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과 믿음
본문
인간적인 신념과 약속의 신앙을 넘어 보지 않고도 믿는 부활의 믿음 지녀야
부활의 아침, 주님이 식탁에 우리를 초대해 주셔서 복을 나누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난 이후에 승천하시기 전까지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께서 3년 동안 하신 공생애 지상사역과 승천하신 이후의 사역은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40일간의 의미를 강조하지 못하고, 그 비밀들을 알지 못한 채 지내왔습니다. 그 40일의 사역은 우리에게 아주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신령한 몸과 육신의 몸이 만나는 시간, 즉 제자들의 육신의 몸과 주님의 부활한 몸이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40일의 의미를 그리스도인들이 발견한다면 우리가 훨씬 차원 높은 복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은 생명의 변화
저는 이 40일 동안 예수님이 하신 행적을 두 가지로 크게 구분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패배감에 젖어있던 제자들을 찾아와서 격려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 말라, 이게 끝이 아니다. 그대들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배신했던 베드로를 비롯해 다시 이전 직업으로 돌아갔던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치유하셨습니다. 제가 예전에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었던 분들이 5년, 10년이 지난 지금 성자처럼 변해 있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 는 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불만스러울지라도 어느 날 돌아보았을 때 우리는 변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그리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런 변화가 40일 동안의 첫째 주제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치유와 회복을 주신 다음에 그들에게 비전을 주셨습니다. 희망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삼아라. 내가 너에게 능력을 주겠다. 두려워 말라.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나가서 세상을 변화시켜라. ’
이번 새벽기도회에서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위로, 격려, 치유를 받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번 집회를 통해서 사명을 얻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번에 사도행전 29장(ACTS29), ‘30개 비전교회’를 선포했더니 처음에는 그다지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씩 그 의미가 전달되고 있습니다. 몇몇 분들이 마산, 전주, 광명, 홍콩, 러시아에 교회를 세워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젠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우리들 마음 속에 그런 비전이 움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제 아침에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 후 우리 성도 한 분이 개인묘지를 하기 위해 준비한 땅을 교회에 바치겠다고 하셨습니다. 변화가 온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마음에 임하셔서 생명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했다가, 이 곳에 돈을 쓰려고 했다가, 이 쪽으로 가려고 했다가 바꾸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지금 제게도 5일만 하기로 한 새벽기도를 40일간 계속해볼까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니까 우리의 시간이 업그레이드 되고, 우리의 생각이 살아나고, 우리 삶의 질이 변합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생기가 돌고 비전쪾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축복이 여러분께 계속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 - 구원의 법칙
우리는 첫째 날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둘째 날에는 ‘생명의 법칙을 활용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주제는 ‘부활과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정의를 잘 아실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장 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가만히 따라가 보면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사역 초창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이 강건하지 않은 것을 굉장히 속상해 하셨습니다.
이성과 상식으로 믿음을 대하는 것을 마음 아파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믿음을 잃어버렸느냐 믿음이 있을 때는 물 위를 걷지 않았느냐’
여러분께 믿음이 있을 때는 기도도, 헌신도, 찬양도, 전도도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믿음을 잃어버리고 힘을 잃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리라”(막 9:23)라고 하십니다. 아직도 그 수준에 있는 분들은 회개하고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을 보시고는 굉장히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주님, 우리 집에 오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제 부하에게 모든 것을 시키지 않습니까. 주님은 그저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겁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너무 놀라셔서 “내가 이스라엘 중에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인도 “주여, 개는 주인의 밥상에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먹지 않습니까.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제게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놀라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병을 고치실 때 마다 예수님께서 공식적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 ” 예수님께서 불쌍한 사람의 병을 무조건 낫게 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이 요청할 때 반드시 응답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요청할 때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이것은 법칙입니다. 왜냐하면 병 고침에는 믿음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법칙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성령의 법칙도 마찬가지 입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부활신앙 얻은 아브라함
그렇다면 믿음 사건의 클라이맥스는 무엇입니까
믿음의 클라이맥스는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기적을 보았습니다. 육신으로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클라이맥스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구약에 부활신앙의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1백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지만 그것은 믿음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1백세에 이삭을 얻기 전 까지 얼마나 곤두박질을 많이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 시시때때로 신경질을 냈습니다.
왜 25년 동안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75세에 여호와 하나님께 약속을 받고 1백세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다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기다리는 것이지 즉각 응답이 아닙니다. 사라가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자타가 모두 인정하기 전까지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만약에 사라가 아기를 낳을 수 있을 때 임신했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셨음에도 ‘우리가 스스로 이루었다’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누가 봐도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될 때 까지 사라를 끌고 가십니다. 그래야 누구든 그 아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기적적으로 이삭을 얻었지만 그것은 믿음의 시작이었지 완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언제 완성되었을까요 이삭이 16세가 되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있어 큰 위기입니다. 아브라함이 겪은 믿음의 위기는 1백세에 아기를 낳은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제물로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창세기 22장 3절에서 6절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이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가서 경배하고 돌아올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마음 속에 부활에 대한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가 아침 일찍 안장을 지우고 떠날 수 있었고, 담대하게 자기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 제단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조금 더 확인시켜주는 말씀이 히브리서 11장 17절에서 19절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여호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 안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때는 그의 믿음이 시작이었지만,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칠 때에는 이미 그 믿음이 부활신앙으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약속의 신앙에서 부활의 신앙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업그레이드 된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으로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 받는다고 해서 갑자기 완전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때로는 착한 생각, 기막힌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부드럽고 아름답고 거룩한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만 계속하면 좋겠지만, 또 곤두박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지울 수 없는 사실은, 내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요 시험에 빠지고 부족한 인간임에도 내 안에 바꿀 수 없는 성령의 강건함/눈물/회개/헌신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헌신합니다. ’ 라는 말은 거짓말 같지만 진실이기도 합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디로 갈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면서도 그 일을 해 냅니다. 선교사로 갑니다. 참 묘한 일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순수해지고, 깨끗해지고, 거룩해지고, 완전해져간다는 뜻입니다. 약속의 믿음에서 부활의 믿음으로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클라이맥스는 결국 부활의 믿음입니다.
‘죽으면 내가 다시 살 것이고 바치면 여호와 하나님이 도로 주실 것이다’ 라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이삭을 데리고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게 될 것이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라. 여호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행하시는 지 보자’ 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그가 확정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부활의 믿음입니다.
저는 오늘 이 부활절 축제에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아침 메뉴가 ‘약속의 믿음을 지나 부활의 믿음으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죽을 때 안심하고 죽으십시오. 발버둥치지 마십시오. 죽으면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당신이 오늘 죽고 다시 깨면 부활의 아침을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부활신앙을 가졌다’고 합니다. 5리를 가자고하면 10리를 가고, 거저 받은 것은 거저 주고,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십시오. 이 말씀은 모두 부활신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의 배경에는 주님께서 응답하시고 우리에게 상 주신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습니다.
보지 않았을 지라도…
이 약속의 믿음과 부활의 믿음 사이에서 번민하고 갈등했던 예수님의 제자 한 사람이 ‘도마’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4절부터 29절의 말씀입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간증했습니다. 그 때 바로 부활의 믿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볼 때는 약속의 믿음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는 부활의 믿음으로 옮겨갑니다. 도마는 믿지 않았습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8일 후에 도마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이 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변함없이 말씀을 해 주십니다. “평강이 있을 찌어다. ” 그리고 개인적으로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예수님은 자기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 믿음은 인간의 신념과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개인적인 믿음인 신념과 자기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죽음을 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의 믿음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네 믿음이 이제 부활의 믿음까지 가기를 바란다. ” 28절에서 도마가 어떤 고백을 합니까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
드디어 도마는 부활의 믿음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도마를 격려해 주십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부활신앙 클라이맥스는 이것입니다. 도마처럼 본 것을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결국 오늘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할 믿음은 내 개인적인 신념도, 약속의 믿음도 아니요, 보지 않았을 지라도 부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나를 변하게 합니다.
얼바인에 교회가 생긴 것도 어떤 한 분의 마음에 생명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란 그런 것입니다.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활의 믿음이 생기면 헌신, 봉사,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교회의 특징입니다. 우리 온누리교회도 처음 생길 때 소수가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교회를 시작하는 사람의 눈물, 기도, 부활의 신앙이 함께 모여서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로 부활의 믿음을
온누리교회는 예루살렘교회처럼 부흥했습니다.
이제는 안디옥교회가 필요합니다. 30개 비전교회가 바로 안디옥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세워지면 2천개의 선교지 교회들이 30개 비전교회를 기초로 생길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생길 때 마다 일어나는 것은 부활의 믿음 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고, 절망에서 기적을 만들어 내는 믿음이 부활신앙입니다.
그런 일이 여러분의 가정에, 개인적인 믿음에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십시오. 그 분은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평강이 있을찌어다. 내가 너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 부활신앙을 가지려면 시련과 고통이 따릅니다. 부활신앙을 갖게 되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의심의 덫에 걸립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이기게 하는 힘이 부활신앙입니다.
믿음의 사람을 가리켜 ‘거인’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미래를 봅니다. 믿음의 사람은 약속을 바라보고 인내하고 온유합니다. 모세도 한 때는 사람을 때려 죽였습니다. 그 모세가 나중에는 “믿음의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도다”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지도력이 생긴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과 2절로 오늘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여호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않으셨느니라”
오늘 하루가 믿음의 하루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모든 일들을 믿음으로 결정하십시오. 그 믿음이라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안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그 부활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부활의 아침, 주님이 식탁에 우리를 초대해 주셔서 복을 나누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난 이후에 승천하시기 전까지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께서 3년 동안 하신 공생애 지상사역과 승천하신 이후의 사역은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40일간의 의미를 강조하지 못하고, 그 비밀들을 알지 못한 채 지내왔습니다. 그 40일의 사역은 우리에게 아주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신령한 몸과 육신의 몸이 만나는 시간, 즉 제자들의 육신의 몸과 주님의 부활한 몸이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40일의 의미를 그리스도인들이 발견한다면 우리가 훨씬 차원 높은 복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은 생명의 변화
저는 이 40일 동안 예수님이 하신 행적을 두 가지로 크게 구분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패배감에 젖어있던 제자들을 찾아와서 격려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 말라, 이게 끝이 아니다. 그대들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배신했던 베드로를 비롯해 다시 이전 직업으로 돌아갔던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치유하셨습니다. 제가 예전에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었던 분들이 5년, 10년이 지난 지금 성자처럼 변해 있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 는 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불만스러울지라도 어느 날 돌아보았을 때 우리는 변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그리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런 변화가 40일 동안의 첫째 주제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치유와 회복을 주신 다음에 그들에게 비전을 주셨습니다. 희망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삼아라. 내가 너에게 능력을 주겠다. 두려워 말라.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나가서 세상을 변화시켜라. ’
이번 새벽기도회에서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위로, 격려, 치유를 받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번 집회를 통해서 사명을 얻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번에 사도행전 29장(ACTS29), ‘30개 비전교회’를 선포했더니 처음에는 그다지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씩 그 의미가 전달되고 있습니다. 몇몇 분들이 마산, 전주, 광명, 홍콩, 러시아에 교회를 세워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젠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우리들 마음 속에 그런 비전이 움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제 아침에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 후 우리 성도 한 분이 개인묘지를 하기 위해 준비한 땅을 교회에 바치겠다고 하셨습니다. 변화가 온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마음에 임하셔서 생명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했다가, 이 곳에 돈을 쓰려고 했다가, 이 쪽으로 가려고 했다가 바꾸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지금 제게도 5일만 하기로 한 새벽기도를 40일간 계속해볼까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니까 우리의 시간이 업그레이드 되고, 우리의 생각이 살아나고, 우리 삶의 질이 변합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생기가 돌고 비전쪾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축복이 여러분께 계속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 - 구원의 법칙
우리는 첫째 날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둘째 날에는 ‘생명의 법칙을 활용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주제는 ‘부활과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정의를 잘 아실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장 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가만히 따라가 보면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사역 초창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이 강건하지 않은 것을 굉장히 속상해 하셨습니다.
이성과 상식으로 믿음을 대하는 것을 마음 아파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믿음을 잃어버렸느냐 믿음이 있을 때는 물 위를 걷지 않았느냐’
여러분께 믿음이 있을 때는 기도도, 헌신도, 찬양도, 전도도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믿음을 잃어버리고 힘을 잃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리라”(막 9:23)라고 하십니다. 아직도 그 수준에 있는 분들은 회개하고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을 보시고는 굉장히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주님, 우리 집에 오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제 부하에게 모든 것을 시키지 않습니까. 주님은 그저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겁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너무 놀라셔서 “내가 이스라엘 중에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인도 “주여, 개는 주인의 밥상에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먹지 않습니까.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제게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놀라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병을 고치실 때 마다 예수님께서 공식적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 ” 예수님께서 불쌍한 사람의 병을 무조건 낫게 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이 요청할 때 반드시 응답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요청할 때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이것은 법칙입니다. 왜냐하면 병 고침에는 믿음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법칙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성령의 법칙도 마찬가지 입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부활신앙 얻은 아브라함
그렇다면 믿음 사건의 클라이맥스는 무엇입니까
믿음의 클라이맥스는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기적을 보았습니다. 육신으로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클라이맥스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구약에 부활신앙의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1백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지만 그것은 믿음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1백세에 이삭을 얻기 전 까지 얼마나 곤두박질을 많이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 시시때때로 신경질을 냈습니다.
왜 25년 동안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75세에 여호와 하나님께 약속을 받고 1백세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다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기다리는 것이지 즉각 응답이 아닙니다. 사라가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자타가 모두 인정하기 전까지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만약에 사라가 아기를 낳을 수 있을 때 임신했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셨음에도 ‘우리가 스스로 이루었다’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누가 봐도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될 때 까지 사라를 끌고 가십니다. 그래야 누구든 그 아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기적적으로 이삭을 얻었지만 그것은 믿음의 시작이었지 완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언제 완성되었을까요 이삭이 16세가 되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있어 큰 위기입니다. 아브라함이 겪은 믿음의 위기는 1백세에 아기를 낳은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제물로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창세기 22장 3절에서 6절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이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가서 경배하고 돌아올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마음 속에 부활에 대한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가 아침 일찍 안장을 지우고 떠날 수 있었고, 담대하게 자기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 제단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조금 더 확인시켜주는 말씀이 히브리서 11장 17절에서 19절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여호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 안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때는 그의 믿음이 시작이었지만,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칠 때에는 이미 그 믿음이 부활신앙으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약속의 신앙에서 부활의 신앙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업그레이드 된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으로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 받는다고 해서 갑자기 완전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때로는 착한 생각, 기막힌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부드럽고 아름답고 거룩한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만 계속하면 좋겠지만, 또 곤두박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지울 수 없는 사실은, 내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요 시험에 빠지고 부족한 인간임에도 내 안에 바꿀 수 없는 성령의 강건함/눈물/회개/헌신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헌신합니다. ’ 라는 말은 거짓말 같지만 진실이기도 합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디로 갈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면서도 그 일을 해 냅니다. 선교사로 갑니다. 참 묘한 일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순수해지고, 깨끗해지고, 거룩해지고, 완전해져간다는 뜻입니다. 약속의 믿음에서 부활의 믿음으로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클라이맥스는 결국 부활의 믿음입니다.
‘죽으면 내가 다시 살 것이고 바치면 여호와 하나님이 도로 주실 것이다’ 라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이삭을 데리고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게 될 것이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라. 여호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행하시는 지 보자’ 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그가 확정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부활의 믿음입니다.
저는 오늘 이 부활절 축제에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아침 메뉴가 ‘약속의 믿음을 지나 부활의 믿음으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죽을 때 안심하고 죽으십시오. 발버둥치지 마십시오. 죽으면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당신이 오늘 죽고 다시 깨면 부활의 아침을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부활신앙을 가졌다’고 합니다. 5리를 가자고하면 10리를 가고, 거저 받은 것은 거저 주고,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십시오. 이 말씀은 모두 부활신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의 배경에는 주님께서 응답하시고 우리에게 상 주신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습니다.
보지 않았을 지라도…
이 약속의 믿음과 부활의 믿음 사이에서 번민하고 갈등했던 예수님의 제자 한 사람이 ‘도마’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4절부터 29절의 말씀입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간증했습니다. 그 때 바로 부활의 믿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볼 때는 약속의 믿음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는 부활의 믿음으로 옮겨갑니다. 도마는 믿지 않았습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8일 후에 도마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이 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변함없이 말씀을 해 주십니다. “평강이 있을 찌어다. ” 그리고 개인적으로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예수님은 자기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 믿음은 인간의 신념과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개인적인 믿음인 신념과 자기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죽음을 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의 믿음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네 믿음이 이제 부활의 믿음까지 가기를 바란다. ” 28절에서 도마가 어떤 고백을 합니까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
드디어 도마는 부활의 믿음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도마를 격려해 주십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부활신앙 클라이맥스는 이것입니다. 도마처럼 본 것을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결국 오늘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할 믿음은 내 개인적인 신념도, 약속의 믿음도 아니요, 보지 않았을 지라도 부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나를 변하게 합니다.
얼바인에 교회가 생긴 것도 어떤 한 분의 마음에 생명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란 그런 것입니다.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활의 믿음이 생기면 헌신, 봉사,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교회의 특징입니다. 우리 온누리교회도 처음 생길 때 소수가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교회를 시작하는 사람의 눈물, 기도, 부활의 신앙이 함께 모여서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로 부활의 믿음을
온누리교회는 예루살렘교회처럼 부흥했습니다.
이제는 안디옥교회가 필요합니다. 30개 비전교회가 바로 안디옥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세워지면 2천개의 선교지 교회들이 30개 비전교회를 기초로 생길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생길 때 마다 일어나는 것은 부활의 믿음 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고, 절망에서 기적을 만들어 내는 믿음이 부활신앙입니다.
그런 일이 여러분의 가정에, 개인적인 믿음에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십시오. 그 분은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평강이 있을찌어다. 내가 너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 부활신앙을 가지려면 시련과 고통이 따릅니다. 부활신앙을 갖게 되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의심의 덫에 걸립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이기게 하는 힘이 부활신앙입니다.
믿음의 사람을 가리켜 ‘거인’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미래를 봅니다. 믿음의 사람은 약속을 바라보고 인내하고 온유합니다. 모세도 한 때는 사람을 때려 죽였습니다. 그 모세가 나중에는 “믿음의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도다”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지도력이 생긴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과 2절로 오늘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여호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않으셨느니라”
오늘 하루가 믿음의 하루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모든 일들을 믿음으로 결정하십시오. 그 믿음이라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안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그 부활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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