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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행동의 완전한 변화, 부활

본문

부활 하면 생각나는 것은 반드시 육체의 죽음이다.
많은 분들이 부활신앙을 목적하고 살라고 하지만 그 부활의 의미는 죽으면 천국을 가니까 그 천국에서의 삶을 생각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면서 사람 앞에 착하게 살라고 하는 말들뿐이다.
그러나 부활에 대해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는 본 장은 그렇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찢어 그 마음이라는 영의 옷 속에 숨겨진 자기의 성품이 변한 자기완성이 이루어진 신앙인의 모습에서 인간의 행동이 아닌 전혀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단적인 증거들이 21절과 29절, 31절과 연결된 9-11절, 또 51절과 연결된 14장 8-11절이 있고, 전체를 설명하면 확실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이 15장 전체이다.
21절의 원문은 사람에 의함 때문에 사망이 왔고, 사람에 의함 때문에 부활이 왔다고 한다.
이는 사람이 행한 어떤 행동 때문에 사망도 오고 또 부활도 오게 됐다는 뜻이다.
이는 육체가 시체가 될 때 부활이 있다는 개념을 틀렸다고 하는 말이 된다.
29절은 죽은 자들을 살리기 위해 먼저 세례를 받은 자들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영적 부활 상태에 대해 나의 나 된 것은이라는 표현을 한 것이다.
죽은 자가 완전히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면서 자기의 성품의 변화를 목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상태를 사람의 마음에 처음 넣은 영의 상태인 네페쉬(프쉬케, 물고기의 육체 같은 의미)였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 있는 죄 성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 보이면서 생명나무 열매먹기를 거부하고 마귀의 유혹을 따라 사람의 죄를 말하면서 자기의 죄를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참 신앙의 사람이라고 말로 가리는 무화과 잎을 치마삼아 자신은 의인이라고 강조하게 된다.
이 상태를 여호와 하나님은 영이 죽고 육(고깃덩어리)이 되었다고 했다.
그 육이 자기의 욕심대로 산다는 뜻으로 자기만을 위하는 베싸르(싸릌스, 짐승의 육체)와 사람과의 관계는 생각하는 육 중심의 사람인 쉐에르(쏘마, 새의 육체)가 된 것이다.
네페쉬가 자기의 성품을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기 위한 생명과일을 먹어 루아흐(프뉴마, 사람의 육체)로 변화 받아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진 영으로 자라났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가 생명의 양식으로 사역하신 것을 역사로 기록한 복음서에서는 죽은 자를 죽은 자가 아닌 자는 자로 표현했다.
잔다는 뜻이 생명의 씨를 얻기 위한 상태 즉, 자기의 마음의 성품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는 상태라고 하는 것이다.
이다.
육으로 사는 것은 죽은 것이고 자기성품을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받기위해 애쓰는 것이 잠자는 상태이다.
그리고 잠자는 상태에서 깨어나 루아흐의 상태로 변화 받는 것이 완전하게 사는 것 즉 부활이라고 문자는 설명하고 있으며 그 문자의 뜻을 본 장 39절에서 41절로 증거하고 있다.
51절에 있는 마지막에 불어지는 나팔에 대한 보조설명이 14장8-11절이다.
나팔이 있다. 전쟁이다. 그런데 그 전쟁의 나팔이 알아듣기 쉬운 말, 허공에 하는 말, 뜻 없는 소리와 비교함으로 해서 전쟁의 나팔은 사람의 소리였다.
부활의 상태를 말하는 신령한 몸이 프뉴마티였고, 이 신령이 참 제사의 조건이었다(요4:23-24).
그러므로 첫째 부활이며, 생활에서의 부활조건인 신령의 상태를 육체가 죽어 영원한 천국에서의 부활만 강조한다면 우리의 온전한 예배는 이 당에 사는 그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는 누구도 이해 할 수 없는 이상한 학설이 되는 것이다.
지금 시대가 또 다시 생각하고 고민해 봐야 하는 문제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 그 행적이다.
만일 부활이 천국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다면 예수그리스도도 천국에서 우리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하셨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에게 자기의 부활을 증명하시고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 받는 과정의 수인 4에 완전의 수인 10을 더하여 40일 동안 우리 사람을 가르치셨다.
하나가 더 있다. 입는다, 덧입는다는 말이다.
고린도후서 3장-5장의 말씀을 보면 하늘의 집으로 덧입는 것은 모세가 율법이라는 수건으로 가려 놓은 마음을 보고 말하는 상태로 세상의 원리를 마음중심교회에 적용시키는 십자가의 도를 찾아 실천하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부활의 개념은 육이 죽어 영으로 사는 상태를 마하는 것이며 첫째는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 사람들의 모든 논리는 자신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논리로 바꾸어 놓고 사람들과 다투지 않는 상태 마음중심의 상태이며 둘째 부활이 영원한 천국생활이다.
그러나 그 상태에도 차별이 있는데 먼저는 최상급의 신앙으로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접붙임을 받은 자요(23), 둘째는 하등의 믿음으로 사람의 모든 것이 죽는 날에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께 항복하고 천국으로 가는 자요(24), 꽁찌는 자기가 왕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다가 마귀들과 음부와 사망과 함께 영원한 불 못으로 들어가게 되는 불신자들이다(25-26).
50절에 여호와 하나님의 유업은 사람의 죽은 영을 루아흐의 상태로 살리는 일이다.
51절의 변화는 사람들이 싸우자고 대들거나 비난하거나 비판 비평 판단 정죄를 앞세우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인간방법을 따라 대응하지 않는 또 다른 영적 방법의 대응이 어느 순간에 나오게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인칭으로 기록된 ‘ 자’는 인칭이 아니라 사람의 어떤 상태를 말하는 형용사이다.
그러므로 51, 52절에 있는 죽은 자는 ‘사람에게 있는 어떤 죽은 것’으로 해석함이 옳은 것으로 죽은 자로 드러나던 모습이 살아난 영의 상태로 행동하게 된다는 뜻이다.
57절에 잇는 이김은 이기는 것이다.
이 이기는 것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열거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잘못을 지적한 후에 회개나 세움을 말하시고 이기라고 하신다.
그러나 6장에서는 그 이김의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을 받은 천사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의 부활도 마음이 성품을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고자 애쓰던 생활신학을 따르는 행동을 수고라고 하시고(58), 그 수고를 동반한 사람의 의지를 인정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이루어주시는 것이라고 하셨다.

본론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 마음의 성품을 자기중심의 욕심으로 채워 넣으시고 이 땅에 보내셨다.
그것이 마귀의 미혹에 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영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보다 힘센 마귀와 싸워 이기기 위해 항상 육의 생명을 담보로 한다.
육을 죽여야 마귀에게 이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르는 인간은 자기의 욕심을 찾으려고 기를 쓰고 싸운다.
그래서 마귀는 여호와 하나님께 참소를 한다. 우리를 비웃으며!!!
자신과의 싸움을 이기는 법은 고정관념의 변화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변화의 법은 인간의 지혜로는 전혀 알 수 없다.
교회는 그 법을 가르치는 곳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교회 출석을 의무화 시킨 것이다.
우리의 죽음은 자기를 괴롭게 하는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지기 싫은 자신의 욕심을 앞세워 사람을 보면서 대응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목사님이 최신에 나온 나의 간증집 “하늘집의 문으로”를 하룻밤에 다 읽고 참 여호와 하나님의 살기 위한 과정이 그렇게 힘이 드는 군요라고 고백했다.
나는 그 목사님의 고백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었다고 믿는다.
남과 다투어야 할 때 다투기 전에 먼저 생각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여호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은 후 나는 내 생각을 바꾸고, 남과 경쟁 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그릇된 신념을 바꿈을 받는데 몇 년이 걸렸다.
먼저 나의 행동이 나오니까!!!
그 후 나의 생각이나 믿음의 문제에서 타인과 나누는 말과 상관없이 타인과의 대화에서 타인을 말 할 때 그를 비하시키고 죄인 시 하고 원망하는 것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그렇게 지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틀렸다고 하면서 나의 말과 행동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죄를 지었다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삿대질이 있었음을 알게 하셨다.
그러고도 또 몇 년,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밑도 끝도 없이 내게 포악을 떨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욕심을 부추기고 있는 마귀의 미혹도 모르고 내게 다가왔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 마귀를 통해 나를 통과하게 하기위해 주는 시험을 주고계심을 보게 하셨다.
싸움이 아니다.
마귀를 통해 나를 검증하려고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순간 나는 가족 모두를 안심시키고 무조건 자리를 떴다.
그 사건으로 나는 내 속에서 타인을 향해 올라오는 나의 감정이 모두 없어졌음을 알았고 그 후로는 타인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나 어떤 악 감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은 그 때 나를 괴롭게 한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였고 나는 내 안에 악한 것을 조그마한 것이라도 가지고 있는 악인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에 있는 성품의 변화를 증명하시는 방법도 여호와 하나님의 몫이다.
우리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이 거룩함을 사람에게 보이라고 요구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성품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할 있다고 하셨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고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기의 마음에 있는 성품을 여호와 하나님께 변화시켜달라고 애쓰는 모습의 노력을 원하신다.
그러면 그 성품의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이 해결하신다.
사람은 타인의 말과 행동에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한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해 마음에서 분노하고 화내고 욕하고 싸우면서 그 마음의 상태를 머리로 정리하여 관계를 생각하는 사람을 속으로만 삭이지만 자신의 정직성을 말하는 사람은 바로 몸으로 그 마음의 상태를 드러낸다.
그것이 죽음의 상태이다.
지금 교회의 모습에서 부활한 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문제만 생기면 세상 법을 찾고 세상 법에 지면 또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들먹거리면서 상대방의 악을 드러내는 상태에서 말이다.

결론
이제 우리는 마음에서조차 세상일에 아무 상처 없이 항상 기쁘고 행복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에게 감사하며 자신의 성품문제나 관계의 법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부활의 신앙을 바라보자.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믿지만 가보지 않은 세상의 부활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저버려서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바알이라고, 우상이라고 부른다고 여호와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에게 자신의 뜻대로 살아달라고 빌어 사람마저 우상으로 만들었던 미련함을 이제 벗어버리고, 마귀의 나팔이 되어 우리를 공격하는 타인의 말에 좌지우지 하는 짓을 벗어버리기 위한 신앙의 길을 출발하자.
그리고 내가 온전히 변화를 받으면 나를 비난하고 비판하던 자들을 변화시켜주셔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가 부활해보자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유업을 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보자.
그러나 그 길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생활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의지를 가지는 것이다.
그 의지조차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인간의 영은 정말 나약한 존재다.
그 나약함을 알고 육의 생명을 마귀에게 던지는 일사각오의 심정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몸으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세상을 살아 부활의 삶을 이워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큰 복이 가득하여 삶 전체가 가정 전체가 함께하는 이웃 전체가 행복해지는 삶이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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