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본문
인간이 할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죽음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 수많은 권력자들과 종교의 창시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모두다 무덤만 남긴 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현대 의학이 인간의 수명을 연장할 수는 있어도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는 모두가 두려워 고개를 숙입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 이유는 이 땅에서의 행복과 더불어 죽음의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심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 신앙의 뿌리라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사건을 믿는 것을 기독교 신앙의 꽃이요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사건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해결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수많은 종교가운데 죽음을 초월하여 부활의 사건을 보여준 종교는 기독교 외에는 없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곧 부활의 신앙입니다.
오늘은 지구촌의 모든 교회가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주일을 지키면서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할 부활의 신앙이 무엇인가를 본문을 통해 상고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부활의 신앙은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여러번 말씀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살아날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마26:32)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죽음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고 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고 책망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주님이 죽지 않고 이 땅에서 왕이 되는 것이 메시아의 목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사탄의 생각이었고, 주님의 뜻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며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의 본연의 사명임을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말씀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은 제자들에게 죽음과 부활을 약속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대제사장들이 보낸 군병들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주님을 지키겠다는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들은 모두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심문받고 있는 대제사장의 뜰까지 몰래 들어갔다가 예수의 제자로 들통나자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하고 말았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주님은 두 명의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여섯 시간동안 고통을 당하시다 죽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었던 신실한 믿음의 사람 아리마대 사람이요 부자였던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새 무덤에 장사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여인들은 모두 한 곳에 숨어서 앞으로 살아가야할 자신들의 앞일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여인들은 안식일이 촉박하여 바쁘게 장사하느라 주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려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새벽미명에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덤의 돌문이 열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무덤을 지켜던 군병들도 없었습니다. 이상히 여긴 여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시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리번두리번 시체를 찾으려고 하는데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있음을 보고 여인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있는데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제사야 여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열 한 사도와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본 일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인들의 말을 믿지 못해 무덤까지 달려와서 확인을 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빈 무덤을 확인은 했지만 주님의 약속의 말씀인 부활의 사실을 믿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원조(조상)라고 말합니다. 그의 믿음의 절정은 100세에 선물로 주신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신뢰합니다.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씨앗입니다. 이삭을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린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이 주저하지 않았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라고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분명 이삭을 통해 언약을 성취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구약의 부활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마치 주님이 죽어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당시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1%의 가능성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은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고난이라는 환경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까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성령 여호와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핍박 중에 있는 빌립보 교회에 편지로 위로하기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믿는 것은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의 삶의 어떤 문제와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다는 부활의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무덤으로 달려가서 주님의 시체를 찾기보다 갈릴리로 달려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문제로 절망할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하심을 신뢰하는 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부활의 신앙은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증인이라는 것은 법정 용어로 사실 그대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오백여명의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주님께서 이들에게 나타나신 목적은 이들로 하여금 부활의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함과, 또한 주님의 부활의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겁쟁이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을 받은 후 담대히 나아가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 증거 했습니다. 사도행전2:14-42에 오순절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복음을 증거 했는데 삼천 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3:11-4:4에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복음을 증거 했는데 이번에는 오천 명이 회개했습니다. 베드로의 두 번의 설교의 핵심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그가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다메섹에서 만난 후 변화되어 부활하신 주님을 본 증인으로 이방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증거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십니까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요 본질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빼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구원의 가치를 상실한 알맹이 없는 껍데기 종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는 반드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실을 증거 해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부활은 죽음을 초월하는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능력을 일으켰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류가 사망의 길로 나아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종과 부활로 인류에게 새 생명의 소망을 가지게 했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죽음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와도 우리는 다시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고 했습니다.
왜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해야 합니까 그것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많은 핍박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한 것은 이들에게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을 비롯하여 열 두 제자들의 대부분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였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사라지지 않고 모든 족속과 나라에 전파되고 있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삶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는 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인간이 소유한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내게서 살아집니다.
재물도, 권력도, 지식과 명예도 죽음 앞에는 무용지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입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처럼 오늘날에도 신앙을 가진 성도들 가운데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라고 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여전히 죄에서 자유함을 얻지 못한 사망의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리하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참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가 누구입니까 살아나신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는 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날마다 주님과 함께 승리하며, 이웃에게 증거 하여 행복을 공유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 이유는 이 땅에서의 행복과 더불어 죽음의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심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 신앙의 뿌리라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사건을 믿는 것을 기독교 신앙의 꽃이요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사건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해결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수많은 종교가운데 죽음을 초월하여 부활의 사건을 보여준 종교는 기독교 외에는 없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곧 부활의 신앙입니다.
오늘은 지구촌의 모든 교회가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주일을 지키면서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할 부활의 신앙이 무엇인가를 본문을 통해 상고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부활의 신앙은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여러번 말씀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살아날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마26:32)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죽음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고 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고 책망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주님이 죽지 않고 이 땅에서 왕이 되는 것이 메시아의 목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사탄의 생각이었고, 주님의 뜻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며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의 본연의 사명임을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말씀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은 제자들에게 죽음과 부활을 약속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대제사장들이 보낸 군병들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주님을 지키겠다는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들은 모두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심문받고 있는 대제사장의 뜰까지 몰래 들어갔다가 예수의 제자로 들통나자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하고 말았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주님은 두 명의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여섯 시간동안 고통을 당하시다 죽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었던 신실한 믿음의 사람 아리마대 사람이요 부자였던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새 무덤에 장사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여인들은 모두 한 곳에 숨어서 앞으로 살아가야할 자신들의 앞일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여인들은 안식일이 촉박하여 바쁘게 장사하느라 주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려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새벽미명에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덤의 돌문이 열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무덤을 지켜던 군병들도 없었습니다. 이상히 여긴 여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시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리번두리번 시체를 찾으려고 하는데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있음을 보고 여인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있는데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제사야 여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열 한 사도와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본 일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인들의 말을 믿지 못해 무덤까지 달려와서 확인을 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빈 무덤을 확인은 했지만 주님의 약속의 말씀인 부활의 사실을 믿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원조(조상)라고 말합니다. 그의 믿음의 절정은 100세에 선물로 주신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신뢰합니다.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씨앗입니다. 이삭을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린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이 주저하지 않았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라고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분명 이삭을 통해 언약을 성취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구약의 부활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마치 주님이 죽어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당시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1%의 가능성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은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고난이라는 환경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까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성령 여호와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핍박 중에 있는 빌립보 교회에 편지로 위로하기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믿는 것은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의 삶의 어떤 문제와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다는 부활의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무덤으로 달려가서 주님의 시체를 찾기보다 갈릴리로 달려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문제로 절망할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하심을 신뢰하는 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부활의 신앙은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증인이라는 것은 법정 용어로 사실 그대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오백여명의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주님께서 이들에게 나타나신 목적은 이들로 하여금 부활의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함과, 또한 주님의 부활의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겁쟁이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을 받은 후 담대히 나아가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 증거 했습니다. 사도행전2:14-42에 오순절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복음을 증거 했는데 삼천 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3:11-4:4에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복음을 증거 했는데 이번에는 오천 명이 회개했습니다. 베드로의 두 번의 설교의 핵심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그가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다메섹에서 만난 후 변화되어 부활하신 주님을 본 증인으로 이방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증거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십니까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요 본질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빼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구원의 가치를 상실한 알맹이 없는 껍데기 종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는 반드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실을 증거 해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부활은 죽음을 초월하는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능력을 일으켰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류가 사망의 길로 나아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종과 부활로 인류에게 새 생명의 소망을 가지게 했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죽음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와도 우리는 다시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고 했습니다.
왜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해야 합니까 그것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많은 핍박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한 것은 이들에게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을 비롯하여 열 두 제자들의 대부분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였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사라지지 않고 모든 족속과 나라에 전파되고 있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삶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는 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인간이 소유한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내게서 살아집니다.
재물도, 권력도, 지식과 명예도 죽음 앞에는 무용지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입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처럼 오늘날에도 신앙을 가진 성도들 가운데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라고 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여전히 죄에서 자유함을 얻지 못한 사망의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리하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참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가 누구입니까 살아나신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는 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날마다 주님과 함께 승리하며, 이웃에게 증거 하여 행복을 공유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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