나타나셨습니다. 한 번은 주님의 빈 무덤에 남아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저녁 때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마침 이 때 도마가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이야기를 증언했습니다.
이 때 도마가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한 마디로 내 눈으로 확인해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도마는 실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증거가 있어야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확인해야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말씀만 들어가지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신자들이 참 많습니다. 남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은혜를 나눌 때 믿지 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믿지 못합니다. 증거를 요구합니다. 무엇인가를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실증적인 믿음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도마의 믿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도마의 믿음은 그야말로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오늘 본문 26-7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8일 뒤에 다시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특별히 도마를 만나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도마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마의 믿음을 바로 세워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보지 못했다고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자 주님께서 그렇다면 나를 보고라도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보아야만 믿는 믿음의 자리에 머무르지 말고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의 관심은 믿음의 형식에 있지 않고 믿음의 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올바른 믿음 위에 서 있는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일부러 도마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런데 도마는 손가락을 내 밀어 주님의 손을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손을 내 밀어 주님의 옆구리에 넣어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 서는 순간 그 동안 잘못된 믿음이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굳건한 부활신앙 위에 서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오늘 부활절을 지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끝일 수 있습니다. 이미 사망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끝내셨습니다. 이제 이 사실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선포만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만나셔서 부활신앙 위에 굳건히 서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것으로 끝일 수 있습니다. 이제 믿으라고만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도 도마 같은 신자들을 찾아오십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굳건한 부활 신앙 위에 서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부활절 아침에 우리 모두에게 도마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영으로 만나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퇴색됐던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도마가 갖게 된 부활신앙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1. 확실한 신앙고백입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도마가 이렇게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 ” 이 고백은 두 가지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우선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라는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마 자신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도마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도마 자신을 위해 부활하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순간 이 분이 자신의 주님이라는 사실이 뼛속 깊이 깨달아집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머리 속에 담아두기만 했습니다. 베드로도 일전에 이렇게 고백했지만 그럴 수 있겠다고 동의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들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철저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나를 위해 무덤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하셔서 철저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은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주님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 1:1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14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셨던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지금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도마는 이것을 거꾸로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나아가 이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면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도마의 신앙고백 안에서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면서 마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하셨고, 이제 사람들이 깨닫고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셔서 생명을 주셨고, 그분이 우리를 축복하셔서 이렇게 복된 삶을 살게 하셨고, 때가 되면 그분이 우리를 저 여호와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존재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것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갑자기 이런 사실이 머리 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런 믿음이 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가득 채워지게 된 것입니다. 도무지 흔들릴 수 없는 굳건한 믿음으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반석처럼 굳건히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2. 철저한 헌신입니다.
도마가 이런 신앙고백을 공식적으로 하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황제 도미티안은 자신을 신격화했습니다. 자신이 쥬피터 신의 화육이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래서 의상이나 이미지를 쥬피터 신처럼 갖추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주라고 신이라고 고백하게 했습니다.
만일 그대로 따르지 않을 경우 가혹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에 따르지 않자 혹독하게 박해를 가했습니다. 사자 밥이 되게 했습니다. 기둥 위에 달아놓고 화형으로 처형했습니다. 당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도마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신앙고백을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이는 정말 철저한 헌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도마는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한 후에 주님 말씀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 땅 끝까지 나아갔습니다. 저 멀리 페르시아를 지나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제자들 중에 가장 멀리까지 복음을 들고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인도의 칼라미나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창에 찔려 순고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신앙고백을 드리고 그 신앙고백대로 살다가 순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믿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머리로만 마음으로만 믿는 자리에서 철저한 헌신의 자리로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부활절 아침에 우리의 믿음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새로운 믿음을 갖게 된 도마처럼 우리가 더욱 굳건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철저한 헌신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은 이런 목적 하에 내용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기록했습니다. 우선 1장에서 12장까지 전반부는 일곱 개의 표적과 일곱 개의 “나는 ... 이다”라는 자기소개 통해서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13장 이후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하신 사건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명을 주시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 전개의 마지막 부분에 오늘 본문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 굳건한 부활신앙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고사성어 가운데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최후의 중요한 부분을 마무리 함으로써 그 일이 완성되는 것이며 또한 일 자체가 돋보인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전체로 볼 때 오늘 본문 이야기는 마치 화룡점정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도마의 믿음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되면 확실하게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요 10:10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씀 그대로 도마와 같은 믿음을 갖게 되면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그 생명을 풍성히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도마가 갖게 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도마의 믿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별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믿음과 만난 이후의 믿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이전 도마의 믿음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이전 즉 초창기 믿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요 11장에서 도마의 초창기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리자 주님께 도와달라는 청이 왔습니다. 주님께서 이틀을 지체하신 뒤에 나사로가 있는 유대 지역으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서 겨우 유대 지역을 빠져나왔는데 다시 그곳으로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만류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 주님께서 정 죽는 길로 가시겠다면 우리도 함께 가서 죽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일견 용기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마가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제자들에게 이것을 보이셔서 믿음을 굳게 세우시려 하신 것입니다. 도마는 이런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도마는 자기중심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믿는다고는 했지만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신자들이 참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뒷전이고 늘 자기 생각대로 예수를 믿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믿는다고는 하는데 주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믿음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요 14장에 보면 또 다른 도마의 초창기 믿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떠나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3) 주님께서 저 천국에 관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적인 차원의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도마가 나름대로 대꾸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니이까” 도무지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답답해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육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기에 영적 차원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도마는 이성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영적 차원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생각과 판단이 이 땅과 육신에 속한 것에만 집중되어있습니다. 저 하늘에 속한 것에는 무지했습니다.
오늘도 이런 신자들이 참 많습니다. 영적 차원에 대해 무지합니다. 저 하늘에 속한 것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아는 것 모두 이 땅에 속한 것들뿐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성적인 믿음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요 20장에서 또 다른 도마의 초창기 믿음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미 두 번 나타나셨습니다. 한 번은 주님의 빈 무덤에 남아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저녁 때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마침 이 때 도마가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이야기를 증언했습니다.
이 때 도마가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한 마디로 내 눈으로 확인해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도마는 실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증거가 있어야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확인해야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말씀만 들어가지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신자들이 참 많습니다. 남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은혜를 나눌 때 믿지 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믿지 못합니다. 증거를 요구합니다. 무엇인가를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실증적인 믿음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도마의 믿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도마의 믿음은 그야말로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오늘 본문 26-7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8일 뒤에 다시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특별히 도마를 만나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도마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마의 믿음을 바로 세워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보지 못했다고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자 주님께서 그렇다면 나를 보고라도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보아야만 믿는 믿음의 자리에 머무르지 말고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의 관심은 믿음의 형식에 있지 않고 믿음의 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올바른 믿음 위에 서 있는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일부러 도마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런데 도마는 손가락을 내 밀어 주님의 손을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손을 내 밀어 주님의 옆구리에 넣어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 서는 순간 그 동안 잘못된 믿음이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굳건한 부활신앙 위에 서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오늘 부활절을 지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끝일 수 있습니다. 이미 사망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끝내셨습니다. 이제 이 사실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선포만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만나셔서 부활신앙 위에 굳건히 서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것으로 끝일 수 있습니다. 이제 믿으라고만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도 도마 같은 신자들을 찾아오십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굳건한 부활 신앙 위에 서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부활절 아침에 우리 모두에게 도마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영으로 만나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퇴색됐던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도마가 갖게 된 부활신앙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1. 확실한 신앙고백입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도마가 이렇게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 ” 이 고백은 두 가지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우선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라는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마 자신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도마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도마 자신을 위해 부활하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순간 이 분이 자신의 주님이라는 사실이 뼛속 깊이 깨달아집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머리 속에 담아두기만 했습니다. 베드로도 일전에 이렇게 고백했지만 그럴 수 있겠다고 동의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들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철저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나를 위해 무덤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하셔서 철저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은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주님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 1:1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14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셨던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지금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도마는 이것을 거꾸로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나아가 이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면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도마의 신앙고백 안에서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면서 마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하셨고, 이제 사람들이 깨닫고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셔서 생명을 주셨고, 그분이 우리를 축복하셔서 이렇게 복된 삶을 살게 하셨고, 때가 되면 그분이 우리를 저 여호와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존재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것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갑자기 이런 사실이 머리 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런 믿음이 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가득 채워지게 된 것입니다. 도무지 흔들릴 수 없는 굳건한 믿음으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반석처럼 굳건히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2. 철저한 헌신입니다.
도마가 이런 신앙고백을 공식적으로 하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황제 도미티안은 자신을 신격화했습니다. 자신이 쥬피터 신의 화육이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래서 의상이나 이미지를 쥬피터 신처럼 갖추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주라고 신이라고 고백하게 했습니다.
만일 그대로 따르지 않을 경우 가혹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에 따르지 않자 혹독하게 박해를 가했습니다. 사자 밥이 되게 했습니다. 기둥 위에 달아놓고 화형으로 처형했습니다. 당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도마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신앙고백을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이는 정말 철저한 헌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도마는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한 후에 주님 말씀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 땅 끝까지 나아갔습니다. 저 멀리 페르시아를 지나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제자들 중에 가장 멀리까지 복음을 들고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인도의 칼라미나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창에 찔려 순고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신앙고백을 드리고 그 신앙고백대로 살다가 순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믿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머리로만 마음으로만 믿는 자리에서 철저한 헌신의 자리로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부활절 아침에 우리의 믿음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새로운 믿음을 갖게 된 도마처럼 우리가 더욱 굳건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철저한 헌신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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