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예수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셨습니다
본문
“죽음의 문턱은 모든 것을 부른다. 파멸의 수렁은 모든 목적론을 삼켜버린다. 그러나 생성하는 실존의 핵심은 스스로 죽음의 생성과정을 만들기 때문에 그리고 생명과 죽음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 대립이 존재하기 때문에 삶의 껍질을 벗기듯이 결코 죽음의 파멸성에 종속되지 않는다”고 유물론 철학의 Ernest Bloch가 그의 책 “Das PrinzipHoffnung, 희망의 원리”에서 말했습니다.
Bloch가 제시한 이 죽음에의 탈 영역성에 대하여 삼위일체적 희망의 신학을 말한 Jurgen Moltmann이 대답합니다. “Bloch는 죽음의 치명성과 진정한 허무성을 간과하고 있다. 죽음은 생명과 변증법적인 동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절대적 모순이요 파괴적 권세로 파악된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의 실존 핵심에서 나오는 내재적 힘으로 극복될 수 없다. 죽음은 무에서부터 존재를 창조하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고 죽음 자체를 그 생명의 능력으로 삼키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만 극복되는 것이다”
두 사람의 키워드는 인간의 실존 핵심인데 Bloch는 생성하는 실존의 핵심은 죽음의 파멸성에 종속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Moltmann은 인간의 실존 핵심에서 나온 내재적 힘으로는 죽음이 극복될 수 없고, 죽음의 파멸성은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만 극복된다고 했습니다. Bloch는 죽음과 부활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보았고, Moltmann은 부활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보았습니다.
Bloch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한 부분을 인간의 자기 주장으로 바꾸어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함으로써 불신앙을 조장합니다. Moltmann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는 예수님의 말씀 전체에 대한 온전한 신앙을 주장합니다.
부활절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 아침에 저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장사된 일과 삼 일 만에 살아나신 부활이 말하고 있는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장사되었다는 사실이 말씀해주는 계시를 생각해봅시다. 첫째, 그것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 27:57-61의 말씀은 분명히 예수님이 역사의 환시 가운데 아리마데 사람 요셉의 무덤에 누이셨다는 기록입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가현이 아니라 틀림없이 죽어 장사지낸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엡 5:2). 그는 자발적으로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는 독생자를 주셨고, 독생자는 자기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버리셨던 것입니다.
둘째, 무덤은 예수님께서 지극히 낮아지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음부에 내리우셨다가 삼 일 만에 살아나셨다는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지극히 낮아지신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선고하신대로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도 흙 가운데 누우셨던 것입니다. 또한 무덤은 히브리 개념에 의하면 바로 지옥입니다. 벧전 3:19에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대속하시기 위해서 가장 천한 마굿간에서 나셨고, 죄수가 되셨고, 귀한 부자의 무덤에 손님이 되셨고, 가장 천한 지옥의 형벌을 맛보신 것입니다. 셋째, 무덤은 우리 죄의 실재를 밝히 드러내 보여줍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무죄한 우리 주님이 무덤에 내리워 삼 일 동안 계셨다는 이 사실에서 우리의 죄가 정말 실재하는 것이며 우리의 죄가 속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값이 지불되어야 한다는 엄숙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주님이 무덤에 삼 일 동안 계셔야 했다면 우리의 죄값은 영원한 멸망, 영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 양을 우리는 십자가에서 뿐 아니라 장사된 무덤에서 더욱 확실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무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무덤에도 찾아오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 11장에 예수께서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에 찾아가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다음, 무덤 앞에 서셔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니 나사로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때 주께서 “죽은 자여 나오라”고 말씀하셨다면 모든 무덤이 열렸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산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죽은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눅 20:37-38에 예수께서 말씀십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이요 이삭의 여호와 하나님이요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모든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실존들입니다.
삶과 죽음이 한 조각 자연이 아닙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낙원과 음부에서 실존하고, 천국과 지옥에서 실존합니다. 세상의 차원에서 보면 모든 인생은 죽는 당일에 미움도 사랑도, 계획도 도모도 허사가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이 땅 속으로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이들도 떠나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의 무덤과도 함께 계시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요 6:37-40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 무덤에 계셨다는 이 역사적 사실보다 더 큰 표적은 없습니다.
마 12:38-40을 보십시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어 사흘간 무덤 속에 계셨다는 이 사실보다 더 큰 표적이 없고, 더 보여줄 다른 표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무덤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으로 부활하신 사실이 말씀해주는 계시를 생각해봅시다. 첫째,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모든 인류가 부활할 것을 보여줍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보편적 진리입니다. 먼저 구약을 봅시다. 사 26:19에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신약을 봅시다. 계 20:11-15에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사도 바울은 고전 15:12-13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고 했고, 20-21에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고 했습니다. 첫째 아담이 죽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는 것처럼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부활하셨으므로 모든 인생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무덤이 끝이 아닙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눅 16:19-31에 예수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말씀으로 사후에 대한 세계를 설명합니다. 낙원에 들어가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과는 질이 다릅니다. 낙원은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이 세상과 연관된 삶을 사는 곳입니다. 부자도 나사로도 이 세상의 삶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고뇌하고, 소원하고, 위로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정해진 운명은 변경될 수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26절).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의 부활에는 심판이 기대되고, 신자들의 부활에는 영생이 기대된다고 말해줍니다. 요 5:29에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고, 단 12:2에는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 대한 심판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보편적 수행을 위한 필요불가결한 조건입니다. Wolfhart Pannenberg가 지적한대로 죽은 자의 부활은 여호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보조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자의 부활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심판과 불확실한 미래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지금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보여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과거나 현재나 세계가 안심하고 소망을 둘 수 있는 유일한 기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행하시지 아니할 약속으로 사람을 조롱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성실성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롬 4:25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부활의 때 이미 우리는 의롭게 되었고, 예수를 믿을 때 실제로 의롭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여호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 죄를 사하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내 인생이 예수의 이름 안에 있으므로 내가 물어야 할 벌점도, 벌금도 내 인생의 주인되신 주님께서 다 갚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삶에 오의, 비밀을 갈 2:20에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부활은 불경건한 자를 향한 의롭게 하시는 은혜와 창조적 사랑의 계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를 반드시 영화롭게 하십니다. 부활은 현재 칭의의 약속으로 우리에게 존재하며 동시에 영화의 약속으로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영은 지금도 우리 구원의 보증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습니다(히 11:35).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새 창조가 예수님의 부활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현실에 부당한 고통과 죄와 죽음이 세계 가운데 있는 한, 부활은 이 세계에서 완전히 증명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부활은 현실과 함께 참된 미래를 향한 투쟁 속에 있음으로 신앙과 소망의 약속으로 존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롬 8:22-25에서 말씀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행복의 총체로써 평강, 그리고 자비와 긍휼에는 자기 백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갑니다. 낙원으로 천국으로 나아갑니다. 신자의 삶에는 좋은 일들이 생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더 많이 주려고 하고, 더 잘되기를 바라듯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을 주시고, 가장 귀한 것을 예비해 주십니다.
넷째, 예수의 부활은 미래가 밝아져온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일 3:2에서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부활은 새 창조입니다.
부활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서 다가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세계변혁에 의해서 붙잡힌 바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절에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 속으로 부활했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 자유하는 새로운 인간, 그리고 새 창조의 현재적인 대표자로서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요 미래의 소망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셨다”는 부활절의 메시지에서 우리는 무덤과 부활에 대한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합니다. 무덤과 부활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대한 불타는 신앙이 다시금 부활하는 주의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loch가 제시한 이 죽음에의 탈 영역성에 대하여 삼위일체적 희망의 신학을 말한 Jurgen Moltmann이 대답합니다. “Bloch는 죽음의 치명성과 진정한 허무성을 간과하고 있다. 죽음은 생명과 변증법적인 동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절대적 모순이요 파괴적 권세로 파악된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의 실존 핵심에서 나오는 내재적 힘으로 극복될 수 없다. 죽음은 무에서부터 존재를 창조하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고 죽음 자체를 그 생명의 능력으로 삼키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만 극복되는 것이다”
두 사람의 키워드는 인간의 실존 핵심인데 Bloch는 생성하는 실존의 핵심은 죽음의 파멸성에 종속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Moltmann은 인간의 실존 핵심에서 나온 내재적 힘으로는 죽음이 극복될 수 없고, 죽음의 파멸성은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만 극복된다고 했습니다. Bloch는 죽음과 부활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보았고, Moltmann은 부활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보았습니다.
Bloch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한 부분을 인간의 자기 주장으로 바꾸어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함으로써 불신앙을 조장합니다. Moltmann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는 예수님의 말씀 전체에 대한 온전한 신앙을 주장합니다.
부활절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 아침에 저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장사된 일과 삼 일 만에 살아나신 부활이 말하고 있는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장사되었다는 사실이 말씀해주는 계시를 생각해봅시다. 첫째, 그것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 27:57-61의 말씀은 분명히 예수님이 역사의 환시 가운데 아리마데 사람 요셉의 무덤에 누이셨다는 기록입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가현이 아니라 틀림없이 죽어 장사지낸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엡 5:2). 그는 자발적으로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는 독생자를 주셨고, 독생자는 자기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버리셨던 것입니다.
둘째, 무덤은 예수님께서 지극히 낮아지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음부에 내리우셨다가 삼 일 만에 살아나셨다는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지극히 낮아지신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선고하신대로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도 흙 가운데 누우셨던 것입니다. 또한 무덤은 히브리 개념에 의하면 바로 지옥입니다. 벧전 3:19에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대속하시기 위해서 가장 천한 마굿간에서 나셨고, 죄수가 되셨고, 귀한 부자의 무덤에 손님이 되셨고, 가장 천한 지옥의 형벌을 맛보신 것입니다. 셋째, 무덤은 우리 죄의 실재를 밝히 드러내 보여줍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무죄한 우리 주님이 무덤에 내리워 삼 일 동안 계셨다는 이 사실에서 우리의 죄가 정말 실재하는 것이며 우리의 죄가 속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값이 지불되어야 한다는 엄숙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주님이 무덤에 삼 일 동안 계셔야 했다면 우리의 죄값은 영원한 멸망, 영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 양을 우리는 십자가에서 뿐 아니라 장사된 무덤에서 더욱 확실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무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무덤에도 찾아오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 11장에 예수께서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에 찾아가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다음, 무덤 앞에 서셔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니 나사로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때 주께서 “죽은 자여 나오라”고 말씀하셨다면 모든 무덤이 열렸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산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죽은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눅 20:37-38에 예수께서 말씀십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이요 이삭의 여호와 하나님이요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모든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실존들입니다.
삶과 죽음이 한 조각 자연이 아닙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낙원과 음부에서 실존하고, 천국과 지옥에서 실존합니다. 세상의 차원에서 보면 모든 인생은 죽는 당일에 미움도 사랑도, 계획도 도모도 허사가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이 땅 속으로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이들도 떠나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의 무덤과도 함께 계시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요 6:37-40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 무덤에 계셨다는 이 역사적 사실보다 더 큰 표적은 없습니다.
마 12:38-40을 보십시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어 사흘간 무덤 속에 계셨다는 이 사실보다 더 큰 표적이 없고, 더 보여줄 다른 표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무덤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으로 부활하신 사실이 말씀해주는 계시를 생각해봅시다. 첫째,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모든 인류가 부활할 것을 보여줍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보편적 진리입니다. 먼저 구약을 봅시다. 사 26:19에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신약을 봅시다. 계 20:11-15에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사도 바울은 고전 15:12-13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고 했고, 20-21에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고 했습니다. 첫째 아담이 죽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는 것처럼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부활하셨으므로 모든 인생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무덤이 끝이 아닙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눅 16:19-31에 예수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말씀으로 사후에 대한 세계를 설명합니다. 낙원에 들어가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과는 질이 다릅니다. 낙원은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이 세상과 연관된 삶을 사는 곳입니다. 부자도 나사로도 이 세상의 삶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고뇌하고, 소원하고, 위로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정해진 운명은 변경될 수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26절).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의 부활에는 심판이 기대되고, 신자들의 부활에는 영생이 기대된다고 말해줍니다. 요 5:29에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고, 단 12:2에는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 대한 심판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보편적 수행을 위한 필요불가결한 조건입니다. Wolfhart Pannenberg가 지적한대로 죽은 자의 부활은 여호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보조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자의 부활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심판과 불확실한 미래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지금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보여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과거나 현재나 세계가 안심하고 소망을 둘 수 있는 유일한 기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행하시지 아니할 약속으로 사람을 조롱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성실성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롬 4:25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부활의 때 이미 우리는 의롭게 되었고, 예수를 믿을 때 실제로 의롭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여호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 죄를 사하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내 인생이 예수의 이름 안에 있으므로 내가 물어야 할 벌점도, 벌금도 내 인생의 주인되신 주님께서 다 갚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삶에 오의, 비밀을 갈 2:20에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부활은 불경건한 자를 향한 의롭게 하시는 은혜와 창조적 사랑의 계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를 반드시 영화롭게 하십니다. 부활은 현재 칭의의 약속으로 우리에게 존재하며 동시에 영화의 약속으로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영은 지금도 우리 구원의 보증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습니다(히 11:35).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새 창조가 예수님의 부활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현실에 부당한 고통과 죄와 죽음이 세계 가운데 있는 한, 부활은 이 세계에서 완전히 증명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부활은 현실과 함께 참된 미래를 향한 투쟁 속에 있음으로 신앙과 소망의 약속으로 존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롬 8:22-25에서 말씀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행복의 총체로써 평강, 그리고 자비와 긍휼에는 자기 백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갑니다. 낙원으로 천국으로 나아갑니다. 신자의 삶에는 좋은 일들이 생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더 많이 주려고 하고, 더 잘되기를 바라듯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을 주시고, 가장 귀한 것을 예비해 주십니다.
넷째, 예수의 부활은 미래가 밝아져온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일 3:2에서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부활은 새 창조입니다.
부활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서 다가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세계변혁에 의해서 붙잡힌 바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절에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 속으로 부활했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 자유하는 새로운 인간, 그리고 새 창조의 현재적인 대표자로서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요 미래의 소망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셨다”는 부활절의 메시지에서 우리는 무덤과 부활에 대한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합니다. 무덤과 부활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대한 불타는 신앙이 다시금 부활하는 주의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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