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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예수 다시 사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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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지도자들은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 시체를 무덤에 가둔채 인봉하고,로마의 병정들로 하여금 창과 칼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의 돌문을 굴려내고, 우리 주님은 죽은 자의 첫열매가 되셔서 부활하시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고로 베드로와 요한과,당시의 사도들은 "우리가 이일에 증인"이라고(행2:32)외치고 다녔던 것입니다. 고전 1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다시 사신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 것이요, 믿음도 헛되며, 주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헛되며, 우리가 이생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끝났다면 기독교는 헛된 종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로 연장 되었으므로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세게적으로 "미래학"이라는 학문이 많은 관심속에서 인기 있게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최근에 와서 "불트만"을 주축으로 "희망의 신학"은 부활을 중심으로하여 부활에서부터 출발하는 신학인 것입니다. 현재는 미래에서 와지는 것이며, 과거도 미래에서 와서 현재를 거쳐서 간 사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믿음,소망,사랑의 관계도 (고전13:13)소망이 있을때 믿음이 유지되며 소망이 있을 때 사랑의 실천이 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에서, 부활을 제자들의 신앙의 산물로 보는 비신화화를 현대 과학에의 항복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부활의 확신을 가질 때에만 죽음에 대한 이해도 바뀌고, 삶에 대한 의미도 새로와지는 것입니다. 사실은 힘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3일만에 다시 사신 예수께서는, 무덤에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를 향하여 이미 예언하신 대로(마26:32)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만나자"고 일러 보내십니다.
이 말씀 속에 담긴 듯을 오늘 부활주일 아침에 상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예루살렘의 공적 활동이 있기전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사적 체험이 절대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모든 시대 모든 개인에게로 동일한 것입니다.
1. 승리하신 주를 보라고! (요16:33)
부활이 없다고 부인하는 세속주의자 사두개인들,생명없는 메마른 교리만 붙들고 의식과 형식에 얽매인 바리새주의자들,잔인한 로마의 병정들, 이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득의한 줄 알고 의기양양 했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태양을 가리운다고 태양이 없어질 수는 없습니다. 마침내, 주님은 어두움을 헤치고 의와 생명의 태양으로 다시 사시고야 말았습니다.
비겁하게 숨어서 전율 속에 떨고있는 제자들에게는 죽어도 사는 생명의 주님 승리의 주님을 만나게 하셔야만 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은 죽음에 대한 이해가 바뀌고 삶의 의미도 새로와지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성화를 그린 레오날드 다빈치(Leonard Davinci)는 인생의 최대의 적은 용기의 상실이라고 했습니다만,오늘 현대인은 부활하신 주님의 승리와 생명의 주님을 만나지 못해서 삶에 대처할 의욕과 용기가 상실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이 자리는 부활의 주님을 상면하는 갈릴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재 계약을 하자고!(요21:15-23)
제자들은 처음 갈릴리 지방에서 부름받을 때 맺은 주님과의 계약을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파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께서는 이제 다시 갈릴리에서 새 언약으로 재 계약을 하자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셨어도 저들은 아내로써 서약후에도 파약을 했고 행음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죄를 사하고 기억지 않으리라"고 재 계약을 촉구하셨습니다(렘31:31-34).
부활하신 주님은 오직 용서와 사랑 속에서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 재 계약을 하자고 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가 갈릴리의 새 언약터가 되십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갈릴리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다짐하시며 세 번씩이나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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