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주님의 부활하심은
본문
한 독실한 기독 신앙인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해 있는 어떤 건설 회사와 용역계약을 맺고 끝없는 모래사장이 펼쳐있는 불모의 땅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아갔습니다.
섭씨 40도가 넘는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 볕 아래 일을 하면서 같은 직장에 있는 모슬렘교도를 사귀게 되었는데 어느날 이 모슬렘교도는 자기가 믿는 교에 대해 대단한 아주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며 엄한 규율대로 살아야 하고 반드시 메카를 순례해야 하되 무엇보다도 큰 자랑은 우리나라 메카에 있는 모하메드의 무덤이야.
너희 기독교의 교주인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지만 우리 교주의 무덤은 아주 웅장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모하메드의 아름다운 분묘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야.
이 말을 듣고 있던 크리스천이 대답하기를, 그래 그것이 바로 기독교와 모슬렘교의 차이점이지. 모하메드나 다른 종교의 교주는 모두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 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셨다 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대해서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이 인류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많지만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요즘은 불교가 산에서 도심으로 내려와 기독교를 모방하는데 찬불가도 만들고 심방도 하고 불교 어린이 학교도 개설하고 수련회도 가지면서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예불도 드립니다.
그러나 불교가 아무리 기독교를 모방한다 해도 한 가지 모방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 역시 존재의 가치가 없고 영생도 누릴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부활하심은 이 자리에 참여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며 나에게 어떠한 유익을 가져오는 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1. 주님의 부활하심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늘날까지 일상적인 생활 원리를 따라 사는 인생 치고 죽음을 겪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도 죽었고 여호와 하나님께 십계명을 직접 받은 모세도 죽었으며 부귀영화의 대명사인 솔로몬 왕도 이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모든 인생의 가는 길을 자신도 간다고 하였습니다.
왕상 02:02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중국의 신선(神仙)을 공부하던 노자(老子)도 죽었으며 권력을 놓지 않고 영원히 살기 위해 불로초(不老草)를 구하던 진나라의 시황제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에 알려진 세계를 거의 다 정복하고 난 다음 내가 정복할 땅이 없다고 통곡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짧은 삼십 삼세(33)로 생을 마친 것이고 보면 누가 죽음을 피할 수 있겠으며 영웅호걸인들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55절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주님께서 사도 바울은 통하여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친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 성도들도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외치면서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사망을 영원히 정복했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를 통하여서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 동안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시겠다는 약속도 해 주셨습니다.
히 0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교회 성도 여러분! 이걸 아셔야 합니다. 기독교 밖에서는 어떠한 종교에도 생명의 부활이 없다는 사실을. 그 이유는 모든 종교는 인간의 소원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타 종교와의 대화는 전혀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그럼에도 종교의 화합을 하고 국론통일을 한답시고 전국적 종단의 모임을 가지기도 하는데 그렇게 해 보았자 어차피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이념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데 무엇을 어떻게 해 본다는 말입니까 공연한 삶의 에너지만 소모하는 격이 아닐까요 오직 기독교에만이 부활이 있고 기독교만이 부활의 종교인 것은 예수님만이 죽음을 격파하셨기 때문이고 예수님만이 부활을 통해 죄를 청산하시고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 주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 절망은 사라지고 말았으며 예수님 안에서는 참된 소망만 있되 죄악도 죽음도 사라지고 천국과 영생이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기쁨과 소망 가운데서 날마다 주님을 섬기며 살 수 있는 은총만이 있을 뿐입니다.
빅토르 위고(장발장을 지은 프랑스의 작가). 인생에 있어서 오늘의 목적은 싸우는 것이요, 내일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요, 일생의 목적은 잘 죽는 것이다.
옛 사람들이 잘 죽는 것을 그만큼 중요한 일로 생각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말로서 인간은 죽음을 몹시도 두려워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특히 이 두려운 죽음 앞에서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데 한 번 살펴볼까요
나폴레옹은 죽는 순간에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세 가지를 중얼거렸다고 하지요.
내 조국 프랑스, 충성스러운 군인, 사랑하는 아내 조세핀. 그의 고백에는 일생을 마감하는 아쉬움이 아주 짙게 배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토벤이 죽음을 맞이하며 읊조린 말 속에는 진한 허무와 체념이 묻어나는데 친구여! 이제 희극은 모두 끝났네.
톨스토이는 죽음의 불안과 공포에 몸을 이렇게 떨었다고 합니다. 이제 나는 어찌 할 것인가
2. 주님의 부활하심은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음을 증거합니다.
나무 중에는 천 년을 사는 수종(樹種)이 있고 동물 중에는 몇 백 년을 사는 것도 있다고 하는데 고작해야 사람은 한 백년 안쪽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갑니다.
그렇게 사는 날들도 슬프고 고통스럽고 근심, 걱정을 한 날을 제외하면 제대로 행복한 날이 몇 날이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만일 우리의 삶의 가치와 소망이 이 세상의 것뿐이라면 만물의 영장(靈長)이며 피조물의 세계를 다스릴 자로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엔 참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으로 여기든 사람도 떠나가고 물질도 없어지고 권세도 무너지고 인기도 저절로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솔로몬 왕은 누구보다도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려 보았지만 그는 말년에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전 01:03)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있음을 결정적으로 안내해 주셨으니 그것이 바로 부활의 소식 영원한 생명의 소식입니다.
요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음을 확인해 주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심으로 주시는 소망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썩지 않는 영원한 산 소망입니다.
벧전 01:0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사람은 희망을 먹고사는 존재라는 말로서 어떠한 절망적인 환경을 만난다 할지라도 다시금 희망에 대한 도전을 하게 되고 또 희망을 찾아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그래서 만일 사람이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대로 자멸하고 말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에게 영원한 희망을 준 사건으로서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희망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요 인류 역사는 깊은 어둠의 수렁에서 도무지 헤어 나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의 젊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변호사 시절에 주 의회 의원에 출마했다가 낙방하고 하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낙방을 한 일이 있었는데 이러기를 몇 차례 거듭하자 그는 철저하게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은 저러다 링컨이 자살하는 건 아니야 하면서 목숨이라도 끊을까 봐 염려가 되어 자기들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링컨은 친구들의 염려대로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다. 어떠한 개선이나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다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실의에 빠졌던 링컨이 어떻게 재기하여 미국의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말하기를 나는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그에게 용기가 되고 희망이 된 것으로서 그래서 그는 다시 공화당에 입당하였고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용기를 주십니다. 반드시 전화위복이 되어 복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형통하게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서만 부활을 기념하지 마시고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 항상 부활의 생명을 간직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주님의 부활하심은 우리의 의심이 사라지게 합니다.
요 20: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우리는 의심 많은 사람 하면 도마를 떠 올리지 않습니까 그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현장에 없었던 사람입니다.
조금 지나서 도마가 마침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주님을 만나 보았노라고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열 사람이 한 마디 씩만 해도 열 마디가 아닙니까
도마가 말하기를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그의 불신앙을 표현했습니다(25절).
그 후 8일 만에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26절) 이때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지 못하고 있는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 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왜 주님께서 27절에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처음 찾아 오셨을 때에 그 자리에 없었던 일로 인하여 열 제자에게 내 뱉은 말 때문입니다.
나는 내 손으로 십자가에서 입은 그 상처를 눈으로 손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도무지 못 믿겠다고 한 그 불신앙의 말을 다 들으셨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어떠한 곳에서라도 행한 우리의 행동이나 말을 다 보고 듣고 계신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함부로 처신할 때가 많지만 이미 여호와 하나님은 다 보고 듣고 계심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출 16:09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명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민 14: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사람들은 자기가 설정한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준에 딱 맞아떨어지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도마도 자기가 설정한 기준에 부합되지 못한다고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였는데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요 20:25절 말씀을 찾아서 함께 보겠습니다.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듣는 것으로도 믿지 못하겠고 보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며 오직 십자가에서 입은 그 못 자국에 자신이 직접 손을 넣어 보고 난 후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의심이 풀릴 때 까지 검증을 하겠다는 사고(思考)로서 전형적인 회의주의자(懷疑主義者)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일수록 회의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 성도 여러분!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 앞뒤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될 것이며 공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직도 의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자신도 모르게 회의적인 생각에 끌려 다니는 분이 계십니까 도마처럼 예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도마가 무엇이라고 고백했는지 28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가 주님으로부터 27절 말씀을 듣고 28절을 고백하고 난 후에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결국은 후일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회의적인 사람일수록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찾아들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의 사건은 기독교 사상의 중심이며 기독교만의 독특한 진리로서 만약 부활의 사건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이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부활의 사건이 없었다면 믿는 이들의 신앙이 필요 없으며 성도들의 헌신이나 경건의 생활도 아무런 능력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전 15:14~19절 말씀에 이런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지금 이 시간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사방으로 우겨 싸이고 답답한 일을 만나고 거꾸러뜨림을 당한 분이 있습니까
소망이 다 끊겨서 한시 바삐 천국 가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신 분이 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아울러 부활의 능력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풀고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거뜬히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가정 그리고 직장과 사업장에 부활의 큰 능력이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섭씨 40도가 넘는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 볕 아래 일을 하면서 같은 직장에 있는 모슬렘교도를 사귀게 되었는데 어느날 이 모슬렘교도는 자기가 믿는 교에 대해 대단한 아주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며 엄한 규율대로 살아야 하고 반드시 메카를 순례해야 하되 무엇보다도 큰 자랑은 우리나라 메카에 있는 모하메드의 무덤이야.
너희 기독교의 교주인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지만 우리 교주의 무덤은 아주 웅장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모하메드의 아름다운 분묘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야.
이 말을 듣고 있던 크리스천이 대답하기를, 그래 그것이 바로 기독교와 모슬렘교의 차이점이지. 모하메드나 다른 종교의 교주는 모두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 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셨다 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대해서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이 인류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많지만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요즘은 불교가 산에서 도심으로 내려와 기독교를 모방하는데 찬불가도 만들고 심방도 하고 불교 어린이 학교도 개설하고 수련회도 가지면서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예불도 드립니다.
그러나 불교가 아무리 기독교를 모방한다 해도 한 가지 모방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 역시 존재의 가치가 없고 영생도 누릴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부활하심은 이 자리에 참여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며 나에게 어떠한 유익을 가져오는 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1. 주님의 부활하심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늘날까지 일상적인 생활 원리를 따라 사는 인생 치고 죽음을 겪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도 죽었고 여호와 하나님께 십계명을 직접 받은 모세도 죽었으며 부귀영화의 대명사인 솔로몬 왕도 이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모든 인생의 가는 길을 자신도 간다고 하였습니다.
왕상 02:02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중국의 신선(神仙)을 공부하던 노자(老子)도 죽었으며 권력을 놓지 않고 영원히 살기 위해 불로초(不老草)를 구하던 진나라의 시황제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에 알려진 세계를 거의 다 정복하고 난 다음 내가 정복할 땅이 없다고 통곡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짧은 삼십 삼세(33)로 생을 마친 것이고 보면 누가 죽음을 피할 수 있겠으며 영웅호걸인들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55절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주님께서 사도 바울은 통하여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친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 성도들도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외치면서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사망을 영원히 정복했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를 통하여서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 동안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시겠다는 약속도 해 주셨습니다.
히 0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교회 성도 여러분! 이걸 아셔야 합니다. 기독교 밖에서는 어떠한 종교에도 생명의 부활이 없다는 사실을. 그 이유는 모든 종교는 인간의 소원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타 종교와의 대화는 전혀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그럼에도 종교의 화합을 하고 국론통일을 한답시고 전국적 종단의 모임을 가지기도 하는데 그렇게 해 보았자 어차피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이념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데 무엇을 어떻게 해 본다는 말입니까 공연한 삶의 에너지만 소모하는 격이 아닐까요 오직 기독교에만이 부활이 있고 기독교만이 부활의 종교인 것은 예수님만이 죽음을 격파하셨기 때문이고 예수님만이 부활을 통해 죄를 청산하시고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 주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 절망은 사라지고 말았으며 예수님 안에서는 참된 소망만 있되 죄악도 죽음도 사라지고 천국과 영생이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기쁨과 소망 가운데서 날마다 주님을 섬기며 살 수 있는 은총만이 있을 뿐입니다.
빅토르 위고(장발장을 지은 프랑스의 작가). 인생에 있어서 오늘의 목적은 싸우는 것이요, 내일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요, 일생의 목적은 잘 죽는 것이다.
옛 사람들이 잘 죽는 것을 그만큼 중요한 일로 생각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말로서 인간은 죽음을 몹시도 두려워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특히 이 두려운 죽음 앞에서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데 한 번 살펴볼까요
나폴레옹은 죽는 순간에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세 가지를 중얼거렸다고 하지요.
내 조국 프랑스, 충성스러운 군인, 사랑하는 아내 조세핀. 그의 고백에는 일생을 마감하는 아쉬움이 아주 짙게 배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토벤이 죽음을 맞이하며 읊조린 말 속에는 진한 허무와 체념이 묻어나는데 친구여! 이제 희극은 모두 끝났네.
톨스토이는 죽음의 불안과 공포에 몸을 이렇게 떨었다고 합니다. 이제 나는 어찌 할 것인가
2. 주님의 부활하심은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음을 증거합니다.
나무 중에는 천 년을 사는 수종(樹種)이 있고 동물 중에는 몇 백 년을 사는 것도 있다고 하는데 고작해야 사람은 한 백년 안쪽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갑니다.
그렇게 사는 날들도 슬프고 고통스럽고 근심, 걱정을 한 날을 제외하면 제대로 행복한 날이 몇 날이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만일 우리의 삶의 가치와 소망이 이 세상의 것뿐이라면 만물의 영장(靈長)이며 피조물의 세계를 다스릴 자로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엔 참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으로 여기든 사람도 떠나가고 물질도 없어지고 권세도 무너지고 인기도 저절로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솔로몬 왕은 누구보다도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려 보았지만 그는 말년에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전 01:03)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있음을 결정적으로 안내해 주셨으니 그것이 바로 부활의 소식 영원한 생명의 소식입니다.
요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음을 확인해 주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심으로 주시는 소망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썩지 않는 영원한 산 소망입니다.
벧전 01:0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사람은 희망을 먹고사는 존재라는 말로서 어떠한 절망적인 환경을 만난다 할지라도 다시금 희망에 대한 도전을 하게 되고 또 희망을 찾아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그래서 만일 사람이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대로 자멸하고 말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에게 영원한 희망을 준 사건으로서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희망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요 인류 역사는 깊은 어둠의 수렁에서 도무지 헤어 나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의 젊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변호사 시절에 주 의회 의원에 출마했다가 낙방하고 하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낙방을 한 일이 있었는데 이러기를 몇 차례 거듭하자 그는 철저하게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은 저러다 링컨이 자살하는 건 아니야 하면서 목숨이라도 끊을까 봐 염려가 되어 자기들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링컨은 친구들의 염려대로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다. 어떠한 개선이나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다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실의에 빠졌던 링컨이 어떻게 재기하여 미국의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말하기를 나는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그에게 용기가 되고 희망이 된 것으로서 그래서 그는 다시 공화당에 입당하였고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용기를 주십니다. 반드시 전화위복이 되어 복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형통하게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서만 부활을 기념하지 마시고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 항상 부활의 생명을 간직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주님의 부활하심은 우리의 의심이 사라지게 합니다.
요 20: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우리는 의심 많은 사람 하면 도마를 떠 올리지 않습니까 그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현장에 없었던 사람입니다.
조금 지나서 도마가 마침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주님을 만나 보았노라고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열 사람이 한 마디 씩만 해도 열 마디가 아닙니까
도마가 말하기를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그의 불신앙을 표현했습니다(25절).
그 후 8일 만에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26절) 이때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지 못하고 있는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 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왜 주님께서 27절에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처음 찾아 오셨을 때에 그 자리에 없었던 일로 인하여 열 제자에게 내 뱉은 말 때문입니다.
나는 내 손으로 십자가에서 입은 그 상처를 눈으로 손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도무지 못 믿겠다고 한 그 불신앙의 말을 다 들으셨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어떠한 곳에서라도 행한 우리의 행동이나 말을 다 보고 듣고 계신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함부로 처신할 때가 많지만 이미 여호와 하나님은 다 보고 듣고 계심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출 16:09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명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민 14: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사람들은 자기가 설정한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준에 딱 맞아떨어지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도마도 자기가 설정한 기준에 부합되지 못한다고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였는데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요 20:25절 말씀을 찾아서 함께 보겠습니다.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듣는 것으로도 믿지 못하겠고 보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며 오직 십자가에서 입은 그 못 자국에 자신이 직접 손을 넣어 보고 난 후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의심이 풀릴 때 까지 검증을 하겠다는 사고(思考)로서 전형적인 회의주의자(懷疑主義者)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일수록 회의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 성도 여러분!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 앞뒤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될 것이며 공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직도 의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자신도 모르게 회의적인 생각에 끌려 다니는 분이 계십니까 도마처럼 예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도마가 무엇이라고 고백했는지 28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가 주님으로부터 27절 말씀을 듣고 28절을 고백하고 난 후에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결국은 후일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회의적인 사람일수록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찾아들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의 사건은 기독교 사상의 중심이며 기독교만의 독특한 진리로서 만약 부활의 사건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이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부활의 사건이 없었다면 믿는 이들의 신앙이 필요 없으며 성도들의 헌신이나 경건의 생활도 아무런 능력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전 15:14~19절 말씀에 이런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지금 이 시간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사방으로 우겨 싸이고 답답한 일을 만나고 거꾸러뜨림을 당한 분이 있습니까
소망이 다 끊겨서 한시 바삐 천국 가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신 분이 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아울러 부활의 능력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풀고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거뜬히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가정 그리고 직장과 사업장에 부활의 큰 능력이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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