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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죽음과 부활의 현장에서 생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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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부활절에는 죽음과 부활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적인 일들을 알아봅시다. 고후 5: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고 말씀했는데 성경은 인간의 육체를 임시적인 장막이라고 부르고, 미래의 몸을 영원한 집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에서 회막과 성막이 솔로몬의 성전으로 전환된 것처럼 육체의 죽음은 우리 삶의 끝이 아니고 영생으로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그저 무섭고 두렵기 때문에 가급적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부인하거나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전 7:2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로다”고 말씀합니다.
언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집니까 우리가 힘이 없어서 쓰러집니까 병을 이기지 못해서, 면역이 떨어져서 죽습니까 그것도 맞지만 더 정확한 해석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비해 놓은 은혜가 마감되었기 때문에 무너집니다(시 77:8, 애 3:19-23). 그렇습니다. 죽을 사람은 접시 물에도 빠져 죽고, 살 사람은 어떤 중병에서도 살아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성도는 약해서 죽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약하고 힘이 없어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는 우주보다 크고 사망의 권세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이땅에서 천국으로 옮겨가시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고전 2:9에 “기록된 바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했고, 시 31:19에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녹을 위하여 이땅에 쌓아놓은 은혜는 365년까지였고, 엘리야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예비해 두신 은혜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할 때까지였습니다.
왕하 2:11에 보면 두 사람 엘리야와 엘리사가 길을 가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밀어붙였습니다.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 안에, 회오리 바람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고 세상에 다시 있지 아니했습니다(창 5:24). 죽음은 회오리 바람과 같고, 해일(Surge)과 같고, 지진해일(Tsunami)과 같아서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Alfred Tennyson이 역동적으로 노래합니다. “황혼의 저녁별 날 오라 부르네 그 별을 따라 떠날 그때엔 슬픔 없으리라 영원한 데서 탄생한 영혼 본향 찾아갈 때 흰 물결 요란하던 바다는 고요하다 저녁 종 울리고 어둠이 덮혀도 배 위에 떠날 그때는 슬픔 없으리라 밀물이 우리를 이 세상 밖으로 밀어가도 나 바다를 다 건넌 후에 주님을 뵈오리라”
천병상(1930-1993)은 감상적으로 노래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바울 사도는 죽음을 안전한 여행으로 보았습니다.
궁극적인 구원이 왔을 때 우리를 그분께로 안전하게 데려가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목적입니다(딤후 4:18). 여호와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시기 때문에(시 116:15) 임종의 장소와 시기를 각각 정해 놓으셨습니다(시 39:4). 불말과 불병거와 같은 주의 천사를 배치해 놓으시고, 엘리사와 같은 마지막 동행자들을 붙여주십니다. 때가 되면 산 자에게서 떼어놓으시고, 세상에서 분리시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아기는 언제 세상에 태어날지를 모르지만 어머니는 그 아기가 태어날 때를 압니다. 10개월이 되면 출산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천국으로 해산될 때를 정확하게 아시고 준비하십니다. 가까웠던 지인들을 보내시고 천사들을 보내사 안연히 출국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천국문은 믿는 자를 위해 언제나 열려있지만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본격적으로 열렸습니다. 낙원은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음부로, 낙원으로 빙빙 둘러가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 천국으로 직행합니다. 열린 천국문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위에 항상 천국문이 열려있었던 것처럼 믿는 성도들의 위에도 천국문은 열려있습니다.
 신약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스데반 집사가 연출해 보여줍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 구약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창 28장에서 야곱이 꿈에 본 것입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여호와께서 약속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12-13절). 그가 잠이 깨어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16-17절).
사닥다리는 교회의 머리인 예수님이시요 또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자신이 열린 천국문이십니다. 천국문이 열려있다는 말은 천국과 교회가 교통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땅에서 하는 모든 행위에는 영원한 결과가 따릅니다. 우리 삶에서 이루어진 모든 행동이 영생에서도 계속 영향을 미칩니다. 교회의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교회는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입니다(딤전 3:15).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고 교회생활을 잘하십시오. 신앙생활의 중심을 교회에 두십시오. 교회는 천국과 통합니다. 천국의 상급과 통하고, 천국의 영광과 통합니다.
모든 사람은 부활합니다.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요 5:29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했는데 이 세상에 오직 하나의 선한 일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일입니다. 요 6:29에 “여호와 하나님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들에게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습니다. 믿고 말고요. 우리 뿐만 아니라 인류는 자기도 모르게 부활 소망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역사가 R. G. Collingwood가 간파한 것처럼 우리도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를 주도하는 서구 문화는 동양이나 헬라 로마의 낙관적인 인간본성론이나 형이상학적 실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기독교 부활사상에서 나온 혁명적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the idea of history, 1945).
예수 믿는 사람도 육의 몸으로는 한 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은 100년도 못 살지만 예수 재림의 날에는 썩지 아니할 것으로, 영광스러운 것으로,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 것입니다. 이것을 부활, 몸의 구원, 구원의 완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영적으로는 중생한 그날부터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성도는 영적 분리인 죽음을 이미 극복하고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멸절이 아니라 그 영혼이 열린 천국문을 통해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가정인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완벽한 구조와 질서의 큰 나라, 가장 행복한 기쁨의 나라로 출국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의 본질은 같지만 그 성격이 다릅니다. 육신 속에 살 때와 부활의 때가 다르고, 이 땅에 살 때와 하늘에 살 때가 다릅니다(고전 15:42-49).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환상처럼, fantasy처럼, 가상의 세계, cyber world처럼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보다 훨씬 뚜렷하고 현실적인 나라입니다. 천국은 공해와 실족케 하는 것이 없고, 결함과 증오로 인한 고통이 없는 하늘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IBM과 맥킨토시가 전면적으로 호환이 안 되는 것처럼 이 세상과는 차원이 달라 호환이 안 되는 나라입니다. 고전 15:50에 바울 사도가 말씀합니다.
“혈과 육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천국으로 해산되는 임종의 때에 약간의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 삼천포교회 공은성 목사님의 설교문에서 인용합니다. “고통은 통과하고 넘어가고 지나가는 성질이 있고, 성도의 죽음은 중지가 아니라 이동이며 패배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이 세상의 여호와 하나님만이 아니라 천국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만 살지 않고 천국에서 영원히 삽니다. 천국에는 온전한 지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9-10, 12).
 천국에는 영속적인 교제가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사랑은 교제를 전제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우리는 사랑을 위하여 부활하고 사랑을 위하여 영생할 것입니다. 또한 천국에는 거대한 변화와 굉장히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막 12:24-25). 무엇보다 좋은 것은 우리 자신이 자유롭고 강하고 성실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행동에 참여한 우리 자신의 삶,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친숙한 이 삶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시되 우리의 삶에 영원히 멈춤이 없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십니다(요 8:51-52, 요 11:26).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삼백 년, 천 년, 만 년 후에 이 경이로운 우주 안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를 그려 보아야 합니다(달라스 윌라드, 여호와 하나님의 모략).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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