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나의 부활을 믿습니다
본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된 지 이틀이 지났습니다.
안식일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을 보려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찾는 여인들에게 그 형상이 번개 같고, 눈과 같이 흰 흰옷을 입은 천사가 말씀합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28:5-6)
주일 새벽에 우리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을 깨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번 부활절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나의 부활’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나의 부활에 대하여 뭐라고 증언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부활만이 아니라, 막연한 우리들의 부활만이 아니라, 나의 부활에 대하여 뭐라고 증언하고 있는가
‘내가 부활할 것인가’
이것은 심각하고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전대미문의 놀라운 기적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복음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상관이 없다면, 인간의 한계상황인 죽음 앞에 한없이 초라해지는 내 자신에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1. 오늘 본문에 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란 질문이 나옵니다.
고전15:12절 “........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하느냐”
고린도 교회의 일부가 헬라 사상의 침투로 말미암아 부활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헬라사상은 이원론입니다.
즉 보이지 않는 이데아는 선하고, 보이는 물질은 악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영혼은 선하고, 보이는 육체는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혼 불멸은 매력적인 것이지만 육체의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악한 육체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바울 사도는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다음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고전 15:3-4절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성경대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구약의 예언대로라는 말씀이지요.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구약의 예언에 따른 것이었듯이 예수님의 부활도 전적으로 구약의 예언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예언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수많은 증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고전 15:5-8절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수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다수의 증인들이 살아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못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자신의 회심에 의해서도 입증된다는 것입니다.
고전 15:9-10절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유언비어로 여기면서, 그것을 믿는 성도들을 색출해내는 데에 물불을 가리지 않은 바울이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변화는 바울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고전 15: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첫 열매!
우리는 다 압니다.
첫 열매가 열리면 그 나무에서는 뒤이어 많은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을!
한 농부가 텃밭에 오이 씨앗을 심었습니다.
새싹이 돋아나더니 줄기가 굵어집니다.
농부는 많은 오이가 열릴 것을 기대하면서 물과 거름을 주었습니다.
줄기 끝에 노란 오이꽃이 폈습니다.
오이꽃이 떨어지기 전에 파랗고 싱그러운 오이가 살을 찌우고 있습니다.
농부는 한없이 기뻤습니다.
그 첫 열매는 농부가 흘린 땀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농부가 기뻐하는 것은 그 오이 하나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오이넝쿨에 가득히 오이가 주렁주렁 열릴 것을 미리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첫 열매는 앞으로 이 오이 넝쿨에서 많은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부활을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예수님을 부활시킨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똑같이 우리에게도 역사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번역에는 이 ‘첫 열매’라는 말을 ‘보증’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3.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복음을 위해 애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법을 동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수없이 강조합니다.
본문 고전 15장에는 “만일 부활이 없다면”이란 가정법 문장이 8번이나 나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이것은 인류 최악의 가정이고,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가정이고, 우리의 믿음을 송두리째 뿌리 뽑는 가정입니다.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자 기독교 신앙의 토대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맙니다.
성도의 구원도, 인내도, 소망도 헛것이 되고 맙니다.
본문에 보면, ‘헛것’이라는 단어가 반복해 나옵니다.
14절 “.......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7절 “........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특히 선한 일에 대한 수고와 봉사조차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바울 사도는 확신합니다.
고전 15:22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53절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
서울 합정동 양화진에 가면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143기의 선교사 묘가 있습니다.
미국 의료 선교사 켄드릭의 묘비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나에게 천 번의 생명이 있다 해도 나는 그 모두를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 ”
간호사인 켄드릭은 26세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조선에 온지 8개월 만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한국 사람보다도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받았던 헐버트 선교사의 묘가 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
그들이 이 땅에 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이 땅에서 매일 매일 죽는 삶을 기쁘게 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내일의 부활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어느 무명작가가 쓴 글을 읽으면서 부활절 메시지를 마치겠습니다.
“친구여 예수는 부활하셨다. /
희망과 생명과 빛이 그와 함께 부활하였다/
지난밤에는 그리스도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음’이 장사된 것이다. /
무덤을 막았던 돌은 굴러 새벽빛을 맞아들이고/ 밤은 깨지고 봄의 속삭임이 묘지를 밝혔다. /
일어나라. 친구여. 예수는 부활하셨다. 부활의 새벽은 밝았다. / 오, 친구여 무덤에서 일어나라. / 어깨가 무거운가. 가슴이 답답한가. 그대를 누르고 있는 그 무거운 바위는 무엇인가. / 친구여 예수를 바라보자. / 부활의 능력은 그대의 바위를 굴려버릴 것이다. /
생명의 빛이 무덤을 꿰뚫었듯이/
의심과 방황과 불신의 구름을 아침 안개처럼 녹여버릴 태양을 가지자. /
친구여 예수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
예수는 생명을 자라게 하는 태양/
예수는 그대에게 새 출발을 주는 부활의 힘/
부활의 아침이다. /
부활은 승리. / 부활은 개선/
허물과 죄에 죽고 영원에 사는 새로운 생명/ 친구여 다메섹 도상의 바울처럼/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신 예수를 만나자. /
그래서 하잘 것 없는 인간의 욕망을 버리고/ 어둠 속을 방황하는 욕심의 방랑을 중단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자.
안식일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을 보려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찾는 여인들에게 그 형상이 번개 같고, 눈과 같이 흰 흰옷을 입은 천사가 말씀합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28:5-6)
주일 새벽에 우리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을 깨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번 부활절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나의 부활’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나의 부활에 대하여 뭐라고 증언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부활만이 아니라, 막연한 우리들의 부활만이 아니라, 나의 부활에 대하여 뭐라고 증언하고 있는가
‘내가 부활할 것인가’
이것은 심각하고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전대미문의 놀라운 기적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복음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상관이 없다면, 인간의 한계상황인 죽음 앞에 한없이 초라해지는 내 자신에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1. 오늘 본문에 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란 질문이 나옵니다.
고전15:12절 “........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하느냐”
고린도 교회의 일부가 헬라 사상의 침투로 말미암아 부활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헬라사상은 이원론입니다.
즉 보이지 않는 이데아는 선하고, 보이는 물질은 악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영혼은 선하고, 보이는 육체는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혼 불멸은 매력적인 것이지만 육체의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악한 육체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바울 사도는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다음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고전 15:3-4절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성경대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구약의 예언대로라는 말씀이지요.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구약의 예언에 따른 것이었듯이 예수님의 부활도 전적으로 구약의 예언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예언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수많은 증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고전 15:5-8절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수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다수의 증인들이 살아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못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자신의 회심에 의해서도 입증된다는 것입니다.
고전 15:9-10절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유언비어로 여기면서, 그것을 믿는 성도들을 색출해내는 데에 물불을 가리지 않은 바울이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변화는 바울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고전 15: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첫 열매!
우리는 다 압니다.
첫 열매가 열리면 그 나무에서는 뒤이어 많은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을!
한 농부가 텃밭에 오이 씨앗을 심었습니다.
새싹이 돋아나더니 줄기가 굵어집니다.
농부는 많은 오이가 열릴 것을 기대하면서 물과 거름을 주었습니다.
줄기 끝에 노란 오이꽃이 폈습니다.
오이꽃이 떨어지기 전에 파랗고 싱그러운 오이가 살을 찌우고 있습니다.
농부는 한없이 기뻤습니다.
그 첫 열매는 농부가 흘린 땀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농부가 기뻐하는 것은 그 오이 하나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오이넝쿨에 가득히 오이가 주렁주렁 열릴 것을 미리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첫 열매는 앞으로 이 오이 넝쿨에서 많은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부활을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예수님을 부활시킨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똑같이 우리에게도 역사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번역에는 이 ‘첫 열매’라는 말을 ‘보증’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3.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복음을 위해 애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법을 동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수없이 강조합니다.
본문 고전 15장에는 “만일 부활이 없다면”이란 가정법 문장이 8번이나 나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이것은 인류 최악의 가정이고,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가정이고, 우리의 믿음을 송두리째 뿌리 뽑는 가정입니다.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자 기독교 신앙의 토대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맙니다.
성도의 구원도, 인내도, 소망도 헛것이 되고 맙니다.
본문에 보면, ‘헛것’이라는 단어가 반복해 나옵니다.
14절 “.......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7절 “........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특히 선한 일에 대한 수고와 봉사조차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바울 사도는 확신합니다.
고전 15:22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53절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
서울 합정동 양화진에 가면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143기의 선교사 묘가 있습니다.
미국 의료 선교사 켄드릭의 묘비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나에게 천 번의 생명이 있다 해도 나는 그 모두를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 ”
간호사인 켄드릭은 26세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조선에 온지 8개월 만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한국 사람보다도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받았던 헐버트 선교사의 묘가 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
그들이 이 땅에 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이 땅에서 매일 매일 죽는 삶을 기쁘게 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내일의 부활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어느 무명작가가 쓴 글을 읽으면서 부활절 메시지를 마치겠습니다.
“친구여 예수는 부활하셨다. /
희망과 생명과 빛이 그와 함께 부활하였다/
지난밤에는 그리스도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음’이 장사된 것이다. /
무덤을 막았던 돌은 굴러 새벽빛을 맞아들이고/ 밤은 깨지고 봄의 속삭임이 묘지를 밝혔다. /
일어나라. 친구여. 예수는 부활하셨다. 부활의 새벽은 밝았다. / 오, 친구여 무덤에서 일어나라. / 어깨가 무거운가. 가슴이 답답한가. 그대를 누르고 있는 그 무거운 바위는 무엇인가. / 친구여 예수를 바라보자. / 부활의 능력은 그대의 바위를 굴려버릴 것이다. /
생명의 빛이 무덤을 꿰뚫었듯이/
의심과 방황과 불신의 구름을 아침 안개처럼 녹여버릴 태양을 가지자. /
친구여 예수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
예수는 생명을 자라게 하는 태양/
예수는 그대에게 새 출발을 주는 부활의 힘/
부활의 아침이다. /
부활은 승리. / 부활은 개선/
허물과 죄에 죽고 영원에 사는 새로운 생명/ 친구여 다메섹 도상의 바울처럼/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신 예수를 만나자. /
그래서 하잘 것 없는 인간의 욕망을 버리고/ 어둠 속을 방황하는 욕심의 방랑을 중단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자.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