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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부활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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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매우 의미 있는 경험을 하게 되면, 같은 경험을 하게된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같은 고향에 살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서 만드는 향우회가 있고, 같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동창회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의 존재가 선거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자 지연과 학연의 극복은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에 중요한 사회적 숙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곧 선거철이 다가오고 있지만 우리는 후보 개인의 자질을 따져 판단하기 보다 체면에 좌우되는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같은 성향 같은 마음을 담고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점수를 줄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에는 유난히 체면이라는 단어의 어원인 면 즉 얼굴과 관련된 단어들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내 체면이 안선다/면목이 없다/면식이 있다/얼굴이 안선다/얼굴을 들수 없다/얼굴이 넓다/그 사람 얼굴이면 잘 통할 것이다/내 얼굴에 먹칠을 하지 말아다오/내 얼굴을 봐서 한번만 부탁합니다.
요즈음은 인터넷 문화가 확산되면서 동일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끼리 뭉쳤다가 쉽게 사라지기도 하고 별의별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많고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쉽게 만났다가 헤어지기도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공동체가 우리 사회에 유익한 순기능적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역기능적 기여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최근 부부 스와핑 사이트, 자살 사이트까지 등장하면서 소위 불건강한 공동체들의 심각한 사회적 역기능을 염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모든 공동체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와 영향력을 가진 공동체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 공동체의 이름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 본문은 이 교회를 가르쳐
'부활의 공동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즉 교회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만나게 된 사람들이 모여서 형성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고린도 전서 15장을 우리는 흔히 부활 장이라고 부릅니다. 이 15장의 전반부(1-19절까지)의 메시지는 예수께서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이고, 후반부(20-49절까지)는 예수를 믿는자들의 부활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15:23에 보면 부활의 순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각각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영적으로 붙어 있는자(소속된 자)라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5-9절을 보시면 이 부활의 주를 처음으로 만나는 경험을 한 사람들의 리스트가 공개되고 있습니다. 게바(베드로)를 위시한 열두제자, 500여명의 형제들, 야고보, 그리고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도 부활의 주를 다메섹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동안 예수께서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고 계실 때에 그의 제자들은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모두 흩어졌고 더 이상 예수의 제자들은 이제 예수의 제자들의 이름으로 이 땅에 존재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 그들은 다시 모였고 갑자기 그들은 생명을 걸고 예수가 이 세상의 구원이고 소망이라고 외쳐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놀라운 생명의 공동체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다시 사신 주님,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 부활의 주님과의 만남의 체험이 제자들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이 부활주일인데 여러분과 저도 죽음에서 다시 사신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셨는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우리가 진정 이 부활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부활의 아침 오늘 우리가 스스로에게 묻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1.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왜 감사해야 한단 말입니까 인생 최대 최후의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정부의 고위 관리직에도 계셨고 사업도 크게 하시다가 암 선고를 받으시고 암과 투병하시는 분과 대화를 나눈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하신 이야기가운데 잊어 버릴수 없는 말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이런 자리에 있고 보니 죽음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더군요. " 더 이상 명예도 문제가 아니고 돈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죽음이었습니다. 죽음 앞에 직면하니깐 죽음처럼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죽으면 모든 것이 이땅에서 모든 것이 다 끝나니깐 죽음이 가장 커다란 문제죠 죽은 다음에 돈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으면 뭐합니까 죽음 다음에 명예와 권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죽음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를 해결받고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요 어떻게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단 말입니까 부활입니다. 부활이 해답입니다. 참으로 부활이 확실하다면 죽음은 잠시의 안식일 따름입니다.
누가 안식을 두려워한단 말입니까 어제밤 잠자리에 드시면서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고 공포에 사로잡혔던 분이 계십니까 왜 그렇지 않으셨습니까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내일 아침 다시 눈을 뜨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고 보고하셨을 때 "아니라. 저가 잠을 자고 있다고. 그러나 이제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유명한 약속이 무엇입니까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였습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완벽한 처방이요 승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이 승리를 입증하시기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살았으니 너희도 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승리를 보장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본문 57절입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렇습니다. 감사할 것 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바울은 무엇보다 이 놀라운 감사를 찬양으로 표현하고 싶어했습니다. 55-56절은 사실은 노래입니다. 죽음을 이긴 승리의 노래요 찬미인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절) 사망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이길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56절)
사랑하는 여러분~ 죄 때문에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 왔지만 이제 부활의 희망으로 우리는 죽음의 지배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무서워 딸수가 없습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과거 순교자들이 죽어가며 찬미한 이유가 아니었습니까 어찌 감사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어찌 찬양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믿고 다른 것 몰라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받고 살게 된것-이것 하나만으로도 영원히 감사하며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자인 것입니다.
2.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의 고린도는 가장 현대화된 문화가 시민들을 세속화시키던 대표적 도시였습니다. 돈과 사치, 부도덕과 음란이 넘쳐나던 도시였습니다. 오죽하면 "고린도인이 된다"는 말은 "방탕한 사람이 된다"는 말의 동의어였습니다.
그런 세속화의 한 복판에서 바울의 전도로 예수를 믿은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도 끊임없이 세속화의 유혹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이 도시는 매우 자유로운 사상이 넘치는 도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만은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사도는 사도행전 18장에서 이 도시에서 전도하다가 수많은 대적과 훼방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전18:6) 이런 핍박과 유혹앞에서 적지 않은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한 신앙은 위기와 어려움과 시련과 환란가운데서 더욱 화려하게 빛나는 것이지만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이런 성도들에게 본문 58절에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들리는 이유는 물론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해야 견고해 질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15장의 서두에서 그 해답을 주었습니다. 15:2절에서 내가 전한 말을 굳게 지킨다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1절부터 강조한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3-4절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과 죽으신지 사흘만에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예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죄사함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용서받은 사람에게는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숙제가 남습니다. 용서받은 우리가 새로운 삶의 길에서 인도되기 위하여(롬6장의 표현을 빌리면-새생명 가운데서 행하려 함이라고) 그는 다시 사시사 우리 곁에 다가오신 것입니다.
다시 사신 주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신다면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면 우리는 흔들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사단은 계속 우리를 흔들어 댈 것입니다. 예수님도 시몬 베드로에게 그의 타락직전에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눅22:31)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살아 계신 주님의 임재를 묵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견고하게 설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역사를 통해서 계속해서 죽고 살아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가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공동체의 주관자가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소망은 이 주님의 임재 안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오늘날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이 살던 1세기 보다 우리의 믿음과 삶의 근거를 흔드는 더 많은 어둠의 세력들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가오는 선거에서도 이 나라가 흔들리지 않고 깨끗함과 번영을 추구할수 있도록 성경적 가치관에 부합한 지도자들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살아계신 주님의 인도를 구할줄 아는 기도하는 지도자들이 세워 졌으면 좋겠습니다.
 지도자들이 흔들리면 나라 전체가 흔들립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붙들린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덜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부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3.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인간의 죄성은 우리가 무엇을 안하려고 하는 것만으로 통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대치나 승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우리가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추구할 주의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전서 내에서 바울이 이 개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1입니다. "-주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고린도 교회 성도들)가 아니냐" 바울이 추구했던 주의 일-그것은 곧 전도하고, 잘 양육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세우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기도하는 지도자들이 이번 선거에서 세워 졌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말을 아마 교회 나가는 사람을 찍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신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동시에 그런 느낌을 받으신 분들 가운데 이렇게 반문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옛날에 교회 나가는 사람 찍어 보았는데 더 엉망이더라고.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나오는 사람들을 진정한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사람들로 훈련하여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나오고 집사 장로도 되었는데 그 속에 자리잡은 가치관은 여전히 세속적이고 비 성경적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내에서는 역사적으로 이런 사람들을 명목상의 기독교인 이라고 불러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투표할 때 교회 나오는 여부만 가지고 하셔서는 안됩니다. 그의 삶과 그가 추구하는 정책이 기독교적 가치관에 근접해 있는가를 반드시 고려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교회의 본래의 사명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주일만 나오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성경공부 제대로 하십시오. 셀 가족 모임을 통해서 성도의 교제안에서 깨어지고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깨달은 말씀 그대로 살려고 몸부림치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 보고싶어서 주께서 부활하셨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800년대를 전후하여 영국교회와 영국사회를 부활시킨 정치가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양심이라고 일컬어지던 윌버포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amazing grace의 작사자 존 뉴턴 목사님의 도움으로 그의 나이 26세에 회심의 체험을 하고 깊은 영적인 각성을 하게 됩니다. 그는 매일 2시간씩 경건의 시간을 가지면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영국 땅에서 가장 무서운 죄악이었던 노예폐지 운동의 비전을 보여 주십니다.
 당시의 영국은 노예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었기에 노예폐지 운동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천만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교회 친구들과 이런 비전을 나누게 되고 마침내 그는 그들과 클래팜이란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날마다 기도하며 이 일을 추진한 끝에 마침내 1833년 노예폐지 법령이 공포되게 되었습니다. 무려 46년 만의 결실이었습니다.
이 일의 실현을 보고 눈을 감기 전 그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나 한 사람은 아무것도 할수 없지만 우리는 함께 이 일을 할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이라고 믿습니다. "
노예 폐지 선언직후 영국의 교회당들은 새 신자들이 물밀 듯 밀려오기 시작했고 한때 그의 영향으로 국회의원 3분의 1이 복음적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국교회 부활공동체를 향하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부활 신앙을 이론으로 교리로만 말하지 말고 어두어진 세상을 밝히라고 말씀하십니다. 절망과 좌절과 소망 없이 살고 있는 저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여기에 참된 삶이 있고 희망과 생명이 있다고 한국교회가 보여 주라고 말씀합니다.
부활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 그 어디에도, 다른 어떤 종교에도, 세상 어떤 공동체에도 갖지 못하는 부활이라는 이 놀라운 생명의 실체를 가지고만 있지 말고 마음껏 세상 속에서 누리고 선포하고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소망 없이 인생을 살고 있는 저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 공동체 교회에 와서 참 소망과 믿음을 갖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새봄교회에 그리고 여러분들의 가정에 직장과 사업장에 그리고 여러분 개개인에게 부활의 소망이 부활의 회복이 부활의 축복이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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