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예수의 부활
본문
오늘은 주님이 부활하신 부활절(復活節)입니다. 부활(復活)은 신앙인으로서 도외시할 수 없는 진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부활의 진리를 믿지 않고는 주님이 다시금 이 땅위에 재림하실 때 부활은 전연 없을 것입니다. 믿는 자만이 주님 오시는 그날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무덤에 있던 자들은 다시금 깨어 일어나 부활에 동참하고 살아서 믿는 자들은 공중 혼인자리에 동참케 될 것입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를 한절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표현의 내용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는다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한 알의 밀알로 표현하여 고난의 진정한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수천 수백만의 금보다 더욱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고난을 금, 은 보다 귀하게 생각하고 고난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율례와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사람이야 말로 참된 성도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이다. 고난이란 바로 씨가 땅에 떨러져 썩어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없이는 새싹이 나 올 수가 없다. 이 과정 즉 고난의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쉽게 얻거나 성공하려는 사람은 심지 않고 거두려는 어리석은 농부와 같은 사람이다. 주님의 고난이 없다면 주님의 기쁨의 부활이 없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독일의 3대악성(3B: 베토벤, 브람스, 바하)의 한 사람이 바하(1685-1750)는 불행을 통하여 대 작곡가가 된 사람이다. 그는 9세 때 어머니를 잃고 10세 때 아버지도 잃었다. 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집에 얹혀살면서 그는 달밤에 형의 서재에 들어가 음악 공부를 했다. 후년에 바하는 실명을 하여 앞을 못 보게 되었다.
그 원인은 달빛에서 악보공부를 하느라 무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명한 그는 마음으로 악보를 읽었다. 눈을 떴을 때 만든 악보를 모두 불속에 던져 태워버린 바하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였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가장 빠른 시기다. 참으로 귀한 진리의 말이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중단한 것이 있다면 지금 시작을 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초청을 받고 찾아가셨습니다. 이 때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한 말씀이 있습니다.
(행10: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는 환영하는 이들에게 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행10:39-40)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여호와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자 나타내시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죽음과 그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전하신 내용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은혜 받을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1 부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부활절의 원래 명칭은 유월절을 뜻하는 ‘파스카’라는 히브리말에서 왔다. 죽음의 노예상태에서 출애굽의 해방을 이루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승리하신 주님과 더불어 제자들도 다시 일어났던 절기다. 이 절기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오랜 절기이며 또 교회력의 근원이다.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고 생기에 찬 교회를 일구어가는 계절로서, 교회력의 색깔은 흰색이다.
복음 전도자 토레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르쳐 “기독교가 증거하는 것들을 굳게 지켜주는 견고한 요새”라고 하였다. 부활은 하나의 역사적 토대로서 기독교의 다른 모든 교리들이 이것을 기초로 하여 세워지며 이것으로 모든 의심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든지 아니 믿든지 이것은 개인의 신앙에 관련된 문제이나, 확실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며 또한 부활에 대한 성도들의 소망은 그 삶을 더욱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점이다.
부활이란 식물이 싹이 나고 다시 사는 자연 현상도 아니며, 진화나 발전 개념 또는 부화(孵化)현상 같은 것도 아니다. 오직 옛것은 완전한 죽음에서 새롭게 살아나는 재창조의 역사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2000년 전 이스라엘 지방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듯이 우리도 죽음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믿는 일이다.
첫 아담 때문에 모든 인간이 죽었듯이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모든 성도가 살아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도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건이며 이를 믿는 것이 바로 부활에 대한 소망인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위험 속에 살고 있다. 만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맹수와의 싸움, 화형 등 여러 순교적인 행위가 이해될 수 없다. 바울 또한 그가 자신을 부인하고 온갖 고난 속에서도 복음 전도 사역에 모든 열정을 바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소망은 성도들에게 모든 행위의 기초로 작용하는 근거였다. 이것이 없다면 모든 복음의 가르침은 쓸모없는 것이며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은 죄 가운데 있고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자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뒤에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소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주춧돌이라 할 수 있다.
(고후11:23-28)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32-33)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 새 (33)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이는 부활의 여호와 하나님이 피할 길을 열어 놓으심으로 자신은 놓임을 받아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광주리를 타고 내려와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이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행위이듯이 부활도 동일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부활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 14:14)라는 욥의 질문 이후 계속된 의문과 질문은 부활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결론이었고 교회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많은 반론과 의심이 반복된 논쟁의 중심이었다. 부활에 대한 반론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개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도난설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간 뒤 그가 부활했다는 주장을 유포한 것이라는 가설이다. 그러나 무덤은 혼자서는 열 수 없는 돌문으로 닫혀 있고, 당시에 세계 최강이라고 자처하던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훔쳐갔다면 이것이야말로 기적이다.
둘째는 환상설이다.
마리아 등이 예수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부활을 열망하였기 때문에 환상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반기독자 르낭은 “부활은 히스테리증이 있는 보잘것없는 여자의 말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500명이 한꺼번에 부활을 목격하였다고 하는데 500명이 한꺼번에 환상을 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셋째는 가사설 혹은 기절설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는 것이다. 사실도 아닌 거짓을 사도들이 생명을 걸고 선포했다면 이것 또한 우스운 일이다. 이외에도 부활의 상징이나 의미는 인정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바울은 부활을 논하면서 고린도전서 15:14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니라”고 하였다.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의 기초요 죽음과 영생에 대한 해답이다. 그래서 불트만은 “기독교는 십자가에서가 아니라 부활에서 시작하였다”라고 하였다.
(행10:39-40)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여호와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자 나타내시되..
여호와 하나님이 3일 만에 다시 살리자 나타내시되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주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다시금 살수 없습니다. 한번 죽으면 그만이지 두 번 다시 산다는 것은 죽은 사람은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죽어서 할 수 없다 할런지 모르나 산사람도 자신과 타인의 죽음을 부활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부활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신이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본 구절에서는 부활사건의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즉 예수께서 혼자 스스로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베드로가 위의 본문과 같은 내용의 설교를 열 차례에 걸쳐 행했던 점을 미루어보아 부활이 초대 기독교에 있어서 선포의 주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시지 않고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했던 소수의 선택된 사람에게만 나타났다는 점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全能)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계를 가진 자입니다. 하지 못할 일 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늘에 별들을 헤아릴 수 없으며 자기의 눈썹도 셀 수 없는 무능한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죽은 자를 일으킨다는 것은 흉내도 못낼 일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공중에 나는 새들도 먹이시고, 길섶에 자라나는 백합화도 아름답게 피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 같은 여호와 하나님이 죽었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리시고,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도 살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 같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중생과 거듭남과 다시금 사는 역사를 할 수 없는 무능한 여호와 하나님은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을 가당하신 분은 인간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신 일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고난을 이겨야 부활에 동참한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지는 과정은 고난을 상징합니다. 썩지 않으면 다시금 싹이 나지 않게 될 것이며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음은 당연지사입니다.
(행10:40-43) 여호와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여호와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살아하는 제자들에게 부활 후에 나타나 모두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소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 식사를 할 때 부탁하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셨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전하는 것은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사명을 이들에게 허락하신 것임을 말합니다. 복음전하다가 투옥되고 매 맞고 비소와 조롱을 당하기도 하고 재산을 몰수 당하기도하고 화형에 처하기도 하고 짐승에게 찢김을 당하기도 하는 고난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고난을 감수하는 것은 결코 수월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 누구며, 죽음에 공포에서 해방 받을 자가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부활을 믿는 자입니다. 부활에 소망을 가진 자 만이 진정으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공포 속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맡은 자의 행동으로 전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순교도 마다하지 않고 생명을 내 걸고 복음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행20:24-25)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많은 어려움들이 기다린다는 계시를 받습니다. (행20:22-23)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복음을 증거함에 많은 고난과 환난이 있음을 예견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 살 것을 결행하는 결심을 볼수 있습니다. 이 같은 것은 고난을 감수하지 않고는 주님의 부활에 동참할 수 없음을 시사하는 바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서간 모든 선진들의 신앙들은 모두가 죽었다하는 자리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역전승을 거두는 역사가 나타난 것은 주님은 부활의 장본인으로서 그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역사로 기적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이야기
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창22:9-11) 여호와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⑵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⑶ 하만과 모르드개의 역사
⑷ 루스드라에서 있었던 일
(행14:12-13)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13) 성 밖 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행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맺는 말
오늘은 주님의 부활절입니다. 부활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부활에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2) 부활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3) 고난이 없이는 부활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를 한절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표현의 내용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는다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한 알의 밀알로 표현하여 고난의 진정한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수천 수백만의 금보다 더욱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고난을 금, 은 보다 귀하게 생각하고 고난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율례와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사람이야 말로 참된 성도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이다. 고난이란 바로 씨가 땅에 떨러져 썩어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없이는 새싹이 나 올 수가 없다. 이 과정 즉 고난의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쉽게 얻거나 성공하려는 사람은 심지 않고 거두려는 어리석은 농부와 같은 사람이다. 주님의 고난이 없다면 주님의 기쁨의 부활이 없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독일의 3대악성(3B: 베토벤, 브람스, 바하)의 한 사람이 바하(1685-1750)는 불행을 통하여 대 작곡가가 된 사람이다. 그는 9세 때 어머니를 잃고 10세 때 아버지도 잃었다. 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집에 얹혀살면서 그는 달밤에 형의 서재에 들어가 음악 공부를 했다. 후년에 바하는 실명을 하여 앞을 못 보게 되었다.
그 원인은 달빛에서 악보공부를 하느라 무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명한 그는 마음으로 악보를 읽었다. 눈을 떴을 때 만든 악보를 모두 불속에 던져 태워버린 바하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였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가장 빠른 시기다. 참으로 귀한 진리의 말이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중단한 것이 있다면 지금 시작을 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초청을 받고 찾아가셨습니다. 이 때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한 말씀이 있습니다.
(행10: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는 환영하는 이들에게 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행10:39-40)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여호와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자 나타내시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죽음과 그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전하신 내용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은혜 받을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1 부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부활절의 원래 명칭은 유월절을 뜻하는 ‘파스카’라는 히브리말에서 왔다. 죽음의 노예상태에서 출애굽의 해방을 이루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승리하신 주님과 더불어 제자들도 다시 일어났던 절기다. 이 절기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오랜 절기이며 또 교회력의 근원이다.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고 생기에 찬 교회를 일구어가는 계절로서, 교회력의 색깔은 흰색이다.
복음 전도자 토레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르쳐 “기독교가 증거하는 것들을 굳게 지켜주는 견고한 요새”라고 하였다. 부활은 하나의 역사적 토대로서 기독교의 다른 모든 교리들이 이것을 기초로 하여 세워지며 이것으로 모든 의심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든지 아니 믿든지 이것은 개인의 신앙에 관련된 문제이나, 확실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며 또한 부활에 대한 성도들의 소망은 그 삶을 더욱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점이다.
부활이란 식물이 싹이 나고 다시 사는 자연 현상도 아니며, 진화나 발전 개념 또는 부화(孵化)현상 같은 것도 아니다. 오직 옛것은 완전한 죽음에서 새롭게 살아나는 재창조의 역사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2000년 전 이스라엘 지방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듯이 우리도 죽음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믿는 일이다.
첫 아담 때문에 모든 인간이 죽었듯이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모든 성도가 살아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도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건이며 이를 믿는 것이 바로 부활에 대한 소망인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위험 속에 살고 있다. 만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맹수와의 싸움, 화형 등 여러 순교적인 행위가 이해될 수 없다. 바울 또한 그가 자신을 부인하고 온갖 고난 속에서도 복음 전도 사역에 모든 열정을 바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소망은 성도들에게 모든 행위의 기초로 작용하는 근거였다. 이것이 없다면 모든 복음의 가르침은 쓸모없는 것이며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은 죄 가운데 있고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자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뒤에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소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주춧돌이라 할 수 있다.
(고후11:23-28)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32-33)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 새 (33)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이는 부활의 여호와 하나님이 피할 길을 열어 놓으심으로 자신은 놓임을 받아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광주리를 타고 내려와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이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행위이듯이 부활도 동일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부활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 14:14)라는 욥의 질문 이후 계속된 의문과 질문은 부활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결론이었고 교회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많은 반론과 의심이 반복된 논쟁의 중심이었다. 부활에 대한 반론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개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도난설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간 뒤 그가 부활했다는 주장을 유포한 것이라는 가설이다. 그러나 무덤은 혼자서는 열 수 없는 돌문으로 닫혀 있고, 당시에 세계 최강이라고 자처하던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훔쳐갔다면 이것이야말로 기적이다.
둘째는 환상설이다.
마리아 등이 예수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부활을 열망하였기 때문에 환상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반기독자 르낭은 “부활은 히스테리증이 있는 보잘것없는 여자의 말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500명이 한꺼번에 부활을 목격하였다고 하는데 500명이 한꺼번에 환상을 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셋째는 가사설 혹은 기절설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는 것이다. 사실도 아닌 거짓을 사도들이 생명을 걸고 선포했다면 이것 또한 우스운 일이다. 이외에도 부활의 상징이나 의미는 인정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바울은 부활을 논하면서 고린도전서 15:14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니라”고 하였다.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의 기초요 죽음과 영생에 대한 해답이다. 그래서 불트만은 “기독교는 십자가에서가 아니라 부활에서 시작하였다”라고 하였다.
(행10:39-40)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여호와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자 나타내시되..
여호와 하나님이 3일 만에 다시 살리자 나타내시되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주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다시금 살수 없습니다. 한번 죽으면 그만이지 두 번 다시 산다는 것은 죽은 사람은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죽어서 할 수 없다 할런지 모르나 산사람도 자신과 타인의 죽음을 부활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부활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신이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본 구절에서는 부활사건의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즉 예수께서 혼자 스스로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베드로가 위의 본문과 같은 내용의 설교를 열 차례에 걸쳐 행했던 점을 미루어보아 부활이 초대 기독교에 있어서 선포의 주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시지 않고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했던 소수의 선택된 사람에게만 나타났다는 점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全能)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계를 가진 자입니다. 하지 못할 일 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늘에 별들을 헤아릴 수 없으며 자기의 눈썹도 셀 수 없는 무능한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죽은 자를 일으킨다는 것은 흉내도 못낼 일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공중에 나는 새들도 먹이시고, 길섶에 자라나는 백합화도 아름답게 피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 같은 여호와 하나님이 죽었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리시고,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도 살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 같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중생과 거듭남과 다시금 사는 역사를 할 수 없는 무능한 여호와 하나님은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을 가당하신 분은 인간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신 일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고난을 이겨야 부활에 동참한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지는 과정은 고난을 상징합니다. 썩지 않으면 다시금 싹이 나지 않게 될 것이며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음은 당연지사입니다.
(행10:40-43) 여호와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여호와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살아하는 제자들에게 부활 후에 나타나 모두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소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 식사를 할 때 부탁하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셨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전하는 것은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사명을 이들에게 허락하신 것임을 말합니다. 복음전하다가 투옥되고 매 맞고 비소와 조롱을 당하기도 하고 재산을 몰수 당하기도하고 화형에 처하기도 하고 짐승에게 찢김을 당하기도 하는 고난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고난을 감수하는 것은 결코 수월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 누구며, 죽음에 공포에서 해방 받을 자가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부활을 믿는 자입니다. 부활에 소망을 가진 자 만이 진정으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공포 속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맡은 자의 행동으로 전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순교도 마다하지 않고 생명을 내 걸고 복음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행20:24-25)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많은 어려움들이 기다린다는 계시를 받습니다. (행20:22-23)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복음을 증거함에 많은 고난과 환난이 있음을 예견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 살 것을 결행하는 결심을 볼수 있습니다. 이 같은 것은 고난을 감수하지 않고는 주님의 부활에 동참할 수 없음을 시사하는 바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서간 모든 선진들의 신앙들은 모두가 죽었다하는 자리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역전승을 거두는 역사가 나타난 것은 주님은 부활의 장본인으로서 그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역사로 기적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이야기
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창22:9-11) 여호와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⑵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⑶ 하만과 모르드개의 역사
⑷ 루스드라에서 있었던 일
(행14:12-13)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13) 성 밖 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행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맺는 말
오늘은 주님의 부활절입니다. 부활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부활에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2) 부활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3) 고난이 없이는 부활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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