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이 있기에 우린 한 가족입니다
본문
로마의 바티칸 궁에는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피에타 (Pieta)라는 조각품이 있다. 그 작품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시체를 성모 마리아가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죽기 이틀 전까지 조각했다는 걸작품이다. 이를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는데,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그 앞에 꿇어 앉아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만약 그 작품의 모습처럼 예수님게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일생이 끝났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슬픔의 종교요 무덤으로 끝나야만 하는 종교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흘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므로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 구원의 종교임을 증명하셨다.
그러므로 부활의 진리는 기독교의 중심되는 내용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시며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다. 한때 영국의 무신론자였던 리틀스톤(Girbert West)은 자기들이 무신론을 주장하는데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의 변화였다.
그들은 이 두 가지 사실을 변증하기 위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얼마 동안 연구한 뒤에 그는 오히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내가 죄인임을 잊고 살았음을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기독교의 두 기둥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예수님은 못박혀 죽으셨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났다면 우리의 죄가 용서는 받을지 몰라도,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믿음이 되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죽음에 대해 침묵하는 종교가 아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영원한 부활이 있음을 안다.
어떻게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이제 그를 믿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은 부활의 둘째 열매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임을 믿는가 그래서 우리는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몸의 부활”을 고백한다. “영원히 사는 것”을 고백한다. 우리 같이 고백해 보자.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입니다. ”
뉴욕에 살던 한 코미디언이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해부실습용 대상으로 기증합니다. 특별히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주십시오. 이것이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부모님의 평생 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더라구요. " 이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은 역시 고통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내 시체가 하버드대학에 들어가든, 냉동인간이 되든, 화장되든 그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나는 죽으면 부활할 것을 믿으며 영원히 살 수 있느냐이다. 혹시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창피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정직하게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영접하면 된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부활의 소망을 가는 분들은 내가 부활이 없는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중에 하나는 우리에게 가족의 개념을 확장시켜준다. 부활은 나 혼자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한 가족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家族, family이란 무엇인가 사전에서는 부부를 중핵으로 그 근친인 혈연자가 주거를 같이하는 생활공동체라고 정의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한 가정, 한 지붕’ 밑에서 날마다 얼굴을 대면하고 사는 사람이 가족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가족이 형성된다. 나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옆에 있는 사람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이다. 같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우린 형제, 자매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믿음의 가족들이다.
먼저는 우리 교회가 한 가족이 되고, 더 넓게는 옆의 교회 성도들, 이 동탄 땅에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한 가족이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연합하여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주 안의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데 이는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공동체요, 한 가족임을 믿는다는 말이 된다. 왜 우리는 천국에 가면 한 가족이 되어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하나의 공동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빨리 화해하고, 용서하고, 이해해주는 것이다. 우린 또 만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관계 이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내 교회 성도들이다. 이 세상 어디를 찾아봐도 매 주일마다 꼬박고박 만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만날 뿐 아니라 예배 후 한솥밥을 나눈다. 그러니 우리는 진짜 가족인 것이다. 우리가 성찬식을 통해서도 한 가족됨을 고백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과 한 피를 함께 나눔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성찬식에는 세례를 받은 사람만 참여한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동탄성지교회의 가족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주지 않는다. 치사하게 지들끼리만 먹는다,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는 게 사랑인데 째째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세례를 받으면 된다. 성찬식을 통해 세례받기를 사모하길 바란다. 세례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Royal Family가 되길 바란다.
오늘 말씀은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말해준다. 31절을 함께 읽어보자.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31)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는 곳에 찾아왔는데 그들은 밖에 있는 사람(outsider)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찾고 있지만 대답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21절에서도 본 것처럼 예수님을 향해 미쳤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34절을 보면 예수님 곁에 둘러 앉은 사람들, 안에 있는 사람(insider)들이 있었다.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34)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뭐라 하시는가 바로 여러분이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이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 곁에는 밖에 있는 사람(outsider)과 안에 있는 사람(insider)이 있는데 진정한 가족은 누구인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것은 교회를 다니느냐, 교회안에 있느냐의 문제와는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사느냐의 문제이다. 교회는 다니면서도 예수 안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예수 안에 있는 사람(insider)이 되는 비결을 쉽게 가르쳐준다.
이것은 예수를 믿은 사람이든, 믿지 않았던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예수안에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가족이 된다. 우리가 진정한 가족이 되려면,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가족이 되려면 먼저는 죽어야 한다.
부활하려면 반드시 먼저 죽어야 한다. 그런데 혼자 죽어서는 백 번을 죽어도 소용이 없다.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존재가 되지 못한다.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자신을 위해 죽지 않고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지만 우리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죽어야 한다.
죽는 것이 무엇일까 죽으라고 하면 사람들은 ‘니가 죽어야 한다, 다 너 때문이야’ 하면서 상대방을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여러분. 손가락질을 하면 한 개는 상대방을 가리키지만, 나머지 한 개는 땅을 향해, 나머지 3개는 나를 향해 가리키는 것을 볼 수 있다. 뭘 말하는가 늘 죽어야 할 사람은 나다. “내가 죽으면 살아납니다. ” “내 탓입니다. ”
죽는 게 무엇일까 실제로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26일에 발생한 천안함 침몰과 더불어 실종자 46명의 생사를 알지 못해 가족들과 온 국민이 안타까워 하고 있다. 죽는 것은 끝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지 모른다. 그 상처는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는 엄청난 아픔이다. 김덕규씨가 해군 홈페이지에 올린 시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772함 수병은 귀환하라/ 772함 나와라/ 온 국민이 애타게 기다린다… '호명된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전선의 초계는 이제 전우들에게 맡기고/ 오로지 살아서 귀환하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대한민국이 부여한 나머지 마지막 명령이다'는 절규에 소름이 느껴질 정도다.
살고 싶은 사람들도 이렇게 많은데, 살아야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도 많은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을 보며 세상은 참 요지경 같기도 하다. 한국인의 자살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라고 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08년 기준 자살사망자는 1만 2,858명으로 전년보다 5. 6%(684명)이 증가했다. 이 수치는 쉽게 말해 동탄에서 1년에 26명(1달에 2명)이 자살로 목숨을 끊는다는 말이 된다. 하루 평균 자살자 수로 따져 35. 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결과다.
죽으면 끝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개인에게는 고통이 끝나겠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해 어떤 길을 걸어가셨는가 군병들에게 잡히는 순간부터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예수님은 조금도 저항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도 않았다.
양털을 깍는 주인 앞에 잠잠한 어린양처럼 참으셨다. 뺨을 치고 침을 뱉어도 아무 대꾸하지 않으셨다. 못박는 순간까지도 그 고통을 참으시며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지도 않으셨다. 이렇게 철저히 죽을 수 있다면, 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이렇게 죽는다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것을 예수님은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힘이 없어서 생명을 빼앗긴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생명을 버린 죽음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억지로, 할 수 없이 순응하는 것과는 다르다. 내가 죽어야 부활이 있음을 믿기에 스스로 자원하여 나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다. 살리기 위하여 내가 알아서 죽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고통스럽고, 내 맘에 내키지 않고,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관계 중에 하나가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일 것이다. 며느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너는 싫지만 나를 봐서 이렇게 말해보렴. 이렇게 섬겨보렴. 나도 니 시어머니를 사랑하니까 니가 대꾸하지 말고 싫어도 ‘예’하고 대답해 보지 않겠니” 그랬더니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조금씩 달라졌다고 한다. 죽는다는 것은 나는 싫어도 주님 때문에 참고, 주님 때문에 순종하고, 주님 때문에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 주에 미디어 금식을 하자고 했는데 여러분은 어떤 것을 시도해 보았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사순절 기간 동안 아침 금식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려고 애썼다. 먹고 싶은 것, 마시고 싶은 것, 피우고 싶은 것을 주님을 위해 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 내가 죽고 새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또 실천한 일 중에 하나는 한 주간 동안 TV를 온 가족이 전혀 보지 않았다. 아이들도 그렇게 좋아하는 게임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 때문에 애쓰고, 수고하고, 절제하고, 참고, 견디고, 사랑하며, 희생하는 모든 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다. 그럴 때 말랐던 땅에서, 가지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다. 예수와 함게 죽으면 반드시 부활은 일어난다.
지난 주에 동탄지역의 목사님들과 중창연습을 하고 식사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세 명의 가정주부가 술 한잔 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런 말이었다. “남자가 바람 안피우고, 여자 안 때리고, 돈 잘 벌어다 주면 괜챦은 것 아니냐”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씁쓸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가정들이 행복은 고사하고 피곤하고 힘들지 않으면 괜챦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는 게 즐거운 것은 사치이고, 그냥 별일없이 하루 하루 살았으면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바램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하면 죽어가는 가정이 살아날 수 있을까 누군가 죽어야 한다. 누군가 손해를 보아야 한다. 아니, 상대방이 죽고 변하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고 달라지고 죽으면 되는 것이다. 소련지방에 페리칸이라는 새가 있다. 사다새라고도 하는 이 새는 턱에 턱주머니가 있어서 물고기를 잡아 담아두었다가 그것을 새끼들에게 먹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지방에는 추운 때가 많기 때문에 물이 꽁꽁 얼어붙으면 이 새들이 먹이가 없어서 턱주머니에 담아 두었던 고기를 다 먹인 다음에는 자기의 가슴팍을 뜯어서 제 살을 새끼들에게 먹이고 나중에는 온 몸을 자기 새끼들에게 뜯어 먹히우고 죽어 버린다고 한다. 미물들도 생존의 문제에서 자신이 살 궁리를 먼저 하지 않는다. 내가 죽음으로 살리는 길을 선택한다.
연어는 아주 신기한 물고기이다. 강에서 태어나 바다로 가서 살다가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다시 강으로 돌아온다. 거센 물살과 큰 바위가 앞을 가로막지만 연어는 멈추지 않고 꿋꿋이 나아간다. 높은 폭포를 뚫고 올라갈 때 북극곰과 수달이 자신들을 잡아먹으려 해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전진한다. 연어들이 강 상류에 도착하면 깨끗한 물이 천천히 흐르는 곳에 알을 낳는다.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오느라 힘이 빠지고 바위에 부딪혀 상처도 많이 난 연어는 너무 지쳐서 곧 죽어 버린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알을 낳고 죽은 연어들은 알에서 나온 새끼 연어들의 먹이인 플랑크톤의 먹이가 되어준다. 결국 새끼들은 어미 연어를 만나지도 못한 채 부화되었지만 죽어서까지 희생하는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을 느꼈기에 연어들은 다시 본능적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
부활신앙은 무엇인가 내가 죽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페리칸처럼, 연어처럼 죽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속한 가정과 자녀들과 내 주변의 사람들을 부활의 능력으로 살려주신다. 부활절은 예수님만 살아나신 날이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더불어 살아나는 축복의 날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신앙은 책임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책임지기 위해 죽으셨다. 가족이 무엇인가 끝까지 책임지고 돌보는 공동체 아닌가 교회도 마찬가지다. 수십년 서로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다. 그래서 결혼한 신혼부부보다 오히려 더 티격태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함께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기 위해 애써야 한다. 35절을 함께 읽어보자.
누구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우리는 예수님처럼 늘 기도해야 한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소서” 그래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고 행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만 영원히 남기 때문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다. 여호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방향을 갈 때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은 건강하고 평안함을 누리며 든든하게 성장한다. (잠16:7)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내 가족도 잘 돌봐야 한다. 예수님도 가족을 귀히 여기셨다.
Family는 father and mother i love you라고 한다. 교회와 가정중에 어디가 우선일까
가정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먼저 세우신 기관이 가정이고 그 다음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사람을 조심할 것을 권면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마찬가지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우리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임을 알고 끝까지 돌봐주고 책임져야 한다.
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게 하셨는가 한국에 5만여개의 교회, 동탄에만 70~80여개의 교회가 있는데 동탄성지교회에서... 서로를 돌봐주고 세워주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우리를 묶어주신 것이다. 좋을 때도 있지만 힘들 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린 한가족이다. 부활신앙으로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 부활의 주인공이 되길 소원한다. 내가 죽음으로 내 옆의 사람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길 원한다. 우리를 만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믿음의 공동체 되길 축복한다.
그러나 만약 그 작품의 모습처럼 예수님게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일생이 끝났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슬픔의 종교요 무덤으로 끝나야만 하는 종교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흘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므로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 구원의 종교임을 증명하셨다.
그러므로 부활의 진리는 기독교의 중심되는 내용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시며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다. 한때 영국의 무신론자였던 리틀스톤(Girbert West)은 자기들이 무신론을 주장하는데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의 변화였다.
그들은 이 두 가지 사실을 변증하기 위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얼마 동안 연구한 뒤에 그는 오히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내가 죄인임을 잊고 살았음을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기독교의 두 기둥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예수님은 못박혀 죽으셨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났다면 우리의 죄가 용서는 받을지 몰라도,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믿음이 되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죽음에 대해 침묵하는 종교가 아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영원한 부활이 있음을 안다.
어떻게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이제 그를 믿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은 부활의 둘째 열매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임을 믿는가 그래서 우리는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몸의 부활”을 고백한다. “영원히 사는 것”을 고백한다. 우리 같이 고백해 보자.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입니다. ”
뉴욕에 살던 한 코미디언이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해부실습용 대상으로 기증합니다. 특별히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주십시오. 이것이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부모님의 평생 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더라구요. " 이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은 역시 고통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내 시체가 하버드대학에 들어가든, 냉동인간이 되든, 화장되든 그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나는 죽으면 부활할 것을 믿으며 영원히 살 수 있느냐이다. 혹시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창피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정직하게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영접하면 된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부활의 소망을 가는 분들은 내가 부활이 없는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중에 하나는 우리에게 가족의 개념을 확장시켜준다. 부활은 나 혼자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한 가족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家族, family이란 무엇인가 사전에서는 부부를 중핵으로 그 근친인 혈연자가 주거를 같이하는 생활공동체라고 정의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한 가정, 한 지붕’ 밑에서 날마다 얼굴을 대면하고 사는 사람이 가족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가족이 형성된다. 나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옆에 있는 사람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이다. 같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우린 형제, 자매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믿음의 가족들이다.
먼저는 우리 교회가 한 가족이 되고, 더 넓게는 옆의 교회 성도들, 이 동탄 땅에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한 가족이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연합하여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주 안의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데 이는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공동체요, 한 가족임을 믿는다는 말이 된다. 왜 우리는 천국에 가면 한 가족이 되어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하나의 공동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빨리 화해하고, 용서하고, 이해해주는 것이다. 우린 또 만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관계 이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내 교회 성도들이다. 이 세상 어디를 찾아봐도 매 주일마다 꼬박고박 만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만날 뿐 아니라 예배 후 한솥밥을 나눈다. 그러니 우리는 진짜 가족인 것이다. 우리가 성찬식을 통해서도 한 가족됨을 고백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과 한 피를 함께 나눔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성찬식에는 세례를 받은 사람만 참여한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동탄성지교회의 가족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주지 않는다. 치사하게 지들끼리만 먹는다,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는 게 사랑인데 째째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세례를 받으면 된다. 성찬식을 통해 세례받기를 사모하길 바란다. 세례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Royal Family가 되길 바란다.
오늘 말씀은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말해준다. 31절을 함께 읽어보자.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31)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는 곳에 찾아왔는데 그들은 밖에 있는 사람(outsider)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찾고 있지만 대답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21절에서도 본 것처럼 예수님을 향해 미쳤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34절을 보면 예수님 곁에 둘러 앉은 사람들, 안에 있는 사람(insider)들이 있었다.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34)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뭐라 하시는가 바로 여러분이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이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 곁에는 밖에 있는 사람(outsider)과 안에 있는 사람(insider)이 있는데 진정한 가족은 누구인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것은 교회를 다니느냐, 교회안에 있느냐의 문제와는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사느냐의 문제이다. 교회는 다니면서도 예수 안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예수 안에 있는 사람(insider)이 되는 비결을 쉽게 가르쳐준다.
이것은 예수를 믿은 사람이든, 믿지 않았던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예수안에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가족이 된다. 우리가 진정한 가족이 되려면,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가족이 되려면 먼저는 죽어야 한다.
부활하려면 반드시 먼저 죽어야 한다. 그런데 혼자 죽어서는 백 번을 죽어도 소용이 없다.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존재가 되지 못한다.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자신을 위해 죽지 않고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지만 우리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죽어야 한다.
죽는 것이 무엇일까 죽으라고 하면 사람들은 ‘니가 죽어야 한다, 다 너 때문이야’ 하면서 상대방을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여러분. 손가락질을 하면 한 개는 상대방을 가리키지만, 나머지 한 개는 땅을 향해, 나머지 3개는 나를 향해 가리키는 것을 볼 수 있다. 뭘 말하는가 늘 죽어야 할 사람은 나다. “내가 죽으면 살아납니다. ” “내 탓입니다. ”
죽는 게 무엇일까 실제로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26일에 발생한 천안함 침몰과 더불어 실종자 46명의 생사를 알지 못해 가족들과 온 국민이 안타까워 하고 있다. 죽는 것은 끝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지 모른다. 그 상처는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는 엄청난 아픔이다. 김덕규씨가 해군 홈페이지에 올린 시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772함 수병은 귀환하라/ 772함 나와라/ 온 국민이 애타게 기다린다… '호명된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전선의 초계는 이제 전우들에게 맡기고/ 오로지 살아서 귀환하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대한민국이 부여한 나머지 마지막 명령이다'는 절규에 소름이 느껴질 정도다.
살고 싶은 사람들도 이렇게 많은데, 살아야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도 많은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을 보며 세상은 참 요지경 같기도 하다. 한국인의 자살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라고 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08년 기준 자살사망자는 1만 2,858명으로 전년보다 5. 6%(684명)이 증가했다. 이 수치는 쉽게 말해 동탄에서 1년에 26명(1달에 2명)이 자살로 목숨을 끊는다는 말이 된다. 하루 평균 자살자 수로 따져 35. 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결과다.
죽으면 끝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개인에게는 고통이 끝나겠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해 어떤 길을 걸어가셨는가 군병들에게 잡히는 순간부터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예수님은 조금도 저항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도 않았다.
양털을 깍는 주인 앞에 잠잠한 어린양처럼 참으셨다. 뺨을 치고 침을 뱉어도 아무 대꾸하지 않으셨다. 못박는 순간까지도 그 고통을 참으시며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지도 않으셨다. 이렇게 철저히 죽을 수 있다면, 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이렇게 죽는다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것을 예수님은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힘이 없어서 생명을 빼앗긴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생명을 버린 죽음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억지로, 할 수 없이 순응하는 것과는 다르다. 내가 죽어야 부활이 있음을 믿기에 스스로 자원하여 나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다. 살리기 위하여 내가 알아서 죽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고통스럽고, 내 맘에 내키지 않고,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관계 중에 하나가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일 것이다. 며느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너는 싫지만 나를 봐서 이렇게 말해보렴. 이렇게 섬겨보렴. 나도 니 시어머니를 사랑하니까 니가 대꾸하지 말고 싫어도 ‘예’하고 대답해 보지 않겠니” 그랬더니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조금씩 달라졌다고 한다. 죽는다는 것은 나는 싫어도 주님 때문에 참고, 주님 때문에 순종하고, 주님 때문에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 주에 미디어 금식을 하자고 했는데 여러분은 어떤 것을 시도해 보았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사순절 기간 동안 아침 금식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려고 애썼다. 먹고 싶은 것, 마시고 싶은 것, 피우고 싶은 것을 주님을 위해 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 내가 죽고 새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또 실천한 일 중에 하나는 한 주간 동안 TV를 온 가족이 전혀 보지 않았다. 아이들도 그렇게 좋아하는 게임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 때문에 애쓰고, 수고하고, 절제하고, 참고, 견디고, 사랑하며, 희생하는 모든 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다. 그럴 때 말랐던 땅에서, 가지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다. 예수와 함게 죽으면 반드시 부활은 일어난다.
지난 주에 동탄지역의 목사님들과 중창연습을 하고 식사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세 명의 가정주부가 술 한잔 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런 말이었다. “남자가 바람 안피우고, 여자 안 때리고, 돈 잘 벌어다 주면 괜챦은 것 아니냐”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씁쓸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가정들이 행복은 고사하고 피곤하고 힘들지 않으면 괜챦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는 게 즐거운 것은 사치이고, 그냥 별일없이 하루 하루 살았으면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바램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하면 죽어가는 가정이 살아날 수 있을까 누군가 죽어야 한다. 누군가 손해를 보아야 한다. 아니, 상대방이 죽고 변하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고 달라지고 죽으면 되는 것이다. 소련지방에 페리칸이라는 새가 있다. 사다새라고도 하는 이 새는 턱에 턱주머니가 있어서 물고기를 잡아 담아두었다가 그것을 새끼들에게 먹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지방에는 추운 때가 많기 때문에 물이 꽁꽁 얼어붙으면 이 새들이 먹이가 없어서 턱주머니에 담아 두었던 고기를 다 먹인 다음에는 자기의 가슴팍을 뜯어서 제 살을 새끼들에게 먹이고 나중에는 온 몸을 자기 새끼들에게 뜯어 먹히우고 죽어 버린다고 한다. 미물들도 생존의 문제에서 자신이 살 궁리를 먼저 하지 않는다. 내가 죽음으로 살리는 길을 선택한다.
연어는 아주 신기한 물고기이다. 강에서 태어나 바다로 가서 살다가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다시 강으로 돌아온다. 거센 물살과 큰 바위가 앞을 가로막지만 연어는 멈추지 않고 꿋꿋이 나아간다. 높은 폭포를 뚫고 올라갈 때 북극곰과 수달이 자신들을 잡아먹으려 해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전진한다. 연어들이 강 상류에 도착하면 깨끗한 물이 천천히 흐르는 곳에 알을 낳는다.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오느라 힘이 빠지고 바위에 부딪혀 상처도 많이 난 연어는 너무 지쳐서 곧 죽어 버린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알을 낳고 죽은 연어들은 알에서 나온 새끼 연어들의 먹이인 플랑크톤의 먹이가 되어준다. 결국 새끼들은 어미 연어를 만나지도 못한 채 부화되었지만 죽어서까지 희생하는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을 느꼈기에 연어들은 다시 본능적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
부활신앙은 무엇인가 내가 죽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페리칸처럼, 연어처럼 죽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속한 가정과 자녀들과 내 주변의 사람들을 부활의 능력으로 살려주신다. 부활절은 예수님만 살아나신 날이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더불어 살아나는 축복의 날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신앙은 책임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책임지기 위해 죽으셨다. 가족이 무엇인가 끝까지 책임지고 돌보는 공동체 아닌가 교회도 마찬가지다. 수십년 서로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다. 그래서 결혼한 신혼부부보다 오히려 더 티격태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함께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기 위해 애써야 한다. 35절을 함께 읽어보자.
누구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우리는 예수님처럼 늘 기도해야 한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소서” 그래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고 행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만 영원히 남기 때문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다. 여호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방향을 갈 때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은 건강하고 평안함을 누리며 든든하게 성장한다. (잠16:7)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내 가족도 잘 돌봐야 한다. 예수님도 가족을 귀히 여기셨다.
Family는 father and mother i love you라고 한다. 교회와 가정중에 어디가 우선일까
가정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먼저 세우신 기관이 가정이고 그 다음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사람을 조심할 것을 권면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마찬가지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우리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가족임을 알고 끝까지 돌봐주고 책임져야 한다.
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게 하셨는가 한국에 5만여개의 교회, 동탄에만 70~80여개의 교회가 있는데 동탄성지교회에서... 서로를 돌봐주고 세워주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우리를 묶어주신 것이다. 좋을 때도 있지만 힘들 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린 한가족이다. 부활신앙으로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 부활의 주인공이 되길 소원한다. 내가 죽음으로 내 옆의 사람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길 원한다. 우리를 만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믿음의 공동체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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