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은 희망입니다
본문
유명한 곤충학자 파브르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좀 짖궂은 학생이 파브르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과 같은 대과학자께서 어째서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그러자 파브르 교수는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은 않네””
그러자 학생이 깜짝 놀라면서 물었습니다.
“그러시면서도 어떻게 선생님은 매주일 교회에 나가십니까””
그러나 파브르 교수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 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지.
그러나 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만이 아니라네.
여호와 하나님은 아주 작은 곤충을 통하여 자신을 보여주시고, 손으로도 만지게도 해주시며, 듣게도 하시지.
그러니 단지 믿기만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관계를 가지고 늘 교제한다는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영상2 (마13:16)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창세기 보다 시제가 앞서 있는 요한복음 서두에 보면,
영상3 (요1:2,3)그가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모든 창조물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이 배어 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은 직접 만드신 인간과 관계를 설정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를 스스로 져 버렸습니다.
어떤 두려움의 신뢰는 가지고 있었을지 몰라도, 교제는 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숨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제는 믿음 이상입니다.
믿음은 멀리서도 합니다.
그러나 교제는 가까이서만 합니다.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믿고 떨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서 교제를 같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교제할 때만이 끈끈한 믿음이 증명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함께 있어야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하기때문에, 떠나 보낸다고 하는 말은 언어의 유희일 뿐입니다.
사랑하면, 곁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같은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도 함께 있어야, 사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어느것과도 관계하고, 교제하지 않으면, 그것은 현상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않고 어쩌면 믿음이 있는가도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책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든지, 기도가 없다든지, 교회의 말씀프로그램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든지, 주일성수에 대한 관념조차 없다면 그것은 주님과의 교제는 이미 끊어진 것이며, 믿음에서는 더욱 더 멀리 있는 것입니다.
교제가 믿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믿어야할 대상을 넘어서 교제할 대상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수없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제자들은 뿔뿔히 흩어져서, 자기의 옛직업을 찾아서 떠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나타났다가는, 또 사라지고, 또 나타나시고 하시는 모습에서 identity, 동질감이 사라진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이제 함께 가졌던 그들의 관계가 단절이 되었다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같은 삶의 공동체로서의 교제가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누가복음 24장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승천까지를 집약해서 한 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상만4 (눅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눅 24: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눅 24: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여자들이 먼저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여자들이 조금더 정적인것 같습니다.
너무 슬퍼서 시체에 향료라도 발라 드려야지 생각한 것입니다.
영상만5 (눅 24: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눅 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을 만나신 주님은, 어두워 졌던 그들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발길을 돌이켜서 예루살렘으로 가보니, 이미 예수님의 부활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사이에 주님이 그들중에 유령같이 나타나셨습니다.
영상6 (눅 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눅 24: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그 시기가 Transition Period 였기때문에 그들은 의심했던것입니다
삶의 환경이 전이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육신과 육신이 만났던, 환경에서 육신과 영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상황인식을 못했다는 말입니다.
교제는 없고, 현현만 있으니까, 그들은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오해가 아니라, 관계와 교제의 오해로, 우리는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영상7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교제라는 것이 영적으로도 가능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이제 육체로 계실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육체로 계시지 않는 것이, 더욱더 효과적인 사역을 이루신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영상8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후에야, 비로서 육체와 육체가 서로 마주 보고, 교제를 가져야 하는 관계가 아님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령님과 함께, 세상으로 뛰쳐 나간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행동한 그들에게 성령은 다이나 마이트가 터지는 것같은 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ㅣ.
안보이지만, 성령이 계시다고 믿고, 그 분과 함께 교제를 즐기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저도 이상하리만치, 성령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아무런, 현상이 없어도, 성령의 인도를 구하고, 어떤 일을 하면, 훨씬더 일이 잘 풀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바람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영상만9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초대교회는 부활하신 보이신, 예수님과 바톤을 교환하신 보이지 않는 성령의 사역이 교차되면서, 더 큰 “유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무소부재 하신 성령의 역사로,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 성령님이 오늘 이 자리에도 계신 것을 믿습니까
그 성령님이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는 것을 믿습니까
그것이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신학자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희망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희망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한 마을에 꽃을 파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가난했습니다.
복장은 허름했고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 항상 행복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을 `행복한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어느날 한 사람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지요”
노인은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내게 행복의 비결이 하나 있지요”
노인의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 나이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고통을 당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의 새벽을 맞지 않았습니까.
저는 고난이 다가 올 때마다 마음 속으로 `사흘만 기다리자’고 다짐합니다.
그때부터 제 삶이 한결 행복해졌어요”
노인이 누리는 행복의 근원은 부활의 소망이었습니다.
봄이 오면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새순이 돋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고난이 닥칠때 “사흘만 기다리자”라고 속삭이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주신, 교제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연관을 가지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잡지에, 전쟁에 나갔던 약혼자를 잃은 여인이 전사 통지서를 쥐고 비오는 날 저녁 동리 강에 있는 큰 다리를 실의 속에 거닐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끝내 약혼자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투신 자살을 결심하고 막 다리에서 뛰어 내리려는 순간 한 중년 남자가 나타나 팔을 급히 잡더니 ”여기는 추우니 우리 다리 지키는 조그만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합시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난로가 있는 그 사무실로 가 자초 지종을 이야기하며 통곡하는데 그 사람이 아무 말하지 않고 두 손을 잡더니 ”여호와 하나님, 이 여인에게 실의를 딛고 일어설 평화와 소망과 용기를 주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이 여인은 말할 수 없는 평화와 삶의 소망과 의욕을 느꼈습니다.
조금 후 이 사람이 인자하게 웃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매님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깨닫고 새 출발하십시오”라고 말했읍니다.
그 후, 이 여인은 집에 돌아왔는데 곰곰이 생각하니 그 다리 지기가 너무 고마워 다시 인사하러 그 곳에 갔더니 사무실도 그 사람도 보이지 않았읍니다.
이 여인은 비로소 그 다리지기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새 출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속의 평화 - 이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이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성령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이 평화를 얻고 모든 정신적 곤고를 극복하며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읍니다.
성령님은 언제 어디서, 도움의 손길을 뻗으실지 모릅니다.
그래서, 영상한번더9-1 성령을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 우리를 도와 주실 지 모릅니다.
영상10 (마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말은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소자를 도웁며, 보고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사역이 바로 이렇습니다.
천사들이 메신저로서, 성령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을 돕는 것입니다.
미식축구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선수는 쿼터 백입니다.
쿼터 백은 볼을 다른 선수들에게 잘 배급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이 터치 다운을 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쿼터 백이 가장 영웅시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쿼터 백이 공을 가지고 어물 어물하다가는 공을 빼앗기게 되므로 여러 사람이 쿼터 백을 보호합니다.
혼자서는 터치 다운을 성공시키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주위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 계실 때 인생의 목표에 터치 다운을 시킬 수 있게 됩니다.
그 분은 소외감과 고독 속에서 창조적이고 선한 일을 하며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길을 열어 주시고,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셔서 우리로 승리를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의 보호자가 계십니다.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분은 다름아닌 임마누엘 성령이십니다.
동네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지킬”이라는 의학박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보호자이며, 자비의 아버지로 불리워지는 사람이었읍니다.
온 동네 사람들은 그를 인간 이상의 그 어떤 존재로 여기며 존경과 칭송을 아끼지 않았읍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는 고민이 하나 있었읍니다.
밤만 되면 ”하이드”라는 흉악범이 나타나 온 동네를 수라장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읍니다.
그 흉악범은 사람을 죽이고, 여자를 능욕하고, 약탈을 일삼는 등 온 동네를 공포 속에 몰아 넣었읍니다.
온 동네 사람들은 골머리를 앓던 끝에 그 하이드라는 흉악범을 잡아 동네의 화근을 없애기로 작정하였읍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한밤중에 보안관 사무실에서 종소리가 울려 펴졌읍니다.
그러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들었읍니다.
몰려든 사람들 앞에 하이드란 흉악범이 체포되어 서 있었읍니다.
그런데 그 하이드의 가면을 벗기는 순간, 사람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바로 그들의 존경해 마지 않던 지킬 박사였던 것입니다.
영국의 단편 작가 ”스티븐슨”이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해 있는 어찌할 수 없는 양면성을 이 소설을 통하여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면성이, 아무런 여과없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절망입니다.
사도바울도 이러한 현상을 말하면서, 얼마나 절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영상11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바로 그 다음구절에서, 이러한 문제를 푸는 간단한 열쇠를 사도바울은 곧바로 제시합니다.
그 열쇠는 그리스도라고 말을 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구원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상12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인간의 양면성입니다.
우리 자신으로는 ,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권력의 압력때문에 할 수 없고, 돈의 유혹때문에 할 수 없고, 마음의 욕심때문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의 목숨을 노리는 두려움때문에, 불과 하루전에,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해 놓고도, 예수님의 면전에서 그를 배반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 입니다.
그것이 죄성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흙탕물속에서 아무리, 몸을 씻으려고 해도, 흙탕물이 뭍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깨끗한 물을 부어서, 정결케 하실 분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 주님이 승천하시고 보내신,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영상13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 분과의 관계를 가질때만이, 나를 지킬 수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나를 지키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차단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로부터 나를 지킨다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나는 나에 대하여 너무 관대하므로, 흉악범도 자신에게는 100% 관대 합니다.
자신에 대한 판결은 대개 무죄 석방입니다.
오직 성령과의 관계가 나를 외부적인 것, 또한 아주 중요한 나로부터 온전히 나의 본래 모습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것을 지킬 때만이 진정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 성령님만이 그것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이제 믿지만 말고, 교제하고, 관계를 가집시다.
그 분과 밀접하게 함께 계시므로 축복이 떠나지 않은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하루는 좀 짖궂은 학생이 파브르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과 같은 대과학자께서 어째서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그러자 파브르 교수는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은 않네””
그러자 학생이 깜짝 놀라면서 물었습니다.
“그러시면서도 어떻게 선생님은 매주일 교회에 나가십니까””
그러나 파브르 교수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 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지.
그러나 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만이 아니라네.
여호와 하나님은 아주 작은 곤충을 통하여 자신을 보여주시고, 손으로도 만지게도 해주시며, 듣게도 하시지.
그러니 단지 믿기만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관계를 가지고 늘 교제한다는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영상2 (마13:16)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창세기 보다 시제가 앞서 있는 요한복음 서두에 보면,
영상3 (요1:2,3)그가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모든 창조물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이 배어 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은 직접 만드신 인간과 관계를 설정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를 스스로 져 버렸습니다.
어떤 두려움의 신뢰는 가지고 있었을지 몰라도, 교제는 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숨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제는 믿음 이상입니다.
믿음은 멀리서도 합니다.
그러나 교제는 가까이서만 합니다.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믿고 떨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서 교제를 같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교제할 때만이 끈끈한 믿음이 증명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함께 있어야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하기때문에, 떠나 보낸다고 하는 말은 언어의 유희일 뿐입니다.
사랑하면, 곁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같은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도 함께 있어야, 사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어느것과도 관계하고, 교제하지 않으면, 그것은 현상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않고 어쩌면 믿음이 있는가도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책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든지, 기도가 없다든지, 교회의 말씀프로그램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든지, 주일성수에 대한 관념조차 없다면 그것은 주님과의 교제는 이미 끊어진 것이며, 믿음에서는 더욱 더 멀리 있는 것입니다.
교제가 믿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믿어야할 대상을 넘어서 교제할 대상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수없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제자들은 뿔뿔히 흩어져서, 자기의 옛직업을 찾아서 떠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나타났다가는, 또 사라지고, 또 나타나시고 하시는 모습에서 identity, 동질감이 사라진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이제 함께 가졌던 그들의 관계가 단절이 되었다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같은 삶의 공동체로서의 교제가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누가복음 24장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승천까지를 집약해서 한 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상만4 (눅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눅 24: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눅 24: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여자들이 먼저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여자들이 조금더 정적인것 같습니다.
너무 슬퍼서 시체에 향료라도 발라 드려야지 생각한 것입니다.
영상만5 (눅 24: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눅 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을 만나신 주님은, 어두워 졌던 그들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발길을 돌이켜서 예루살렘으로 가보니, 이미 예수님의 부활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사이에 주님이 그들중에 유령같이 나타나셨습니다.
영상6 (눅 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눅 24: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그 시기가 Transition Period 였기때문에 그들은 의심했던것입니다
삶의 환경이 전이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육신과 육신이 만났던, 환경에서 육신과 영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상황인식을 못했다는 말입니다.
교제는 없고, 현현만 있으니까, 그들은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오해가 아니라, 관계와 교제의 오해로, 우리는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영상7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교제라는 것이 영적으로도 가능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이제 육체로 계실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육체로 계시지 않는 것이, 더욱더 효과적인 사역을 이루신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영상8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후에야, 비로서 육체와 육체가 서로 마주 보고, 교제를 가져야 하는 관계가 아님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령님과 함께, 세상으로 뛰쳐 나간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행동한 그들에게 성령은 다이나 마이트가 터지는 것같은 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ㅣ.
안보이지만, 성령이 계시다고 믿고, 그 분과 함께 교제를 즐기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저도 이상하리만치, 성령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아무런, 현상이 없어도, 성령의 인도를 구하고, 어떤 일을 하면, 훨씬더 일이 잘 풀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바람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영상만9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초대교회는 부활하신 보이신, 예수님과 바톤을 교환하신 보이지 않는 성령의 사역이 교차되면서, 더 큰 “유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무소부재 하신 성령의 역사로,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 성령님이 오늘 이 자리에도 계신 것을 믿습니까
그 성령님이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는 것을 믿습니까
그것이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신학자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희망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희망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한 마을에 꽃을 파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가난했습니다.
복장은 허름했고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 항상 행복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을 `행복한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어느날 한 사람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지요”
노인은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내게 행복의 비결이 하나 있지요”
노인의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 나이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고통을 당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의 새벽을 맞지 않았습니까.
저는 고난이 다가 올 때마다 마음 속으로 `사흘만 기다리자’고 다짐합니다.
그때부터 제 삶이 한결 행복해졌어요”
노인이 누리는 행복의 근원은 부활의 소망이었습니다.
봄이 오면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새순이 돋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고난이 닥칠때 “사흘만 기다리자”라고 속삭이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주신, 교제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연관을 가지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잡지에, 전쟁에 나갔던 약혼자를 잃은 여인이 전사 통지서를 쥐고 비오는 날 저녁 동리 강에 있는 큰 다리를 실의 속에 거닐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끝내 약혼자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투신 자살을 결심하고 막 다리에서 뛰어 내리려는 순간 한 중년 남자가 나타나 팔을 급히 잡더니 ”여기는 추우니 우리 다리 지키는 조그만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합시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난로가 있는 그 사무실로 가 자초 지종을 이야기하며 통곡하는데 그 사람이 아무 말하지 않고 두 손을 잡더니 ”여호와 하나님, 이 여인에게 실의를 딛고 일어설 평화와 소망과 용기를 주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이 여인은 말할 수 없는 평화와 삶의 소망과 의욕을 느꼈습니다.
조금 후 이 사람이 인자하게 웃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매님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깨닫고 새 출발하십시오”라고 말했읍니다.
그 후, 이 여인은 집에 돌아왔는데 곰곰이 생각하니 그 다리 지기가 너무 고마워 다시 인사하러 그 곳에 갔더니 사무실도 그 사람도 보이지 않았읍니다.
이 여인은 비로소 그 다리지기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새 출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속의 평화 - 이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이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성령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이 평화를 얻고 모든 정신적 곤고를 극복하며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읍니다.
성령님은 언제 어디서, 도움의 손길을 뻗으실지 모릅니다.
그래서, 영상한번더9-1 성령을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 우리를 도와 주실 지 모릅니다.
영상10 (마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말은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소자를 도웁며, 보고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사역이 바로 이렇습니다.
천사들이 메신저로서, 성령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을 돕는 것입니다.
미식축구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선수는 쿼터 백입니다.
쿼터 백은 볼을 다른 선수들에게 잘 배급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이 터치 다운을 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쿼터 백이 가장 영웅시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쿼터 백이 공을 가지고 어물 어물하다가는 공을 빼앗기게 되므로 여러 사람이 쿼터 백을 보호합니다.
혼자서는 터치 다운을 성공시키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주위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 계실 때 인생의 목표에 터치 다운을 시킬 수 있게 됩니다.
그 분은 소외감과 고독 속에서 창조적이고 선한 일을 하며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길을 열어 주시고,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셔서 우리로 승리를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의 보호자가 계십니다.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분은 다름아닌 임마누엘 성령이십니다.
동네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지킬”이라는 의학박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보호자이며, 자비의 아버지로 불리워지는 사람이었읍니다.
온 동네 사람들은 그를 인간 이상의 그 어떤 존재로 여기며 존경과 칭송을 아끼지 않았읍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는 고민이 하나 있었읍니다.
밤만 되면 ”하이드”라는 흉악범이 나타나 온 동네를 수라장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읍니다.
그 흉악범은 사람을 죽이고, 여자를 능욕하고, 약탈을 일삼는 등 온 동네를 공포 속에 몰아 넣었읍니다.
온 동네 사람들은 골머리를 앓던 끝에 그 하이드라는 흉악범을 잡아 동네의 화근을 없애기로 작정하였읍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한밤중에 보안관 사무실에서 종소리가 울려 펴졌읍니다.
그러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들었읍니다.
몰려든 사람들 앞에 하이드란 흉악범이 체포되어 서 있었읍니다.
그런데 그 하이드의 가면을 벗기는 순간, 사람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바로 그들의 존경해 마지 않던 지킬 박사였던 것입니다.
영국의 단편 작가 ”스티븐슨”이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해 있는 어찌할 수 없는 양면성을 이 소설을 통하여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면성이, 아무런 여과없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절망입니다.
사도바울도 이러한 현상을 말하면서, 얼마나 절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영상11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바로 그 다음구절에서, 이러한 문제를 푸는 간단한 열쇠를 사도바울은 곧바로 제시합니다.
그 열쇠는 그리스도라고 말을 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구원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상12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인간의 양면성입니다.
우리 자신으로는 ,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권력의 압력때문에 할 수 없고, 돈의 유혹때문에 할 수 없고, 마음의 욕심때문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의 목숨을 노리는 두려움때문에, 불과 하루전에,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해 놓고도, 예수님의 면전에서 그를 배반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 입니다.
그것이 죄성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흙탕물속에서 아무리, 몸을 씻으려고 해도, 흙탕물이 뭍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깨끗한 물을 부어서, 정결케 하실 분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 주님이 승천하시고 보내신,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영상13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 분과의 관계를 가질때만이, 나를 지킬 수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나를 지키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차단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로부터 나를 지킨다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나는 나에 대하여 너무 관대하므로, 흉악범도 자신에게는 100% 관대 합니다.
자신에 대한 판결은 대개 무죄 석방입니다.
오직 성령과의 관계가 나를 외부적인 것, 또한 아주 중요한 나로부터 온전히 나의 본래 모습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것을 지킬 때만이 진정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 성령님만이 그것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이제 믿지만 말고, 교제하고, 관계를 가집시다.
그 분과 밀접하게 함께 계시므로 축복이 떠나지 않은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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